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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5

위험과 환란 중의 기쁨 P2 / John Piper

LNCK 2015. 11. 9. 14:59

위험과 환란 중의 기쁨 P2            1:14, 1:24                영어 녹취록           출처, 편역

 

Joy in Risk and Suffering / John Piper                                  위험과 환란 중의 기쁨 P1  

 

 


 

 

서론/ 성도의 기쁨은, 그가 처한 환경 때문에 생기지 않습니다.

  자기 속에 가진 보배때문에 생깁니다.

 

기쁨과 고난이 연결된다는 것은

제 존 파이퍼가 신약성경을 찾아보니, 21곳에 그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다 읽으면 너무 기니까, 아래에 10구절만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 ‘고난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기쁨이 동반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의 역설적 진리이지요.

우리가 이런 말씀을 좀 묵상하고, 그 속에 푹 잠기기를 원합니다.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벧전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줄 앎이라.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살전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고후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이 외에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을 놓치지 마십시오.

신약성경은 성도에게, ‘고통을 당할 때 기뻐하라고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핍박이든지, 암 같은 질병이든지, 혹은 경제적인 문제이든지

성도가 부유하고 건강할 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고후8:1

 

즉 삶이 안정되지 못하고, 위협과 위험이 도사린 상황에서도

그들은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보통 기쁨이 아니라 넘치는 기쁨입니다.

그 결과, 그 증거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의 삶에서 그들의 가난을 없애주시지 않고,

그들은 돈도 없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기쁨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기쁨의 근거와 원천은, 어떤 다른 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후8:1절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환란 중에도 기뻐했습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설교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가난해서 돈이 없고, 병든 성도들, 그래서 기쁘지 못한 성도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설교하고 있습니까? *목회자, 선교사 컨퍼런스 설교

그런 것들을 잃어버려도, 우리는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런데 마게도냐 교인들은, 가난하고 여러 가지로 환란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삶에서, 교회에 와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따르고, 배워야 하는 점입니다.

 

기독교 사역의 궁극적인 성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도를 무슨 부자가 되게 하고, 건강한 삶을 살게 해서, 기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고통 중에 있는지, 혹은 즐거움 중에 있든지, 그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기쁨을 발견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그의 거룩에 참예케 하시기 위해서, 즉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12:10

필요한 경우, 성도가 심하게 고통을 당하게 하시고,

그래서 심지어 성도가 하나님께 시험 들고, 하나님을 미워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성도가 자기가 하는 일이 범사에 다 잘 되어,

마치 하나님을 간절히 가까이 하지 않고도, 그럭저럭 잘 살 때가 있습니다.

 

이러든지, 저러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보다 더 소중한 분이십니다.

 

내 현실이 쫄딱 망해도, 나는 소중한 하나님을 가지고 있으며,

반대로 내 현실이 아주 잘 살아도, 나는 그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기쁨의 근거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다고 슬퍼하지 않으며, 부자라고 그것 때문에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내가 모신, 내가 가진 하나님 때문에, 그 보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만약 우리가 중산층 이상의 안락한 삶을 산다고,

그것으로 기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실제로 기쁘지 않지만요.

우리 기쁨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내가 전쟁터에 처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어떤 형편에서든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 구절에서, 신약성도들이 기뻐했던 것입니다.

자기 환경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

 

성도가 고통을 당하면 주님,  입니까?’ 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때 목회자는, ‘성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라는 이 설교를,

그에게 말해주기 보다는, 먼저 같이 울어주어야 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2:15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환란 당한 성도가 안정을 되찾았을 때,

심방 가서 이런 설교를 해 줘야죠. 당장은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

 

 

1.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첫 번째로

더욱 거룩해지고, 더욱 믿음에 깊어지라입니다. Deeper holiness and deeper faith

 

12: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이런 정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그러니 10절 말씀도, 아주 극심한 환란과 고통의 상황임을 뜻합니다.

거의 피 흘리기까지 가기 직전의 상황인 거죠.

