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갈5:24, 롬9:31~32, 16.02.14 출처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 구원 받은 성도
▲얼마 전에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장면을 TV에서 보았습니다.
이북에서 ‘잠깐 나갔다 돌아오겠다'고 집을 나갔는데,
그는 결혼 6개월된 신혼의 남자 신랑이었습니다.
그가 집을 나가서 의용군에 끌려가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히게 되어서, 그 후 남한에 남게 되었지요. 이제 대한민국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 신혼부부가 60년이 지난 후에 이산가족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 아내에게 임신 3개월된 아이가 있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헤어진지 60년 후에 이산가족 상봉을 해서 만났는데
할머니는 이북에 남아서 유복자를 키우고 살았는데,
서로 결혼했는지 확인을 하더라고요.
근데 할머니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유복자를 키우며 홀로 살았고
할아버지는 남한에서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갖고 살다가
이산가족 상봉으로 두 분이 만나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하는 얘기가,
"나는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비록 남한에 내려와서 가정을 갖고 살았지만
그러나 북한에 남겨두고 온 부인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60년만에 만나고 나니까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도 역시 마찬가지로 "나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굉장히 제가 영감을 받았습니다.
▲혹시 여기 설교를 들으시는 성도님들 가운데
‘나는 오늘 죽어도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나는 이 새벽기도 시간에 하나님이 딱 데려가셔도 나는 여한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시는 분 계십니까?
왜요?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분으로 인해서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고, 더 가질 것이 전혀 없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 한번 손들어 보실까요?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분!
예, 두 분이 손 드셨습니다. 그 두 분만 확실히 구원받으신 것 같은데요.
다른 분 혹시 손을 못 드셨으면,
아직도 세상에 미련이 많으신 거죠?
정녕 구원받은 성도는 ‘나는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부르소서.’ 라는 고백이
24시간 내내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구원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고,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런 진정한 고백을 드릴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부터 ‘왜 지금 죽어도, 혹은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지’
그것을 제가 오늘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하박국을 읽어보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나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이 얘기는 무슨 얘기냐면, '나는 세상에서 미래의 소망이라는 게 없습니다.
왜냐면 소망이 다 끊어져 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니깐 사업을 해도, 무엇을 해도, 앞으로 잘 될 것이 전혀 없는, 소망이 없는
그런 사람의 모습을 설명하는데요..
그러면 뭐 은행에 잔고라도 좀 있어야 되잖아요?
앞으로 사업을 해서 잘 될 것도 전혀 없고,
은행에 잔고도 없고, 집에 먹을 것도 전혀 없고,
지갑은 텅텅 비어있고, 인생으로 말하면 영락없이 루저loser인데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야, 이 세상에서 완전 루저와
그리고 미래의 소망이 없는 사람. 이 사람에게 정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셨구나!' 생각했습니다.
근데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게, 정말 앞으로 잘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소망이 우리 앞에 있고
그리고 은행잔고가 두둑하게 있고, 우리 지갑이 퉁퉁하게 차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누가 못하겠어요? 못할 사람 아무도 없죠.
▲욥이 잔치를 하고난 다음에 자식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렸고,
그래서 사단이 가서 하나님께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왜 욥이 하나님을 그렇게 잘 섬기는지 아세요?
하나님이 너무 잘 해주시니까,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길 수밖에 없잖습니까.”
이렇게 사단이 하나님께 욥에 대해서 고소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다 끊어졌을 때, 아무것도 내게 존재하지 않을 때
‘주님은 이 땅에 속한 그 무엇보다 내게 더 크시고, 더 위대하시고, 더 훌륭한 유산이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구원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참으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줄 믿습니다.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 구원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비록 좋은 일이 생기지 않더라도 범사에 감사해야.. 구원 받은 사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제 사는 것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사는 것이다”
현재 상황이 어찌할지라도, 사업이 망할지라도, 자녀가 병들지라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어떤 일이 내게 있다고 할지라도,
데살로니가전서에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런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렇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가 되십니까/안 되십니까?
좋은 일이 막 생기면 감사가 되잖아요, 그렇죠?
기뻐하고, 기도도 술술 잘 되잖아요, 그렇죠?
근데 좋은 일이라고는 전혀 없는데, 그때에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그럴 수 있는가요?
이것이 정말 우리에게 문제인데,
그런데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좋지 않은 일들이 나한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내게 아무 동요도 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는 주님 한분만으로 인해서 완전히 행복한 삶이다.
나는 정말 주님 한분만으로 인해서 완전히 즐겁다. 감사하다."
이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과 연합된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비바람과 풍파와 눈보라가 친다고 할지라도
주님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까?
예. 이렇게 주님과의 연합을 좇아가기를 원하는 분.
주님과 연합되기를 원하시는 분은
오늘 아침 저에게 귀를 기울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구원으로 부르신 목적 – 그리스도와 연합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그 택함 받은 백성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연합으로 데려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내 행복을 위해서
이 땅에서 정말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살면서 영광을 누리다가
때가 되어 하늘로 오라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함으로 불렀고,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불렀고,
영생으로 불렀다고 믿습니까?
근데 우리가 길을 잃어버리면
'이 땅에서 좀 그래도 잘살아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이 땅에서 내가 좀 잘 되어야 그래도 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얘기를 할수 있지,. 그렇지 않은가?'
