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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위인들의 발걸음을 뒤따르기 / 커크 프랭클린

LNCK 2016. 8. 24. 14:56

영적 위인들의 발걸음을 뒤따르기         11:13~16, 13:13         출처, 정리

 

선교한국 2016 대회 주 강사, 커크 프랭클린 WGA 총재.   Kirk Franklin

   

현대 사회는 영웅을 원합니다.

 

누군가 영웅이 나타나서 우리를 선한 곳으로, 평화로운 곳으로 인도해 주기를 원하죠.

 

왜냐면 온통 세상이 어둡고 힘들고 악하기 때문에,

영웅이 나타나 해결해 주기를 바라죠.

 

그래서 경제계, 정치계는 물론이고,

종교계에서도 영웅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웅이 아무도 안 나타나면, 고의로 만들어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슈퍼맨영화가 나온 겁니다.

 

그런 영웅이 나타나서

우리가 지켜지고, 나쁜 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기를 바라는 심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슈퍼맨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영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과연 누구일까요?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크리스천에게는 <예수님>이 우리의 영웅이십니다.

그 이유는,

먼저는, 예수님의 신분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요.

또한 예수님은 혁명적인 믿음을 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가르침 때문에, 정계도, 교계도 나눠집니다.

 

엄청난 희생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진정한 구세주, 즉 영웅이셨습니다.

사망과 부활을 통해서 온 세상을 구원하신, 역사의 최고 영웅이셨습니다.

 

2.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영웅들>이 나옵니다.

과거 우리 역사에 존재했던 영웅들입니다.

 

이분들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우리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으므로, 그들은 영웅이 맞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이, 믿음으로 에녹이,

믿음으로 노아가,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열방의 아비로 살았습니다.

그 외 바락, 입다, 삼손 등

 

그들은 열악하고 절박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자기 시대에 자기 사명의 길을 굳세게 걸어갔으므로

 

그들은 자기 시대의 영웅이었으며,

또한 후대에, 오늘날 우리 시대에까지, 우리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11:13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16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위 구절에 보면, “믿음이이 영웅들을 인내하고 견디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받기로 약속된 것을 자기 시대에 다 받지 못하였지만요.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약속받은 것을, 완벽하게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약속은 받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게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믿음으로인내하고 견뎠던 사람들입니다.

그 약속의 완전한 성취는, 저 천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 그들이 했던 일은, 약속의 온전한 성취보다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고, 믿음으로 견뎠는데,

 

그것은 장차 하나님이 지으신 도성을 바라보았고, 미래 천국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그 영원한 약속을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영웅이 됩니다.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내가 영웅>이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이 되는 사명을

이 시대에 감당할 수 있을까요?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열방이 언젠가 다 어린양의 보좌를 둘러싸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그 목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함께 모여 찬송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역사의 온 열방과 함께, 모두 모여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7:9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이런 일을 이루려면, 믿음의 조상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걸어갈 길이 있습니다.

 

13:13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1930년에 인도의 간디가 10만명의 대중을 이끌고

소위 단디 마취라고 불리는 소금행진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Salt March

간디의 리더십에 의해서, 10만명의 인도 국민들이 바닷가에 가서 소금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법에 의해서, 일반 시민이 바다에 가서 소금을 만들 수 없게 했습니다.

 

영국식민정부는, 소금에 많은 세금을 부과해서,

많은 돈을 거둬들이는 정책을 벌였기 때문에,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생필품인 소금을, 비싸서 잘 구입할 수 없었습니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을 하면서 소금 법을 허물기 원했기 때문에

대중들을 바닷가로 데리고 가서 평화롭게 소금을 만드는 것을,

아주 좋은 저항 방식으로 여겼습니다. 데모와 소요가 아니라요

 

이렇게 촉발된 시민불복종운동은, 인도의 수백만 천민계층을 불 붙혔고,

그들이 동참해서 궁극적으로 인도의 독립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소금은, 인도 역사상, 인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심벌이 되었습니다.

소금이 없으면, 사람들은 못 산다는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소금이 되는 사명을, 우리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소금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조미료이죠.

또한 비료의 역할도 하고, 방부제의 역할도 합니다.