 

죄와 싸우는 일이, ‘피 흘리는것을 요구할 때도 있고,

하나님은, 그런 고통을 허락하시면서까지, 우리를 더욱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피 흘린다는 말 그대로, 신체에 위해를 당하든지, 목숨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피 흘리는 환란까지도, 성도가 당하는 것을 불사하시며,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아직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만, 선교지에서는 일어나고 있죠.

그 일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깊게 하는 일이라면, 하나님은 다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 이유, 즉 그의 거룩함에 참예케 하시는, 이 이유가

다른 여러 이유들보다, 가장 크고 중요한 이유입니다. 대표적 이유입니다.

 

고후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어지는 구절에, 이런 큰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렇다면, ‘사형 선고와 같은 이 고통을 허락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울의 대적자, 사탄, 하나님.. 이 셋 중 한 존재이겠지요.

 

그런데 지금 이 환란과 고통의 목적이 하나님만 간절히 의지하게 하심이라:9

라고 했습니다.

그럼 위 세 존재 중에, 누가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만 간절히 의지하게 하겠습니까?

 

바울의 대적자? 아니죠.

사탄? 아니죠, 그는 오히려 바울의 믿음의 파괴자입니다.

답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로, 바울이 당한 사형선고같은 고난의 궁극적 원인자인 셈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사형선고와 같은, 즉 사망의 고통을 당하는 성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궁극적 원인자는, 대적자도 필요하고, 사탄도 필요하겠지만,

그 모든 상황을 허락하시고 주관하시는 궁극적 원인자는 바로 하나님이신데,

그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만 간절히 의지하게 하시려고입니다. 고후1:9

 

그래서 하나님이 성도에게 고통과 환란을 주시는 목적은

deeper holiness and deeper faith를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런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

deeper holiness and deeper faith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올바른 대처법인 것입니다.

 

고후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런데 위 구절을 자세히 보십시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고서, 지금 희망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 희망이 남아있다면, 그건 부활뿐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부활의 희망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죽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부활하니까요.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도 이 믿음을 가졌던 것일까요?

어쨌거나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아가지, 살 길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기까지 하면서

deeper holiness and deeper faith로 이끄신다는 것이죠.

 

사실이 그렇습니다.

deeper holiness and deeper faith를 가지지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걸 가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구약의 욥이 그랬죠. 요나도 그랬고요.

바울처럼, 오늘날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deeper holiness and deeper faith를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

내가 사업이 잘 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오늘도 나의 삶의 상황이

전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되지는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내가 절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답답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겠지만,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가 잘 이해하고, 하나님께 시험드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deeper holiness and deeper faith를 주시기 위한 목적입니다.

 

 

2. 성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 두 번째로

고난은 천국의 내 상급을 더 크게 만듭니다.

 

고후4:17 우리가 잠시 받는환난의 경한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이 구절에 보면, 우리가 현재 받는 것은 가볍고(경한)’, ‘잠시 받는것이라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일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가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잠시 받는, 가벼운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중한)’것을 바라보았지요.

 

그는 우리의 현세가, 마치 연기와 같이, 잠시 후에 없어질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침울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뭘 준비케 하는데,

그것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영광의 중한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었습니다.

 

환란을 통해 deeper holiness and deeper faith에 들어간 사람에게

그게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비교해보라고 했습니다.

잠시 받는 영원한

가벼운 무거운

환란 영광

 

고후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함이니

 

여기서 이루게 함은 영어로 ‘preparing, work’으로 번역했고,

헬라어로 카테르가조마이입니다.

그 뜻은, ‘생산한다. 영향을 미친다. 가져온다등입니다. *produce, effect, bring about.

 

, 우리가 현세에서 받는 고통과 환란이

producing, affecting, preparing, and bringing about 해서,

즉 생산하고, 영향을 미치고, 준비하게 하고, 가져오게 하는데,

즉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그 비교할 수 없는 것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현세에서 받는 고통과 환란이 없다면,

저 천국에서 영광의 무거운 것을, 받지 못한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미안할 게 없다는 말이, 말이 됩니다.

성도들에게, 극심한 환란과 고통을 주시지만, 전혀 미안해하시지 않는답니다.

