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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에서 사랑으로

LNCK 2016. 5. 13. 19:28

힐링에서 사랑으로                 고전13:1~13                   16.05.08스크랩, 출처

 

 


 

위기의 교회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이제 식상한 표현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위기가 위기라면 대책이라도 강구해 볼 텐데.

위기가 만성화되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느낌입니다.

 

기독교 인구의 급속한 쇠퇴는, 구체적인 통계숫자를 제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현상입니다.

5년마다 시행하는 통계청의 종교 인구 조사에서

개신교 인구만이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교회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만 문제가 아닙니다.

언론에 드러난 한국교회의 민낯은 예수 믿는 우리가 들어도 부끄러운 자태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신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진리는 따르지만,

다니고 싶은 교회가 없다 하면서 신앙생활을 쉬고 있는 사람들도 백만 명이 넘는다고 말합니다.

 

이들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도 만들어졌습니다. “가나안교회 성도

교회를 안 나가는 성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에 한국사회 미래의 고질적인 문제인 저 출산과 맞물려

엄청난 위기로 다가올 것입니다.

 

미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2020년경에는 한국교회의 임계점이 다가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가 갑자기 떨어지는 지점을 임계점이라고 말하는데

대략 202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황금시절은 다 지나가고, 이제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겨울의 길목에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위기의 한국사회

 

지금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에 드릴 수 있는 위로는

교회만이 이런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나라도 같은 위기의 선상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한국교회 성장의 곡선과 대한민국 성장의 그래프는 거의 일치합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할 때에는 우리나라도 성장의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쇠퇴와 함께 나라도 여기저기서 구멍이 생기고 있습니다.

 

사실 이 위기의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지구촌의 현상이기도 합니다.

 

인류는 지난 100년 동안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시기를 보내었습니다.

극심한 자연재해도 비교적 드물었고,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가 과학 기술은 인간을 우주로 보낼 만큼 발전했고,

문명의 이기는 인간의 생활을 너무도 편리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한 글로벌 경제는 급속도로 부의 규모를 키워왔고,

세상의 학문은 더욱 정교해지고 심오해졌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인류가

100년 전의 사람들보다 행복하냐는 질문입니다.

이런 번영을 누리지 못했던 100년 전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오늘 우리가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전 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불안을 느끼고 있고,

작은 일에도 울화가 치밀고,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평소에 가장 빈번하게 느끼는 심리상태는

첫 번째가 피곤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불안하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몇 주 전 나전도사님이 사는 아파트에 부부싸움을 하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가스 밸브를 틀어놓고 불을 질러 아파트 주민이 대피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이런 소식은 뉴스감도 되지 않습니다. 이 정도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요즘 분노로 인해 미쳐가고 있습니다.

보복운전이 우리가 흔하게 만나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왜 기분 나쁘게 내 앞에 끼어 들어오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던 불안과 분노가 서로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피로사회입니다.

불안하고,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으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입니다.

정말로 팍팍한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집단적으로 험난한 세월을 헤쳐 왔습니다.

1997IMF 사태가 분기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고도성장의 패러다임이 끝나고, IMF가 터졌습니다.

경제위기가 닥친 것이지요.

 

직장을 잃어버린 중산층이 하층민으로 추락한 사람들이

우리 이웃들 가운데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우리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던 노숙하는 사람이 생겨났고,

노숙자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습니다.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하고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가족이 해체 당한 사람들을 목격하고 경험하면서

한국 사회는 물질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전 세게 어느 나라도 하지 못한 전 국민 금모으기로 민족 저력을 발휘하면서

IMF의 큰 고비는 넘겼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살림살이는 더 팍팍해져 갔고, 경쟁은 더 심화되어 갔습니다.

 

물론 이 위기의 과정에서도 자본과 정보를 가지고 있던 소수의 사람들은

무사히 살아남았습니다. 오히려 부자들은 더 큰 부자가 되었지요.

소위 말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격차가 심하게 벌어지는 양극화가 진행된 것이지요.

 

빈부의 격차가 자꾸만 벌어지는 원인은 간단합니다.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자본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커져 가면

양극화는 더 심화되어 갑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대다수 서민들은 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나 혼자뿐이구나. 아무도 나를 돌보아 주지 않는구나!

