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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문 뒤에 열린 문

LNCK 2016. 4. 18. 15:37

닫힌 문 뒤에 열린 문               16:6~15                 16.03.06설교녹취, 출처

 

도입

 

내 앞에 인생의 모든 문이 닫혔다고 느껴본 적이 있으신지요?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스러운 한 두 번의 사건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문이 막히는 그런 좌절, 실패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막으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축복하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런 경험속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신비로운 것은,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 그 순간에, 우리의 눈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 절망스런 순간에

우리 영혼에 눈이 뜨이고,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게 되고

그 상황을 보게 되고, 더 정확하게 보게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문을 막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로운 문을 여십니다.

 

▲때로 우리 인생은 깨어집니다. 세상은 깨어지는 것은 내다버립니다.

깨어진 그릇, 깨어진 기기는 못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깨뜨리심으로써,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깨어짐은 아름다움입니다.

우리가 깨어짐을 통해 하나님을 아름답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죠.

 

   주일날 예배드리는 많은 성도님들 가운데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성령님의 임재가운데 그 찬양의 깊이가 다르게 느껴지는 분은

   대개 보면 깨어짐을 경험한 분들입니다.

 

   과거에 한 때 인생에 막힌 문앞에 서 있었던 성도님들입니다.

   그러나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예배하며 찾는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열린 문을 예비하신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문을 닫으실 때는, 또다른 문을 열어놓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깨뜨리실 때는, 더 아름다운 인생을 예비하신줄 믿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요,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의 신비입니다.

 

 

◑본론/ 성령님의 인도에 민감했던 사도바울

 

사도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했던 지역(1차선교여행)을 다시 방문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2차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죠.

동역자 바나바와 함께 그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의견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전도여행을 했던 때에 함께 동행했던 마가요한이

버가에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어떤 이유이든지간에 아마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마가요한을 다시 선교팀에 합류시킬 것인가/말 것인가의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마가요한을 데리고 키프로스(구브로)섬으로 갔고,

바울은 실라 라는 새로운 동행자를 찾았고,

또한 루스드라에 가서 디모데라는 신실한 영적 아들도 만나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이별은, 답답하고 가슴아픈 일이고, 앞길이 막히는 일 같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통해서,

마가요한은 회복의 기회를 주시고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 같은 신실한 동역자를 만나게 되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전도여행 때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고 함께 하시는 역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전도여행 때는, 초기에는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1차때)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루스드라도 다시 방문합니다.

참 놀라운 일이죠.

한국남자들은 군대생활에 고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는데

바울은 자기가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루스드라로 다시 찾아갑니다.

그곳의 신자들이, 믿음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1차전도여행지역을 다시 되돌아다닌 이후에,

사도바울은 본격적인 두 번째 선교여행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막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허락지 않으신 것입니다.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터키 북쪽 지역을 다니다가, 비두니아(흑해 연안)으로 가려고 했는데,

길이 자꾸 막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막으셨다. 예수님의 영이 허락지 않으셨다.'

이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메시지는,

사도바울은 그 매순간 순간의 걸음을, 그저 자기가 계획해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대화 속에서 매 순간에 어느 도시를 다음에 가고,

어느 사역을 할 지를, 순간순간 성령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허락 속에서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막으셨다'는 표현의 구체적 내용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6

그런데 그 뒷 부분에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으셨다'는 표현을 통해서 볼 때, :7 

이것은 영적인/내적인 교통을 통해서, 허락지 않으신 것을 분별했던 것 같습니다.

 

비두니아로 가는 북쪽 길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을 것입니다.

길이 많았는데, 어떻게 막으셨는지요? 이것은 물리적으로 차단된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로마 군인들이 막은 것도 아니고, 사도바울의 건강에 어려움이 있어서 못 간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직후에 더 먼 길도 갔으니까요.

 

어떤 환경이나 상황적 문제이기 보다는, 바울에게 내적인 성령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이 방향이 아니구나' 하는 어떤 지시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차원의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간절한 기도, 계속적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분별력입니다.

 

우리는 보통 환경적 요인을 분석해서, 가장 이성적/상식적인 판단을 내리지만,

그런데 사도바울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도시들임에도 불구하고,

기도가운데 '성령님, 하나님 제가 이 도시를 가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라고

성령님과 나누는 대화속에서 그 여부를 결정하는

그런 차원의 기도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았다. 성령님께서 막으셨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평소에 그가 늘 그의 발걸음, 발걸음마다 예수님의 임재하심과 동행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관련글 : 땀흘리는 기도

 

평소에 성령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기도했을 때, 잘 들려오지 않는 것은,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아서이죠.

