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끝까지 행1:6-8 16.05.29.스크랩, 출처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바로 지금입니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것은, 종말과 함께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합니다.
이방인과 죄인들의 통치로 이 땅은 더러워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을 정화하고 하나님의 의와 생명과 평화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나라가 임박했음을 선포하시고 다녔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임재를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인으로 보고 이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매정합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7)
제자들의 호기심과 기대를 원천적으로 차단시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쓸데없는 데 관심 두지 마. 때가 되면 어련히 아버지께서 임하게 하실 거야.
너희는 너희 할 일이나 제대로 해.”란 투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좀 머쓱했을 것입니다. 3년 내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만 말씀하시고
이제는 부활까지 하셨으면서 정작 그때가 된 듯한데, 더 이상 관심 갖지 말라니...
▲주님은 종말에 대한 관심을 차단시키면서, 다시 제자들에게 성령에 주목하도록 만드십니다.
우리 말 성경은 8절에 ‘오직’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원문인 ‘그러나’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은 성령을 받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다른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다른 데 관심두지 말고, 오직 성령을 기다리고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바깥일에 신경 쓰기 전에, 먼저 자신이 변화되고 능력을 받으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주체적 변화에 대한 요구입니다. 내 안에 먼저 하나님 나라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되어야
그 하나님 나라는 임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얼굴만 바라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있으면 의기양양하고,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의기소침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언제까지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겠습니까? 이제는 자기 스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가 밖에 있어서는 안 되고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가 내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가 되어 주도적으로 이끌며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곧 하나님 나라는 자기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성령 받아서 변화되고 능력 받는 게 중요합니다.
일반 사회 운동이나 정치 운동은 구조나 법을 바꾸려고 하지만
기독교는 사람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아무리 구조를 바꾸어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 사람이 바뀌어야 세계가 바뀝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을 받아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갈 때
바로 거기에 하나님 나라는 임하고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수피 바야지드의 기도문).
내가 젊었을 때 나는 혁명가였고 하느님께 드린 나의 기도는
“주여 저에게 세상을 뒤엎을 힘을 주소서.”였네.
그러나 내가 중년에 이르러 내 인생의 절반이 덧없이 흘렀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기도의 내용을 바꾸었네.
“주여 저에게 저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힘을 주소서.”
그러나 나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주위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을 보았네.
이제 내가 늙고 여생을 헤아리게 되면서 나는 나의 우둔함을 눈치 채게 되었다네.
지금의 내 기도는 이렇게 되었네.
“주여 저에게 내 자신을 변화시킬 힘을 주소서!”
내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했더라면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을 거야.
다른 사람 바꾸려고 하지 마십시오. 바꿀 수도 없습니다. 자기를 바꾸십시오.
자꾸 세상 탓하지 말고, 환경 탓하지 말고 자기를 바꾸십시오. 그러면 세상이 바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온 영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성령 받아야 믿어지고, 성령 받아야 생각이 바뀌고, 성령 받아야 능력 받고,
성령을 받아야 온갖 악한 습관이 끊어집니다.
성령충만을 받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자주 오해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믿음이 생기고, 방언을 말하고,
심지어 예언을 행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게 다가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를 신비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성령이 임할 때 일어나는 더 중요한 변화는 자기 생각(자아)이 죽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이 죽는 것입니다. 대신 예수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자기를 복종시킵니다. 그럴 때 능력이 나옵니다.
◑권능을 받고
성령을 받으면 권능이 생깁니다. 8절 “너희가 권능을 받고”에서 ‘권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영어 단어가 ‘다이너마이트’입니다.
다이너마이트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 안에 쥘만한 정도의 크기인데
그것이 터지면 집채 만한 바위를 부서뜨립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능력자가 됩니다.
▲그 증거는 베드로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였습니다. 그는 어린 계집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했던 겁쟁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게 되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담대히 설교를 합니다.
그 유창한 설교에 사람들이 저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며 의아해할 정도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3천 명, 5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능력입니다. 예수님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사도들은 병든 자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는 엄청난 능력을 행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행했던 권능의 행전입니다.
