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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6

주님과 연합으로 가는 길

LNCK 2016. 2. 18. 15:16

www.youtube.com/watch?v=0mP7NuKTclE&feature=youtu.be

주님과 연합으로 가는 길  3:17-19, 갈6:14, 롬9:31~32 스크랩, 출처   English

 

◑주님과 연합으로 가게 하시려고, 내가 원치 않는 삶을 허락하십니다.

 

▲한국사람들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얻을 때, 가장 행복할 때,

'이제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렇게 고백하실 수 있는 분 있으신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있으시면 한번 손들어 보실까요? 없으십니까?

저밖에 없나요?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후회 없이 고백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하박국서 3:17~19 에서 기자가 말합니다.

'집안에 아무것도 없고 인생이 망하고 찌질한데 그래도 주님으로 기뻐한다. 이런 행복과 감사가 있다.

나의 발이 사슴처럼 다닌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육체 가운데 살지만 내가 나를 주관하지 않고

그분이 나를 주관함으로써 살아가는 감사함, 현재 상황이 어떻더라도

세상에 온갖 좋은 것들도/ 악한 것들도 이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더 갖고 싶은 것도 누리고 싶은 것도 없이, 주님 한분 만으로 완전히 행복한 삶',

나는 그렇게 만족하며 살고 있다.

 

▲이렇게 주님과 완전히 연합된 삶, 완전한 친밀함, 완전히 행복한 삶을   ←설교의 제목 및 주제 

성도님들께서 가지시기를 원하시면 제 설교를 잘 들으십시요.

 

제가 하려는 설교는 전혀 특별한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많이 들으신 설교 내용들을 정리하고, 연합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는 것 뿐입니다.

이 주님과의 연합으로 가는 길,친밀함으로, 성도님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우리를 주님과의 연합으로 친밀함으로 데려가는 주체는, 내가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우리를 향한 가장 크고 위대한 사랑으로

우리가 거절하고 싶을지라도 거절할 수 없는 잔인한 사랑이신 그분이, 친히 인도하시고 주장하십니다.

연합으로 가는 길의 종착지는 주님 안입니다.

 

누가 주님과 연합으로 가는 길을 시작할 수 있는가요?

주님께 구원받기로 선택된 성도들입니다.

주님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창세전에 당신의 자녀들을 선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언제 주님과 연합으로 가는 길을 친밀함으로 가는 길을 시작하는가요?

대부분 벌써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을 구주로 인격적으로 영접하고서부터, 우리는 연합으로의 가는 길이 시작됩니다.

 

성경만이 우리를 주님과의 연합으로 인도하는, 더할 것도 뺄것도 없는 완전한 지침서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속에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하나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주님의 제자가 되라고 하시며

제자가 되는 조건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마치 두 날개와 같기도 하고 두 바퀴처럼 우리를 균형있게 하여주십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더불어

주님과의 연합으로 가는 길이 끝날 때까지

이땅에서 우리 삶이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할 두명의 동료들이 있는데

이들은 바로 자기부인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눅 9:23 에서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통해서 이 길을 인도하십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좀 더 멋진 영광과 기쁨이 아닌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우리에게 동반자로 주셨을까요? 우리가 혼동합니다만,

우리는 죄속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계획을 세우는 것도 악한지라

우리에게 이런 동반자라만 끝까지 우리를 인도할 수 있기에

우리에게 이런 조건을 통해서 주님께 오라고 하십니다.

 

사도바울이 갈 5:24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우리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통해서 못박으라고 하십니다.

 

늘 우리는 우리 생각에 우리 눈에 좋은 것은 축복이고, 눈에 싫은 것은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이렇게 판단하는 것입니까?

죄인인 내가, 선악과를 먹은 죄인의 가치관으로, 축복과 저주를 나눕니다.

 

어떤 무명인이 쓴 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심으로 나를 더욱 더 주님의 형상과 닮게 하시기 위해

   나의 모난 부분들을 깎으실 때 하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시지만

   나는 그것을 고난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사랑하심으로 나를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낮은 마음과 넓은 마음을 갖게 하시려고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것

   하나님은 그것을 은혜라 부르시지만, 나는 그것을 연단이라 부릅니다.

