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회하는 기도 시70:5 1871.10.29. 영어 출처
Pleading / Charles Spurgeon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 시70:5
지금도 그렇지만, 공립교육이 정착되지 않았던 옛날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젊은 청년이 미술이나 상업을 배우는 가장 지름길은,
그 방면의 대가를 찾아가서, 그의 문하생으로서 배우는 길이었습니다.
기도를 배우기 원하는 신자는,
많은 시편기도를 썼던 다윗에게 가서 배워야 합니다.
◑기도의 첫 단계는 <죄의 고백>입니다.
기도할 때는 언제나 ‘죄를 고백하는 마음, 자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레슬링 선수가, 또는 스포츠 선수가
시합에 들어갈 때는, 가장 간편한 복장으로 나아갑니다.
거추장스런 모든 것은 다 벗어버립니다.
기도를 드리려는 사람도, 먼저 ‘고백’을 통해, 자기 영혼에 거추장스런 것들을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기도를 달리기 주자에 비유해 봅니다.
뭘 잔뜩 매달고 달리는 사람이, 기도의 경주에서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기도는, 먼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영혼의 무거운 짐들을, 먼저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기도를 드리는 중에, 또는 기도를 마치고 나면
마음에 잔잔한 평화가 임해야 정상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회개를, 진실된 죄의 고백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죄의 고백이 없는 기도는, 그런 신자는
어쩌면 주님을 믿는 것도, 아직 아닐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위로부터 내려주신 믿음을 가진 성도는,
늘 자기 죄를 깨닫고, 죄의 용서를 탄원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구제하는 사람들을 보십시다.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온정을 베풉니다.
도움을 원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온정을 베풀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눈먼 소경이, 자기의 처지를 인정하고 도움을 구했을 때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지요. 아니면 길에서 그냥 그를 지나치셨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 말에, 너희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자기들이 영적으로 소경임을,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음을
주님께 탄원하고, 고백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기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백의 기도, 탄원의 기도를 통해
나 자신의 영적으로 헐벗은 처지를 겸손히 주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 사죄의 은총을 받고, 영안이 열릴 것입니다.
▲오늘날 모태교인처럼 교회를 다니지만, 마음에 평화가 없고
아직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기도할 때마다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더욱 솔직하게, 더욱 진지하게, 더욱 구체적으로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의 은총도,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이 위에서 부어주셔야 가능한 것이지만,
그렇게 회개에 힘쓰는 사람에게, 위에서 회개의 은총이 부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아무 것도 숨기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악을 이미 다 아십니다.
하지만 내가 그 죄를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회개 기도를 드리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 회개의 은총을 간구하는 가운데,
자기 죄를 세밀하게 찾아내어, 그걸 인정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벌거벗기십시오.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사소한 죄라도, 민감하게 회개하십시오.
죄를 사소하게 취급하지 마십 시오. 그런 죄는 없습니다.
내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없었더라면, 내가 내 죄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것도 영원히요.
그러므로 죄를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죄든지, 회개를 가볍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슬쩍 모르는 체 해 주시는 죄,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엄격하셔서, 내가 이런 죄도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회개할 때, ‘내가 죄를 여기는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
‘주님이 죄를 여기시는 엄중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반역했고, 감사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하나님을 격노시킴에 대해서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게 내게는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죄에 대해 항상 그 죄값보다 가볍게 여겨서, 가볍게 회개하는 경향이 있지만,
아닙니다. 오히려 더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 죄의 무게보다, 훨씬 더 무겁습니다.
내가 내 죄를 무겁게 여기지만, 그것은 실제 죄의 무게의 절반 밖에 못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이 회개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죄의 무게의 10%밖에
회개 했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회심 안 한 사람들’의 회개가 이렇죠.
그런데 참고로, 스펄전을 위시한 대부분 사람들은 다 ‘극단적 회심론자’들입니다.
그런데 회개하다 보면, 하나님이 회개의 은총을 위에서 부어주셔서
‘오 제가 하늘과, 사람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청소년기의 죄, 젊어서 지은 죄,
자기 마음으로 지은 죄, 자기가 잊어버린 죄,
자기가 직접 범한 죄를 다 인정하고 회개하게 되는 거죠.
믿지만,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은 죄,
복음으로 살지 못한 죄,
회개의 은총이 부어질 때, 과거에 죄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죄다 죄로 보이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양심을 비추셔서, 깨닫게 하실 때,
자기 과거 인생 전체가, 죄투성이, 죄범벅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깊은 회개를 하고 나면, 신비한 하늘의 역사로
자기 마음에 하나님의 평화가 깃드는 것이죠.
우리가 회개하며 스스로 죄인 임을 인정하면
주님은 우리를 무죄로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기 목에 밧줄을 걸면, (죽을 죄인 임을 인정하면)
‘내가 아들 예수의 공로로 너를 사면하노라’는 판결을 받는 것입니다.
그 반대는, 그 반대의 판결입니다.