그래서 음식에 소금을 뿌려야 맛이 나고, 또한 쉽게 상하지도 않습니다.

 

한 가지 희소식은, 이 소금자원이 이 세상에 한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채취하기도 하고, 암염을 땅에서도 캐기도 합니다.

 

옛날에 바다였다가, 지금은 육지가 되어버린 곳에서 캐는 암염은,

가끔 염기가 없는 소금이 채굴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짠 맛을 잃으면 길에 버리운다고 말씀하셨죠. 그냥 흙에 불과하니까요.

 

제가 이번 <선교한국 2016대회>에 참석하면서 *2년 마다 열립니다.

터키 항공을 타고 서울로 왔는데,

기내식을 주면서, 소금이 몇 그램만 들은, 작은 1회용 소금봉지도 함께 주었습니다.

 

아주 작은 소금이지만, 사실 이 정도의 양도

많은 음식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음식 전체의 맛을 내는 데는,

아주 작은양의 소금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양의 소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뜻은,

우리의 믿음의 삶과 존재가, 비록 작은 양이지만,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정말 소금이라면,

이 세상은, 우리 때문에 정말 살만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이 시대의 영웅이라니까요.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살기 어렵고 팍팍한 세상을, 활기차고 아름답고 살 맛 나게 만드는

소금의 역할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엄중한 사명이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소금의 맛을 쉽게 잃을 수도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순결함을 잃을 때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 아무리 소리친다고, 증거한다고.. 되는 일은 없습니다.

 

2. 또한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 세대가 목말라 찾고 있는 영웅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빛은, 영적 도덕적 광체를 비춰내는 것입니다.

 

딤전6:16에서 하나님은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셨는데,

성도의 빛의 원천은, 바로 거기입니다.

그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빛을, 우리가 받아서 반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빛이라고 말씀하실 때,

당시 중동의 정황에서, 이 말씀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세계관에 의하면, 빛과 생명은 동의어입니다.

어둠과 죽음도 동의어이죠.

 

또한 중동에는, 한국과 달리 굉장히 빨리 해가 집니다.

해가 지자마자 갑자기 캄캄해져 버립니다.

아침에도, 어둡다가 갑자기 환해 버립니다. 동 터는 여명 같은 게 없습니다.

이렇게 빛과 어두움의 대조가 아주 극명한 곳입니다.

 

그런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작은 촛불이나 손전등도,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세상 빛이라고 할 때,

아주 작은 빛이라도, 어두운 세상에는 아주 희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아주 캄캄한 가운데 거합니다.

우리 각자는 불을 켜야 합니다. 불을 밝혀야 합니다.

불이 스위치를 끄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등불은 말 아래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이,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면,

스스로 말(됫박) 아래로 숨어버릴 수 있습니다. 잠수탄다고 그러죠.

 

우리는 비록 개인적인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사명인 세상의 빛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계속 빛을 비추는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우리가 먼저 변화 transformation 되어져야 합니다.

 

변화 transformation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을 성실하게 살려면, 절제와 훈련 disciple이 필요합니다.

 

로버트 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가능성,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정말 일어나려면, 우리가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그 훈련 discipline 이란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가능성, 잠재력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훈련은, 자동적으로 시간이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게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기에, 우리 각자에게 어렵습니다.

 

변화 transformation, ‘우리의 본질, 자질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3:21, 12:2절에 그 단어가 나오는데요,

한 마디로 말하면 형태 form가 바뀐다는 trans 뜻입니다.

 

외적 모습이 바뀌는 게 아니라, 속 본질이 변화된 가운데, 겉 형태까지도 바뀌는 것입니다.

, 마음과 생각이 변화되어서, 삶의 태도까지도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변해서, 그 길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12:2

 

3:21절에도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이렇게 변화시키는 주체는, 그리스도이신데,

이건 죽어서 그렇게 되는 것도 뜻하지만,

우리가 살아있을 때도, 소금과 빛으로서, 우리가 변화된..

우리 낮은 몸이,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변화된 사람을 찾을 수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사람 말고, 우리 일상의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변화된 사람은 누구입니까?

 

수년 전에, 저 커크는 남태평양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를 방문했습니다.

