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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찾느냐

LNCK 2016. 3. 27. 14:37

누구를 찾느냐                 20:11~18                   07.04.15.스크랩, 출처

 

서론

 

저는 해마다 10월이 되면 1973년도 그 때에 공부하러 갔던 미국의 풀러 신학대학에 가서

한번 씩 일주일 동안 특강 형식으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벌써 13년째 해마다 가고 있는데요.

후배들에게 일주일간 특강으로 아침 8시 반에서 오후 4시 반까지 연속으로 그렇게 강의를 합니다.

 

강의할 때마다 종종 시간이 좀 있으면 그 옆에 있는 서점에 들러서

그간에 어떤 책이 나왔나 해서 서점을 둘러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둘러보다가 또 몇 권의 책을 좀 사가지고 오기도 합니다.

 

3년 전에 서점에 들러서 책을 좀 보다가 서점 점원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요새 문제의 작이 무엇인지, 제일 많이 팔리고 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책과

그 주제가 뭐냐고 그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점원은 서슴지 않고 내게 책 몇 권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모두가 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책입니다.

 

그 중에도 제가 사서 특별히 정독을 하고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은 책은

마빈 메이어(Marvin Meyer)The Gospels of Mary라는 책인데

이건 쓴 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수집한 컬렉팅입니다.

 

교부들의 저작이나 옛날 문서에 나오는 모든 자료들을 살펴서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다 모아 놓았어요. 수집해서 편집한 그런 책입니다.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거기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있는 것도 있지만 성경에 없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든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이 마리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며 모든 것을 경험한 사람도 마리아입니다.

또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고 기억하고 있는 분도 마리아입니다.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기도 하고

또 그것이 더욱더 소중해지는 그런 경향이랄까 그런 학문적 연구를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본문에서만 봐도 예수 부활에 대하여 첫 증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먼저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 그런데 우리는 조금 과거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누군가하면 성경에 비춰지는 대로

8:2절에 보면 일곱 귀신이 들렸던 사람입니다.

 

이 일곱 귀신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 해석을 다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주 흉악한 귀신이 들린 그런 과거를 가진 사람이에요.

그리고 예수님 앞에 와서 눈물로 발을 씻었어요.

발에다 눈물을 떨어뜨리고 자기의 소중한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7:36절에 보면 이렇게 정성과 지성으로 예수님께 높은 존경을 바칠 때에

옆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 예수님 참 답답한 분이다. 저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여자라는 걸,

저 여자가 창녀 출신이요. 게다가 귀신 들렸던 자요. 이런 여잔데..,

이 여자가 저렇게 와서 발에 입을 맞추고 눈물로 발을 씻기니,

누군 줄 알면 거절할 텐데, 저거 가만히 계신 것을 보니까 저가 아무래도 메시아가 아닌가보다.'

뭐 그런 생각을 하고 또 그렇게 말들도 했던 것 같아요.

 

이런 때에 마리아가 얼마나 거북하고 죄송스럽고 힘들었겠습니까?

정성을 다한 것만은 틀림없는데 이렇게 됨으로 예수님에게 누를 끼치는 거란 말예요.

예수님의 그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한 것 같아서,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을 거란 말이에요.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이 많음이니라.(47)"

저가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저의 많은 죄가 다 용서 받았느니라하고 말씀할 때

이 말을 듣고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웠겠습니까?

 

아마도 이 말씀으로 인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내 일생을 이분에게 다 바칠 것이라고

그렇게 중심에서부터 맹세를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본론1. 막달라 마리아의 열정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던 그 날 아침에 된 사건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그 십자가 앞에 있었습니다.

그 비참한 모습을 다 쳐다보았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 다 물러갔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어머니 마리아는

아리마대 요셉의 도움을 받고 니고데모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을 무덤에 장례합니다.

그 장례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중요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덤 문을 봉하고 돌아가는 그 장면도 다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안식일이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가고 오는 것을 할 수 없어서 그대로 기다렸다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새벽 어두운 가운데 무덤을 향해 갑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날 새벽에 가서보니, 무덤이 열려 있습니다.

시신이 없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성경대로 보면 '그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무덤이 비어있더라고 사실을 알립니다.

