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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LNCK 2016. 1. 28. 16:37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히11:13-16, 8:18-22            16.01.10. 스크랩, 출처

      

사람들은 인생을 여러 가지로 비유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설득력 있게 들려오는 비유가

인생은 나그네라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은 나그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나그네처럼 사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생각은 동의를 하지만 몸은 나그네의 불편한 삶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말은 나그네라 말하지만, 실제 생활은 나그네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달리 생각도 나그네, 몸도 나그네로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 우리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 준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저들은 이 땅에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임시 체류자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이 땅을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하는 고향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타향으로 여겼습니다.

 

가야할 목적지가 있어서 만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천성을 향해나가는 도상의 존재,

순례자로 산 사람들이 믿음의 선진들이었습니다.

 

우리말과는 달리 영어에는 나그네라는 말이 두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는 Vagabond이고, 또 다른 하나는 Pilgrim입니다.

 

Vagabond는 목적 없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상황이 좋으면 머물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기를 반복합니다. 집시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Pilgrim은 가야할 분명한 목적지가 있어,

그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달려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땅에 아무리 소중하고 좋은 것이 있더라도 그것에 붙들리지 않고,

편히 쉴 곳이 있어도 그곳에 머물지 않고, 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믿음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Pilgrim, 순례자라 부르고 있습니다.

 

순례자의 최고의 목표는 올바른 길을 찾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흔적 하나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나그네의 최고의 지혜는 길을 분별하고 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길을 찾는 것은, 내비게이션이 가르쳐 주지 않는

나만의 인생길을 찾는 것은, 차라리 예술이라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믿음과 생존의 예술이, 나그네가 올바른 길을 찾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살아가는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비밀, 스스로 풀어야 하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의 열쇠는, 스스로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주변 환경과 자신에게 기준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길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그네로 사는 비밀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길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것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자신들이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음을 기꺼이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라는 의식으로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11:1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설명을 한 바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을 어떻게 설명을 했습니까?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똑같은 맥락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마치 그것이 자기들의 삶 속에 이루어진 것처럼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믿음입니다. 하나는 시간적인 믿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공간적인 믿음입니다.

 

먼저 <시간적인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시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고 난 후에

캄캄한 밤중에 불러내어 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하늘의 별이 몇 개인지 세어보라어찌 하늘의 별을 다 세어볼 수 있겠습니까?

 

이때 하나님은 너의 후손이 이와 같을 것이라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서야 겨우 아들 하나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시간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을 믿은 것입니다.

아직은 받지 못했지만 받은 것으로 믿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머지않아 설날이 다가옵니다. 설날이 되면 우리는 고향을 찾아갑니다.

평소에 두 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고향 가는 길이, 두 배 세배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도 신이 납니다. 시간으로 볼 때 몸은 아직도 고향에 당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친지들을 만나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것으로 이미 마음은 설레고 있습니다.

 

시간적인 믿음이 이와 같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기뻐하였습니다.

 

다음은 <공간적인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보지 않았는데 본 것처럼 믿고 살았습니다.

가보지 않았는데 가 본 것처럼 믿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롯과 분가를 했습니다.

롯은 요단 동편 물이 풍부하고 초지가 넉넉한 곳을 선택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메마르고 거친 가나안 땅을 선택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동서남북을 둘러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니라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살아서 땅 한 평 가지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처연했는고 하면 자신의 아내 사라가 죽었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 된 땅 한 평이 없어서, 헷 사람에게 막벨라 굴을 사서

겨우 장례를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부도난 수표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언제 땅을 선물로 받았습니까? 400년 후에 애굽에서 올라왔을 때

이스라엘이 그 땅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공간적으로 땅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받지 못했지만 받은 것으로 믿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의 후손을 통해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소풍을 기다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내일 소풍가는 날입니다.

요즘은 너무도 풍족하여 이런 설렘이 없습니다. 평상시 너무도 잘 먹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어릴 때에는 소풍 때만 먹는 메뉴가 있었습니다.

엄마가 싸주시는 김밥, 삶은 계란, 사이다 한 병,

거기에다 보물찾기는 최고의 놀이였습니다.

 

그런데 소풍 당일보다는 소풍 전야가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아직 몸은 소품의 현장에 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생각은 이미 소풍의 현장에 가 있습니다.

