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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돌판을 깨뜨리다

LNCK 2016. 4. 13. 19:04

십계명 돌판을 깨뜨리다               32:15-35       16.04.10.스크랩, 출처

 

    


 

모세의 분노

 

 모세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분노한다는 것은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미성숙해보입니다.

자기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죄를 짓기 쉬운 상태가 분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형제에게 분노하거나(5:21-22) 형제를 미워하는(요일3:15) 것도

살인죄와 같이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분노가 나쁜가? 아닙니다. 사실 분노의 원조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는 자주 하나님의 심판을 분노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시편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7:11)

악에 대해서 견디지 못하는 의로움이 분노로 표출됩니다.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 나훔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1:2,6)


진노 분노 보복으로 가득 차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니느웨를 향하여 쏟아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분노합니다.

 

모세가 지금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을 정면에서 어기고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며 광란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모세는 하나님이 직접 친수로 쓰신 그 거룩한 십계명 돌판을 집어 던져 깨뜨려버렸습니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언약을 저버린 그들에게는, 이런 거룩한 돌판이 더 이상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불사르고 가루로 만들어 그 가루를 물에 타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일종의 저주 의식입니다.

우상을 향한 저주가 그들 몸속에 들어가 그대로 실현되게 만드는 의식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선 레위인들로 하여금 칼을 들고서, 자기 형제나 이웃을 망론하곤 우상숭배자들을 치게 합니다.

이 때문에 3천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무리 우상숭배 했다고 하여 그 많은 사람을 죽이냐며

현대인들이 가진 인도적 기준으로 성경을 보지 마십시오. 고대 사회에서는 비일비재했던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시의 문화를 따라서 악을 징계하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세의 분노는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하는 그런 분노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가 이스라엘을 살렸습니다.


하나님은 잔뜩 화가 나서 이스라엘을 다 치려고 하였습니다. 모세만 빼고 다 없애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았습니다.


매우 화가 나 있는데 누가 대신 화를 내면 나의 분노가 가라앉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이와 유사한 장면을 민수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또 우상을 숭배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 사람들이 염병으로 죽어갔습니다.


그 와중에도 우상의 풍습을 좇아 음행을 행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제사장 비느하스가 그 남녀를 창으로 찔러 죽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었고 하나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25:11)


하나님의 분노를 비느하스가 대신 터뜨렸고 이 때문에 더 큰 화를 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 질투로 번역된 단어가 젤롯으로

후에 예수님 시대에 로마에 대항하여 무력항쟁 했던 열심당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 분노하고 폭력을 행사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장사치들의 소굴이 되었을 때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장면을 매우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다.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셨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셨다. 상을 엎으셨다.”


이런 주님의 분노에 대해서 요한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2:17)

여기서도 젤롯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의 집이 장사치의 소굴이 되었는데

이 때문에 아무도 분노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더 아팠을 것입니다.


실상 분노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요, 이 사람 때문에 우리가 삽니다.

더 큰 심판을 막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의로운 분노라고 합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엉망이고 지도자들이 정말 엉터린데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까?

분노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자는 껄끄러운 사람들이 아니라, 실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자들입니다.

이들 때문에 우리가 삽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잘못되고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분노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나라를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정의로운 분노를 표출하는 자들이 많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그 민족은 심판을 면합니다.

새로운 발전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 416일은 세월호 2주기입니다. 304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사라진 날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배는 인양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정부가 진상규명을 막고 있는 현실입니다.

현 정부는 사고 대처를 잘못해서 엄중한 질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정부가 세월호 문제를 이념 논쟁화 하여 덮으려 합니다.

진상은 규명하지 말고 잊으라는 식으로 몰아갑니다.

이런 모습들이 정부가 사고대처의 잘못뿐만 아니라

더 큰 잘못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일반 청문회나 정치인 기자 회견은 지상파 방송 3개가 생방송으로 동시중계하면서

세월호 청문회는 생방송은커녕 언급조차하지 않습니다.

꽃다운 청춘들의 죽음을 위로하고 안전사회로 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데

세월호 문제가 정쟁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유가족들이 분노하고 이 아픔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이 소리를 시끄럽다고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들어야 우리 민족이 삽니다.