라고 우리가 오해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거룩함으로 불렀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불렀고, 영생으로 불렀기 때문에
주님이 택한 그 자녀는, 하나님의 손안에 의해서 붙잡혀가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덫에 걸려 살고 있구나.'
아마존에는 들짐승이 많은데, 그 들짐승을 다 덫으로 잡아서 먹어요.
호랑이도 먹어요. 원숭이는 최고 맛있는 고기라서
손님이 오면 최고 좋은 고기로 원숭이를 요리해서 대접하거든요.
그래서 제 뱃속에 원숭이가 몇 마리나 들어있나 생각해보니까
제 뱃속에 원숭이가 한 24마리 쯤은 들어가 있을 것 같아요.
근데 대개는 덫을 이용해서 동물을 잡거든요.
원숭이가 지나가는 길에다가 덫을 놓는다던지
또는 아마존에 표범이 많은데, 그 표범이 지나가는 길에,
표범이 발자국을 남기고 가잖아요.
그럼 거기에다 땅을 깊이 파고 나뭇가지로 덮어서 덫을 놓는데
그러면 원숭이나 호랑이나 그 덫에 걸리더라고요.
한번 덫에 걸리면 이미 사람에게 잡힌 거죠.
절대 못 빠져 나갑니다.
근데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녀라면
하나님의 덫에 걸려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하나님의 잔인한 사랑에 의해서, 빼도박도 못하는 사랑에 의해서
주님과 연합으로 가는 길을 이미 출발했는데
근데 어떤 사람은, 기쁘게 그 길을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옛날 한국에 소에 코뚜레를 끼워서 데리고 갔잖아요.
그 상태로 밭을 갈고 했지요. 그렇게 힘들고 괴롭게 그 길을 갑니다.
근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거룩으로, 연합으로, 영생으로 불렀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덫에 걸려서 진행 중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하시면서
뻗대지 말고 그냥 기쁨으로 가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근데 이 연합으로 가는 길에는, 성경이 유일하게 지침서인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은 뭐 어떤 사람이 들려주는 예언이라든지 환상이라든지
그런 신비적인 것들을 좋아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성경이라는
빼도박도 못할 만큼의 완전한 지침서를 주시면서
이 성경속에서 ‘하나님을 네 몸보다 더, 너보다 더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이 두 개의 계명가운데서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명의 동반자를 붙여주시는데
그 두 명의 동반자가, 최고로 우리를 도와주는 동반자입니다.
혹시 결혼하신 분들은, 남편이나 아내가
내 최고의 동반자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내 이상형과 만나서 결혼하셨습니까?
근데 그런 이상형과 결혼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를 베푸신것인지, 여러분 믿습니까?
이상형과 결혼한다고 하는 건요, 더 이상 부딪혀서 깨질 일이 없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이상형이 아닌 정반대의 사람. 그 반대의 사람이
사실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주는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이 여러분 옆에 세우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연합으로 가는 길의 두 동반자
이 주님과 연합의 길을 잘 가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 동반자를 주셨는데
그 동반자가 <자기 부인>과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 과 ‘행복’ 이런 두 명의 동반자를 주셨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영광과 행복!
정말 24시간 내내, 365일 내내 영광과 행복이 나와 동반한다면
정말 인생을 살아 볼 맛이 나지 않겠어요?
근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부인>과 <십자가>. 듣기만 해도 끔찍하잖아요.
근데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바로,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체험할 수 있는
최고로 좋은 도우미로, 여러분 옆에 두셨다고 하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근데 성경을 보면, 제자가 되는 조건을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계속 말씀하셨는데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잖아요.
근데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영광과 행복이라고 하는 동반자가 아니라
자기부인과 십자가라고 하는 동반자를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여러분 생각해 보신적 있으세요?
왜 이렇게 내가 말로 들어도 끔찍한, 내가 만나면 진짜 정나미가 딱 떨어지는
그런 동반자를 우리에게 주시고,
그 동반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오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우리가 다 죄 속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계획하는 것도 다 악하기 때문에
그 악이 끊어지기 위해서는, 그 죄가 끊어지기 위해서는,
영광과 행복은 그 죄와 악을 더 증가시켜주고
자기부인과 십자가는 그 악을 끊어주기 때문입니다.
근데 이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통해서만
내 자아가 완전히 물처럼 쏟아져야만 거룩함이 가능하고
연합이 가능하고, 영생으로 가는 길이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동반자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이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통해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통해서 못 박고
주님께 오라고 이렇게 부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조건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있는 것이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믿습니까? 예.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근데 우리 생각에는 늘, 우리에게 좋은 것은 축복이고
우리에게 싫은 것은 환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눈에 좋은 것들, 즉 사업이 그냥 일취월장한다든지 그러면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데, 뭐 암에 걸렸다든지,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더니 치료가 불가능한 병에 걸렸다..
그러면 우리는 감사가 안 나옵니다.
근데 누가 축복과 저주를 정해놓는가요, 누가 그걸 결정합니까?
하나님이 우리 눈에 좋은 것은 축복이고, 우리 눈에 나쁜 것은 저주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신약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누가 이렇게 축복과 저주를 나누고 있습니까?
누가 이 축복과 저주를 규정하고 나누고 있습니까?
내가 나누죠. 내가 규정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이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성경은 '너희는 마귀에게서 났다'고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그랬잖아요.