 

   사탄이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질투하여,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위하여

   나에게 물질의 부함과 세상의 즐거움을 풍족히 불어 넣어줬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시험이라 부르시지만, 나는 그것을 축복이라 부릅니다.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바라보기에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오해하고 잘못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아버지의 계획하심과 뜻하심을 깨달을 수 있도록

주님에게 아버지의 지혜를 구하고, 나의 아둔하고 어두워진 눈을 밝혀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간혹 내가 이해할수 없는 일들로 인해 마음이 무너 질때도 있겠지만

그 분은 이해할 대상이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이기에 , 늘 하나님과의 시선 맞추기를 게을리하지 않기를...

 

우리는 모두 건망증 환자라서, 자꾸자꾸 들려주지 않으면 까먹고 맙니다.

내 맘은 한없이 가라앉아 먹먹해질 때 눈을 들어 우릴 사랑하시는 그분을 바라봅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이라는 것들을 한번 뒤집어서 보시면

주님이 눈에 훤히 보입니다. 눈에 좋은 것은 시험이고, 눈에 싫은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를 주님께 데려가는 것은, 우리 눈에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잠깐 행복하고 감사하다가, 대부분 우리를 주님께 멀어지게 합니다. 맞습니까?

 

그래서 우리 뜻을 따르지 말고 부인하라고 합니다.

결코 달갑지 않은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뭐가 좋은지 모르는 인간에게 방향을 모르는 인간에게,

주님은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께 오라고 하십니다.

 

매일 십자가를 기쁘게 진다는 것은

어제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오늘의 모든 상황을 가장 기쁘게 받아들이며 내일을 주님께 맡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 대하여 절망하게 하십니다. 작고 큰일들을 통해서 세상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실직, 사업이 망하는 일, 자녀들 문제, 건강,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세상을 버리라, 주님께만 소망을 두라"고 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버리지 않으면, 세상이 나를 버린다고 사도 바울이 갈 6:14 에서 말씀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이미 주님과의 연합에 들어간 사람 친밀함에 들어간 사람은

주님이 내가 원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실 때, 그것이 내게 베푸는 최선의 사랑임을 압니다.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악함과 약함을 발견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그분임을 인정하게 하십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이 내가 주인인줄 알고, 잘못 살았음을 회개케 하십니다.

원하지 않는 일, 사고, 실직, 자녀들 문제,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는 일등이 우리에게 올 때

'내가 무슨 죄가 많다고, 뭘 그렇게 잘 못했다고 이런 시련을 내게 주시나?'

라고 우리는 불평합니다. 원망합니다. 거절합니다.

 

이런 모습들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음을,

악으로 가득 차서 내가 주님을 살해한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결코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수도 없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수 없을 때,

'주님, 저는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수 없는 무능한 약하고 악한 존재 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우리를 도우셔서 ,그분의 도움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짐은 더 어렵습니다. 힘겹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거절합니다.

 

교회에 헌금 하고, 교회 봉사를 잘 하고, 전도를 잘 하는 일은

어쩌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일 보다 더 쉽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에게 순종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들 앞에서 본을 보이며,

이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일은, 교회 봉사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고, 외형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에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삶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주님안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만이

우리를 연합으로 친밀함으로 데려갑니다.

    

 

◑'주님과 연합', '친밀함'으로 가는 길에는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크리스천'(주인공)이 가는 길에 많은 샛길들이 있습니다.

고생스러워 보이지 않는 길, 쉬워보이는 길,

그런데 그 쉬운 길을 따라 가다가 죽을 고생을 하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가는 길"을 이탈시키는 것들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설교제목 및 주제

 

여러 장애물들 중에서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첫번째 장애물 , 샛길은 기복주의 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세상에 속한 복을 얻으려는 마음,

하나님을 달래고, 충성하고 복을 받으려는 인간 본연의 마음,

우리 눈에 좋은 것들, 세상에 속한 것들을 가지고 싶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종으로써 그분께 영광을 돌리려면, 이런 것 저런 것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도 예외가 없이 이 땅에서 가난하지 않고 건강하고 자녀들이 잘 되고,

장수하고 명예롭고 잘 살고 싶습니다. 누가 이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겠습니까?

하나님도 우리가 이렇게 잘 살기를 원하시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찌질이 가난하고 아프고 가정은 파탄나고 수치스럽게 살기를 바라시겠는가요?