어떻게 하든지 내 힘으로 살아남는 수밖에 없구나.

돈이 없으면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구나!”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져 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가슴 아픈 한국 사회를 분석한 책이 나왔습니다.

이나미 교수가 쓴 <한국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입니다.

 

저는 이 책 제목을 보자마자 괜한 웃음이 나왔습니다.

오래 전에 칼 포퍼가 쓴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제목이 생각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자인 이나미 교수는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을

패러디한 것이라고 서문에서 솔직하게 밝혔습니다.

 

굉장히 주관적일 것 같고, 감정적일 것 같은 문제를 논리정연하게 펼쳐나갔습니다.

한국사회를 12 가지 콤플렉스가 움직이는 사회라고 보고 접근한 것입니다.

 

물욕, 허식, 교육, 집단, 불신, 세대, 분노, 폭력, 고독, 가족, 중독, 약한 자아

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남과 비교하면서 만들어가는 병적인 질투심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과시를 위해서 명품 소비에 열광하고, 면접에 통과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성형수술에 매달립니다.

이것은 열등감에서 출발한 것이고, 자존감을 잃어버린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세계 최하위 수준의 출산율이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돈 없어서 못 살겠다. 돈 없어서 결혼 못한다. 돈 없어서 아이 못 낳는다.

돈 없어서 아이 교육 못 시킨다.’ 아예 이런 말에 지배를 당하여

모든 것을 돈으로 물질로 평가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힐링 유행 사회

 

이런 물질적 성공에 대한 집착이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경쟁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피곤하고, 불안하고, 그냥 화가 납니다.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는 분노와 불안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한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집단 현상입니다.

 

그래서 이런 불안과 분노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힐링이 이 시대의 화두로 등장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가 나는 지금 위로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서점가에 나갑니다.

인터넷에서 책을 구입하지만 서점가에 진열 된 책을 통해서, 사회의 흐름을 보려고 노력 합니다.

 

지난 3년 동안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던 주제는 힐링입니다.

아프기 때문에, 힐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피곤하기 때문에 힐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힐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나 처방보다,

일단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기 원하는 대중의 심리 때문에 나타나는 사회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제가 실소를 금하지 못한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나온 청춘을 위로하는 책이었는데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제가 책 이름은 정확하게 밝히지 않겠습니다.

서울대 교수이신 작가는 그래 서울대생들도 아프니까, 그래서 청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과 정보와 인맥과 자원을 차지하게 될 서울대 학생들이

아프다고 호소하고, 그것을 위로해 주다니!

한편으로 이해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소수의 엘리트 사람들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곤하고 힘들겠지요.

힐링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이때의 힐링은

이 시대의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힐링과는 전혀 다른 성격입니다.

 

더군다나 ‘20대의 불같은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청년들에게,

내일을 이끌고 나가야 할 젊은이들에게 도대체 힐링이라는 말이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심지어 서울대 학생들도 아파할 만큼

힐링 유행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짊어지고 나가야 할 상위 0.1% 사람들조차,

자기의 아픔을 타인의 아픔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 때문에

제 마음도 덩달아 아팠습니다.

 

저들이 우리나라의 중심부에 설 사람들인데 나라의 미래가 걱정되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나라를 이끌고 가야 하는데

자기 아픔만 알도록 가르치고 있으니 나라가 걱정되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힘들다보니,

아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타인의 아픔보다는 자신의 아픔에 주목하다보니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와서도 위로 받고 싶습니다. 교회가 거대한 힐링의 무대로 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전하는 말씀도 대부분 위로와 힐링에 대한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상처 입은 영혼을 힐링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 맞습니다. 힐링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힐링이 틀렸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아픔은 분명한 현실입니다.

 

 

문제는 힐링이 복음을 대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힐링이 내세우는 슬로건은 간단합니다.

자신을 위로하라. 사랑하라! 자기 자신을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자기만을 힐링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힐링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아파하는 사람을 사랑하여

결국 자신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원대한 사랑이 복음입니다.

