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오로지.. 행1:13-14 16.06.12.출처보기
◑교회의 출범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비유나 모든 활동은, 곧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부활 후에 온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교회였습니다.
이를 비판적으로 보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사도행전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생전에 글을 남기신 적이 없습니다.
복음서도 예수님이 직접 쓰신 글이 아니라 제자들이 기록한 글입니다.
글이 남겨졌다면 예수님의 사역이나 메시지는 보다 분명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을 메시아와 하나님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신앙의 눈으로 공생애 기간 동안 하셨던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들을
다시 되새기면서 기록한 것이 복음서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들의 선교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해석하는 방식을 취하다보니
예수님의 모습이 매우 다양해졌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각 복음서마다 결이 다릅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이 그만큼 크신 분이기에
사방에서 조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에게 알려진 예수님은,
교회라는 공동체가 경험했던 예수님이라는 점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증언한 산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인간적 제도라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가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칼빈 또한 교회를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로 비유하였습니다.
그만큼 교회가 소중함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온전한 하나님 나라는 장차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지겠지만
마치 임시정부처럼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누가복음 22장 29, 30절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열두 제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인데
바로 오늘 말씀에서 언급된 열두 사도들 위에 서 있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행1:13절과 14절은 교회의 탄생을 보여줍니다.
열두 사도들의 이름과 여자들과 예수님의 가족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 중에 “사도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성은 교회가 사도라는 인격과 사도의 증언 위에 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정통과 이단을 나누었던 기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세우신 정식 사도가 세운 교회냐는 것이었습니다.
정식 사도가 세운 교회만이 정통교회입니다.
복음서나 신약 성경들이 정경이 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도나 사도와 관련된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사도 마태가 기록했고, 마가는 사도 베드로의 수제자 마가가 기록했고,
누가복음은 바울 사도와 함께 했던 누가가 기록했다는 식입니다.
물론 사도들의 이름만 있다고 다는 아닙니다.
둘째 기준은 사도들의 공통된 신앙 전승에 근거하고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도신경과 같은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어느 날 계시를 받고 말씀을 깨달았다고 하여
사도가 되고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못지않게 교회의 전통은 소중합니다.
안수와 교회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사도적 연관성도 중요합니다.
그것이 정통교회를 결정합니다.
개신교가 자꾸 이단이 많은 이유는
이처럼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는 경향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교회의 질서나 전통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모릅니다.
누가는 이미 누가복음에서 열두 제자의 이름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또 다시 그들의 이름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자가 아니라 사도입니다.
이 열둘이라는 수를 맞추기 위해서 오순절 성령 강림 전에
유다의 빈자리를 맛디아로 대신하게 합니다.
이 열두 사도 중 수석은 베드로입니다. 다음은 요한입니다.
이름을 언급하는 순서가 중요합니다.
복음서에서는 베드로 다음에 그 형제인 안드레가 언급되고
요한은 야보고 다음에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도 공동체의 주도권은 처음에는 베드로였지만
나중엔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로 넘어갑니다.
▲바울도 예루살렘 중심의 이 열두 사도에 대해서 그 권위와 질서를 깍듯이 인정합니다.
그래서 다메섹 회심 후 독자적인 선교를 하기 전에
예루살렘에 가서 회심의 사실을 확인 받습니다.
1차에서 3차에 걸친 선교를 마친 후에는 꼭 예루살렘에 올라가 선교 보고를 합니다.
이런 열두 사도들에 의해서 파송을 받은 자가 바울이고,
바울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이방인들 중심의 교회입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당시에는 이방인 교회가 주류가 되었지만
누가는 결코 그 뿌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열두 사도 중심의 공동체, 여기에서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그리고 마침내 이방 여려 교회들이 세워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질서와 전통, 권위와 계승을 무시하고 자유로운 성령의 역사만 강조하면
사도행전 말씀을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한 공동체 유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초대교회의 이 하나됨을 매우 인상적이었던 교회의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2장 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5장 12절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고”
이외에도 4장 24절과 8장 6절에서도 언급됩니다.
초대교회는 베드로파, 바울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유대주의파,
영지주의 파, 세례 요한파 등 다양한 파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보기에 그것은 작은 차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교회를 이루고,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본질에서는
모두가 하나였습니다. 하나 됨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 마음이 되면 어떤 위기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토인비가 『역사연구』라는 책을 썼습니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입니다.
자연의 변화나 이민족의 침입 등 한 문명을 흔드는 도전이 있습니다.
이에 응전하여야 하는데, 제대로 된 응전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두 가지인데 분열과 경직성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나라와 민족에게 중요한 것은 이 하나 됨입니다.
나라나 모든 조직이 무너지는 중요한 이유는 내부분열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과 불의는 공동체를 깨는 가장 나쁜 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객과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가난한 자의 인권을 외치고
정의를 부르짖었던 이유는
불의와 불평등이 하나된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분열은 공동체성을 파괴하고 그래서 효과적인 응전도 할 수 없게 듭니다.
▲초대교회는 하나가 되었기에
밖으로의 고난이나 내부적인 위기들을 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짧은 몇 구절에서도 교회의 하나 됨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 중에 눈에 뜨이는 사람은 셀롯인 시몬입니다.
셀롯은 열심당입니다. 이들은 폭력적으로 로마에 대항했던 자입니다.
다른 편에는 마태가 있습니다. 마태는 세리로 알려졌습니다.
