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갈릴리에서 만나자! 막16:1-8, 약2:1-9 16.04.10 설교스크랩, 출처
◑마가복음은 "다시 갈릴리에서 만나자"로 끝을 맺습니다.
마가복음의 또 다른 이름은 원시 복음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가장 많은 유산을 가진 수제자였습니다.
마가는 바로 베드로의 제자였습니다. 마가는 선생 베드로부터 들었던
생생한 이야기를 복음서에 그대로 담아놓았습니다.
이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마태, 누가, 요한은 마가복음을 기초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처음 복음서를 기록했던 마가는 예수 부활을
아주 짧고 급박한 메시지로 전달하고 갑작스럽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
마가복음에 의하면 갈릴리의 여인들이 안식일 다음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는데
시체도,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도 만나지 못하고, 단지 천사가 일러주는 메시지만 듣게 됩니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이미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는다. 보라 여기가 빈 무덤이다. 그대들은 지금 제자들에게 가서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그는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거기서 만나자.” 16:8
이것이 마가복음의 결론입니다.
▲그 뒤에 계속 되는 8절부터 20절까지는 꺾음 괄호로 표시했습니다.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구약성경의 원본은 없습니다. 아마 원본이 있었다면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귀중하게 떠받들 것 같아
하나님께서 일부러 없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여러 개의 사본을 맞추어서 오늘 우리가 보는 성경이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성경 중에 가장 권위 있는 사본은 사해사본이고,
신약성경의 사본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본은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시내산 사본입니다.
이 두 사본에는 마가복음이 16장 8절로 말씀을 끝맺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의 마지막 결론이 “갈릴리에서 만나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합니다.
마태는 빈 무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빈 무덤 안에서 곱게 접혀있던 수의가 예수가 부활했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예수 부활을 증거 합니다.
다른 복음서처럼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요,
과거에 있었던 한 사건으로써 부활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마가는 아주 역동적으로 "지금 갈릴리에 가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리고 오는 세대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었듯이
오늘 우리도 갈릴리로 가면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죽음에서 실제로 살아나신 곳이 예루살렘 아닙니까?
실의에 빠져 있는 제자들이 머물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만나자고 했다면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감동이 훨씬 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왜 멀리 떨어져 있는 갈릴리에서 가서 만나자고 말씀하시 것일까요?
사실 예루살렘은 겉으로만 성전의 도시이지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곳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 야합하여 하나님도 팔아버리고 정의도 짓밟아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엄중하게 심판하는 것이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 야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정치 종교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죽이는 집단입니다.
마가는 다른 어떤 복음서 기자보다 마지막 일주일을 아주 치밀하게 조직적으로 요일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에
그 어느 한 날도 성전의 도시 예루살렘에 하루도 주무시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셨다가 저녁에는 베다니와 벳바게로 돌아가셔서 그 곳에서 주무시고
다음 날 아침에 올라오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단 하루 밤도 주무시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억울함과 분노에 가득 차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예루살렘 어디에서 만나자'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아하 이제는 예수께서 복수하기 위해 모이라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은 대결과 갈등의 장소였지 화해와 통합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굳이 먼 장소인 갈릴리에서 만자자고 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갈릴리는 어떤 곳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렇게 급하게 갈릴리로 가셨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셨을까요?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공생애 시절을 대부분 보낸 곳입니다.
이곳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갈릴리 호수 주변으로 아름다운 경치와 자연은 있지만
백성들의 삶은 눈물 골짜기를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곡창지대였던 갈릴리는 로마사람들에게 곡식을 수탈당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랴' 했겠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예수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많은 영향을 준 일본작가 엔도 슈사쿠는
갈릴리의 아름다운 자연과 대비되는 백성들의 삶을 보며 아파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잘 그린 작가로 유명합니다.
엔도 슈사쿠는 두 가지 유언을 남겼습니다.
하나는 내가 죽거든 하나님 앞에서 인간성을 깊이를 바라본 두 권의 책
“깊은 강”과 “침묵”을 관에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쓰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는 너무도 푸릅니다.”
이 묘비명은 갈릴리 바다를 바라보며 사람들을 바라본 예수님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는 너무도 푸릅니다.”
말 속에는 예수님의 애환과 눈물과 사랑이 다 들어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바로 이곳에서 제자들을 처음 만났고,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연습하며 3년의 공생애 살았습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장소입니다. 예수님과 관계가 처음 맺어진 곳입니다.
사랑과 복종, 평화만이 지배하던 곳입니다.