 

평범한 일상속에서, 그저 내 상식과 경험을 따라 살아갈 수도 있는 인생이지만,

늘 하나님께 묻고, 의지하고, 기도하고,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해 자기 하루의 삶을 주님께 의탁하고,

그 하루에 예정된 일과를 위해 미리 기도하고.. 큐티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하나님이 어떤 새로운 생각을 주실 때를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일을, 새롭게 계획을 바꾸어서 계획하게 되고,

전혀 만날 생각이 없었던 사람도, 만나는 스케줄을 잡게 되고,

이미 정해놓았던 계획을, 취소하기도 합니다. 기도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그렇게 합니다.

 

기도하던 중에 어떤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전화한번 해야 되겠다'는 소원이 생깁니다.

성령님 안에서 우리 삶의 일정이 계획되거나 바뀌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매순간 순간 성령님의 허락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몸의 순종'이 있을 때, 성령의 인도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삶이 우리에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여기에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내 감정 이전에, 내 생각 이전에, 말씀에 대한 순종이 항상 앞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미 분명히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

십계명을 통해 나타난 말씀, 산상수훈을 통해 나타난 말씀 등,

'복음을 땅끝까지 이르러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 등,

이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발걸음이 있을 때,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내가 이미 분명히 드러난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을 때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어렵습니다.

 

그런 말씀에 대한 순종은 전혀 없이, 그저 내 감정, 내 느낌, 내 직감 속에서

성령님의 뜻을 확인 받으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분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순종하는 삶이 있으면, 분별이 뒤따라 옵니다.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런데 앞서 12: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2절에 '분별'이 되려면, 1절에 '몸의 드림'이 먼저 되어져야 합니다.

혹은 둘은 동시에 같이 가는 것입니다.

 

'분별'은 열매이지요,

내가 먼저 행해야 되는 것은 '내 몸을 드림'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면

놀랍게도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된 마음만이 분별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자꾸 이것을 거꾸로 삽니다.

'하나님 제게 분별을 주세요. 그러면 제가 제 몸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분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게 내 욕심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뒤섞여서 분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내 몸을 드림/말씀에 순종이 제일 앞서 나갈 때

내가 변화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뜻이 분별이 되는 것입니다.

 

▲살전2:18절에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우리는 막히는 경우가 있을 때, 사탄이 막는지, 하나님이 막으시는지

분별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는데, 사탄이 막았다고 오해해서.. 막 뚫고 나가려는 때도 있고,

지금 사탄이 막은 건데, 하나님이 막으셨다고 보고.. 쉽게 포기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은, 12:1~2절입니다.

너희 몸을, 여기서 ''이라고 했습니다. '정신, 마음'이 아닙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 몸의 순종입니다.

 

우리는 분별이 되면, 그 다음에 순종하려고 그러는데요

그렇게 않습니다. 순종해야 그 다음에 분별이 되는 것입니다. 순서를 유의하십시오.

 

   여러분이 단기선교를 가 보시면, 예전에 잘 들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왜 그럴까요?

   일단 ''이 순종해서 가 있으니까, 분별이 잘 되는 것입니다.

 

   서울의 어려운 달동네에 가서 여러분의 몸을 한 번 드려보십시오.

   몸을 움직이는 것이 순종입니다.

   정신과 마음으로 아무리 고상한 묵상을 한다고 해서.. 그게 순종은 아닌 것입니다.

 

   몸이 움직여야 합니다. 손을 펴야 하고, 다리가 힘들어야 되고, 몸에 땀이 나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몸이 움직여서 순종하게 되면

   마음에 하나님의 뜻이 분별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도바울이 왜 이런 성령의 막으심을 체험했는가 하면,

그는, 요즘 차를 타고 다녀도 힘든 지역입니다. 길이 고불고불하고 산악도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힘든 지역을, 그 넓은 지역을 순종하며 다녔습니다.

이렇게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고 가면, 분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성령님의 막으심을 분별할 수 있을까?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하시는 분은, '몸의 순종'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 없이 철야기도를 밤새 하면서, '분별력을 제게 주십시오' 하면,

그 동기가 이기심이라서, 자기 자랑과 자기를 높임이라서 '나는 이런 쪽집게야'

그걸 구해도, 잘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기록된 말씀 앞에 '몸의 순종'으로 나아가면,

바울처럼, 성령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길이 아니다. 저 길로 나아가라' 그리고 사탄이 막는 것인지,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인지도 분별하게 됩니다.