 

아픈 세상, 병든 세상을 치료하는 위대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복음을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을 위한 복음으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신학교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상담심리학이 신학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기도하고, 함께 하나님의 임재를 찬송하고,

말씀을 통해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받거나 상담 받는 장소로 변하고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으로 우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상담으로 신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풍조가 만연합니다.

 

사랑이 주제가 아니라 치유가 교회의 메인 메뉴로 등장했습니다.

변질된 것이지요. 아니 타락한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크고 작은 상처를 가지고 이 자리에 오셨을 것입니다.

위로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예배의 자리에 나왔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교회에서나마 위로 받고 싶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위한 교회의 힐링은 정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뿐만 아니라 상한 육체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힐링은 예수님의 사역 후반부에서는 점점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사역 후반부는 힐링 사건에서 십자가 사건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에서, 고난의 십자가를 직접 지시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후반부에 사랑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자기 몸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속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상처 받은 영혼에 대한 동정과 치유는 더 큰 십자가 사랑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조차도 더 큰 사랑으로 성장해 나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영역을 더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더 큰 사랑으로 커져가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나의 관심은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어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소개하기 전에 12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오늘 우리 시대의 표현으로 바꾸어서 번역해 보겠습니다.

너희는 더욱 더 큰 힐링을 사모하라. 내가 가장 좋은 사랑의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사랑은 나만 치유하는 힐링이 아니라

아파하는 이웃과 나를 동시에 치유하는 가장 큰 힐링 완벽한 힐링입니다.

 

 

힐링을 구할 게 아니라, 사랑을 베푸십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을 이어갑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리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여러분, 상처받은 영혼에 대한 힐링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앙이 멈추면 안 됩니다. 더 성장해야 합니다.

 

힐링에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타인을 사랑하는 것으로,

내게 도움이 되는 교회에서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교회로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내가 받은 상처를 위로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받은 상처를 위로해 주는 단계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

그것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미래는 이것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회복해야 교회다울 수 있고, 병든 세상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병들게 됩니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 있는 한국교회가 겨울을 견뎌내고 봄을 맞이할 수 있는 길은

이 길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저는 가장 큰 힐링인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오래 된 새길

우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사랑입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식상하다고도 말할 수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오랜 된 그 길에서, 식상한 그 길에서, 뻔한 그 길에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새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오래된 새 길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모두가 아파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아파하고 힘들어 하지 않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라 해 보십시오.

아마 손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아픔 가운데서 너 자신을 위로하라. 사랑하라 자기 자신을 외치고 있습니다.

나에게 힐링과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이 땅에서 아파하고 힘들어 하지만

자신을 향한 사랑을 너머서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큰 사랑의 강에 도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오시면서, 아마 집 앞에 있는 여러 교회를 거쳐서 오신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수원에서, 일산에서, 잠실에서, 정릉에서, 시흥에서, 그리고 강남에서 인천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셨습니다.

 

왜 여기 갈릴리교회를 찾아오셨습니까?

그 흔하게 받을 수 있는 위로도 받지 못하는데, 왜 이 갈릴리교회를 찾아오셨습니까?

 

그것은 이 갈릴리교회 공동체 속에 가장 큰 힐링,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변질되지 않은 원시복음이 살아서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고,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나를 자라게 만들고, 이웃과 함께 행복을 만들어가고,

사랑이 분노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을 치유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이 갈릴리교회에 있습니다.

나의 아픔을 이해하는 나긋나긋한 말씀은 듣지 못해도,

그 큰 힐링,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 본문인 서신서 말씀 사랑장 뿐만 아니라

구약의 말씀도, 복음서의 말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된 줄을,

그리스도의 제자 된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한국교회는 화려했던 옛 시절은 지나고

이제 겨울의 길목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이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날의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가장 큰 힐링, 이웃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랑이

이 혹독한 겨울을 이기게 만들 것입니다.

가장 큰 힐링, 사랑은 복음의 시작이요, 복음의 완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이들이 아파하고,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우리도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너 자신을 위로하라.” 하면서 자신을 향한 힐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 된 우리는 힐링에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을 너머서서 이웃을 사랑하여, 세상을 치유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큰 힐링인 사랑을 실천하여, 함께 행복한 세상 만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