그래서 우리는 이것들도 영적인 것들과 함께 간구합니다.

 

잠언 307-9 부하게도 마시고 가난하게도 마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이소서,

하나님 잘 섬기게 하소서, 이것이 마치 복음이라도 되는 듯이 기도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말은 뒤집어서 보면, '저는 세상에서 가난하지는 말고 존경받는 위치에 나를 머물게 하여 주십시오' 라는

야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니 무슨 불 경건한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절대로 하나님을 이용해서 잘 살려고 하는 마음이 없고 순수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여러분이 실직하고 사업이 망하고 찌질하게 가난하게 만드시고

자식들은 망나니가 되고 이혼하거나 상처하거나, 그래서 세상에 손가락질 하는 사기꾼으로 전락하고

영적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어도 좋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시겠습니까?

 

고난이 없을 때 우리는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듯 합니다.

그런데 고난이 오면 '내가 얼마나 충성했는데 십일조, 헌금, 교회를 사랑하였는데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속된 말로 본전 생각이 납니다. 기가 막힙니다.

'왜 하나님은 그때 막아주시지 않으셨나? 하나님이 과연 계시기나 한가?' 라고 생각합니다.

 

200611월에 세번째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 건강검진을 받는데

아내 허운석 선교사에게서 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폐암 선암 2기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5년 안에 50% 살고 50% 죽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당연히 50% 사는 줄에 설 줄 확신하였습니다.

'왜 선교사로 그렇게 덥고 습하고 독충이 많은 아마존에 가서 몸을 부서지더라도

인디오 한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헌신하고 주님을 사랑하였는데

주님이 우리 손을 들어주시지, 그래서 50% 사는 줄에 서는 것이 당연하지..'

 

설교를 들으시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틀렸습니까 맞았습니까?

이것이 지성이면 감천이고 인과 응보라는 원리가 잘 맞아떨어지는 것 아닙니까?

 

'폐암 2기로 수술을 받았는데 기적적으로 치료가 되었다.'

'이 간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 교회는 이런 간증을 들을 때 기뻐합니다.

 

영어로 Give and Take 주고 받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바친 것 만큼 주셔야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마존에서 선교사로 사역할 때, 순수하게 전혀 대가를 바라지 읺고 아마존에서 충성하였는데

후에 보니 보상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저희 마음 속 깊은 저변에 장사꾼의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손을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3년이 지나고 암이 재발하였습니다.

그때 저희의 충격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사랑은, 우리의 죄와 악을 보여주셔서 우리를 정결케 하여 주시는 일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이런 경험 없으신가요? 주님께서 꼭 들어주실 줄 알았는데,

들어주시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거절당했을 때 느꼈던 그 쓰라림의 경험이 있으신가요?

 

인간이 주님께 하는 모든 헌신, 사랑, 충성, 이 모든 것들은 기복주의에 기초를 둡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바치는 헌신과,

일반 종교인들이 자기를 위하여 행하는 공덕과 아무 차이도 없습니다.

 

기복주의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세상에 속한 복을 얻으려는 마음,

신을 달래고 충성해서 복을 받으려는 인간 본연의 마음,

우리 눈에 좋은 것들, 세상에 속한 것들을 가지고 싶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늘 기복주의라는 샛길에 빠져서, "연합으로 가는 길, 친밀함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립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7-9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똥으로 여긴다...

왜요? 주님을 더 얻기 위하여! 

연합과 친밀함을 위해서요! 

 

세상에 속한 것은 배설물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과 주님을 동시에 섬기면, 주님과의 연합에 친밀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2. 두 번째 장애물, 샛길은 율법주의입니다.

우리가 처음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하고, 우리는 그 사랑의 감격에 겨워서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까닭에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의식이 싹트면서,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성령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주님은 이 율법주의에 대하여 마태복음 15:8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주의는, 마음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입술로만 사랑합니다.

그래서 주님 당시에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한다던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주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는지 복음서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02절과 3절에서 바울이 율법주의에 대하여 이렇게 지적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로마서 9313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율법주의는 종교적 야망을 숨기는 고도의 전략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위선자, 독사의 새끼, 온갖 독설을 퍼부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그들은 당시 사회로부터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칭호를 들었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을 보실까요?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던지

살인도 서슴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잡아다 죽이려 하였던

광기 서린 충성과 헌신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아래 내용과 연결됩니다.

