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유 갈2:1~10 출처보기
◑갈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이런 표현으로 봐서, 예루살렘 방문은 첫 번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을, 성경에 기록된 횟수로만 4번 정도 방문했습니다.
1) 행9장에,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가 잠시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고,
2)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모아준 헌금을 받아서, 바나바와 함께, 전달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갈2장 배경이, 이 두 번째 방문 때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3) 세 번째 방문은, 율법 문제로 예루살렘 공회가 소집되고
베드로의 결정적 발언에 의해, 신학적 중요한 문제가 하나 결정 됩니다.
행15장에 그 기록이 나옵니다.
4) 마지막 방문은, 로마로 압송되기 전에,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됩니다. 행21:15~
▲그럼 2번째 방문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왜 올라갔을까요?
방문의 목적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누구와 동행했는가요?
누구와 방문했는지를, 좀 특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어쨌든 예루살렘 방문 시 동행했던 사람은, 세 사람이었는데
바나바는.. ’함께’라는 표현을 봐서, 대등하게 동행한 것이고,
디도는.. 종속적 관계의 표현인 ‘데리고’를 볼 때, 디도는 데리고 간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함께 / 데리고’ 이렇게 다른 표현을 썼을까요?
갈2:2절에 보면, ‘계시를 따라 올라가’
바울이 방문한 곳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많은 유형의 여행이 있었어요.
쫓겨도 다니고, 의도적으로 간 곳도 있고, 또 잠시 머물렀던 곳도 있었어요.
그때마다 ‘계시를 따라’ 이런 표현이 안 나오고, 그냥 팩트만 나오지요.
유독 이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의 문제에 관한 한,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고 그랬어요.
이렇게 밝히는 것으로 봐서, 이 방문에는 사도바울의 자의적인 의미보다는,
사실 하나님의 어떤 중요한 계획이 이 방문 속에 감춰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동행자의 미세한 유형의 차이(함께 / 데리고)와
둘째, 왜 ‘계시를 따라’ 올라가게 되었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바나바는 언제나 바울과 동행하면서 다녔습니다.
여러 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했지만, 언제나 바나바는 ‘동행’했습니다.
▲그럼, 왜 디도는 ‘데리고’ 갔을까요?
딛1:5 내가 너(디도)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바울이 힘들고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제일 먼저 떠올려졌던 인물은
디도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때 심부름을 디도가 합니다.
디도는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바울을 돕던, 충성된 제자였습니다.
그레데 섬은, 섬 사람의 특이한 기질과, 바울에 의해 이 섬에 뿌려진 복음으로 교회가 세워졌는데,
앞으로 이 섬에 감당해야 될 선교사역이 너무 많았어요.
게다가 이 까다로운 기질의 사람들 때문에, 아주 선교가 제일 힘들고,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늘 이곳에 바울이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선교해야 될 곳이 많고, 몸은 하나인데,
그레데만 머물러 있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이 어려운 그레데를 누구에게 맡겨야 마음이 놓일까 고민하다가,
제일 먼저 떠올려졌던 인물이 디도입니다.
딛1:5 내가 너(디도)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남은 일’.. 그레데 교회 안에 벌어졌던 갈등의 문제로 봅니다.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
그레데 섬은 컸습니다. 그러면 그 갖 지역마다 영적 지도자를 세워야 하는데,
이 역할을 복음을 가지고, 바른 신학을 가지고 감당할 사람들이,
바울 주위에 그렇게 많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디도를 그레데에 떨어뜨릴 계획을 합니다.
자, 그래서 오늘 이 디도를 앞서 예루살렘에 데려가는 겁니다.
왜 데려가는지 그 이유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갈2: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그 예루살렘에 선배 사도들에게 *‘유력한 자들에게’
자기가 이방 땅에 다니면서, 전파한 복음의 내용을 그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을 왜 설명했는가 하면,
지금까지 자기가 복음을 전파한 내용과, 또 그 내용을 가지고 앞으로 선교할 사역 때문에,
이 본부 교회에 보고 겸, 어떤 확증을 받기 위해서
디도를 데리고, 본부에 도착해서, 그 설명을 하는 겁니다.
◑갈2: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디도는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인/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표현으로 봐서, 본부 교회의 선배 사도들이, 사도바울에게 뭘 요구했느냐 하면,
‘너와 같이 선교를 같이 다니는 이방인 디도에게, 그렇다면 할례를 받게 하는게 좋겠다.
그래야 안전하게 그레데 섬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지도자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게 아니냐’ 하면서
할례를 강요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바울이 그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말입니다. :3
그걸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통해 지금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거절했을까요? ↓
◑갈2:4a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갈라디아서가 쓰여진 중요한 동기가 뭐였습니까?
바울이 없는 틈에,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로부터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다른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앞서 복음을 전한 사도바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지만,
그것만으로 구원이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모세의 전통을 따라, 우리가 오랜 세월 지켜온 율법이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할례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플러스 알파 복음을 갈라디아 지역 교회 성도들에게,
유대로부터 올라온 거짓 교사들이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휘청거렸습니다.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거야?’