그 당시에, 현지인들이 프랑스를 대항해서 시민항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뉴칼레도니아 사람들은, 정령숭배 마술을 사용해서

프랑스 군대에 맞서서 싸웠는데요,

그래서 실제로 프랑스 군대가, 밝은 대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항군들이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원주민들이, 야음에 자기를 숨긴 게 아니라

백주 대낮에 갑자기 나타나서, 프랑스 군대를 공격했다고 하는데요,

그들이 시야에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공격을 받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가자

프랑스 군대는 원주민들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수년 후에 제가 그곳에 가서,

제가 그 저항군 중 일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제게 어떤 해코지를 하지나 않을까, 속으로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안내인은, 제게 그런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면 '저들이 이제 다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제 제가 그들이 함께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는데요,

정말 그 화음과 그 찬양의 영감이,

제가 마치 천상의 하모니를 듣는 듯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정령숭배적 주술과 폭력적 저항에서 벗어나서

마음과 행위가 변화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시민이 된 것을.. 제가 목격했습니다.

이제는 대항을 하되, 아주 평화스런 방식으로 대항을 한다고 합니다.

 

지난 2010년에 3차 로잔 대회에서 <로잔 헌신>이라는

아주 중요한 성명서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Lausanne Committment

 

그 중에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크리스천과 불신자 사이에 그 삶과 행위의 차이가 별로 없다면,

예를 들어서 부정부패와, 탐욕에 있어서,

성적 문란과 이혼율에 있어서,

방탕한 삶과, 인종차별에 있어서,

소비적(낭비적) 삶과, 사회적 편견에 있어서,

 

 

만약 신자와 불신자간에, 별로 차이가 없다면, 소위 개긴도긴이면

그런 크리스천 신자나 교회가, 아무리 복음을 외쳐서 전파해도

아무런 권위가 없는,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분야의 삶에 있어서,

신자나 불신자가 별로 차이가 없다면,

불신자가 왜 크리스천이 되려 하겠습니까?

아무런 고상함이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하는데요.

 

돈이나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신자나 불신자나 별반 차이가 없다면, 그 가치관이 똑같다면,

한 마디로, 전도의 말에 권위가 서지 않는 것이 되죠.

 

저는, 아주 어린 영아 때부터, 성경번역선교사였던 부모님을 따라서

파푸아뉴기니에서 자라났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거기 케와 족 언어로 15년만인 1973년에

신약성경 번역을 마치고, 하나님께 봉헌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워파 라는 어린 소년이,

그 봉헌식과 축제를,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다 지켜보았습니다.

 

30년이 지나서, 워파는 이제 어른이 되어서

저희 부모님이 미국에 계신다는 것을 알아내어,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그는 지금 거기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30년 전에 봉헌했던 성경책들은, 다 나눠주어서 없어지고

또 창고에 남아 있던 일부 책들도, 벌레가 먹어서 다 헤어졌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희 부모님은 다시 파푸아뉴기니의 케와 종족에게 가서

케와어 신약성경 개정판을 다시 만들어서, 출판했습니다.

 

저도 그 의미 있는 기념식에 같이 참석했었는데,

3천 명의 케와족 크리스천들이, 교회를 총 망라해서 참석하였습니다.

 

워파 목사가, 그 기념식의 주관자였습니다.

제가 기억한 워파의 모습은, 그 어릴 적 꼬마의 웃는 모습이

아직 그의 얼굴에 남아있었습니다.

 

워파의 얼굴에, 또한 사람들의 얼굴에

다시 개정된 <신약성경>을 갖게 되었으니,

모두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했습니다.

 

그 후 워파는, 자기가 주도해서 <구약성경>을 번역하기로 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와 이메일로 상담을 주고 받으면서

성경번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토의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번역 초기부터, 일이 쉽게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워파가 몸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아직 한창 젊은 나이였는데요. *30대 후반이었겠죠.

 

저 커크는 아주 혼동스러웠습니다.

왜 이렇게 중요한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 변화된 사람 워파를, 천국으로 데려가시는가?’

 

제가 그 해답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자기 삶이 변화된 한 사람 워파를 통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압니다.

 

변화된 사람은,

자기가 변화되기 이전의 삶으로 결코 되돌아가지 못합니다.

