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6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다

LNCK 2016. 5. 2. 16:58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다              34:29-35, 막9:2~3                 16.05.01. 스크랩, 출처

    


 


모세의 얼굴

 

모세는 참 놀라운 사람입니다.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출애굽을 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 헌법과 같은 모세오경을 기록했다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얼굴로 대면하여 보았던 사람입니다.

호렙산 가시떨기에 타는 불꽃 가운데서 처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40일 동안 함께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는데 그 뒷모습을 보았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비록 등만 보았다고 하지만, 인간 중에 어느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모세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아마 모세의 영광의 절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두 번째로 시내 산에 올라서 하나님과 함께 했던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빛 중의 빛이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빛의 흔적이 모세의 얼굴에 계속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합니다. 아마 하나님처럼 생각되었던 모양입니다.


모세가 부르자 그때서야 가까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모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수건을 썼다고 전합니다.


하나님을 볼 때만 이 수건을 벗었다고 말씀합니다. 모세의 얼굴이 이처럼 빛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29절입니다.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모세는 빛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빛을 가까이 하면 우리 얼굴에서도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도 가장 영광스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온 육체가 변화되는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9:2-3)


예수님의 옷이 광채가 날 정도면 그 몸은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이시기에 빛이신 그분의 영광이 살짝 노출 된 순간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마 이때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연약한 한 인간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빛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얼굴에서 빛이 났던 다른 한 인간이 또 있습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 공회에 끌려가서 서게 되었는데 그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전합니다.

   “공중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6:15)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진리로 충만한 순간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저 높은 곳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이미 보았기에 그 얼굴이 빛났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는 하나님처럼 빛이 납니다.

 

우리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빛이신 하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다면,

진리의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다면 우리 또한 얼굴에서 어떤 비범한 빛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는 어떤 신비적인 현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것을 붙잡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렇다면 반드시 얼굴 표정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라는 노래 가사가 단순히 화장발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기에 그것이 표정으로 나타나고 우리 얼굴을 변화를 가져옵니다.


링컨이 했다는 “40세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은 신앙인에게도 진리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부모가 물려준 유전과 습관이 만든 얼굴입니다.

그러나 40세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만든 얼굴입니다.

내가 어떤 가치관과 생각을 품고 살았느냐에 따라 우리 얼굴이 달라집니다.

 

   김구 선생의 교훈입니다. 김구 선생은 구한말 나라가 엉망이어서

   벼슬길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관상학을 공부했습니다.

   자기 얼굴을 실험 삼아 관상 공부를 하던 김구 선생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기 관상을 보아도 부귀한 상이 아닙니다. 오직 천하고 가난한 상뿐이었습니다.


   비관하던 선생에서 희망을 주었던 것은 관상학 책의 마지막 구절이었습니다.

   “관상(얼굴) 좋음이 신상() 좋음만 못하고, 신상 좋음이 심상(마음) 좋음만 못하다.”


   이 구절에서 힘을 얻었던 김구 선생은 당시의 심정을 백범일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음이 바뀌면 얼굴도 바뀝니다. 우리 안에 있는 품격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높은 자리나 인정받는 자리에 서면 사람의 인상이나 품격이 바뀌는 것을 종종 봅니다.

자리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까? 예 물론 그런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지면 이렇습니다. 자리가 주는 안정감이 그렇게 만듭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존경이 우리 마음에 작용한 결과입니다.

자리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 마음이 우리 얼굴을 바꿉니다.


그러나 모두가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하여 이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 마음을 열지 않으면 결코 얼굴은 빛나지 않습니다.


장관이 되고 높은 자리에 올라도 마음 씀씀이가 바뀌지 않으면 얼굴에서 빛이 나질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민수기에 아론의 축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론과 그 뒤를 잇는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 기도를 다음과 같이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오늘날 예배의 축도로서 사용되는 공인된 두 가지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6:24-26)


여호와의 얼굴이 두 번이나 언급됩니다.

여호와의 얼굴이 우리 위에 비추기를, 여호와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여 들리기를 간구하는 축도입니다.


진리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 생명으로 충만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할 때 우리 얼굴 또한 빛이 납니다.


태양 빛이 가득 비출 때 달이 환하게 빛을 내듯 우리 얼굴 또한 빛이 납니다.

하나님의 빛으로 충만한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모세의 영광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모세 얼굴을 보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모세를 영광스럽게 만드셨을까요?


중세 시대에는 모세의 영광을 모세의 머리에 난 뿔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남긴 유명한 조각상 두 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피에타상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모세상입니다.

2m가 넘는 거대 상인데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 모세상의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해괴한 모습이 나오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당시 라틴어 번역 성경 벌게이트의 오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9, 30절의 모세의 얼굴 피부에서 '광채가 난다'는 구절을 '뿔이 난다'로 번역했습니다.

빛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단어 카난뿔이 나다는 뜻으로도 쓰이기 때문입니다.