 

불편하고 답답할 때는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맞습니다. 화가 쌓이면 병이 됩니다.

소리를 질러야 화난 줄 알고 바꿀 것 아닙니까? 그것은 개인이나 사회나 마찬가지입니다.


몇 년 전에 주목 받았던 책으로 프랑스의 스테판 에셀이 쓴 분노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94세의 에셀이란 노인이 쓴 34 페이지 분량의 작은 책인데

프랑스에서 출간된 지 7 개월 만에 200만 부를 돌파했습니다.


지은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였는데

그 때의 경험을 기초로 요즘 세대를 향하여 분노할 것을 명령합니다.

레지스탕스란 말 자체가 저항한다는 의미인데 그 저항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습니다.


에셀은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에 분노하라고 말합니다.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벌어진 적은 없었다고 하며,

그런 사회에 대해서 분노하라고 말합니다.

돈을 쫓아 질주하는 경쟁 사회를 향하여 분노하라고 말합니다.

    

에셀은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라고 하며

이 무관심이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폭력투쟁으로 나서라는 말은 아닙니다.

에셀은 합법적이며 평화적인 봉기를 제시합니다.


이번 주 413일이 20대 국회의원 선거입니다.

선거독려 현수막에 보니 투표는 총알보다 강하다고 쓰여 있습니다.


예전에는 총과 칼로 자기 욕구를 표출하였는데 이제는 투표로 합니다.

투표로 여러분의 분노를 보여주십시오.

광장에서 외치는 것보다 더 강한 소리를 내는 것이 투표입니다.

 


깨어진 십계명 돌판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깨뜨린 것은 계약의 파기를 뜻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복주시겠다는 것이 계약의 내용입니다.


이 계약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을 지킬 때 계약은 성립이 됩니다.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24:7) 시내 산에서 그런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함으로 말씀을 정면에서 위배했으니 이 계약은 깨진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해줄 의무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 계약 파기의 문제는,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악한 길로 갈 때

항상 들고 나오던 위협의 카드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1:9)


우상숭배의 길을 가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 파기 선언입니다.

예레미야에게는 계약의 파기 선언 후 다시 새계약을 맺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31:31-32)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한 대가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시지 않으니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언약을 준수할 때만이 유효합니다. 이스라엘이 수도 없이 계약을 파기하였지만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가요? 나는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 살아도 괜찮은가요?

우리나라의 어떤 이단 중에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며

죄에 대한 고백도 더 이상 불필요하다고 하는 이단도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칼빈의 장로교 교리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자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입니다.

그렇게 예정 받은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결국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예정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믿음을 유지하고 있으면 우리는 예정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믿다가도 어느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정 받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 예정론은 찬양의 고백으로만 받아들이십시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끝까지 붙잡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산상수훈의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 했다는 것은 그의 진면목은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현상적으로는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는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유지하는데 매우 필요합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는 사도 바울의 말씀에도 주의하십시오.


구원은 우리 손아귀에 쥐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삼가고 조심해서 이루어가야 합니다.

성결이나 행함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이미 얻은 구원을 유지하는 데는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 관계를 청산하자고 나올지 모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이런 신실한 믿음이나 행함이 필요하지만 이 때문에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받아들이십니다. 모세에게 다시 십계명 돌판을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시 관계가 회복되기까지의 대가와 시간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죄의 대가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책임이 물어집니다.


오늘 말씀에서 반복해서 말씀합니다.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33)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34)


또한 하나님이 곧바로 용서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올라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34절입니다.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333절입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꼴도 보기 싫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서 출애굽기 말씀을 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 바로 임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한동안은 소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다시 돌아오지만 한동안 떠나계셨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때 이스라엘 백성이 맞닥뜨렸던 현실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떠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망해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그대로 끝인가? 아닙니다. 그들이 붙잡았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지금은 떠나계시지만 다시 돌아오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 낙성식에서 했던 기도입니다.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성전에서 주께 기도하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왕상8:33-34)

 

하나님은 돌이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다시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3:22-23)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돌이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