세리는 로마에 부역하여 세금을 수탈해가던 자들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처럼 애국자와 친일파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예수라는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여러 정치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갈라선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정치성향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또 하나의 하나 됨은 남자와 여자의 함께 함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4절에 ‘여자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당시 고대 사회나 종교는 가부장적 체제에 있었습니다.
여자들의 활동을 제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전하고 있는 여자들의 활약은 대단합니다.
누가는 특별히 이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을 섬겼던 여자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8:3),
예수님은 가정 일로 바쁜 마르다보다는
마치 랍비의 제자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아래까지 갔던 자들은 여자들뿐이었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다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현장을 처음으로 방문했던 자들도 여자들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눅23:55-56)
사도행전에는 빌립보 교회의 루디아부터 여성 사역자 브리스길라,
예언하는 빌립의 딸들까지 등장합니다. 여성들의 활동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한 마음으로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총신대에서 불거진 여성 목회자 안수 문제는 좀 안타깝습니다.
총신대학교 한 여성 강사가 모임에서 여성 안수와 관련한 기도를 했다고 해서
이미 예정되었던 강의를 폐강시켜버렸습니다.
합동을 비롯한 몇몇 교단들은 여전히 여성안수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여성이 공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렇다면 여성 전도사 제도는 왜 두고,
여성들을 사역에 왜 그렇게 많이 동원하고 있습니까?
집에만 있게 하지. 다 남자와 자신들의 특권일 뿐이고 잘못된 관행일 뿐입니다.
성경에는 당시 로마 사회의 문화 때문에, 여성의 공개적 사역을 제한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동시에 성경에는 여성의 가르치는 활동을 장려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가부장적 문화가 사라져가고 있는 이 시대에도
여성 안수를 금지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는 천주교도 여전히 보수적입니다.
사제는 남자만 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래서는 교회가 온전히 한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가뜩이나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많아지는 현 문화에서는 말입니다.
▲초대교회에서 하나 됨을 유지하는 데는 예수님의 가족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이 언급됩니다.
이들은 예수님 공생애기간 동안에는 예수님의 사역에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집으로 끌어오려 했습니다.
사역하는데 가족들이 함께 하지 않으면 참 힘듭니다.
공생애 기간 중에는 그러지 못했지만
예수님 부활 후 이들은 늦게서야 예수님을 인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에 열심 하였고 이것이 교회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사역에, 예수님의 가족의 참여는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발언이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사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예수님의 가족들은 긍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베드로를 이어서 예루살렘 교회를 잘 이끌었습니다.
‘낙타무릎’이라 불릴 정도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의하면 60년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밀어뜨림을 당하고
결국 돌에 맞아 죽는 순교를 하였습니다.
가족들이 희생하고 헌신하면 교회에 큰 힘이 됩니다.
▲문제는 우리 한국교회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족의 개입은 희생과 헌신이 아니라
특권과 군림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초대교회처럼 가난하고 고난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세습이라면
그것은 칭송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세습과 가족의 참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공교회성을 약화시키고 교회를 분열시킬 위험성도 있습니다.
*후대 역사의 평가나, 그 실제 결과를 지켜볼 일입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교회가 필요하고,
이런 교회에서만이 자발적 헌신이나 성장이 가능합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이들은 모여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아마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12절에서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기도했다는 표현에서 ‘마가의 다락방’이라 추정합니다.
이 다락방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다락방입니다.
아마 오순절 성령강림도 이곳에서 기도하다가 받았을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시온 산 근처의 2층 다락방을 방문하게 됩니다.
백여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제법 큽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모여 기도했습니다.
옛날 개역 성경에서는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하였고
개정판에서는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고 하였습니다.
과거 진행형 형태의 완곡법입니다. 지속적인 행동을 묘사합니다.
이를 ‘오로지’ ‘전혀’ 라는 단어를 써서 강조합니다.
영어 단어들은 ‘constantly’라는 부사를 덧붙입니다.
이들의 기도는 단회적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매일 반복했습니다.
2장 42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처럼 기도에 전념했던 이유는, 기도할 때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기도할 때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기도할 때 환상을 보았습니다. 기도할 때 옥문이 열렸습니다.
기도할 때 합당한 사람이 세워졌고, 성령께서 새로운 사역지로 인도하셨습니다.
기도가 모든 막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였고, 모든 능력의 근원이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일찍이 예수님을 통해서 경험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세례 받으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세울 때 기도하셨습니다. 주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변화산상에서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비유의 많은 부분이 기도에 관한 비유들입니다.
밤중에 찾아온 벗의 비유,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걸인의 비유,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 비유 등.
주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기도의 말씀들인데,
누가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시더라도, 예수님은 그 능력을 기도함으로 받았습니다.
▲인간인 제자들은 물어 무엇 하겠습니까?
사도들은 자신의 본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6:4)
이방인 고넬료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행10:4, 31)
우리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능력의 근원이 기도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공동체가 기도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힘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간절히 기도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기도했지만 그 결과가 우리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때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뻐하시지 않는 기도는 응답이 오히려 해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시간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가 기도의 맥을 놓고 있었다면 다시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쓰면서, 초대교회의 위대한 사역과 그 사역은
바로 기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다시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 능력을 잃어버린 누가 시대의 교회를 향한 누가의 격려일 것입니다.
누가 시대는 초대 교회의 열정과 비전과 능력이 사라져가는 시대였습니다.
누가는 초대교회의 역사를 쓰면서, 다시 이 열정을 불러일으키길 원합니다.
그 능력의 비결은 기도에 있었습니다.
기도의 도전을 우리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능력이 살아나는 저와 여러분과 우리들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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