  

저는 1991년 브라질 아마존에 선교사로 파송 되면서부터, 교과서처럼 선교를 하는 선교사였습니다.

여러 선교사들이 기도카드나 명함을 만들고, 거기에 후원 구좌번호를 기록합니다.

 

저희는 아주 오래 전에 주님이 제게 갈릴리와 나사렛 삶의 가난을 배우고

농촌에 목회자 없이 버려진 양떼를 돌보라고 감동을 주셔서

장신대 4학년 때부터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주님께만 도움을 구하고 살았습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 조지뮬려, 워치만니, 대천덕 신부님등이 제게 큰 영향을 주셨습니다.

내가 만일 주님의 일을 한다면 필요한 재정을 주님께서 모두 책임지시리라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주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항상 당당했고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는 세상에서 주님을 제일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아마존 검은 강의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계백장군 이었습니다.

   풍전등화처럼 스러져 가는 조국 백제를 위하여, 그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을 알고

   가족들을 위한 한점 염려도 그의 마음을 흔들지 않게 위하여

   자기 가족을 먼저 살해하고 전쟁터에 나가서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그 장군보다

   저는 제가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아마존 적도 바로 아래, 365일 폭염과 습도 독충들로 인하여

5분도 쉬임을 허락하지 않는 곳에서 가족들이 벌레에 물려서 피와 진물로 범벅이 되었을 때에

눈을 감고 계백장군을 떠올렸습니다.

눈을 뜨고 가족들의 고통을 보고 한국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계백장군을 떠올리면서 눈물을 삼켰습니다.

 

'어떻게 하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을까?' 24시간 사역을 생각하였습니다.

 

제 아내가 암 수술을 받고, 이제 사역을 좀 줄이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을 줄이지 않고 더 확장하였습니다.

 

누가 이런 저를 향해 손가락질 할 수 있었겟습니까?

내가 휼륭한 선교사로 살기를 바래서, 아내와 자녀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였습니다.

*혹시나 율법주의적 의가, 선한 선교 사역적 열심 가운데, 일부 섞여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마존에서 이렇게 22년을 사역하고, 저는 아내를 먼저 보냈습니다.

이제 땅을 치고 통곡을 하고 외양간을 고쳐도, 돌아올 소도 없고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평생 피눈물을 흘리고 회개를 하고, 주님께 돌아가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윤동주가 쓴 서시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시처럼 죽는 날까지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선교사이기를 원했습니다.

만일 제가 꽃이라면, 산 한쪽에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누구도 상관없이 주님만을 위하여 흐드러지게 피다가 지는 꽃 무더기가 되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거룩한 것에 악이 있고, 악한 것에 선이 있다고, 세익스피어가 말했다고 합니다.

제 종교적 열심과 헌신속에 야망이 숨겨진 것을 것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주님이 제 허물을 보이실 때, 제가 그렇게 왕 바리세인인줄 몰랐습니다.

제가 하지 않았던 실수들이 제 자랑이 되고,

제가 잘한 일들이 큰 업적이 되고 명예가 되는 줄 몰랐습니다.

 

율법주의는 고상한 종교인의 탈을 쓰고

자기 야망을 실현하는 교묘한 마귀의 전략임을 그래서 알았습니다

 

 

◑자기 의, 자아의 문제 해결하기

 

▲세상에서 얻은 영광과 부와 지식이 많을수록, 뿌듯한 보람을 많이 느낄수록

"자기 의"라고 하는 또는 "자아"라고 일컫는 괴물은 더 커집니다.

 

수치와 가난, 멸시를 받을 때가 복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많이 헌신한 사람일수록 이룬 업적이 클수록, "자기 의, 자아"가 커집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한일이 없습니다.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라고 할 때,

그때 그 겸손한 마음이 주님께 진정한 헌신이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지 못하도록 친밀함을 갖지 못하도록 막는 가장 주범이

율법주의와 기복주의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열매가 "자기 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 또는 "인간의 자아"라고 표현하는 것은

내가 소유한 영적인 것, 육체적인 것, 정신적인 것, 모든 것으로 나를 대표합니다.

그동안 내가 인정한 나와 다른 사람들이 인정한 나가 바로 나입니다.

