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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LNCK 2015. 11. 20. 11:28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3:1~6                 04.05.23.출처보기 

                                                                                              *원제목 : 명목상의 교회

 

비판이 아니고 확신

 

진 우드라는 목사님이 한국을 방문해서 세미나를 인도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비판이 아니고 확신이다.’

 

참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뿐만이 아니고, 정치인들은 물론, 각계각층이 모두 필요로 하는 것은

비판이 아니고 확신입니다.

기업인들이 필요한 것도, 비판이 아니고 확신입니다.

 

비판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언론이 비판하고, 모든 사람이 비판을 하는 이 시대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비판의 말이 아니고 확신을 심어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인이나 사회나 조직의 지도자들에게 비판만 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당신들이 그 자리에 올라갔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시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시오. 기도하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도와주실 것을 믿으시오.’ 이런 자기 확신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기업인들에게 하나님이 이 사업을 당신에게 맡겼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청지기의 사명을 다하시오. 기도하시오. 겁내지 마시오.

중국이 따라올까 염려하지 말고, 불경기라고 염려하지 말고

요셉처럼 비록 7년의 흉년이 있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에게 구하시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게 비판만 하지 말고 확신을 심어주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교회를 저버리지 아니하신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귀한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교회를 부흥하게 하신다.’

이런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소명에 대한 확신, 사명에 대한 확신, 정체성에 대한 확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지금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러므로 확신입니다.

그런데 확신은,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심어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심어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줄 수 있습니까?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믿음을,

내가 갖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것은 당연하죠. 내 믿음을 내가 지켜야 되고,

내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심어주어야 됩니다.

 

내 자신에 대한 믿음 뿐만이 아니고, 이 사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교회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은 장차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쓰실 것이다. 우리 교회를 쓰실 것이다.

이 땅의 믿는 자들을 하나님이 쓰실 것이다.’

 

믿어야 됩니다.

이 믿음을 가지면, 본인의 삶이 변하고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자기 정체성이 흔들릴 때가 옵니다.

그때마다 확고한 사명,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재정립 해야지요.

아래에 그 한 예가 나옵니다.

 

어느 목사님의 사모님의 수필집 제목이 <Who are you?>입니다.

이 분이 말하기를

 

나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한 남자의 아내요 두 아이의 엄마요 목사의 사모인데,

그런데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하나님 제가 누구입니까?’

 

얼마나 솔직한 고백입니까?

명암에 있는 나의 직함이 내가 누구인가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나의 사회적인 지위가 내가 누구인가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호렙산에게 하나님에게 여쭤보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 Who am I? 내가 누구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시냐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그건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시는데,

네가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만이

비로소 우리는, 내가 누구며, 무엇을 위해 살며,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나,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주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될지.. 정체성이 확립됩니다.

개인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주 안에서만이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좋은 일 많이 합니다. 그러나 방황합니다. 목적과 비전이 흔들립니다.

그냥 교회는 이 세상에서 선한 일을 행하는 단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건 목적을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방황합니다.

내가 무얼 해야 되는지 잘 모릅니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되는지 잘 모릅니다.

 

이것은 믿음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줄 설 때, ‘기준!’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학생을 중심으로 줄을 서지 않습니까?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3:2

따라해 보세요. ‘굳게 하라

 

믿음은 연약한 마음을 가진 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마음이 굳은자를 위한 것입니다. 담대해야 믿을 수 있습니다.

담대해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담대한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담대한 사람이 승리합니다.

담대한 사람이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도

그러므로 강하고 담대 하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문화적인 기독교인에서 탈피해야

비판이 아니라, 확신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지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렇게 지적으로 동의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존적으로 그분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정말로 지옥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지옥이 있다고 믿는다면, 본인도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지옥에 가지 않도록 전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자신도 삶이 변하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는 지옥을 안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일어나는 현상 중에 하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계3:1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명목상으로만 교회입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죽은 교회요, 죽은 신앙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많아진다고, 무턱대고 좋아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도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덴마크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통탄해 했던 것은

덴마크 사람들이 덴마크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삼단 논법적인 생각입니다.

덴마크는 기독교 국가다. 나는 덴마크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독교인이다.’

이것이 잘못된 설정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에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집안에 태어났다고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진정 거듭나야 됩니다.

네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사람은 3대 째 믿든지, 5대 째 믿든지

목사의 아들이든, 장로의 아들이든.. 반드시 거듭나야 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 집안이 아닌 데에서 태어난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그 믿음이 진짜일 확률이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안 믿는 집에서는 믿음을 갖기가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무엇이 사람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만듭니까?

 

첫째는 교회와의 인연이 예수님과의 인연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일평생 교회를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제각각 다릅니다.

사람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다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토론토에서 다니던 한인교회는

당시 토론토에서 학생부가 제일 크고 활성화 되어 있던 교회입니다.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그 교회 학생부로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부가 활동이 많기도 하거니와 재미있었습니다.

 

주일날 예배가 끝나면 저녁 9, 10시가 돼서야 집에 돌아갔습니다.