 

'몸의 순종'이 없는 사람은 분별력이 없어서

자신에 대한 정당한 성령의 지적을, 또한 사탄의 지적으로 오해해서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말씀 앞에 엎드리고 순종하는 마음은 하나도 없이, 분별력만 갖기를 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때

-영적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게 될 줄 믿습니다.

 

▲바울은 비두니아(터기 북부, 흑해 연안)로 가기 원했지만

성령님이 길을 막으셔서, 드로아로 오게 되었어요. (터기 서부 해안)

 

우리는 대륙 너머 그리스가 우리 눈에는 보이지만, 드로아에서 보면 바다밖에 안 보입니다.

그러니 바다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드로아로 갈 계획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거기는 바다이고, 더 이상 갈 곳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다에 가로막힌 곳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의 계획에 없었던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그들이 홍해에 진친 것이 연상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인도가, 하필 막다른 골목인 홍해 바닷가로 인도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똑같은 상황입니다.

드로아로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왔는데,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것입니다.

바다 밖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막힌 문이 열린 문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 앞에 문을 막으심으로써, 새로운 문을 여십니다.

 

43장에,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

 

▲드로아에서 바울은 환상을 보게 되죠.

바다 건너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음성이었습니다.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확신하고, 즉시' 입니다.

11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확신함)이러라

 

'연기된 순종은 불순종이다' 라는 말이 있죠. '확신하고 즉시' 그들은 움직였습니다.

 

바울의 계획은, 소아시아에 집중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을 뛰어넘어 유럽으로 그들을 보내기 원하셨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내가 사는 지역, 우리 마을, 우리 나라..' 그 쪽만 바라보기 쉽습니다.

지역이기주의가 얼마나 심한지요.

어쩌면 바울의 마음속에도 소아시아가 자기 마음속에 더 강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 너머에 있는 그 유럽,

아무도 자기를 오라고 한 적이 없는데, 그는 환상속에 마게도냐 사람의 초청을 받고, 거기로 즉시 갔습니다.

 

▲저희 교회가 설립한 NGO 더 멋진 세상 BETTER WORLD

세네갈에 있는 본나바 지역에 들어갔습니다.

 

저희가 아는 지역도 아니고, 그런데 그 지역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거기는 사막입니다.

근처에 있는 작은 염전에서 소금을 퍼다가 팔아서 사는데, 소금이 한 트럭에 몇 달러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지역에 들어가게 된 이유가, 거기는 정통 이슬람도 아닌, 거의 민속적 이슬람입니다.

이슬람 지도자가 있지만, 중동 이슬람처럼 강력하지는 않고, 그저 민속종교 처럼 믿습니다.

 

거기 추장 바로 밑에 남동생이 그 종교지도자입니다. 그는 꾸란 경 같은 것을 들고 다니는데,

그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마을이 움직였습니다.

 

저희 선교사보다 원래 브라질 선교사 내외가 그곳에 먼저 들어갔습니다.

그 브라질 선교사가 들어가개 된 계기가, 마을 전체가 완전히 이슬람 지역인데요.

 

그 선교사가 딱 갔더니, 그 종교지도자가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 전에 자기 꿈에, 이 선교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생긴 사람이 그 마을에 실제로 찾아오니까,

'이 사람의 말은 무조건 들어라'

 

그래서 브라질 파울로 선교사가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고,

저희 ngo와 코이카가 협력해서 거기에 마을 회관, 보건소도 지어주고,

그 마을이 진짜 BETTER WORLD, BETTER VILLAGE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후부터 마을에 선교사들이 상주하게 되었고,

추장 아들이 한국에 와서 연수도 받고 가서 농촌 계발을 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한 마을이 점점 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말씀을 보면서, 그 파울로 선교사가 생각났습니다.

신비한 방법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일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도 한 번 바울과 같은 환상을 보고 싶습니다.' 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못 보신 분이 많은 것은, 순종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이습니다.

 

내 몸이 순종하는 자리에 있으면, 성령님의 인도와 지시가 보입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순종하는 자리로 가면, 환상도 보이고, 분별도 되고, 음성도 들립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은 없이, 내가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하려 하는 것은,

나를 증명하고, 나를 과시하려는 그러한 마음일 때가 많고,

그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는 거죠.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음성을 듣고, 그들이 즉시 순종했을 때

   11절에 그들은 '이틀'만에 드로아에서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행20:6절에 보면, 마게도냐에서 드로아까지 오는데, 닷새가 걸렸다고 했습니다.

