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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기대하는 마음

LNCK 2016. 1. 27. 12:02

기적을 기대하는 마음                11:20-24               16.01.24출처

 

아래 내용과 반대적 측면의 설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둘 다 받아들입니다./ .

 

 

 

서론

 

예수님처럼 잘 알려진 인물이 세상에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세상의 일반인들에게 예수님이 누구냐?’라고 물어보면,

아마 ‘4대 성인 중의 한 분이다라고 답하거나, ‘기독교의 교주다하고 말하거나

위대한 스승이시다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석가모니라든가, 모하메드라던가, 공자라던가

심지어 마하트마 간디와 대등한 입장에서 놓고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다른 어떤 인물과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만이 가진 아주 특별하고 중요한 성격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다수의 인생의 세상의 스승들은 인생의 바운더리를 설정해놓고,

그 경계선을 설정해놓고,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이냐,

그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이고 지혜로운 것이냐를 논했다면

예수님은 그 경계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그것을 당신도 극복하셨고, 남들도 극복할 것을 가르치시고, 또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였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 하신 것이 가장 큰 예에요.

 

그것 뿐만이 아니고 질병이든 아픔이든 배고픔이든 그 어떤 것도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또 풍랑을 잠잠케 하셨고, 귀신을 내쫓으셨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셨고,

당신만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남들도 그렇게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석가모니에게 이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한 과부가 석가모니를 찾아와서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지금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살려달라고 청을 했습니다.

 

석가모니가 대답하기를, 온 동네를 다니면서

식구들 중에 병든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이 있거든

그 집에 들어가 쌀을 한 웅큼 구해서 밥을 지어 아들에게 먹이면 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온 동네를 찾아다녔지만

식구들 중에 병든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이 한 번도 없었던 집이 없어요.

그래서 풀이 죽어서 석가모니에게 돌아왔더니, 석가가 말하기를,

거 봐라. 죽음이나 질병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인데

너는 어찌 그것을 피하려고 하느냐?’라고 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인성에 가셨을 때

어느 과부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어서 그를 장사하려고 장지로 가는 행렬을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이 그 어머니가 슬피 우는 것을 보고 민망히 여기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죽은 자에게 가까이 갔더니 행렬이 멈추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청년에게. 청년아,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했더니

죽은 자가 일어나 말하기를 시작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청년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라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같다고 누가 말을 합니까.

모든 종교가 같은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에게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당신만이 가진 특별하고 중요한 면모가 있었고

그것이 기독교를 기독교로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특별한 면을 알지 못하고 부각시키지 않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오, 기독교 진리를 호도하는 것입니다.

 

본문 설명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진리와 예수님의 특별한 면을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성경 구절이에요.

예수님이 그 전날 멀리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시장하셔서

열매가 있을지 가까이 가 보셨더니 잎사귀가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게 말씀하시기를,

다시는 사람이 너에게서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 저주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그들이 지나가다가 베드로가 보니까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신기해서 예수님에게 주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베드로의 관건은 주님, 비결이 뭡니까,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예수님은 당신이 어떻게 그 기적을 했는가를 설명하기 보다는

너희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어떻게 그 기적을 행하셨는가를 말씀하기 보다는

누구든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의 특별한 예언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만의 비결을 감추고,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 사람들이 갖지 못한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것을 당신만이 알고 있는 비결로 감추려고 하신 것이 아니고

그것을 너희도 해봐라, 너희도 할 수 있다, 너희가 하거라라고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예수님의 놀라운 면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것을 당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 할 수 있고, 누구든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은

신앙의 성격이 어떠한 가를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 말씀이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씀이 무슨 뜻이냐,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뜻이에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이 믿음을 공유할 때에,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누구든지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요,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평등화에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을 하고 사도로 부름을 받았죠.

 

이제 그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찾아가서 자기도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설득을 하려고 하는데,

원래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할 리가 없습니다. 텃세가 말도 못합니다.

 

텃세는 어디든 있습니다. . 오늘날만 텃세가 있는 게 아니에요.

당연히 베드로와 야고보에게 텃세가 있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3년 반을 함께 했고,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어디서 굴러온 돌이 이제 와서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을 하느냐?’