‘사도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그런데 이분들은 본부에서 오신 분들인데, 무시할 수 없잖아!’
여기서 갈라디아 성도들이 헷갈린 것입니다.
그래서 급하게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앞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그 내용들을,
본문 갈2:1~5에서 소개하고 있는 거죠.
자, 디도 얘기를 그래서 하는 겁니다.
‘디도에게도, 너희에게 전했던 그 복음처럼,
이렇게 할례를 명할 것을, 본부 사도들이 나에게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거절했다. 왜? 바로 복음 때문이다.’
▲여러분, 디도는 앞으로 그레데 섬이라는 지역에서 교회의 담임목사가 될 후보생입니다.
그 성의 모든 사람들은, 이 디도에 의해서 목양이 되어지고, 복음을 가르침을 받고,
또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파해서 교회를 세워야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디도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당시에,
덜커덕 ‘그게 낫겠습니다. 그게 안전할 것 같습니다.’ 해서
사도들의 요구에 따라서, 디도가 할례를 받았다면,
나중에 디도가 바울 선생님께로부터 배운
‘오직 구원은 그리스도로만 이루어집니다. 그 분을 믿음으로써만 구원이 완성됩니다’
라는 복음을 가르칠 때,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상 확증하기 위해서, 디도를 예루살렘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갈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이 오늘 제목이 되는 ‘자유’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자유가 무엇입니까?
보통 우리는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유로 이해합니다만,
(지금 이 부분이, 이 설교의 정상 부분,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이해 안 가는 대목 하나를 소개할게요.
여기를 접어두시고, 잠시 사도행전 16장을 열어보십시다.
행16: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그러니 디모데는 혼혈입니다.
디도는 선배 사도들이 할례를 받을 것을 권했을 때,
바울이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행16장에서 디모데는, 바울이 앞장서서 할례를 받게 합니다.
일관적이지 못합니다. 이율배반입니다. 어느 쪽이 맞습니까?
분명히 갈2장에서, 디도에게는 할례를 못 받게 하고서는,
그런데 행16장에서, 바울이 앞장서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합니다.
▲여러분, 고린도교회에 제일 심각했던 문제는,
우상의 제단에 바쳐졌던 고기가 시장에 유통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고기를, ‘나는 먹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고기 자체는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닙니다.
그리고 우상이라는 존재는, 그걸 믿는 사람에게나 우상이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실상 우상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참 신이 없으므로,
우상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걸 우상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나 우상이지, 신자에게는 목석에 담긴 우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기를 아무 양심에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문제는, 그렇게 바울의 생각처럼,
‘나는 우상에 바쳤던 고기라도, 그것은 양심에 자유를 가지고,
나는 먹을 수 있다.’ 이건 신앙이 강한 쪽이었어요.
상대적으로 ‘어떻게 우상제단에 바쳤던 고기를 먹어? 그건 안 돼!’
이렇게 자유하지 못했던 신앙이 약한 사람들이 구분되었습니다.
그래서 먹는 쪽은, 먹지 않는 쪽을 ‘(믿음이) 어린 자들’로 보았고,
반대로 먹지 않는 쪽은, 먹는 자들을 ‘‘방종주의자들’로 본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 그 문제로 두 그룹으로 나눠진 것입니다.
이때 바울의 결론은
‘만일 음식이 네 형제로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나는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먹는 자유 때문에,
약하다고 구분되어진 그 사람들이 시험에 들고, 실족해서 넘어지는 일이 발생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안 먹겠다.’
이게 바로 “자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고 싶은 진짜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라는 개념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진짜 자유는, 할 수 있지만,
형제의 덕과 형제의 사랑을 위해서, 나는 안 하겠다. 이게 진짜 자유의 완성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디도의 경우에는,
그가 앞으로 이방인 지역에서, 한 교회를 책임질 목회자로서, 복음을 전할 것인데
할례를 받으면, 이후에 벌어질 시비의 개연성 때문에 안 됩니다. 막았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의 경우는, 왜 오히려 자기가 먼저 할례를 받도록 했느냐면,
복음을 전파하는데, 이 할례 문제가, 사소한 시비꺼리가 되어서,
궁극적인 복음전파의 목적지로 가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할례를 받을 것을, 바울 자기가 먼저 명령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할례는 구원에 관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해야 되고, 상황에 따라서는, 어떤 경우에는 안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 결국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기준은 덕과 형제사랑입니다.
그것이 기초되지 않는 자유는, 방임과 방탕과 방종으로 흐르기 십상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갈2장에서 계속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2: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말은, 더 이상 율법으로 종노릇하지 않고,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분의 의로, 우리의 구원은 완성된다는 말입니다.
그 외 어떤 복음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갈1:7절에서 이렇게 강력하게 말씀했습니다.