장차 더 좋은 것 받게 하시려고, 거쳐야 할 당연한 통과의례 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둘은 인과관계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천국에서 받는 영광과 상급이 각자 다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세에서 받는, 고난, 고통과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에서는 누구나 다 행복하고, 걱정이 없고, 후회가 없고, 눈물이 없으므로

천국에서는 모든 성도의 상급이 똑같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공통점도 있겠지만, 동시에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deep holiness and deep faith를 이루기 위해서 순종해서 더 고난을 겪은 사람에겐,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영광과 상급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고후9:6절에도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하셨으니,

우리가 이 땅에서 심은 고난의 분량에 따라, 천국에서 거두는 분량도 각자 다를 것입니다.

 

바울도, 부활 때는 한 별의 영광이 다른 별의 영광과 다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고전15:41.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닥칠 때, 그걸 피하려고만 하다가는,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잠시 당하는 환란의 경한 것은

장차 우리에게 영광의 중한 것을 반드시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3. 내가 당하는 고난은, 다른 사람을 담대하게 만듭니다.

 

당신이 고난당하는 것을 목격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담대해 집니다.

파급효과가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도 기꺼이 고난당하는 대열에 동참하게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1;14

 

이것이 현재 로마에서 가택 연금된 바울에게, 인내를 더하게 했을 것입니다.

자기 대신에, 담대하게 나가서 뛰는 사람들이 많아졌거든요.

 

저 존 파이퍼를 담대하게 만든 분들도 있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헨린 마틴, 윌리엄 케리, 존 패이튼, 에이미 카르마이클 등등

이런 분들의 지난 고난의 생애를, 그들의 일기나 자서전 책을 통해 접하면서

저 파이퍼는 큰 용기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중에 승리한 모습은, 나에게 거울이 되었으며,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중에 인내함을 보면서, 나의 고난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여러분의 모델을 뽑으십시오.

그분들이 먼저 겪으셨던 고난을 보면서, 여러분의 고난에 대한 위로를 삼으십시오.

그 분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나도 저 분처럼 살아야 되겠다는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당하는 사람이 일어나면

거기엔 반드시, 그걸 보고 담대해지는 사람이 생깁니다. 물론 도망하는 사람도 생기겠지만요.

 

제 친한 친구 래리가 있는데, 그가 암투병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오히려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임을 직감했습니다.

후에 제가 테네시에 있을 때, 래리의 소천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의 부인의 말에 의하면, 그는 그 만남 후로 2주간을 더 살았는데,

정말 얼굴에 빛을 발하며 살다가, 천국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래리 형제님은, 저보다 두 살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 잘 하면 10년도 더 살 수 있었지만, 암으로 비교적 일찍 소천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얼굴에 빛이 났습니다.

그의 고난과 승리는, 죽음을 앞둔 모든 사람에게 용기와 힘을 주었습니다.

저 파이퍼도 나도 저렇게 죽어야 되겠구나하는 소원을 갖게 해 주었지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는 선교사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속에는 크게 승리했다는 기록은 없고,

그가 말을 타고 다니는 중에, 미국 인디언들에게 전도한 내용인데,

그는 병들고, 고생하고, 죽을 뻔했다는 기록뿐입니다.

 

그러나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고난을 당하는 해외선교사들에겐

그의 경험의 진솔한 고백은, 많은 힘과, 용기와, 격려를 주었던 것입니다.

일종의 동병상련이죠.

 

선교사역을 처음 하시는 분들은, 어떤 장미 빛 환상같은 것을 갖고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선교사역을 오래 하시는 분들은, 그런 환상은 없죠.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같은 책을 읽으면,

그런 장미 빛 환상 같은 것을 깨는데, 해독제처럼 큰 도움이 됩니다.

그는 너무나 정직하게, 자기의 감정과 어려움과 고난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젊은 여러분 또래는 잘 모르겠지만,

60대 이상인 분들은, 1956년도에 에쿠아도르에서 일어났던

5명의 20대 청년 선교사들의 죽음은, 당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짐 엘리엇, 피트 플래밍, 네이트 세인트, 에드워드 맥컬리, 로저 유데리안 등

이들이 에쿠아도르 미전도종족의 창에 찔려 순교했고,

그들의 아내들과 아이들이 남겨졌습니다. 20대 후반의 정말 젊은 나이에 말입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파급효과를 미친 사람은, 그들의 아내들입니다.