여름에는 야구를 하고요, 가을에는 축구를 하고요, 겨울에는 배구를 하고,

성가대 활동이 있고, 문학의 밤이 있고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몰라요.

 

그러다보니까 그 학생부를 나오는 학생들이, 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친구 때문에 나오고, 재미가 있어서 나오고, 예쁜 여학생들이 있어서 나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학생부를 졸업할 때가 되니까, 그걸 알게 됐습니다.

뿔뿔이 다 흩어지더라고요. 신앙생활을 다 계속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뿐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처음에는 다 그렇게 교회를 다니다가 그게 계기가 되어서 믿음을 얻게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교회가 명목적인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복음이 가장 큰 어필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가장 앞세우고 그것을 분명하고 강력하게 전해야 됩니다.

사람이 교회에 대해서 매력을 갖는 이유가

교회에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교회가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 음악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복음 때문이어야 됩니다.

 

복음이 그 교회의 가장 확실하고 가장 강력한 어필이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교회와의 섣부른 인연이, 교회에 대한 섣부른 친숙함이

그 사람이 거듭나지 않았는데,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게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섣부른 교회와의 친숙함, 그것은 내가 아직 거듭나지 않았는데,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로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인 생각이

사람을 반드시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대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사람이 기독교를 허용하지 않았습니까? 기독교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콘스탄틴 대제는, 자기가 죽기 전까지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는 세례 받는 것을 최대한으로 보류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기독교에 대해서 우호적인 입장이었지만

자신이 세례 받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했다는 사실 이예요.

 

여러분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도 기독교에 우호적인 분들 많았습니다.

대통령 조찬기도회가 있으면 기회가 될 때마다 참석하고, 교계 유명한 목사님들과 절친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에는 멋있는 면이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상징하는 것은 소위 개화, 개방, 발전, 서구 문명, 변화, 이런 것을 상징했습니다.

 

YMCA라는 단체가 있죠? 여러분 그 YMCA‘C’가 크리스천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YMCA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구의 스포츠를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영화도 있지 않습니까? 'YMCA baseball' 처음으로 야구를 소개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화 되는 것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무늬만 그리스도인여서는 안되고

중심에 회개와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할렐루야. 중심이 거듭나야 됩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것과 같은, 본질적인 변화가 그 중심에 일어나야 됩니다.

자석을 가지고 모래밭 위를 지나가면 모래 속에 있는 금속이 자석에 달라붙는 것처럼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중심에 예수가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달라붙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 땅에 그대로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기독교인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아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매일 저에게 성경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릅니다.

저는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마음속에 성경이야기를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자기 아버지가 목사인줄 아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거는 엄마한테 다 부탁하고 엄마를 찾는데,

성경이야기 만큼은 아버지를 찾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희 아이가 성경 이야기를 아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의 지식을 갖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심방 갔을 때, 그에게 성경의 지식을 전달해준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고넬료는 성경 말씀을 습득한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께서 말씀을 듣는 모든 자에게 내려오시니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라신비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들은 것뿐만이 아니고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과의 만남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알려고 해야 됩니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간접적인 지식이요 후자는 직접적인 지식이요,

전자는 이론적인 것이요 후자는 체험적인 것입니다.

 

17: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한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체험적인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윤리적인 실천이 반드시 그리스도인임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뻐꾸기는 아름답게 울지요? 그러나 아름답게 운다고 다 뻐꾸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다 착하게 살게 돼있습니다.

그러나 착하게 사는 사람이 다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서 구사회는 기독교 영향권 밑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그들의 생각과 문화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박애정신, 봉사정신, 기부문화, 약자를 배려하는 정신, 민주주의, 인권,

이런 것들이 다 기독교의 영향입니다. 기독교의 영향이 남아있습니다.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해서 믿음까지 남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가 지고 나면 잠시 동안은 온기가 남아있지요. 그러나 해는 졌습니다.

믿음이 떠나간 다음에도 그 믿음의 흔적과 영향력은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저버린 지 오래된 사람들 많습니다.

 

미국의 인류 대학교들, 다 신학교로 시작했습니다.

하버드도 신학교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수백 년이 지난 이후에 신앙이 남아있습니까?

신앙의 흔적은 남아있지요. 그러나 신앙이 남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명목상의 교회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됩니다.

 

본문 계3:2절에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그랬습니다.

우리가 굳게 하지 않으면 그대로 사장될 것이 많습니다.

은사도 사장되고 내게 주신 사명도 사장되고, 우리에게 주신 소명도 잃어버리고,

내가 물려받은 믿음도 까먹어 버립니다. 굳게 붙잡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강물이 고여 있지 않고 흐르는 것처럼

이 세상은 늘 우리를 하류를 향하여, 멸망의 바다를 향하여, 우리를 이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없는 지푸라기나 나무는, 그 물에 실려서 멸망의 바다로 갈 것이지만,

생명이 있는 물고기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는 것처럼

생명이 있는 자만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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