 

공간적인 믿음이 이와 같습니다. 아직 약속한 땅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천국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천국에 가 본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받은 것처럼,

이미 현장에 와 있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은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명하였다.”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선진들과 약속하실 때

미래의 로드맵과 청사진을 다 보여주고, 약속을 맺은 것이 아닙니다.

 

약속은 하셨지만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약속만 하셨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마치 이미 자신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정착해서 살지 못하고, 장막을 치며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기꺼이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열두 번이나 이사를 다녔습니다.

이삭은 다른 이사를 제외하고 우물 때문에만 세 번이나 이사를 다녔습니다.

 

야곱은 바란 아람까지 야반도주 했다가 가나안에 다시 왔다가

요셉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그 역시 수없이 이사를 다녔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야곱이 애굽의 바로 앞에서 한 말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인생길을 나그네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백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손에 쥐지 못했지만 손에 쥔 것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욕심을 내려놓았습니다.

조급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저들의 가슴에는 하나님이 가득 차 있었고, 저들의 손은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땅에 대한 미련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소유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결국 이것 때문에 믿음의 삶을 포기하기도 하고, 나그네 삶을 중단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따라서 살고, 믿음을 따라서 죽는 것을

나그네 삶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성도들에게는 나그네의 삶을 살라고 말하지만

자신은 나그네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왜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 땅에 서 있는 건물을 사랑합니까?

교회가 왜 그렇게 돈 좋아합니까? 교회가 왜 권력자 편에 붙어 있기를 좋아합니까?

 

교회가 나그네 삶을 살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건물로 자기 존재감 드러내고, 교회가 돈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고,

교회가 정권 눈치 보고, 나그네가 아니기 때문에,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변질 된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 자랑, 돈 자랑 힘 자랑 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랑해야 교회는 빛이 납니다.

 

한국교회가 땅에서 가져야 할 것이 많이 생기고, 욕심을 붙들자 죄와 허물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근원적인 부분입니다. 허물은 윤리적인 결함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윤리적인 허물만을 죄로 여기고 있습니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인간의 욕심입니다. 인간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욕심이 인간의 가장 큰 죄악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물질과 사람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싸움은 바로 이 싸움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 그대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했습니다. 인간이 욕심이 우상숭배요, 가장 큰 죄악입니다.

 

제가 매주일 참회기도를 하면서 욕심에 휘둘리는 인간성,

하나님을 주인 삼지 않는 인간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참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참회이기도 하지만 회중을 대표해서 참회하는 것입니다.

제가 싸우지 않으면 갈릴리 성도들이 이런 영적인 싸움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처절하게 싸웁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저 옛날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싸웠던 영적인 전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곤한 하나님을 버리고, 물질의 풍요와 욕심을 축복이라고 말하는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오늘날도 그 인간성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옛날 그 인간이 지금 이 인간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인간의 욕심을 정당화 하는 것을 깊이 참회하지 않으면, 바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성도들 개인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를 향한 영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욕심을 축복이라고 말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것에 발맞추어 교회도 신전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그네처럼 살다가 특별하게 남긴 것 없이 하나님 앞에 갔다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그 유업을 받지 못하고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성도는 죽어서 믿음을 남겨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성도들이 가장 힘이 있을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 한분만 믿고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입니다.

 

목사가 힘이 있을 때가 언제입니까?

오늘 이 말씀 전하고 광야로 나가라 하더라도, 주신 말씀 가감 없이 전할 때입니다.

 

교회가 힘이 있을 때가 언제입니까?

교회의 경제는 만나 경제인 줄로 믿고, 이웃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 교회의 곳간을 비울 때입니다.

스스로 나그네 될 때입니다.

 

성도의 사명은, 목사의 사명은, 교회의 사명은 소유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사는 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살더라도 멋있게 사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어떠합니까?

욕심을 축복이라고 변질시켜, 양손에 떡을 들고서도 더 가지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오늘 목사들은 어떠합니까?

현실에 안주하여 광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는 어떠합니까?

건물을 신전으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선진들은 한 손에도 떡 한 조각 들고 있지 않아도

나그네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도 가진 재산 하나 없어도, 광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도 제대로 된 건물도, 가진 재산도 없는 텅텅 빈 창고로 살아도

너무도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살아간 믿음의 선진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따라 죽었다.”