그들의 아내들은, 남편의 선교사역을 이어서 계속 했던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 등은 책을 쓰기도 하고   독후감 영광의 문   짐 엘리엇 그 이후

남겨진 미망인들이 계속 아우카 부족을 위해 선교했습니다. 남겨진 미망인 믿음의 영웅들

 

물론 그들이 시들어가던 1950년대의 미국 선교를 확 흔들어 깨웠지요.

*한국에서도 2007년도에 아프간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바바라 유데리안의 증언을 좀 읽어드릴게요. 그녀는 로저 유데리안 선교사의 아내입니다.

 

그날 밤, 선교부 책임자는, ‘누가 죽어서 강가에 버려져 있다는 소식을,

우리 가족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은 티셔츠와 블루진을 입고 있다고 했습니다. *공중에서 경비행기로 정찰 확인한 상황

 

저는 알았습니다. 그 날 블루진을 입고 나간 사람은, 남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하기 이틀 전에,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제게 주셨습니다.

 

48:14,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제가 남편의 죽음 소식을 확인하였을 때,

내 마음은 오히려 찬송이 가득 찼습니다.

말씀대로, ‘하나님이 죽을 때까지 인도해 주셨음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아이들에게 엄마와 아빠의 역할까지 다 해야 하니,

그걸 잘 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로 요청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간증을 읽을 때, 특히 자매들은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제게도 바바라 유데리안 같은 믿음을 주소서!’

이렇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제 세대의 젊은이들이,

이들 5명의 20대 선교사의 순교에 감동을 받아서,

남미로 해외로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게 하십니다.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고난이 뭔가 부족해서, 우리 고난으로 그 남은 것을 채우신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십자가 대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은 충분하고 완전했습니다. ‘다 이루었다하셨잖아요.

우리가, 바울이, 거기에 뭘 보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아직 세상에는 복음이 완전히 전파되지 못했으므로,

그의 교회를 위한 고난복음 전파를 위한 고난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채워야 하며, 바울은, 그걸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교회/복음 전파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오히려 기쁨과 특권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쉽게 이렇게 말해도 된다고 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지 못합니다. 2천년 사건이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보면서, 2천년 전 그리스도의 고난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 번은 트리니티 신학교 채플에서,

당시 89세였든 오스왈드 샌더스의 설교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 감명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는 이 설교를 하고서, 얼마 후에 소천하셨는데요,

마치 저 파이퍼보고, 이 일화를, 제 책에 넣어서 소개하라는 것 같았습니다.

당시에 마침 저는, 책 집필에 몰두하고 있었고, 그 일화를 제 책에 넣었습니다.

 

인도의 한 순회 전도자의 일화입니다.

그 가난한 전도자는, 인도 북부의 오지 마을들을 돌면서, 복음을 전하고 다녔죠.

 

그가 가진 것은, 오직 작은 짐보따리 하나뿐이었습니다.

정말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처럼, 기쁨과 소망가운데 순회전도를 하고 다닌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을에서 쫓겨날 때도 있었지요.

 

하루는 그가 너무 피곤해서, 나무 아래 쓰러져, 풀밭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깨고 나서 보니까, 주위는 해가 지고 어두컴컴해져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자기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자기를 해치러 온 줄 알았지요.

그때 촌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보러 나왔습니다. 보니까 당신의 발이 다 부르터 있는데, *아마 맨발로 다닌 모양

그걸 보니, 당신은 거룩한 분임에 틀림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시려고, 그 발로 여기까지 걸어서 찾아오신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 합니다.

 

저는 이 일화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말씀과 의미가 연결된다고 봅니다.

 

당시 사람들이 바울의 고난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대신 느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고난이, 바로 교회(신자)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본 것은 아니겠지만요!

 

복음 전하러 산을 넘는 발은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 발은, 매끈하고 하얗기 때문에 아름답지 않고,

상처 나고, 피가 나고, 부르튼 발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도가 고난을 당하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주께로 돌아와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난과 고통을 보고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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