 

내가 이룬 공적, 자랑, 기복주의와 율법주의는

'너는 괜찮은 기독교인이다'라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문제 있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렇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이것들도 우리에게 자기 의라는 것을 심어줍니다.

 

▲"자기 의"가 왜 문제가 되는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의가 있다면, 공적이 있다면, 자랑이 있다면, 거저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2124 절 말씀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탁월하고 휼륭해서

종교적으로 명예와 영광과 부를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의 의로 말미암아 주님의 그 의를 힘입어 주님께 나갈 수 없다면

이것보다 더 큰 손해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사탕 하나를 얻기 위해 다이아몬드를 버리는 것 같습니다.

 

912-13 말씀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주님은 자기 의가 전혀 없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의로 주님 앞에 나가는 사람은,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20절에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가 아무리 크고 위대한 일을 주님의 이름으로 많이 하였다 하더라도

주님의 의가 아니면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주님과의 연합으로 가는 이 길을 시작케 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친히 인도하시는데, 그분의 때가 되면

그분이 우리의 의를 자아를 없애주시기 위하여 찾아오십니다.

 

창세기 3212절을 보면 야곱이 고향으로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 숫자가 많았음을 인식하였던지 여호와의 군대 마하나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야곱이 무서워 했던 것은 그 형 에서와 군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야곱을 찾아와서 싸움을 시작한 분은 누구입니까?

얍복강가에 와서 야곱의 다리를 부러뜨린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 해야 할 분은, 우리의 자아를 자기 의를 공격하여 완전히 없애시고

연합으로 친밀함으로 데려가시고자 오시는 성령님이라고 믿습니까?

'어떤 방법으로든지 제 자아를 제 의를 완전히 없애주십시오' 라고 기쁨으로 성령님을 초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선택한 사람, 하나님께 특별히 사랑받은 사람은

주님께서 자기 의를 완전하게 없애주신다고 믿습니다.

 

주님의 때가 되면,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자기 의를 없애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소원하고 사모하고, 우리 자아가 우리 의가 없어지기를 바라고 몸부림을 쳐도

주님만이 우리를 자아로부터 자기의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안에 온전히, 그리고 내가 그분안에 온전히 거하게 하기 위하여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어떻게 없애주시는가요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주 가까이에서 주님께서 한 사람의 자기 의를 없애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아내 허운석 선교사입니다. 자기 목숨보다 주님과 인디오 형제들을 더 사랑하고

불처럼 타올라서 일생을 헌신했는데

암을 통해서 자기 의를 없애 주시고, 주님과 완전이 연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과 완전이 연합한 사람의 설교를 들어보기 원하시면

인터넷 유튜브에 들어가서 '허운석 선교사'라고 치시면 설교들이 열어집니다.

 

   잔느 귀용이라는 15세기에 살았던 영성가는 아주 젊은 날,

   남편이 죽고, 자녀 둘이 죽고 가톨릭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아

   십수년간 감옥에 갇히면서, 그 고난속에서 주님과의 연합이라는, 친밀함이라는 복을 받았다고 이해합니다.

 

   저는 제 목숨을 거두시고, 아내를 살려달라고 부르짓던 제 기도를 거절하시고

   주님께서 아내를 취함으로 자기 의를 없애 주시는 주님을 경험하였습니다.

 

주님은 갈보리 산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취하시고 우리를 버리실 때,

우리는 천지가 개벽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그동안 내가 믿엇고, 확신했던 모든 것이 내게서 나온,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고 비로소 주님안으로 들어갑니다.

더불어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내의를 벗고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게 됩니다.

 

어느 영성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가장 잔인하게 대할 때가, 가장 자비하게 대하시는 때입니다.

 

우리 자아가 죽어야만 주님과 연합이 되는데

우리 자아를 죽이러 오시는 성령님이, 단번에 우리 자아를 죽여주심이

우리가 주님께로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라면

죽다가 살고, 살다가 다시 죽고 그렇다면 죽는 기간은 더 길어지고, 우리는 더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존재라고 가정을 하면

단숨에 죽는 것이 났겠는가, 숨을 좀 쉬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가 반복을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나 단번에 죽도록 한다면, 그것이 자비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

목숨을 주고라도 바꾸고 싶었던 그 무엇이 처참하게 버려질 때

하나님도 나를 버리신다고 경험될 때, 비로소 자기 의가 없어집니다.