▲이 능력은 어떠한 고난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담대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권력자들이 복음 전파를 방해하자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행4:29)
위협 앞에 달아나던 제자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채찍에 맞고 빌립보 지하 감옥에 갇혔지만
그것이 그를 절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찬양과 감사가 폭발했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
그러자 차꼬가 풀리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성령을 받은 성 프란체스코의 가난과 고행은, 중세의 부패와 무기력을 일시에 바꾸어버렸습니다.
로마서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다 성령을 받았던 루터의 종교 개혁은, 중세 시대를 마감하게 만들었습니다.
종교개혁기에 스코틀랜드의 앤 여왕은 개혁자 존 낙스를 가리켜
“유럽의 1만 군대보다 그의 기도가 더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 안에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의 새로운 신학 운동은 자유주의자들이 놀던 놀이터에 폭탄을 던져버렸습니다.
일거에 신학의 흐름을 인간 중심성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다시 세워 놓았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그 안에 폭탄을 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수 애양원을 설립했던 손양원 목사님은
그 안에 폭탄 정도가 아니라, 사랑의 원자탄을 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해방 직후 여순 사건 때 공산당들에 의해서 자기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기 수양 아들로 삼았습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랑이 원수도 이념도 녹였던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 생가에 가면 기념관이 있는데
그 기념관을 원자탄 모양으로 형상화해 놓았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무기력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고 세상이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의 침략을 피해 밀을 포도주 틀에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작은 지파 변변찮은 가문의 사람이었고 겁쟁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를 찾아온 여호와의 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6:12)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작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알아보았고 기드온은 그 기대대로 3백 용사를 데리고 가서 미디안의 대군을 물리칩니다.
◑땅 끝까지
성령이 임하면 한계를 돌파하는 인생이 됩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한계를 돌파하고 복음이 전진해가는 모습입니다.
1-7장은 예루살렘을, 8-9장은 유다와 사마리아를, 10장 이후는 땅 끝까지 나아갑니다.
사도행전에서 땅 끝은 로마입니다.
이는 단순히 지리적 확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계를 돌파해가는 모습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를 죽였던 곳입니다. 유대교의 본산입니다. 복음은 이 한복판을 점령해갑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과 원수 되었던 민족입니다. 복음은 이 원수 됨도 극복합니다.
땅 끝은 유다의 경계를 넘어 이방 세계를 가리킵니다.
복음이 좁은 유대 민족주의를 넘어서 세계의 종교가 되기까지는 난관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상종도 하지 않을 정도로 배타적이었습니다.
이 배타성을 뛰어넘어 세상의 끝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이 결정적 장애물들을 넘게 하는데 성령이 역사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하고,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하고,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함으로써 복음은 땅 끝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항상 땅 끝을 바라보게 만드십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성령이 임할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환상과 꿈은 vision이고 dream입니다. 단순히 계시를 받는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환상과 꿈을 꾸었던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바울은 아시아 지역 복음 전파가 끝날 무렵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19:21)
복음은 땅 끝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될 인생의 땅 끝은 어디입니까?
바운더리를 작게 그리지 마십시오. 크게 그리십시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일화입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로 유명합니다.
그는 또한 로마제국의 수도를 동쪽으로 옮겨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이라는 대도시를 건설한 황제입니다.
이 대도시를 건설할 때의 모습은 정말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될 정도입니다.
콘스탄티누스가 말을 타고 가면서 창끝으로 선을 그으면 그것이 도시의 경계선이 되었습니다.
D.H. 로렌스가 쓴 유럽사,『역사, 위대한 떨림』이라는 책에서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도시의 경계선을 긋는 날을 정했다... 그는 창으로 선을 그으면서 서서히 행진했다.
그러면 수행원과 측량사들이 정확한 표시를 했다...