이 세상 법정에서 제일 큰 죄는 ‘반역죄’입니다. 하늘 법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왕께서, 반역자를 봐 주실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하나님은,
마치 어린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자기 죄를 고백할 때, 기꺼이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처럼,
회개하고 탄원하는 우리를, 기꺼이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의 다윗처럼, 어린 아이처럼,
또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 시70:5
▲교회에서 함께 모여 예배드릴 때도, 우리는 이 시70:5절의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I am poor and needy. 나는 심령이 가난하고, 영혼이 궁핍하오니
Pity on me.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주님 앞에 모일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항상 상하고, 통회하고, 가난한 심령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그 겸비한 심령에, 위로부터 성령이 임하시면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죄인에게 임하실 수 없습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는 상한 심령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성령님이 그 빛으로 우리 교회를 비춰주시지 않는다면,
성령님이 우리 교회에 임하지 않으신다면, 얼마나 큰 재앙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로 함께 모였을 때도,
회개하며, 자신을 낮추며,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공동체 위에, 성령님이 임재하시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계시던 성령님도, 떠나가 버리십니다.
"Not by might nor by power, but by my Spirit, saith the Lord.
이는 힘으로도 아니 되고, 능으로도 아니 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4:6
▲기드온의 예를 살펴보십시다. 그가 두 가지 표적을 구했는데요.
제 생각에,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가르쳐 주셨던 그 교훈을
지금 우리 모두가 배우기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이 교훈을 깨우친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것입니다.
기드온이 양털을 땅에 놓았을 때, 아침에 이슬이 내렸는데 보니까
그 주변 땅은 다 마르고, 양털만 이슬에 젖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에 다 같이 앉아있지만,
소수 일부는, 성령의 은혜를 촉촉이 받고, 양털처럼요,
그 주위 대다수는, 마른 땅처럼, 아무 은혜도 못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령님이 이 교회를 방문/임재하신다고 해도,
양털만 젖어있고, 그 주위 땅은 마른채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그 반대로 되었습니다.
양털은 마르고, 그 주위의 모든 땅은, 이슬에 젖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은혜로, 자신의 뜻에 따라서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어제 성령을 받았지만, 오늘 그는 못 받을 수도 있고요,
어제 성령을 못 받았지만, 오늘 그는 성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누구의 개인 소유물이나, 독점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회개하는 그에게, 성령은 임하십니다.
바람은 임의로 붑니다. 사람이 바람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낮아지고, 통회하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로 부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어떤 높은 직책의 사람이나,
어떤 능력의 사람이 사역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바람이 불면, 아무리 낮고 비천한 사람이라도
그는 능력있게 일하는 것입니다.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4:6
▲예수님은, 오천명을 먹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기들이 가진 것을 먼저 모으게 하셨습니다.
자기들이 가진 것이 너무 미약하다는 것을,
보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먼저 제자들을 겸손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5천명이 먹고 나서도,
제자들은, 그 기적을 온전히 믿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보게 하셨습니다.
그 보리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것이었는지를요.
그래서 제자들이 절망했습니다.
‘이것으로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가득 잡게 하실 때에도,
먼저 빈그물로 절망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밤새 그물을 내렸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나이다.’
이 고백을 하게 하신 후에, 그물에 가득 잡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회개의 기도란, 통회의 기도란,
그렇게 우리가 먼저 기도로 ‘빈그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오병이어 뿐임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슥4:6절의 성령의 역사가 온전히 나타나니까요.
자신들의 고기잡이 기술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이렇게 빈그물, 빈도시락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게 되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회개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무능함과 nothing이요,
오히려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인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킬 때,
무교병과 유월절 어린 양을 먹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해야 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집 안에, 유교병 (누룩 든 빵)을 먼저 내어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먼저 자기 옛 능력과, 옛 자신감과, 옛 사람을 내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유월절 어린양의 양식을 취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성령이 임하시는 유월절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능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성령님이 교회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먼저 제단에, 나무에, 제물에, 물을 네 번이나 길어다 부은 것입니다.
물이 흘러넘쳐서, 도랑에 흐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물범벅이 된 거죠.
그래서 어떤 발화제나 화학용품이 있어도, 다 물에 젖어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백성들과 바알의 제사장들에게
‘하늘에서 불이 정확히 내린 것이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고,
*바알의 선지자들은, 제단 밑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서 불을 붙이기도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는 태도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일부 사역자들은, 자기 부모의 유산이나 도움을 일절 거절합니다.
또한 자기 제자들에게도, 먼저 부모로부터 떠나는 훈련을 시킵니다.
그래서 완전히 맨손으로, 믿음으로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살지, 사람의 인위적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자세입니다.
불이 하늘에서 내려서, 제단의 제물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도랑의 물까지 핥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백성들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가 하나님시다.’를 외쳤습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부은 네 번의 물은
하나님의 성령의 불이 임하기 전에, 네 번 우리를 좌절시킴에 비유됩니다.
-우리가 용기를 잃게 되고
-우리가 슬픔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낮추십니다.
그래서 무슨 설교자가 잘나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게 아니라
교회가 크고 유명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완전히 밑바닥인 상태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우리를 비우시기 전에,
우리가 기도로, 통회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회개하며 비우는 것입니다.
본문의 다윗처럼 ‘나는 가난하고 궁핍합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성령이,
그 개인에, 그 교회에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슥4:6절 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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