그런 사람이 규정하는 축복과 저주, 즉 오복 개념이 축복과 저주는.. 애당초 틀린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유대인)이 '마귀의 자손'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면
우리는 유대인보다 덜 거룩합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율법이라도 계속해서 그런 걸 갖고 있었지만,
우린 그것도 안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짜 마귀 왕으로부터 태어남을 입은 존재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이 선악과를 먹은 그 피가 우리속에 흘러내리고 있잖아요.
그 선악과를 먹은 사람의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이 뭐겠어요?
내가 좋은 것은 축복이고, 내가 싫은 건 저주라고
내가 판단을 내리는 그 판단이 얼마나 가관인가요.
하나님 보시기에 그 판단을 어떻게 보시겠어요?
그래서 제가 늘 사람들한테 무슨 얘기를 하냐면,
‘세상이 말하는 가치관을 "뒤집어 놓고 보면" 주님이 딱 나타나시는데
세상이 말하는 진짜. 그리고 하나님이 말하시는 진짜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이 정말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잘되면, 누가 그때 기뻐하겠어요?
본인들이 기뻐하고, 가족들이 기뻐하겠죠.
이 교회가 이 지역에서 막 차고 넘쳐서 그냥 1만 명, 2만 명,
뉴저지 최대 한인교회가 된다 그러면, 누가 제일 기뻐하겠어요?
목사님이 제일 기뻐요. 그리고 교인들의 어깨가 (자부심이) 딱 올라가잖아요.
그런데 다른 교회 교인들은, GFC교회가 막 부흥하고, 최대 교회라고 그럴 때
기뻐하겠어요/안 기뻐하겠어요?
다른 교회 목사님들이 기뻐하겠어요/안 기뻐하겠어요?
왜 안 기뻐하겠어요? 내 교회 아니니깐,
내 교회 교인들이 그 교회로 몰려가니까 싫어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업이 잘 되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은 기뻐하는데,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자기는, 남들이야 죽든 말든 성공하고 잘 되기를 원하고,
또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지 못하는.. 죄인들입니다.
그렇게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 생각하는 가치관이란,
'내 눈에 좋은 것은 축복이고, 내 눈에 싫은 것은 저주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뒤집어서 봐야만 주님이 진짜 나타나는데
그 뒤집어서 보는 주님은, 자기부인과 십자가가 없으면 주님이 안 나타나세요.
그냥 죄인의 가치관으로는, 주님이 안 나타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좋은지도 모르고,
그냥 내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날마다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날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게 뭔지 아세요?
어제 일을 다 잊어버리고, 오늘 내가 처한 상황이 무엇이냐,
오늘 처한 상황이, 내가 정말 빚쟁이들에게 시달릴지도 모르고
그리고 내가 오늘 만나는 이 상황이, 정말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닌데
이 상황을, 주님이 내게 주신 좋은 것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가장 하나님이 내게 최선으로 주신 상황이 오늘 하루다.' 라고 받아들이고
그리고 내일을 주님께 의탁하는 것이
매일 기쁘게 십자가를 지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 대해 절망하라고 고난을 주십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세상에 절망하라고 그랬어요. ‘세상을 향해서 절망을 좀 해라.’
그래서 세상에 절망을 하도록 우리를 데려가시는 방법이
크고 작은 고난을 매일 주시는 거예요.
크고 작은 고난을 매일 주셔서 ‘세상에 절망하고 하나님을 좀 바라보아라.’
그런데 세상에서 너무 잘 되면, 하나님 바라볼 사람 있어요/없어요?
세상이 너무 행복한데, 하나님 바라보고 싶겠어요?
세상에 절망을 해야 하나님이 보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미 주님과의 연합에 들어간 사람은요.
고난이 오는 것이 내게 큰 은총인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연합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고난이 오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죠.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만났잖아요.
사업이 망하고, 암에 걸리고, 치료가 불가능한 병에 걸리잖아요. 그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때 우리가 반응하는 것이 하나님이 섭섭한 거잖아요. 그렇죠?
하나님이 섭섭하게 여겨질 때가 많이 있어요.
좀 정직해 보세요. 하나님이 섭섭할 때가 많잖아요.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다고,
내가 사기를 쳤나, 살인을 했나, 강도질을 했나,
내가 무슨 삶을 그렇게 잘못 살았다고, 내게 진짜 합당하지 않은 고난을 이렇게 내게 계속 허락하시는가...’
근데 그렇게 내 속에 있는 걸 쏟아놓는 것이
그렇게 쏟아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법인 것을
영의 눈을 여시고 보셔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고난이 올 때, 우리 약함이 드러나고, 악함이 막 솟구쳐 나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주인으로 생각하고 산 것이 아니라
주님을 내 종으로 생각하고, 필요할 때 나를 좀 도와주세요.
사업 잘 되게 해주시고, 자식 잘되게 해주시고, 그리고 건강하게 해주시고...
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들이 내 좋은 일을 구하잖아요.
‘하나님, 내가 원할 때, 필요할 때, 항상 도와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들이
바로 하나님을 우리가 종처럼 필요할 때 부리는, 알라딘의 마술램프처럼
하나님을 우리가 내 소원대로 이용하고 싶어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하고 그런 고난들을 거절하는데
그때 우리는 내속에 선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을,
로마서가 우리에게 잘 말해주지 않습니까? 이 땅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그런데 그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할 때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의인인데... 나는 교회 나와서 그래서 많이 변했는데.'