혹시 실족할 때가 있어도, 금방 다시 돌아옵니다.

 

 

성경번역과 세계선교

 

아프리카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간은 우리 친구가 아니므로, 즉 기다려주지 않으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

 

지금 세계인구의 33%는 자기가 크리스천이라 주장합니다.

그 말은 세계인구의 2/3가 불신자이고, 그곳에 교회도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번역은, 세계인구 2/3정도의 언어로 완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번역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가, 히브리어나 헬라어만으로 기록되어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7:9절에 보면, 천국에

세계 여러 열방과 민족과 방언의 신자들이 다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 완성된 미래 모습을 볼 때, 지금 우리가 여러 민족 언어와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례로, 초대교회 시절 북아프리카 지역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거기서 베르베르 족이 기독교를 믿고 있었는데,

그들 교회에서는 라틴어를 썼고, 라틴(로마)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슬프게도 7세기에 북아프리카에 이슬람교가 밀려들어왔을 때,

북아프리카의 기독교는, 거의 모두가 빠르게 이슬람화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역사학자들이, 그 이유를 연구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뚜렷한 한 가지 이유는,

그 베르베르 족은, 자신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이,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니까,

그래서 참된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으니까,

 

그 결과 구제, 평등, 상대적으로 부패하지 않은 정부,

또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이슬람의 거센 파도 앞에

그만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르베르 부족 언어로 성경이 최초로 번역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 한국선교사들이 거기에 파송되어 결국 이루었습니다. *아마 신약만

 

그런데 에티오피아의 경우는, 위와 정 반대입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5세기부터 벌써 그 나라 말로 성경이 번역되고, 읽혀졌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지난 20세기 동안, 역사의 풍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건재해 내려왔고,

오늘날에도 에티오피아의 기독교는 아주 세력이 강합니다.

 

저는 지금 호주 멜버른에 살고 있는데, 인구는 5백만입니다.

거기 기독교 서점에 가면, 영어성경만 50가지 다른 역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민족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갖고 있으면, 교회가 든든히 서 있다는데,

그런데 왜 호주는, 그 케이스에 해당이 안 되고, 오히려 감소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호주 사람들은, 성경을 옛날 고대문서 쯤으로 취급합니다.

오늘날 왜 우리가 그 퀘퀘 묵은 옛날 책을 믿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대부분 서구교회가 걸어갔던 길처럼

호주도 지금, 경제가 발전하면서, 삶이 넉넉해지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세속주의와 물질의 풍부한 소비로 인해서,

사람들의 영혼이 피폐해져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 대해, 회의하고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이런 현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성경의 진리에 대해, 의심하고 회의적인 그들 현대인들에게

 

기독교라는 어떤 지식이 아니라

-맛을 내는 소금의 삶

-빛을 발하는 성도의 삶을 통해서

그 영광과, 그 고상함과, 그 고결한 권위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일상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그렇게 살아내야하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스티브 에디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된 기독교 교회 역사는, 재정지원이나 자원의 지원을 풍부하게 받은

개인이나 교회에 의해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에 의해서, 그 역사가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 각자를

그 분의 지상명령에,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 되는 일에 초대하고 계신데요,

그 일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룰 것입니까?

 

우리는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치욕을 우리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안락한 곳에서 나간다는 것은,

지금 상황보다 더 고통스런 곳으로 간다는 뜻인데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웅이셨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

그리고 교회역사에 나오는 여러 영웅들이 계십니다.

 

오늘날에는 누가 영웅입니까?

영웅이라고 해서, 진짜 무슨 슈퍼맨이 되거나, 큰 능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요,

 

아주 작은 존재이지만

작은 양의 소금이, 많은 음식의 맛을 내게 하고요,

작은 촛불이라도, 캄캄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영웅인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도,

자기 시대에서는 그리 큰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자기 앞에 주어진 그 사명을, 빛과 소금으로서 감당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오늘날 영웅이 맞습니까?

우리는 담대한 겸손을 가집시다.

겸손한 담대함을 가집시다.

 

그런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

지금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역이, 주님을 더욱 닮아가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깨달아졌다면,

그 부족한 영역을 바꾸고 성장시키기 위해서, 나는 어떤 결단을 하고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 시간 눈을 감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