그곳은 대립, 분열, 싸움 이전의 장소이며 제자들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첫 사랑의 장소에서 그의 제자들과 재회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도 여간 낭만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마가복음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 보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나 서신서를 보더라도, 제자들이 예루살렘이나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을 향해서
복수하기 위해 진격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달려가신 갈릴리 버림받은 땅,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이 서려 있는 땅 갈릴리가
유대와 로마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고,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를 통합하는 가교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세상을 치유하는 심장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어떤 선교 단체에서는 슬로건을 Back to the Jerusalem 이라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셨고,
사도들의 발자취를 기록한 사도행전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고 말합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땅 끝으로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땅 끝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갈릴리라 말할 수 있겠지요. *새로운 관점입니다.
마태복음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마가는 종으로 오신 메시야에게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고난 받는 메시야, 섬김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찾아간 곳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가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마가는 거침없이 그리고 아주 단호하고 분명하게 갈릴리에서 만날 수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마가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고 한다면 종교의 도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차별받고 무시 받는 갈릴리로 가야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마가는 지금도 갈릴리에 가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용
이런 신앙고백 아래에 우리 교회의 이름을 '갈릴리교회'라고 지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창립 초기부터 교회가 성공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이 좋은 장소,
괜찮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노동자의 눈물이 있는 곳, 구로공단 한복판을 한국의 갈릴리, 서울의 갈릴리,
오늘의 갈릴리라 생각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바다는 너무도 푸른 노동자의 심장 한복판에 갈릴리교회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차별 받고 무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차별 받는 사람들을 통해서 화해와 평화의 다리를 놓아 푸른 갈릴리를 만들겠다는 것이
우리의 꿈이요,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은 머리로만 생각하는 이상이 아니라 몸으로, 삶으로 살아야 된다는
마음으로 주님처럼 검소한 삶으로 이웃을 위해 나누고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목수로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사셨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난한 사람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가난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아니고는 자신의 존재감을 찾을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이 아니고는 위로를 받을 때가 없는 사람,
하나님이 아니고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하더라도
이 마음을 품고 살아야 갈릴리 예수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구체적으로 가난한 사람과 나눔이 있어야 갈릴리 성도요, 예수 안에서 가족 된 사람입니다.
바로 이 정신으로 지난 30년을 갈릴리교회는 달려왔습니다.
문제는 옛날에는 갈릴리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습니다.
닭장 같은 작업 현장에 갇혀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노동자의 아픔을 보면서
'바로 이곳이 갈릴리구나!' 하면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갈릴리가 명백하게 보였습니다.
맞벌이 일하러 나간 부부가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벌집에 아이를 방안에 가두어 두고
먹을 것을 넣어두고 일하러 나갔습니다. 이 벌집이 불에 타면서 아이가 죽었습니다.
이때 '이 아이의 현실이 갈릴리이구나!' 하면서 어린이집을 시작했습니다. 갈릴리가 명백하게 보였습니다.
또한 이주노동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려도 대변해 주는 사람 없고, 임금을 받지 못해도 누군가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기계취급 받았습니다.
이때 이주 노동자의 현실이 갈릴리구나! 하면서 이주민선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저들의 아픔을 함께 고민하고 나누어 짊어졌습니다.
이주노동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연상하면서 말입니다. 갈릴리가 명백하게 보였습니다.
▲문제는 옛날의 갈릴리는 이렇게 눈에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갈릴리는 눈에 잘 띠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부활한 예수를 찾으려 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늘의 갈릴리라는 현장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의 현장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부활한 예수를 갈릴리에서 만나겠다는 사람들에게 현장은 생명입니다.
현장은 정체성입니다. 현장을 잃어버리면 입만 남습니다. 교조주의가 딴 것이 아닙니다.
현장을 잃어버리고 말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갈릴리 교회의 담임목사인 저의 가장 큰 과제가
오늘의 갈릴리 현장을 찾아내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옛날에 선명하게 보였던 갈릴리 현장을 어떻게 다시 찾아야 합니까?
우리가 오늘의 갈릴리를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수년전에 제가 자랐던 고향을 찾아갔습니다.
저를 키워주었던 시냇가도, 옛 동산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내 아버지를 묻었던 선산도 다 사라지고 아파트단지만 남아있었습니다.