라고 우리가 생각을 합니다.
조금 더 지나면 제가 설명을 하겠지만,
의인이라고 생각... 은혜가 막 올 때는 내가 의인이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교회 와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그럴 때에는요.
그러다가 문제에 딱 부딪히면 그때 속에서 올라오는 쓴 뿌리가
그냥 여러분 얼굴을 장악하잖아요. 여러분을 장악할 때,
그때 의인이었던 사람이, 죄인으로 그냥 얼굴이 험상궃게 바뀌잖아요.
근데 그런 것들이 "내가 바로 주님을 살해한 죄인입니다.
로마의 군병이 주님을 죽인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지금도 죽이고 또 죽이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나님께 그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 할 몸이 바로 난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도 여기 달려 죽어야 되는데, 안 죽이시고 살려두시는 것이 너무 송구합니다."
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계시해 보여주시는데
그렇게 좀 하나님께 ‘내가 당신을 십자가에 죽인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라고
우리를 크고 작은 고난으로 인도하시면서
세상일에 절망하고, 주님을 바라보라고 인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근데 사실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을 능력을 갖췄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필요가 있었겠어요/없었겠어요?
우리가 십자가에 죽고 자신을 부인할만한 능력이 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일이 없으시죠. 내가 다 해버리고 말테니까요.
◑기복주의 라는 덫
제가 불교를 조금 연구해봤더니 불교는 네 가지(4제)가 있더라고요.
인생은 고통이고
그 고통을 주는 것들이 집착이고, 사랑이잖아요.
그걸 멸하는 방법이 있고
도를 통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런데 불교식으로 도를 닦아서 나름 도를 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교의 성철스님같은 분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도 도를 통하면 세상 것들을 다 버리고, 세상 욕심을 버리는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불교 믿는 사람보다 좀 더 높이 올라가야 되는데
불교를 믿고도 버리는 세상을, 예수를 믿고도 버리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이르는 구원이잖아요.
근데 예수님은 우리한테 너 혼자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는 십자가를 질수도 없고, 자신을 부인할 수도 없는 진짜 무능한 존재라고,
▲성경을 잘 보세요. 성경이 굉장히 아름다운 구절들이 좀 있는데
그렇지만 우리에게 심판과 멸망을 얘기하는 구절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여러분 아세요?
우리가 왜 성경을 아름다운 책, 사랑의 책, 능력의 책, 구원의 책으로 보는지 아세요?
우리 눈이 그것만 보기 원하니까, 그런 것만 딱 따서 보는 거예요.
좋은 건 내꺼, 나쁜 거는 다른사람 꺼.
그러니깐 성경이 우리 눈에 잘 안들어오는데
진짜 딱 우리의 가치관을 뒤집어 엎고 보면요,
성경은 무시무시한 책이예요.
그냥 성경이 심판과 불과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 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딱 들어와야, 이게 진짜 주님을 잘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부인할 수도 없고 십자가를 질수도 없는
그런 정말 무능한 죄악된 존재, 구원이 불가능한 존재인데
구원이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 저는 십자가를 질수도 없고, 자신을 부인 할수도 없는,
정말 저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랬어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꼬.’
정말 실존적인 고백을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드리면서
'주님 그러므로 당신의 보혈이 참으로 능력 있고 위대하고
나를 위해서 흘리신 당신의 보혈을 내가 믿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근데 우리가 주님과 연합으로 가는데 사단이 여러 가지 장애물을 두고
우리들로 하여금 거기로 가지 못하게 하는데
첫 번째 장애물은, 세상의 편함입니다. 넓은 길입니다.
<천로역정> 책을 읽어보면, 주인공 크리스천이 이렇게 천성을 향해서 가는데
길을 가다가 좋은 길이 딱 앞에 나타나고, 동시에 험한 길이 나타났는데
그가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좋은 길을 보면서 "야, 이거 진짜 하나님이 나한테 그래도 좀 쉼을 주시는구나."
그래서 좋은 길/넓은 길로 딱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한참 가다가 그때, 정말 심하게 얻어맞고
그리고 다시 자기가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서" 다시 또 길을 가는...
<천로역정> 읽으셨어요? 이 책은 기독교 모든 서적 중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인데,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주인공 크리스천이 길을 잘못 들어서 돌아오고 또 다시 출발하고
돌아오고 그래서 또 다시 가는 그런 많은 유혹들이 있는데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을 잘 보여주는 책인데,
첫 번째 마귀가 우리에게 우리 길을 혼동시키는 것이 기복주의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 GFC 교인들은 기복주의에 한사람도 눌려있는 사람이 없겠죠?
여러분, 사람들이 얼마나 기복주의에 물들어 살고 있는지, 제가 소개할까 합니다.
기복주의는요 하나님을 이용해서 잘먹고 잘살고
이 땅에서 부귀와 영광을 누리고 싶은 것이 기복주의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복을 좀 주기를 바라는 마음 있어요/없어요?
"난 하나님이 나한테 이 땅에 좋은 복을 하나도 안주셔도 저는 기쁘고 감사하고 충분합니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 계시면 손들어보세요.
"하나님 저는 이 땅에서 제 눈에 보기에 좋은 복을 다 거두어가셔도,
이 땅에 제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하나도 안주셔도, 저는 너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그런 분은 손들어보세요.
다 우리는 이 땅의 좋은 것을 원해요.