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믿음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하니 무소유로 살라는 말인가?’ 하면서

적잖게 저항감을 느끼는 성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그네 삶의 핵심은 소유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년 전에 제레미 리프킨이라는 학자가 <소유의 종말>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제레미 리프킨은 생태과학자라 말할 수 있고, 과학철학자라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과거의 시대를 소유의 시대라고 말하고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시대를 접속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전에는 소유해야만 살 수 있는 시대였는데

이제는 접속만으로 충분히 살 수 있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소유의 시대에는 내 머리에 지식을 소유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접속의 시대에서는 내가 필요한 정보와 지식은

손에 들린 스마트폰 접속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시장이라는 구체적인 장소가 있었지만

요즘은 가상의 공간에 접속하여 물건을 구매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또 물건도 전에는 소유를 했지만

요즘은 집도 영구임대, 차도 리스, 다른 물건도 렌탈,

굳이 소유하지 않아도 편리하게 살 수 있는 접속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유의 종말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레미 리프킨이 소유의 종말을 말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는 소유의 시대가 아니라 접속의 시대를 산 사람 아닙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빌려서 쓴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이 내 몸을 일정기간 사용하도록 빌려 주셨습니다.

 

나의 지식과 지혜도 빌려주셔서,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총명함도 거두어 가십니다.

나의 집도 일정 정도 살고 나면 다른 사람이 주인 되도록 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다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집도 차도 버리고 광야로 나가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사용하는 몸,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살고 있는 집,

하나님께서 빌려주셔서 잠시 사용하고 간다는 나그네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욕심에서 해방되고 만들고 믿음의 사람으로 걸어가게 만듭니다.

 

1700년대 유럽의 합스부르크 왕조 시절 니콜라스 왕자가

불란서의 베르사이유 궁을 본떠서 호숫가에 큰 저택을 지었습니다.

 

유럽의 귀족들은 별장을 짓고 나면 우리나라 재벌들과 달리 문화적 취향을 즐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명망 있는 연주자들을 불러다가 오케스트라 조직했습니다.

 

자신의 별장 자랑도 하고, 오케스트라 자랑하기 위해 여름 내내 축제를 열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잠시도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연주를 했습니다.

 

드디어 축제가 끝났습니다. 단원들은 고향에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너무나도 그리웠습니다.

그런데도 그 귀족은 단원들의 마음을 헤아리지를 못하고 그들을 계속 붙들어 놓았습니다.

 

단원들은 악장에게 건의를 했습니다.

니콜라스 왕자에게 휴가를 요청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악장이 천지창조로 유명한 하이든이었습니다.

하이든은 단원들의 마음을 담아서 하나의 특이한 교향곡을 작곡을 했습니다.

드디어 발표회가 열렸습니다.

왕자는 시종일관 미소를 띤 채 흐뭇한 표정으로 음악을 감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주가 막바지에 이르자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자기 연주가 끝나자 보면대 옆에 세워두었던 촛불을 끄고서

슬그머니 무대 밖으로 퇴장해 버렸습니다.

한 사람만 그렇게 하는 것이 단원 전체가 차례로 나갔습니다.

 

4악장 제일 마지막 연주에는 바이올린 주자 한 명만 달랑 남았습니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아주 슬픈 가락으로 가냘프게 연주를 하고 끝맺었습니다.

 

그 왕자는 그때서야 단원들의 마음을 곧 헤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튿날 단원 모두에게 원하는 휴가를 보내주었습니다.

이때 하이든이 작곡하여 연주한 곡이 하이든의 교향곡 제 45, “고별교향곡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케스트라 단원이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면서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인생이라는 오케스트라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이 끝났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한 평생 몸 빌려주셔서 잘 사용하고 갑니다.

나에게 지식과 지혜 빌려주셔서 잘 사용하고 갑니다.

나에게 집 빌려주셔서 따뜻하게 잘 사용하고 갑니다.

내가 남기고 가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 삼은 믿음의 흔적입니다.

 

저는 믿음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부름 받지만

후대들이 이 믿음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믿음을 따라서 살고 믿음을 따라서 죽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이렇게 살고 죽어서 우리에게 몸으로 말하는 믿음을 전해준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선진들처럼 나그네로 사십시오.

소유와 욕심이 종이 되지 말고 우리를 영원토록 자유하게 하시는 믿음의 종이 되십시오.

 

저희 교회 또한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 한분 가지는 것 말고, 가져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예배당 건물도, 성도들이 드린 헌금도, 성도들 자체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고, 믿음을 따라 죽으므로 말미암아

멋진 인생 살아가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