그럴 때 베드로와 요한이 이 소식을 듣고 그냥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달려가는 그 장면도 자세히 보면, 요한이 좀 젊기 때문에 먼저 갔어요.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베드로가 먼저 들어가요. 들어가서 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벌써 거기 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는 거기서 빈 무덤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이거 어떻게 된 건가하고 돌아옵니다. 그 자리에 있지 않고 돌아 왔어요.

 

그런데 마리아는 안돌아 왔어요. 그 자리에 그냥 있는 거예요.

그냥 있으면서 '예수님의 시체라도 만나야겠다.'

그리고 시체에 기름을 부을 생각으로 심지어는 그렇게까지 말해요.

"어디에 있거든 말씀해 주세요.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예수님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동산지기인 줄 알고, 예수님이 거기에 서 계신 걸 못 알아보고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 내게 말해주세요'라고 예수님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이제 자기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마리아여" 합니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이름을 부릅니다.

"마리아여" 할 때에 그가 "랍오니여" 그리고 예수님께 인사를 드리게 됩니다.

 

여러분, 이 순간을 생각해 보세요.

이 여자가 이렇게 정말 끈덕지게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시체라도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체를 내가 가져가겠다고 하는 정도까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에 있든지 그걸 보아야겠다는 거예요.

꼭 만나야 하겠다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어딘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래 그렇게 간절하게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바로 이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마리아여."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습니다.

이 두 제자에 대한 이야기를 24장에서 쭉 읽다보면

저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만, 조금 화가 나곤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달리, 이 사람들은 지금 엠마오로 가는데, 그냥 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뿐 아니에요.

여인들이 말하기를 예수께서 부활하셨더라고 전하더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다 듣고도 엠마오로 갑니다.

 

가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는데 저들이 그분을 누군지 못 알아봅니다.

그리고 예수를 메시아로 알았는데,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어서 실망했다고,

나라를 회복하실 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비참하게 끝날 줄 몰랐다는 얘기를 합니다.

 

예수님이 그 뒤를 따라가면서 같이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마디가 무엇인가하면

"여인들이 무덤에 갔다가 예수의 시체를 못 봤고

그리고 부활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서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엠마오로 길을 걸어가고 있어요.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무덤이 비었다면 가보면 될 거 아니요?

왜 엠마오로 가느냐 말이요! 좀 더 적극적으로!

아니 시체가 없다면 가보면 될 거 아녜요.

무덤이 비었다면 빈 무덤이라도 가봐야겠다고 달려 갈 것이지

왜 엠마오로 가 버립니까! 이런 자세가 맘에 안 들어요.

 

그 생활태도가 맘에 안 들어요. 신앙도 그건 잘못된 신앙이에요.

여러분, 꼭 잊지 마세요. 비록 미련하고 부족해도 열정이 있어야 돼요.

무덤이 비었다면 내가 확인하겠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 도마, 그 의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마음에 들어요.

이 사람, '남 다 예수님 만나 보았다고 하지만 난 아니요.

나는 얼마나 비참하게 죽은 걸 알고 있어.

내가 그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야 믿겠다.' 그것도 괜찮은 거예요.

 

그의 확실하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자 보세요. 이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범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을 잘 아십니다.

그런데 그가 젊었을 때, 경험한 하나의 사건을 한평생 잊지 않고

자기 생활 철학으로 삼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가 아주 어렸을 때 그의 숙모께서 선물로 구두를 하나 사준다고 했어요.

고맙게 생각하고 숙모를 따라 갔어요.

제화점에 가서 구두를 주문하는데, 발 치수를 재고 다 한 후에 이제 한 가지 문제가 남았어요.

이 구두의 맨 앞을 사각으로 할 것이냐 동그랗게 할 것이냐, 이걸 결정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각이 좋을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동그란 것이 좋을 것 같고,

이럴까 저럴까 하다가 결정을 못해서

그러면 그냥 두고 며칠 후에 와서 결정을 하겠다고 하고선 돌아왔어요.

그리고서 며칠이 지나도록 결정을 못했어요.

 

그 후에 잊어버리고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그 제화점 점원을 만났어요.

만났더니 아니 왜 아직도 오지 않느냐고, 아직도 그 결정을 못해서 그런다고,

그럴 것 없으니 가보라고 다 만들어 놨더라고.

 

그래서 그 제화점에 가 봤더니 하나는 사각으로 만들고, 하나는 둥글게 그렇게 만들었더래요.

그 때 레이건이 중요한 것을 생각합니다.

 

'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결정한다.