그래서 누구든지 가난하고 싶지 않고, 병들고 싶지 않고,
자녀들이 잘되고 장수하고, 그래야 좀 예수 믿는 사람의 폼이 나잖아요.
여러분 교회에서 그런 얘기 많이 듣잖아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공부 열심히 해라.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사업을 열심히 해라.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건강관리를 잘해라.
우리가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33세에 죽어버렸는데 영광이 되겠어요/안되겠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도바울은 25년을 고난의 삶을 살고 또 살다가
결국 로마의 감옥에서 목이 잘려 죽었는데,
그리고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말 집도 절도 없이 떠돌다가
사도요한을 빼놓고는 다 순교했잖아요.
그런가하면 그 모든 선지자들은, 왕과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다 핍박 받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까/안 드러납니까?
세속적 관점에서 그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께 욕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왜 우리는,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 기준이 되고 모범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는 항상 내가 좋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내게 좋은 것은 축복이고, 내게 싫은 것은 저주라고 하는 이 죄인의 가치관,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의 진짜 악한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하나님이 내 인생을 꼬깃꼬깃 꼬으셔서
'나는 인생에 가망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내팽겨쳐 지면
그때 우리가 진짜 하나님한테 짜증이 나잖아요.
저도 과거에 한 때 기복주의에 푹 젖어서 살았던 사람이었음을 제가 발견하고
이제는 그 사탄의 미혹에서 놓여나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006년 11월에 아내 허운석 선교사가 암 수술을 받았는데
의사가 수술이 끝나고 난 다음에 이렇게 얘기했어요.
‘아마존에 절대 가지말라고. 아마존에 가면 죽는다’고 그랬어요.
아마존에 가지 않아도 50%는 오늘 내일 죽고,
50%는 5년을 넘게 살수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근데 허 선교사와 제가, ‘죽는 줄에 가서 줄을 설 것’이라고 생각했겠어요?
저와 집사람은 100% ‘사는 줄에 가서 줄을 설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왠지 아세요?
정말 아마존에 가서 자기 몸이 부서지더라도 한 명에게 더 복음 전해서
그 영혼이 예수님께 돌아오기를 얼마나 노력하고 수고했고
충성했고 하나님께 최선을 다했는데
하나님이 아내 허선교사를 사는 줄에다가 세워주실 줄로 믿었지요.
여러분 그렇지 않겠십니까?
선교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쳤는데,
죽이는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곧 생각되어 지겠어요?
하나님 당신의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는데
그렇게 목숨을 바친 사람을, 죽는 줄에다 세워놓고 죽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어요? 안되잖아요.
제가 아내와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가 15년이나 아마존에 와서 일을 했는데,
수술하고 나고 5년이나 넘게 살았고
그리고 난 다음에 정말 GFC교회에 와서 간증을 하면서
‘나는 진짜 폐암2기로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하나님이 내게 치유의 광선을 베풀어 주셔서
나는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간증을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로와 은혜와 용기를 받고,
암환자 성도들이 자기도 살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소망을 받을 것인가!”
*이게 다 기복주의적 발상이었던 것이죠. 착각이었습니다.
▲근데 아내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 그 얘기를 들으면서 위로가 돼요, 안돼요?
위로가 안 되잖아요. 암환우 들에게 위로가 안 되고 낙심이 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왜 하나님이 허선교사를 데려가셨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give & take 라는 말이 쓰잖아요.
‘하나님께 바치면, 바친 것만큼 하나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그것이 바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잖아요.
그리고 인과응보 라는 것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만큼 하나님 우리에게 보상해주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인과응보와, 지성이면 감천으로 우리를 대해 주셔야 되는데
그렇게 대해주시지 않을 때, 진짜 절망이 되더라고요. *그건 기복주의였죠.
‘하나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절망이 될 때,
그때 제가 알았어요. ‘아, 내가 기복주의적인 목사이고 선교사였구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만큼, 우리가 충분하게 복 받고 잘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만큼 주시지 않고, 반대로 뒤집어 엎어버리실 때
우리가 낙심하고 절망하는 그것이 바로, 기복주의적 신앙이 갖고 있는 특색이라는 거죠.
▲하나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가장 큰 사랑이 뭔지 아세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가장 큰 사랑은,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 속의 악을 보여주시면서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셔서, 우리의 악과 죄를 정결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보상이신 줄로 믿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보상이라고 믿어요.
하나님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상을 주시는데
그 보상이 고난이라고 저는 믿어요.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상하셔서, 우리를 의롭고 정결하고
정말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 욥이 그렇게 말하잖아요.
그렇게 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보상입니다.
여러분, 이런 신앙에 여러분의 눈이 떠지지 않으면
여러분은 계속 기복주의를 따르게 되는데,
기복주의는 마귀가 우리에게 주는 덫입니다.
하나님의 덫에 걸리는 게 좋겠어요. 마귀의 덫에 걸리는 게 좋겠어요?
예수를 아무리 잘 믿고, GFC교회에서 헌금을 제일 많이 내면
의인으로 인정받고, 교회에서 충성하고, 세상에서 영광과 부귀를 누리고 산다고 할지라도
이런 고난을 통해서 한 사람속에 들어있는 모든 악과 죄가 다 쏟아져나가고
주님에 의해서 거룩과 정결함으로 연합의 삶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마귀의 덫에 걸려서, 기복주의적 인생을 살다가 마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 깊이 생각해보시고
기복주의로부터 탈출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기복주의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가 잘되려고 하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복을 받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내가 원하는 일을 추구하고 싶은 것이, 바로 기복주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복주의에 빠지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친밀함을 누리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영생으로 가는 길이 불가능합니다.