 

   물론 순풍이 불어서 그런 것이지만, 계절적으로 순풍이 부는 계절이었는지 모르지만

   바울 일생이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였을 때, 그들이 탄 배가 정말 '순풍에 돛 단듯' 항해를 한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드디어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16: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었습니다.

여기서 '첫째'는 로마제국의 출발점이 되는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가 자신의 아버지 빌립 왕이 세운 빌립보에서부터 세계정복을 시작했기 때문이죠.

그 외에도 빌립보가 '첫 성'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내력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몇 번에 걸친 내전이 있었는데,

3차 내전 때,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가 대결해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합니다.

(이 전쟁이 빌립보 지경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도시에 이름에 빌립보가 붙여집니다.

이 도시가 로마제국의 출발지가 된 것으로 보는 거죠.

 

여기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출발점이 되었던 도시가,

이제 유럽 복음화의 출발점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이루어지는 현장에 가보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준비하시고 만나게 하신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 갔을 때, 그들은 평소에 익숙했던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회당입니다.

1차선교여행 때 보면,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서

그 회당에 정기적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함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 말은, 유대인 10명이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씀을 전할 무대가, 회중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된 거죠.

물론 회당이 없다고 바울이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늘 회당에 있던 남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선적 전략이었던 사도바울에게는,

큰 어려움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회당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으러 갔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하러 간 장소에서 만난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전도대상자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전도하려고 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 바울 일행이 안식일에 기도하려고

성문밖 강가로 갔는데, 거기에 있던 여인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저를 참된 신자로 여기신다면)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빌립보 교회의 출발은, 이 루디아의 집이었습니다.

그들의 '회당식 전도' 방법은 막혔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방법으로 길을 여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바울의 선교에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방향의 변화뿐 아니라

-회당에서, 가정으로.. 다시 말하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인지,

빌립보서와 다른 서신서를 읽어보면 압니다.

 

사도바울이 목회했던 교회들 중에 가장 큰 위로와, 가장 큰 격려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고린도서에,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면서, 빌립보 교회를 예를 듭니다.

 

'너희는 부자 교회이면서 진짜 연보를 안 하는 구나!

예루살렘 교회가 지금 기근에 빠져있는데, 너희 부자 고린도교회는 안 하는데

오히려 가장 연약한 마게도냐(빌립보)교회의 헌신을 보라.'

 

그뿐만 아니라 빌립보교회는, 사도바울이 가는 곳마다 후원했습니다.

바울의 원칙은 자비량선교이었지만,

그 원칙을 깨면서까지도 빌립보교회의 후원은 받았습니다. '이는 향기로운 제물이라.'

사람보고 하는 게 아니라, 진짜 하나님보고 드리는 것이므로 받겠다고 했습니다.

 

1장에 그들은 '나의 기쁨, 나의 자랑, 나의 면류관'이라 칭찬했습니다.

 

대개 서신서들을, 앞에 문제점들이 나오는 패턴을 보이는데,

고린도전서, 갈라디어서가 특히 그렇죠.

 

그런데 빌립보서는 칭찬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스도께서 내 증인이시다.‘

그런 아름다운 교회가 형성된 것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가는 곳마다 막으시고,

(회당 중심의) 방법도 막으시고

알지 못하는 곳으로 인도하셨는데,

 

그 유럽선교의 첫 문이 열리는 곳에서

루디아와 그 빌립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럽 전체를 복음화 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역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영어로 No way 말도 안 돼. 길어 없어 하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는 New way 새로운 길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인생의 길이 막혀서, 앞이 캄캄하고 눈물밖에 흐르지 않습니까?

여러분 더 눈물을 흘리시기 바랍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야, 새 길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 엎드리십시오. 성령님께 길을 기울이십시오. 순종을 다시 시작하십시오.

 

말씀 앞에 순종하기를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성령님의 허락이 떨어질 것입니다.

이 길은 막혔지만, 또 다른 길이 열려있다는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막힌 문 자체가, 열린 문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를 체험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걸어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인생에 문이 닫혀 답답하고 힘들고 고통스려울지라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고 준비하실 줄로 믿습니다.

말씀 앞에 순종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다시 한 번 우리 몸을 주앞에 드려 순종할 때

주께서 우리에게 분별력과 지혜를 주시고, 문을 열어주시고, 길을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