바울의 주장을 받아들일 리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친교의 오른팔을 내밀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역사하시는 증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소위 신앙의 평등화의 기준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증거를 보여주면

사울왕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모세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바울의 사도 됨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먼저 믿었던 사도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여러분이 동일한 일꾼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신다면

입으로 요구하지 말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증거를 보이면 됩니다.

 

그래서 모든 믿음의 종은 하나님께 근본적으로 구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나타나게 해달라고 하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해달라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말로 강요한다고 사람들이 그것을 믿을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증거를 보고 하나님이 저 분을 통해 역사하시는구나

하나님이 저 분과 함께 하시는구나 그것을 알게 되면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사람에게 안수를 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부르시고 능력을 주신 것을 교회가 보고 인정하는 것 뿐이에요.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이 안디옥에 선지자와 교사들이 있었다 하고,

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중에 바나바와 바울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금식을 하며 주님을 섬기는 중에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바나바와 바울을 내가 맡기는 일을 위하여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들에게 안수하고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내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선택한 게 아니고

성령이 부르시고 교회는 그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그것을 축복한 것 뿐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일하시는 순서입니다. 성령이 일하시는 순서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쓰시는 사람을 어떻게 아는냐 사람들이 압니다.

깨닫습니다. 눈에 보입니다. 증거가 나타납니다.

 

그걸 일부러 증명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회가 되면 그 증거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장차 임금감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자기가 증명하려고 애를 쓴 게 아니에요.

 

기회가 되니까 그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사울 왕과 신하들과 장군들과 모든 장병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이스라엘 군대만이 아니에요. 블레셋의 골리앗과 블레셋 왕들과 장수들과 병사들,

아군과 적국,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윗이 물매돌 다섯 개를 들고 나가서 첫 방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림으로써

사울왕과 이스라엘 민족 뿐만이 아니고 적국에까지

하나님이 이 어린 소년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

하나님이 이 소년에게 기름을 부으셨다는 증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애쓴다고 머리를 굴린다고 이런 일이 가능해지겠습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높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이셨더니 우리 편 뿐만이 아니고 적군이 보는 앞에서

우리 편이 봤을 때에도 겁이 나는데, 적군이 볼 때면 얼마나 겁이 나겠습니까.

 

사울 왕이 볼 때도 가슴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저렇게 쓰신 적이 없는데 저 어린 소년을 저렇게 쓰시는구나., 무섭다.

 

사울 왕이 봤을 때도 가슴이 뜨끔했을 텐데 적군이 볼 때는 오죽했겠습니까.

,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정말 강하구나.

 

여러분 하나님이 사람을 높이시기를 기다려야 됩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노력을 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할 일을 태만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결국은 나는 평소에 신실함과 믿음으로 준비를 하지만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서 하나님이 나에게 기름부음을 허락하시고

그리고 나를 쓰셔야 됩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여름방학에 토론토 집에 돌아갔는데,

어느 날 이 알바를 하다가 점심시간에 토론토 대학 채플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토론토 대학에 여러 칼리지가 있는데

그 중에 트리니티 칼리지의 채플이 정말로 아름답고 그렇습니다.

그 채플에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가서 앉아서 기도를 하는데

제가 방언을 하고 스스로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의 내용이 내가 곧 너를 크게 쓸 것이다라는 예언이 나왔어요.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상징적인 말씀인지,

이라는 말이 3040년을 말하는 것인지 사흘, 나흘을 말하는 것인지 알 리가 없죠.

 

그런데 며칠이 되지 않아서 저의 담임 목사님이 여름 수련회 강사가 펑크가 났으니

너와 내 친구가 가서 그 수련회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라고 맡기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기도를 하고 예언을 한지 며칠이 되지 않아서, 그 때 저는,

! 이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거로구나

믿음이 오고 그리고 기쁨이 오고 자신감이 생기고 포부가 생기고

무언가 큰 역사가 일어나겠구나 하는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련회를 했는데 그 때가 1983년이에요.

그런데 1983년 여름에 성령이 얼마나 뜨겁게 역사를 하시는지

이후에 제가 신학교를 가고 목사가 되었지만

목사가 된 후에도 그렇게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는지 없는지

제가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젊은 대학생이었을 때에 제가 스스로 기도를 하면서 방언을 통역하면서

하나님이 곧 너를 크게 쓰리라 하셨는데 정말로 그 말씀대로 됐어요.