내가 내 문제를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결정하고 그것을 내가 따라가야 한다.

그러면 나라는 존재는 없는 거다. 언제나 내가 결정하고 내가 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것이 레이건의 한평생을 사는 생활 철학이 됐다고 합니다.

 

여러분,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 왜 그런 정도에 머무는가하는 말이요.

무덤이 비었다면 가보면 될 거 아니요.

그거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별로 멀지도 않은데,

이걸 안 가보고 부활했다고 무덤이 비었다고들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런 희미한 사람들이 있나. 이게 잘못이란 말이에요.

 

, 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 갑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로 인해서 실망을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골방으로 지하실로 피했습니다. ?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 불똥이 자기에게 튈까봐요...

예수를 죽인 자들이 제자도 죽일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을 찾아 갔어요.

비었다니까 찾아가서 빈 무덤을 보고 돌아옵니다.

 

거기서 무엇인가 해답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그냥 의심하며 이상하게 생각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특별합니다.

빈 무덤을 보고 돌아와서 많은 사람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도

이상해서 다시 돌아갑니다. 다시 가서 무덤을 들여다봅니다.

거기서 천사(예수님)를 만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끝까지 확인하려 했습니다.

그 때에 이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만나 주십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마음이 감복된 것 같습니다.

"마리아여!" 하고 만나 주십니다.

그녀가 찾았던 것은 죽으신 예수요. 시체일 뿐입니다.

그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찾아 갔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이요, 애정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십니다. "마리아여." 만나 주십니다.

 

좀 더 나아가서 그 거룩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계시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신령한 몸을 그에게 보여 주십니다.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2.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그리고 오늘 본문에 모든 복음,

모든 성경의 핵심이 되는 십자가 사건의 핵심이 되는 내용이 여기에 나옵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하라(20:17)"

 

내가 십자가를 지므로 이제는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가 된다는

놀라운 복음입니다.

 

여러분,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될 때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에요.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체험하게 될 때에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요,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도 볼 수 있고,

나도 볼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한마디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하시고 아버지를 생각해요.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갈 것이다.

그러나 내 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느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철저하게 아버지, 그렇게 아버지 앞에 생명을 위탁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그 아버지가 확실함으로 이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가 곧 이제는 너희 아버지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게 뭡니까? 예수 믿는다는 걸 딱 한가지로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주기도문을 보세요. 주기도문을 다 읽어가도

그 중에 단 한 번도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아버지라는 개념 속에

모든 신앙 고백이 다 들어 있어요. 모든 신앙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가 아버지라는 걸 잊지 말아야 되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말씀하십니다.

 

 

3. 부활의 주님을 진정 만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죄인입니다. 어두운 과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 어쩌면 모든 사람보다 가장 불행했던 과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사랑했습니다.

단순한 마음으로 사랑했습니다. 단순하게 열정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그의 사랑을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승화시킵니다.

차원을 바꿔 주었습니다. 높은 차원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찾아 다녔습니다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만나 주십니다.

찾아가는 예수가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이름을 부르시는 바로 그 예수님을 깨닫게 됩니다.

 

마리아는 단순한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만

이제는 엄청난 사랑으로 승화되고 성화된 사랑으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노벨 수상자이기도 한 극작가인 유진 오닐(Eugene O'Neill)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쓴 책 가운데 나사로가 웃었다라고 하는 특별한 책이 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죽었다가 나흘 만에 살아난 이 나사로가

세상에 살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을까? 어디까지나 추리극 입니다. 생각을 해 봅니다.

'나사로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았을까?' 그걸 소설로 썼습니다.

 

이 소설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나사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요?

한번 죽어봤더니 죽음이 별거 아니거든요. 아시겠습니까?

죽음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도통한 사람이요,

바로 이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만나고저 했던 그리스도는 죽으신 그리스도요, 하나의 시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만난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요,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요,

영원한 그리스도였습니다.

 

여러분, 마리아가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순간,

그는 새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그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으로 바뀝니다.

만나고저 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를 나와 함께 하신 그리스도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의 첫 증인이 됩니다. 복음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실의에 빠진 저희들을 오늘도 불러주신 걸 감사하며

점점 희미해지는 저희들의 믿음을 온전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저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큰 기쁨을 얻고 새로운 생을 산 것 같이

우리도 주님을 만난 기쁨에,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기쁨에 사는 부활의 증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