뿔은 권세나 힘을 상징합니다.

뿔이 나든, 빛이 나든.. 그만큼 하나님은 모세를 매우 특별한 존재로 높였습니다.

 

왜 모세를 이처럼 높이고 있습니까? 그것은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근간이 되는 위대한 율법집인 모세오경을 남겼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사랑은 대단합니다. 율법은 만물이 창조되기 2천 년 전부터 있었다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인간 모세를 높임으로써 하나님의 말씀도 위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을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시기도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영웅으로 높이는 것을 매우 위험시합니다.

인간을 높이는 것은 교만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영웅은 자칫 잘못하면 많은 대중을 잘못된 길로 이끌 가능성도 높습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래서 자신을 사람들이 추앙할까봐 자신의 묘비를 세우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그 평생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던 칼빈은, 인간이 영광 받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유언대로 칼빈은 묘비도 없이 제네바의 한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인간 편에서야 겸손해야 하겠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세우심으로서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모세를 영화롭게 하듯 한 인간을 영웅으로 만듭니다. 엘리사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뒤를 이은 대단한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이 있었던 선지자였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적의 동태를 미리 아는 놀라운 예지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행했던 기적 중에 제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엘리사의 제자 중 하나가 나무를 하다가 빌려온 도끼가 물에 빠졌습니다.

탄식하고 있는데 엘리사가 그 도끼를 기적적으로 물에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 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고”(왕하6:6)


무슨 전설 따라 삼천리도 아니고 여기서 어떤 도덕성이나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의미가 있습니다. 기적 자체가 아니라 바로 엘리사입니다.

엘리사의 엄청난 능력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은 엘리사를 영웅으로 만듭니다.


엘리사는 바알의 우상 세력과 싸우던 대표적인 선지자입니다.

기울어져가던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 불리던 상징적인 존재였습니다.

엘리사는 한줄기 빛처럼 어두움 가득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였던 영웅이었습니다.

 

유다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성전을 건축하고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세운 두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그런데 스가랴 선지자는 이들을 매우 위대한 인물로 높입니다. 이 둘을 감람나무와 순에 비유합니다.


등잔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4:11,14)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6:11-12)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주도 하에 성전 건축이 이루어집니다.

이 구절이 이후에 메시야를 예고하는 예표가 되었지만

역사적으로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메시야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칼빈이나 루터와 같은 인물들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었겠습니까?

영웅은 대중들의 의사와 소망을 집약하는 중심체입니다.

오용되거나 스스로 교만하여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위대한 위인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역사의 큰 발전을 이룰 것입니다.

저는 우리 역사나 교회사에서도 이런 신앙의 위인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물질과 권세에 취했던 중세 교회를 청빈과 성결로 개혁했듯이,

타락할 대로 타락한 한국교회를 뒤집어놓을 그런 신앙적 위인의 탄생을 소망합니다.


민주주의의 시대이지만 여전히 우리의 뜻을 실현하는 데는

의지의 결집체인 영웅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모세의 영광은 신의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그런 중에도 겸손하고 온유했다는 점입니다. “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12:3)

    

 

그리스도인의 영광

 

모세의 영광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어떠했습니까?

모두가 보았습니까? 사도 요한과 제자들은 보았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보았습니다. 그의 빛이 너무 환해서 눈이 멀고 말에서 거꾸러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보지 못했고 가장 가까이 했던 유다 또한 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9-10)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왜 그들에게는 빛이 보이지 않았을까요? 어둠을 사랑해서입니다.

아무리 밝은 빛이 눈앞에 비추어도 우리가 맹인이면 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여 일어난 사건이 바로 이 빛을 볼 수 있는 은혜입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고후3:15-18)


모세의 영광을 가리기 위해 사용되었던 수건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을 덮고 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외면하고 그 영광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수건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죄에 물들어 우리 눈이 다시 어두워갑니다.


1)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헛되고 어리석은 욕심 때문에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유혹에 빠져 하늘의 영광이 보이지 않습니다.


2) 편견으로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자기만 옳다고 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바리새인과 다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3) 이기심으로 눈이 어두웠습니다. 자기만, 자기 가족만, 자기 민족만, 자기 종족만 생각하다

더 큰 것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만 생각하면 자기 또한 죽습니다.


4) 무지로 눈이 어두웠습니다.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데 솔직하지 못합니다.

게으릅니다. 진리를 좇는 길은 마치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간절히 붙잡고 발버둥치지 않으면 떠내려갑니다.

 

주의 영은 진리의 영입니다. 주의 영은 사랑의 영입니다. 주의 영은 생명의 영입니다.

주의 영은 자유의 영입니다. 주님의 영의 역사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놓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 또한 그리스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으로 우리 자신의 거울을 닦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의 영이 활동하시도록 우리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윤동주의 시처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밤이면 밤마다...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아야 합니다.

홀로 걸어가는 그리스도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