갈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바로 그 유대 본토에서 올라와, 갈라디아 교회에
플러스 알파 복음을 가르쳤던 거짓 교사들의 궤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갈2:6. 유력하다는 이들(예루살렘 사도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무슨 뜻입니까? 그래서 2차 예루살렘 방문 때, 사도들이 내 본심과,
내가 전한 복음의 내용을 잘 소통하고 이해해서,
바나바와 나에게, 또는 내가 데리고 갔던 디도에게
어떤 율법의 의무도 지우지 않았다. 부담을 주지 않았다.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갈2: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자, 예루살렘 교회의 선배 사도들이, 드디어 중요한 확인 하나를 해 줍니다.
‘아, 베드로는 이 정통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세웠다면,
사도바울은 바로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하나님이 세웠구나’
를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 얘기를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서신을 통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매우 엄청난 이야기인데, 글자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놓치고 지나갈 수 있는 표현 하나를 사도바울이 슬쩍 꺼내 놓습니다.
◑갈2: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정통 유대인 사도들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친교의 악수를 했다'고 했습니다.
이걸 몇 줄 문장으로 썼기 때문에, 덤덤하고 별 감동이 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것은 매우 매우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막힌 담을 허셨다’
이 얘기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민족과 민족, 과거와 현재, 미래와 현재, 모든 장벽을 다 허무는
인류 역사에 중요한 소통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심지어 사도들까지만 해도
구원을 민족적으로, 혈통적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할례를 고집부리고 강조했던 것이죠.
여기서 ‘친교의 악수를 했다’는 말은,
‘자 이제 우리가 서로 입장을 이해했으니까 친하게 지내자..’ 이런 정도의 얘기가 아닙니다.
이건 정말 오랜 세월 수천 년 그들의 마음과 인식세계를
두껍게 가로막고 있던 담이 무너지는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친교의 악수를 했다’는 것은,
이방인을 대표하는 사도와, 유대인을 대표하는 사도들 사이에,
의식의 소통과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공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들이나 우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고, 한 하나님의 백성이구나!’
이것을 딱 한 단어로 ‘친교의 악수를 했다’로 표현했습니다.
이 친교의 악수는, 매우 강력한, 적극적인 선교적 단어입니다.
그 얘기를, 10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갈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이 10절은, 굉장히 생뚱맞은, 썩 그렇게 자연스럽지 못한 문장 같습니다.
지금 앞에 굉장히 선교적인 중요한 신학적인 논제가 합의가 이루어지고,
소통이 이루어지는 그 끝에, 왜 갑자기 구제 얘기가 등장할까요?
‘내가 너희들 다 이해했다. 너희들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 때문에 어려우니까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을 잊지 마라’ 이런 세속적인 개념일까요? 아닙니다.
행11장을 후에 읽어보면, 선지자가,
예루살렘 지역에 큰 환란과 기근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굉장히 어려워졌다는
소식을 전하고 예언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방교회가, 헌금을 모아서, 바나바와 바울에게 전달을 부탁합니다.
그들이 그래서 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얘기를 왜 했는가요? 여기에 매우 중요한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름과 겨울에 국내선교를 나갈 때마다 천원 헌금을 합니다.
그렇게 모은 몇 백~몇 천 만원으로, 연계 교회들을 도와주고
또 ‘어깨동무 사역’으로 미자립교회를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재정이 있고 교회가 크니까, 그들은 약하니까
구제 차원에서 도와주는 것일까요?
여러분, 교회가 구제를 하는 것은, 절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런 개념입니다.↓
여기서 왜 구제 얘기가 갑자기 생뚱맞게 등장하느냐면,
‘이제는 너희들과 우리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지체요, 한 몸이니
이 복음의 은혜의 열매를, 우리가 공유하고 나누는 것이라’는
복음의 메시지 차원에서의 구제 개념입니다.
이것은 약한 자가 도움을 받고, 더 넉넉한 자가 도와주는 단순 공식의 구제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눔과 공유와 그리스도의 지체요, 한 몸이라는 것을 여기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지에 가서, 그들을 돕고, 물질로 나누지만
그 나눔은, 당신들이나 우리나,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요,
당신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입니다.
왜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지체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의 교회를 확인하고, 그 하나님이 더 넉넉하게 하고, 유여케 하신 공동체로부터
약한 공동체를 함께 하게 하는 구제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그 교제를 순종하는 것이죠.
이것은 돕고 도움을 받는 개념 이상입니다.
이것은 너무 아름다운, 우리 교회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순종인 것입니다.
▲마치는 말
오늘 우리는 이 10절 끝까지 살펴보면서, 매우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인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뭐냐?
그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게 자유가 아니라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우리 자유의 기준은
형제의 덕과 사랑을 기초로, 안 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디도를 데려간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왜 디도에게는 할례를 금지했고,
왜 디모데는 적극적으로 할례를 시켜서, 선교여행에 동행시켰는가요?
그 할례 자체가 진리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원리가, 우리의 신앙의 인식을 더 부요케 하고 풍성케 해서,
우리의 전 생애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눔과, 연약한 형제들과 하나됨을
순종을 통해, 확인하는 아름답고 풍성한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하며,
그저 도움을 주는 선교가 아니라, 기쁨으로 그 형제와 함께하여 달려가는(:10)
그런 선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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