 

주님은 당신이 능력을 행하신 것 뿐만이 아니고,

제자들에게도 당신을 믿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것을 명하시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어요.

 

오늘 본문뿐만이 아니에요.

12살난 소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집에 가실 때에도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을 하셨어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풍랑을 보고, 바람을 보고, 물에 빠질 때에

예수님이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을 했느냐 붙잡으셨어요.

 

또 우리는 어찌하여 그 귀신을 내쫓지 못하였나이까 라는 질문에

이것은 너희의 믿음이 적은 연고라 하고 그들을 책망하셨고,

 

공관복음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에도

나를 믿는 자는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예수님의 관심사는 당신이 모든 일을 하고

당신이 모든 짐을 지고 당신이 모든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떠나가시고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능력을 행하고 예수님처럼 병자를 고치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가 믿어야 되고, 우리가 경험해야 되고,

우리가 가르쳐야 되는데 많은 설교자들은 이것을 가르치기를 주저합니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본인들이 믿지 않기 때문인지, 민망하기 때문인지,

성도들에게 괜히 바람만 불어넣다가 실망할까 염려하기 때문인지,

본인들이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성도들의 신앙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였던 토마스 제퍼슨은, 지금의 기준으로 봤을 때도 참 맹랑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성경을 읽기는 읽었는데 성경에서 모든 이적과 기사는 신화라고 정의를 내리고

   그것을 다 제거했어요.

 

   성경에서 무슨,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는 건가,

   무슨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셨다 던가, 그런 건 다 신화라고 제거해 버리고

   예수님의 도덕적인 가르침만이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그것을 보존한 것이 소위 제퍼슨 바이블이에요.

 

   얼마나 짧겠습니까. 제퍼슨 바이블은 정말 짧아요.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아니에요.

사람이 자기의 취향대로 자기가 믿을 수 없는 것을 제하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제하고,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듣는다면

그건 하나님을 자기가 대신하는 것이요, 성령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감동하여 쓰게 하는 성령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내 판단이 더 옳다, 내 기준이 더 옳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은 차라리 안 믿는 것보다도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능력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주저하는지 아십니까?

 

과거 믿음을 가르쳤던 분들이 그냥 산을 옮기라고 말할 수가 없으니까

구체적인 맥락을 필요로 하는 나머지 그것을 무엇으로 집약시켰냐면

믿음의 능력을 가짐으로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병을 고칠 수가 있고, 물질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소위 오럴 로버츠 목사, 케네스 헤이건 목사의 wealth and health gospel,

건강과 번영신학이라는 것이 거기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능력을 가르쳤던 대다수의 목사님들은 이 두 가지로 귀결됐어요.

 

몸의 병을 고치는 것과 물질의 축복을 받는 것,

그런데 거기에 대하여 염증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그건 잘못됐다라고 하는 과정에서

애기 목욕물을 버리다가 애기까지 버렸어요.

 

다시 말하면 잘못된 가르침을 수정하려고 하다가

믿음의 능력조차도 거부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나도 이거 가르치다가 그렇게 될까를 염려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문에서 믿음의 능력을 가지면

너희가 건강을 얻고 번영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고,

무엇이든지, “무엇이든지 그렇게 되리라,”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무엇이든지라고 말씀을 하셨지, 몇 가지로 제한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믿음의 능력을 제한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제한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만 가지 일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만 가지 일에 기도의 응답을 필요로 합니다.

 

펫 로버슨 목사님이 쓴 책을 보면 수년 전에 멕시코 만에서 허리케인이 발생해서

그것이 미국 본토를 향하여 북상을 하는데

그것이 버지니아 주 해변에 상륙할 수 있는 그런 상황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그 허리케인을 꾸짖었더니 허리케인이 방향을 바꿔서

대서양 쪽으로 빠져나갔다라는 간증이 실려 있습니다.

 

, 우연한 게 아닙니까. 기도를 한번 안 해보세요. 얼마나 우연한지 보게.

, why not?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꾸짖었다면, 왜 우리가 허리케인이든 질병이든 암이든

시험이든 재앙이든 꾸짖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무엇이든 만 가지 일에, 우리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만 가지 일에,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