◑율법주의의 덫
영생으로 가는 길, 연합으로 가는 길, 거룩함으로 가는 길에 또 장애물이 있는데
율법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종교성, 자기 종교적 열심으로, 죽도록 충성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예수님을 믿었을 때, 예수님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합니까.
그걸 첫사랑이라고 말하는데, 그 첫사랑을 경험할 때 주님의 사랑에 겨워서
인생을 다 주님께 드리고 싶고, 목숨을 다 바치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 신앙이 많이 바뀌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게, 점점 부담감이 생깁니다.
로마서 3:20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으로 죄를 깨달으라고 주셨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내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게 될 때,
그러니까 죄를 깨닫고 주님께로 방향을 돌리라고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을 내가 내 힘으로 지키려고 할 때, 내가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는데,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이 백성이 입술로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15:8
율법주의는, 마음으로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지만
그러나 겉 행동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또한 입술로 주님을 사랑하는.. 그런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 특별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습니까?
로마서 9:31~32절에 사도바울이 말씀하시죠.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겉 행위로 하나님을 사랑했잖아요.
그래서 이제 율법주의는 종교적인 야망을 숨기는 고도의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야망(목회 성공 같은 것)이 우리에게 있거든요?
우리는 다 종교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인데
자기 야망을 숨기는 고도의 전략으로 마귀가 우리에게 주는 게, 율법주의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최고의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였잖아요.
칭찬과 존경을 받고, 사회로부터 정말 구별된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명성을 들었던 사람들을
주님은 '위선자,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하고, 얼마나 무시무시한 독설을 퍼부었습니까.
예수님 믿기 이전의 바울을 보면,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죽이는데 내어주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사도바울이 그 당대에 진짜 최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주의적 자기 의’이었지요.
근데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했던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어떤 보상을 주시느냐.
예수님이 주시는 보상이 바로 25년동안 정말 고난과 고통을 경험하고
그리고 로마의 감옥에서 목이 잘려 죽는 고난을 그분에게 보상으로 주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분을 데리고 가셨다.. 라고 생각합니다.
▲저나 허 선교사나 선교사로 파송되면서
저희가 하나님 앞에 딱 구한 것이 한 가지가 있었어요.
위대한 선교사라고 하는 이름을 얻는 것도 아니었고
아마존 모든 영혼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아니었고요.
'하나님 우리가 아마존에 가는 이유는, 하나님 당신을 더 깊이 사랑하고
당신과 연합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아마존에 갔어요.
그러니깐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겠어요.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른 선교사들이 하는 많은 것들을 전혀 하지 않는
교과서적인 선교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원주민과 함께 동화되어, 원주민과 비슷한 생활수준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자칫 잘못하면, 율법주의적 자기 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희는 너무 잘났기 때문에
그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 정말 너무 당당한 그런 선교사로 살았어요.
*율법주의적 의 일 수 있었습니다.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이나, 조지 뮬러나 허드슨 테일러 같은 분들이
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공급을 받아서, 사역을 그 누구보다도 더 월등하게 잘했던 분들이었잖아요.
저희도 그래서 ‘믿음 선교’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절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실 선교사로 가기 전에, 6년동안 한국 농촌에서 정말 가난하게
한 달에 9만원 받고 살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때 계란을 실컷 먹어보는 게 평생 소원이었고
허 선교사는 고등어자반을 실컫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렇게 가난하게 살 때, 서울에 있는 교회에서 우리를 보조했는데
보니깐 우리 시골교회 교인들이,
‘우리 전도사님은 서울에서 보조를 받으니까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헌금을 하지 않아도, 우리 전도사님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으니깐
교회에 열심으로 헌금을 안 해도 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교인들에게 ‘우리를 이제 그만 도우시라’고,
그러면서 도움을 끊었어요. *율법주의적 자기 의 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올인하겠다. 믿음으로 올인하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근데 정말 하나님이 우리가 필요할 때 모든 것을 공급하셨고
선교사로 아마존에 가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필요를 항상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깐 당당함이 있었어요. 자신감.
그래서 뭐 어느 교회가 후원을 중단 한다 그러면
"감사합니다. 후원을 중단해주셔서...”
그리고 하나님이, 선교에 더 적극적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를 행하실 줄로 믿었습니다.
그런 당당함과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구걸하지 않고, 그런 당당함이 있어서 좋았지만,
그 자신감과 당당함이 어디서 온 것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이것도 저한테서 온 것이었어요. 우리 인간에게서 온 것이었어요.
이게 율법주의적 자기 의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바리새적이 되고 말죠.
▲제가 평소에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계백장군이었어요.
여러분 계백장군이 누군지 아세요? 나당연합군을 대항해서 전쟁하러 나갔는데
당시 백제는 의자왕이 3천 궁녀와 더불어 놀았잖아요.
백제가 전쟁에 지는 게 너무나 당연했어요.
그래서 계백장군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자기 가족들을 다 살해했어요.
자기가 친히 칼로 살해했어요. 살해당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렇지만 계백은, 가족들을 살해하고 그리고 전쟁터로 나갔어요.
왜 전쟁터로 가족을 살해하고 나갔겠습니까?