사람들은 황제의 뒤를 따라오면서 수도의 면적이 엄청난 데 놀랐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황제에게 그동안 지나온 땅만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콘스탄티누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지금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안내자가 멈추는 게 좋다고 생각할 때까지
계속 걸어갈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다섯 개의 산을 넘어 바다에 닿을 때까지 걸어갔다.”
이렇게 건설된 콘스탄티노플은 서로마가 망한 후로도 천년을 더 지속하며 동로마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시선을 먼 땅 끝을 향하도록 만드십니다.
▲우리 교회의 땅 끝은 어디입니까? 한국교회가 바라보아야 할 땅 끝은 어디입니까? 바로 북한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우리에게는 정확히 북한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루살렘은 어디입니까? 가장 가까운 이웃이지 않습니까?
우리와 북한은 한반도 땅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유대는 어디입니까? 유대는 같은 민족이지 않습니까?
북한은 한 핏줄로 이어지고 같은 언어를 쓰는 한 민족입니다.
우리의 사마리아는 어디입니까? 사마리아는 원수를 말하지 않습니까? 북한이 사마리아입니다.
가장 원수가 되어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땅 끝은 어디입니까? 아프리카입니까? 아니면 지구 반대편 남아메리카 오지입니까?
아닙니다. 북한 땅이 땅 끝입니다.
모든 곳은 다 비행기로 갈 수 있지만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가장 먼 곳 그곳은 북한입니다.
우리는 북한 선교를 위해서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북한선교는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바라보아야 할 땅 끝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이 비전을 품게 하시고,
또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경계심과 미움과 이념도 다 녹여주시길 기도합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
우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려는 목적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증인이라는 헬라어는 ‘마르투스’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마터(martyr)’ 곧 순교자입니다.
예수의 증인들이 다 순교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 모두가 순교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최초의 순교자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그는 헤롯의 손에 의해서 칼로 베임을 당하였습니다.
교회사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네로 황제 때에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인지라 십자가형에 처하지 않고 목을 베이는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지금도 로마의 ‘세 분수 교회’에 가면 바울을 처형했다는 돌기둥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머리가 세 번 튀고 그곳에서 샘이 솟았다고 하여 세 분수 교회라 합니다.
안드레는 헬라 아가야 지역에서 전도하였고 마지막은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래서 X 자형 십자가를 안드레의 십자가라 부릅니다.
세리 마태는 이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다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다 나중에 에베소 지역에 활동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기름 가마에 던져졌으나 살아났으며
밧모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요한계시록 등을 기록했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는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으며 그곳에서 기도하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지금도 인도의 남부 첸나이란 곳에 가면 도마의 유적지가 있습니다.
저도 인도 의료 선교차 갔다가 그곳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도마가 숨어 지내던 동굴이 있는데 거기에는 도마가 기도하던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팔을 대고 기도하던 곳인데 하도 많이 기도하여 11자 모양으로 홈이 날 정도였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즘은 예전처럼 순교자가 흔하지 않고 또 그럴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여전히 계승되고 있습니다.
내가 죽을 때 그리스도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욕심이나 생각이나 정을 죽여야만이 그리스도가 온전히 드러납니다.
입술로도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겠지만 세상은 이제 우리더러 삶으로 증거하라 합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1:5)
가톨릭에서는 순교를 적색 순교와 백색 순교 녹색 순교로 구분합니다.
적색 순교는 원래적 의미로 피를 흘리는 순교를 의미합니다.
백색순교는 “피를 흘리지는 않지만, 철저한 금욕주의를 지켜나가는 사막의 수도자들처럼
순교의 영성으로 살아가는 순교”를 말합니다.
녹색 순교는 “전 생애 동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며,
신앙을 증거하고 자기 자신을 투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 사회의 예수의 증인들은 적색이나 백색 순교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녹색 순교적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탐욕스런 모습에서 세상에 그리스도를 믿겠습니까?
우리의 분열된 모습이나 배타적인 모습에서 세상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얼굴에 있는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성난 얼굴을 보며
세상이 예수님이 주시는 부활의 승리를 느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가 죽는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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