 

우리 속담에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가 비빌 언덕을 완전히 제거하심으로써

우리 자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죽게하십니다.

 

내가 붙들었던 사랑 소망, 그렇게 믿었던 사랑하던 그 누구를 제거하심으로써

주님은 우리를 홀로 그 분 앞에 서게 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정체를 드러냅니다. 내가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고 했던 주님은

내 인생에 전부가 아니었고, 내 생명은 이 땅에 기초하고 있었고,

내가 위선자였고, 종교인이었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던 것은

주님을 이용해서 종교적 야망을 이루려고 하였던 사기꾼이었음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이 때 우리 자아가 물같이 쏟아집니다.

 

   이 설교를 들으시는 분중에 고통이 극심하신 분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성도님을 주님과 연합으로, 친밀함으로 초대하기 위하여 준비하신 고난일 수 있습니다.

 

   우리 목을 주님께 기꺼이 내놓고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염려하시지 마십시오.

   저도 전에는 전혀 이해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성도님들에게 이 과정을 허락하실 때, 비로소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럼 저를 찾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의가 없어진 사람은, 주님께서 상한 마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물론 완전한 연합에 들어가기 전에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상한 마음, 회개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자기 의가 사라지면 영구적으로 상한 마음을 주십니다. 이 때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게 허락하시는 모든 고통이 합당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제가 자기 의가 없어진 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상한마음을 주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다르게 이해하면, 상한 마음이 자기 의를 없애준다고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상한마음을 가지라'는 권고를 듣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상한 마음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사용하셨다고 믿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사람들은 내가 죽을 자리에 동물 한 마리가 대신 죽고 내가 용서를 받고 살고 있다는 마음,

지금 오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시고, 내가 그 공로로 용서를 받았다는 이 마음입니다.

 

상한마음을 가지면 주님의 눈으로 우리를 보며 회개가 가능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것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나를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려고 했었고,

거룩하고 싶은 내 인간적 야망을 채우기 위해서 헌신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딤전 115절 말씀처럼 '내가 죄인중의 괴수다' 라고 고백합니다.

'나라는 인간은 살아 있음이 아주 미안한 존재다. 내 안에는 선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악 그 자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악으로 살인을 일삼은 존재'임을 알려주시고 회개케 하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악한 나를 왜 데려가시지 않고 살려두셨나?' 이런 회개를 하게 하십니다.

 

이런 회개를 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습니다.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 있어서 경쟁자가 없습니다. 누가 가장 낮은 곳에 내려 갈려고 경쟁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나으므로 정죄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고 자기가 처한 자리를 기뻐합니다.

 

모든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가 섬길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들이어서 감사합니다.

 

두사람이 기도하러 갔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리새인은 네거리에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고

죄인은 고개도 못 들고 기도했다, 바로 내가 그 사람이다 라고 인정합니다.

 

이 상한 마음으로 인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히 들어오시고

우리가 주님께로 온전히 들어갈 때 주님과의 연합이 친밀함이 이루어집니다.

 

그럼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한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요?

    

전에는 관심이 자기와 가족 교회 내 나라에만 있었는데

관심이 이기적인 자기로부터 떠나서, 주님께 있고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자기 삶의 모든 것이 주님께 집중됩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자기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자기 삶에 균형이 잡힙니다.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그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힘겹고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며 감사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마치 높은 데서 사슴처럼 다닙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종교적인 매임으로 하지 않고, 주님의 강권하심으로 합니다.

그래서 잘하고 못하고 에 부담이 없습니다. 열등의식을 갖지도 않습니다.

 

자기 못남을 잘 알아서 칭찬이나 높임에 관심이 없고,

누구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아 삶이 자연스럽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믿으며 삶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연합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구적인 안식과 자유 평안으로 인도를 받습니다.

 

가장 행복한 상태의 삶이 지속되며, 세상 행복 명예 재물 그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한 삶을 주시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을 부인하고 매일 십자가를 짊으로, 우리의 의를 포기하고

주님의 의에 힙 입어 당신과의 연합으로 친밀함으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하는 완전한 행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며

주님 한 분 만으로 기뻐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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