자기 가족들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비참하게 멸시를 받고 죽는 것보다
내가 가족을 죽이고 나가겠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죠. *율법주의적 자기 의의 예죠.
두 번째로는 내가 가족들을 염려해서
내 조국 백제를 위해서 싸우는 전쟁에서 물러나지 않겠다.. 라는 각오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그는 최선을 다해 싸워서, 정말 장렬하게 백제라고 하는 한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장군으로서 ‘계백장군의 노래’라고 하는 게 있었는데, 옛날에 그런 노래가 있었어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불렀는데, 지금도 사람들이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계백장군을 생각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종이면서 계백장군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과연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름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은 사람들이잖아요.
세상의 어떤 장군이나 대통령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굴을 들기가 좀 부끄럽잖아요.
저나 저희 아들이나 딸이나 허 선교사는 피부가 다 알레르기 체질이었어요.
물만 닿으면 다 이렇게 진물이 나고 부어올라오는 그런 체질이에요.
그러니깐 얼마나 많이 고생을 했는데
제가 그렇게 아이들과 집사람이 정말 피부가 막 진물러서 고름과 피로 얼룩졌을 때
그때 그거를 보면서 눈을 딱 감았어요. 왜 눈을 감았는지 아세요?
제가 눈을 뜨고 저걸 보면, 이렇게 고생하는 가족들을 방치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한국으로 되돌아갈 것 같아서 눈을 딱 감았어요.
그리고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 눈물을 삼켰습니다.
*마치 계백장군처럼 단호했지요. 그러나 이게 율법주의적 자기 의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사역을 하고난 다음에
22년동안 허운석 선교사가 저랑 같이 사역을 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로 돌아갔잖아요.
아내가 천국 가고 난 다음에, 내가 가진 율법주의. 종교적인 야망을 실현하고 싶었던
고도의 전략을 가졌던 내가 틀렸다고 하는 것. 내가 틀렸었다고 하는 것.
그것을 시인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율법주의에 빠졌었구나...’
이건 정말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패도 깨지지 않습니다.
왜냐면 선한 명분 아래 깊이, 눈에 안 띄게 숨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쉽게 못 발견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정말 목숨바쳐 선교하는 선교사를 보고
그 한 영혼이 구원받는다는것이 얼마나 기쁜것인가,
내 가족들이 내가 희생함을 통해서 한 영혼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얼마나 기쁜일인가,
그것(선한 명분)들을 보면서 사는데, 누가 저를 정죄하고 누가 저를 책망하겠어요.
▲셰익스피어가 이런얘기를 했더라고요.
'거룩한 곳에 악이 있고, 악이 있는 곳에 선한 것이 있다'고.
율법주의는 아주 거룩해 보이는데
목숨을 바치는 하나님의 전사들이 있는 그곳에, 가장 선한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가장 무시무시한 마귀의 전략이 숨겨져있다고 하는거죠.
C.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그 마귀의 졸개가 어떤 사람을 다 관리를 하는데
그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이 마귀가 그냥 오들오들 떨어요. 어떻게 하면 좋겠냐 그러니까
그때 마귀의 대장이 "걱정하지 말어. 교회가서 종교적인 야망, 종교적인 교만을 팍 심어버리면
그 종교적인 교만 때문에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아무 상관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으라고."
C.S.루이스가 그걸 벌써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와서 그냥 성경 읽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구역예배하고
심방하고 밥하고...정말 얼마나 교인들이 수고해요.
교인들이 수고하지 않으면 교회가 운영이 불가능하잖아요 그렇죠?
요새 교회들은 뭐 용역업체를 사갖고 업체가 청소 다해주고 밥도 다해주고
그러니까 교인들이 밥도 안하고, 그냥 아주 편하게 하는 교회도 있더라고요.
그러나 대부분 교회는 교인들이 다 자원봉사 하잖아요. 자원봉사로 교회가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다 그렇게 할 때,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가슴 뿌듯한 보람이라고 하는 게 있잖습니까.
여러분? 교회와서 막 하루 종일 밥하고 설거지하고 김치 담고 그럴 때 기쁘잖아요, 그렇죠?
이 김치 먹고 우리 중고등부 청년들, 목사님 잡수시고 열심히 일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
여러분 기뻐요, 안 기뻐요? 일하고 나서 기쁘죠.
근데 이 기쁘다고 하는 이것도, 우리가 잘 봐야 되는데
우리가 잘한 것들이, 행했던 선한 것들이, 다 우리한테 악으로 돌아온다고 하는 사실.
그러니깐 율법주의에 사는 사람은, 우리 종교적인 열심속에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다 사실은 자기를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인데
그것이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교회가 계속해서 교인들에게 열심을 자극시키잖아요.
교회가 하는 간증이 뭡니까?
그 권사님 그렇게 교회에서 헌신하고 기도하고 40일 금식하고 철야하고 그랬는데
그렇게 예수 안 믿던 방탕했던 술주정뱅이 남편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이게 정말 얼마나 멋진 간증입니까 그렇죠?
또 그리고 암에 걸려서 췌장암 말기였던 교인이 있었는데
그분이 저녁마다 교회와서 기도했고 온 교인이 합심해서 기도했는데
그분이 그냥 암으로부터 완전히 건강해져서 치료받고
지금 완전히 건강한 삶을 살고있습니다.. 그럴때 야, 이거 얼마나 멋진 간증입니까,
우리가 행하는 종교적 열심속에 하는 모든 것들이 다 율법주의에 속해있으면
그 영광이 누구에게 가느냐?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오는 거죠.