어디에서도 고향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어야 고향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 날 텐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씁쓸한 마음으로 ‘세상 많이 변했네!’ 하면서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몰라보게 변한 고향 앞에 서 있는 저 역시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자신이 변한 줄도 모르고 고향산천만큼은 변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 갈릴리도 변했습니다. 구로구청 앞에 있던 갈릴리가 아니라 신도림 갈릴리로 변했습니다.
구성원도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갈릴리도 변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자신도 변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고향산천만큼은 그대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처럼 말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장소가 변하고 구성원이 변한 가운데서도
우리가 찾아가고 지켜야 할 갈릴리 현장은 과연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찾아가야 할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바다는 너무도 푸른 곳은 어디입니까?
▲갈등과 대립의 현장이 우리가 다시 찾아가야 할 갈릴리입니다.
갈등과 대립으로 인간은 이토록 아파하고 있습니다.
힘 있는 자는 앞에서 전쟁 하고, 힘없는 자는 뒤에서 테러를 가합니다.
이것은 비단 서방 국가와 이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갈등과 대립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런 갈등과 대립 속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도 없고, 가슴이 시리토록 아픔만 남을 뿐입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어떠합니까? 젊은이들이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3포 세대라는 말을 등장시켰습니다.
여기서 더 나가 5포, 7포, 9포 세대를 말까지 나왔습니다.
이 정도만 아닙니다. 자신의 조국을 ‘지옥 불 반도,’‘헬 조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이러한 헬 조선의 불안과 공포에 사로 잡혀 무능력과 무기력으로 탈진하여
점점 일할 의욕을 삶의 의욕을 상실하는 정말 지옥과 같은
헬 조선의 상황으로 추락하여 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젊은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가진 자들은 가진 자들만을 위한 리그를 만들고,
배운 자들은 배운 자들만을 위한 리그를 만들고, 금수저는 금수저만을 위한 리그를 만들고 있습니다.
차별을 아예 정당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 짓는 것이다.”고 경고 하고 있습니다.
갈릴리는 차별 받는 땅이었습니다.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차별 받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무시당하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존재감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차별과 무시가 있는 곳에 그 어떤 차별도 없이 사랑으로 찾아가신 것입니다.
차별을 평화로 만들어내는 곳이 갈릴리입니다.
그런데 갈릴리의 이름으로 사람 차별하면 정말로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길은 너와 나 사이, 하나님과 나 사이가 이 대립성에서 해방되어
다시금 화해와 통합을 이루는 길 밖에 없습니다.
무덤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처럼, 대결의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처럼,
싸움의 현장에서, 미워하는 증오의 현실에서, 대립과 갈등의 구조 속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대립과 갈등의 현장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씀하십니다.
사랑과 이해와 평화가 지배했던 장소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체념과 좌절 속에서 죽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증오 때문에 이웃과 등진 사람들에게,
예수님과의 관계가 옛날 같지 않고 서먹서먹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지금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갈릴리를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좌절된 너와 나, 대결하고 있는 너와 내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갈릴리를 알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거기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차별 받고 있는 갈릴리로 가고 계십니다.
주님이 아니면 존재감을 찾을 수 없는 갈릴리로 가고 계십니다.
우리도 바로 이곳에서 화해와 평화로 서로 만나자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다시 갈릴리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만났던 곳입니다. 첫 사랑이 간직된 장소입니다.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는 산산조각 난 상태입니다.
한 명의 제자는 은 30에 눈이 멀어 스승을 팔아넘겼습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거든 영의정, 좌의정 시켜 달라.”고 하다가 야반도주 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의 십자가 현장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첫 사랑이 다 깨어졌습니다.
비록 주님께서 부활하셨지만 첫 사랑, 기본을 회복하지 않고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본은 무엇입니까? 분명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입니다.
특별한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본이 다져지지 않으면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인간은 이토록 아픈데 바다는 너무도 푸른 갈릴리로 먼저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씀하십니다.
차별과 무시로 가슴 아픈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 갈릴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갈릴리 사람들은 돈으로 사람 차별하지 않고,
지식으로 사람 무시하지 않고, 옷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마음으로 차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화해와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또한 첫 사랑을 간직하고 기본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시자마자 갈릴리로 달려가셨습니다.
인간은 이토록 아픈데 바다는 너무도 푸른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푸른 바다와 같은 사람이 이토록 아파하는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차별로 무시로 존재감도 잃어버리고 꿈도 희망도 잃어버린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가 바로 그곳에 있게 하옵소서!
어떤 인간의 조건으로 사람 차별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만났던 첫 사랑을 간직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와 삶으로 푸른 바다와 같은 갈릴리를 만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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