그 영광이 내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선한 일을 많이 할수록 좋습니까, 안좋습니까?
인정과 명예를 받게 되니까 좋죠. 그래서 가족까지 희생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안 좋은 것입니다. 봉사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해야죠.
율법주의 가운데서는, 선한 일을 많이 할수록 안좋다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이 한번 기억하시면서
우리가 선한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뿌듯한 보람이 느껴지는데
이 뿌듯한 보람이 우리 자아 먹여 살리는 거예요.
▲우리 자아가 뿌듯한 보람이 있을 때, 또 우리가 열심히 사업을 해서
이게 늘어나잖아요. 그럼 여러분 기쁩니까, 안 기쁩니까?
여러분의 자본이 늘어난다고 하는 게, 여러분 피와 땀의 결과잖아요. 그렇죠?
또 우리 GFC교회가 커지는 것도 뿌듯한 보람이 느껴질 것이거든요.
우리는 그 뿌듯한 보람을, 하나님이 주신 감사와 기쁨으로 늘 생각을 하잖아요, 그죠?
근데 이게 우리 자아를 점점 키우고, 우리 안에 괴물을 키우는 건데,
이 때는 자신을 많이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데, 그래서 고난을 주시는 겁니다.
봉사를 하고 사업이 잘 나갈 때, 곁 길로 빠지지 말고 정도로 가라고, 주님이 섭리하시는 겁니다.
그헞지만 우리는 봉사를 통해 자기 의가 더 커지는데
이 자기 이와 이것들이
여러분 우리에게 눈꼽만끔 작은 자기 의가 우리 자아가 우리 안에 있으면
십자가의 보혈. 예수님의 구원을 받겠습니까?
눈꼽만하고, 티끌만한 우리의 자아와 우리의 의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 자랑이 있다면,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 없죠.
우리를 주님을 거부하고, 자기 의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치워버리게 됩니다,
그분이 우리를 받아들일수 있는 문은,
우리 자아와 우리의 의, 자기 의가
물처럼 쏟아진 사람에게만 구원의 문이 열려지는데
알사탕 하나를 얻기위해서 알사탕 하나를 손에 꽉 쥔 어린아이가
어른이 "얘야 알사탕을 내려놓아라. 그럼 내가 너에게 다이아몬드를 줄게."
그럴 때 "나는 알사탕이 좋사오니 다이아몬드는 당신이 갖고 나는 알사탕을 먹겠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행하는 종교적인 열심이, 율법주의에 있는 사람은
그것들이 다 자기의 의가 되고, 자랑이 되고, 명예가 되고, 업적이 되고
우리 자아를 키우는 것들이 되어서, 우리의 구원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3:21~24절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혀주기를 원하시는데
그 하나님이 입혀주길 원하시는 의의 옷은
율법주의가 전혀 없는, 자기의 의가 전혀 없는..
'저는 세상에 무익한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모든 것이 다 제 악함이고, 제 잘남이고,
제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제 자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것 뿐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만,
제가 십자가의 보혈에 숨겨져서, 십자가의 보혈에 가려져서 하나님 앞에 가는 것만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사랑하는 GFC성도님들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제가 우리 아마존 교인들한테 연말 31일날 설교하면서 그랬어요.
거기도 불꽃놀이 하거든요.
축제하면서 불꽃을 쏘아 올리는데, 그때 0시가 딱 되면 그때 소원을 빌잖아요.
여기도 송구영신예배 드렸을 텐데, 그때 소원을 비는데
여러분이 비는 소원이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이 비는 소원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2016년에 제게 가장 중요한 기도의 목적입니다' 라고 기도하지 않을 사람은
얼른 불꽃놀이에 좇아가시라고,
거기 가서 '올 한 해동안 내 모든 질병이 치료되고
우리 아들딸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사업이 확장되길 원합니다' 라고 하는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 옆에 가서, 같이 오늘 저녁에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낫습니다..라고 얘기했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이용해서 복을 받으려거나
율법주의를 통해서 종교적인 야망을 실현하고자하는 고도의 전략.
그런 것이 우리들 마음속에 있다면,
우리들의 예배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전혀 드려지지 않는,
드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은,
왜냐면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면, 그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 자체가 하나님께 멀어지게 하는 것이니까
드리지 않는 예배가 낫다 할 만큼, 이거 아주 과격한 얘긴데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하나님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의 행복과 번영과 평안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거룩과 연합과 영생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잊어버리지 마시고
코를 꿰서 소를 데려가는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도 있다고, 아까 말씀드렸죠?
누가 우리를 이 길로 데려가느냐?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데려가시는 주체이십니다.
그분에게 기쁘게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원해서 쉽게 가시기 바랍니다.
고난과 고통이 우리를 찾아올 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그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셔서, 내게는 고난이 점철된 인생으로
내게 허락하시는 주님. 당신의 은혜가 놀랍고 감사하니 기뻐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참으로 우리 GFC교회 교인들이
담임목사님을 통해서 매일매일 듣는 설교를 제가 한번 더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의 심령속에 참으로 주님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그리고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가운데
주님이 데려가시는 이 거룩의 길, 연합의 길, 영생의 길로 매일매일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타자 KB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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