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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보다 순종이 우선

LNCK 2017. 2. 10. 16:24

수영로교회 이규현 목사 - 계획보다 순종이 우선이다 - YouTube

 

계획보다 순종이 우선                히11:8~12              17.01.08설교 스크랩

 

철새들이 때가 되면 자기 갈 곳으로 날아가는데

목표지점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1,500km 이상 긴 코스를 쉬지 않고 날아가는데

자기들이 머물러야 할 곳을 정확히 잘 찾아간다고 그래요. 참 신기합니다.

뇌에 GPS가 달려 있는듯한 느낌이 들죠.

 

종종 우리는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목표점을 향해 가다가 길을 잃을 때가 많아요.

 

연초가 되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합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

디렉션. 방향을 잡는데요.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이 길로 가면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미래에 대한 전망을 많이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점쟁이를 찾아가고 토정비결을 찾고

어떻게 해야 내 인생에 길이 있고

내가 원하는 지점에 갈 것인가 미래에 대한 염려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믿음의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어디론가 가고 있죠. 가만히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에겐 목적지가 있습니다. 정말 제대로 가는 길인지, 미래가 있는 것인지.

이 길로 가면 미래가 열릴 것인지.. 고민을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서 그 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죠.

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너무 유명한 말씀이죠.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우리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첫 부름을 받을 때

첫 번째 하나님 메시지는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보여준 땅이 아니에요. 본문도 마찬가지죠.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갈 바를 알지 못했다.

 

특이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데

목적지를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겁니다.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1. 그러니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는 겁니다.

나아갈 때는 어디로 갈 지 모르는 겁니다.

 

어디로 가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나와라’.

 

하나님 부르심의 특징은 육하원칙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에 항상 부담스러운 부분이 이것입니다.

 

확실한 것을 보장받고 떠나고 싶은데, 확실한 것을 보장해주지 않는 거예요.

이게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의 출발지점에선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과 정반대죠. 세상에선 대체로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다 따지고 확인하고 점검하고 분명해야 출발합니다.

 

목적지도 분명하지 않고 지도도 없는데, 길을 떠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길은 불확실한 출발을 한다는 거죠.

믿음의 삶이란 불확실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확실한 것만 원한다면 믿음의 길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 확실한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가겠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길을 갈 수가 없어요.

 

믿음의 삶은 선택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확실한 것은 단지 하나,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것. 그것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부르신 분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믿음의 길은 무모하고 위험해보입니다.

믿음은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이가 75세입니다.

75세라고 하면 굉장히 안정된 삶을 살아야 할 나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순종하는데 어떻게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났다는 겁니다.

 

당시의 문화에서 부족을 떠난다는 것은 미래는 물론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은 장막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옮겨 다니는 유목민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엔 모두가 정착민입니다. 정착을 하고 사는데

아브라함은 유목민을 선택한 겁니다.

정처 없이 떠나는 겁니다. 초원을 따라 초목지를 따라 끊임없이 옮기는 문화.

 

유목민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지평선을 향해 나아갑니다.

유목민 삶의 특징은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텐트 생활을 한 거죠.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신유목민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국경을 쉽게 넘나들고 유학생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태어난 곳을 다 떠나요.

대부분의 우리 젊은이들이 글로벌 기업에 들어가면 국적이 의미가 없습니다.

늘 돌아다닙니다.

 

태어난 곳에서 살지 않고 이주해가는 현대의 젊은이들을

우리는 신유목민이라고 합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유목민이 농경민보다 우월했습니다.

칭기즈칸을 통해서도 확인한 바 있지만, 정착하는 순간부터 야성이 사라집니다.

 

믿음의 삶은 정착민보다 유목민의 삶과 비슷합니다.

믿음의 삶은 안정된 삶을 거부하고 불안정한 삶으로 떠나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믿음의 삶은 닫힌 구조가 아니라

열린 구조로 이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닫힌 공간에 살면 안정감이 있죠. 안정감.

그러나 열린 사회로 나아가려 하면

자기가 살던 삶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외부 세계와 단절을 만들고 성을 쌓게 만드는 겁니다.

 

가인이 첫 번째 성을 쌓은 사람입니다. 가인이 성을 쌓으면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아벨을 죽이고 난 뒤의 두려움. 떠난 자의 두려움이 성을 만들었어요.

 

그러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성을 쌓는 문화는 문명이 무너졌습니다.

닫힌 세계는 삶의 안정감이 목표가 돼요.

그러면 자연히 믿음의 삶과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성을 높이 쌓을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 최초의 바벨탑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성을 무너뜨려버리셨죠.

믿음의 삶은 닫힌 구조가 아니라, 열린 구조를 추구합니다.

 

요즘은 모두가 이 세상에 다 열려있습니다.

교통도 통신도 다 열려서 고도로 발달해서 왕래가 워낙 자유롭게 오가죠.

 

또 인터넷을 통해서 세상이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야 해요.

믿음은 우리를 닫힌 구조에서 열린 구조의 삶으로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우리를 넓게 보고 멀리 보게 합니다. 우리 시야의 폭을 넓혀줍니다.

하나님은 부족 안에 갇혀 있던 한 사람을 이끌어내서

모든 민족의 통로로 삼고자 그를 이끌어내신 것이죠.

 

만약 아브라함이 갇혀 살았다면 그 인생은 그것으로 끝났을 겁니다.

불러내신 이유는 네 인생을 통하여 더 넓게, 부족의 삶에서

모든 열방에게 모든 민족에게로. 개인의 복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 통로로 삼기 위해 그를 이끌어내신 것이죠.

 

그러므로 유목민적인 삶, 안정된 삶을 벗어나

바깥으로 열린 세계로 나아가는 삶이 선교적 삶입니다.

 

믿음의 삶은 선교적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선교사가 될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선교적 삶은 살아야 합니다.

 

선교적 삶은 유목민적 삶입니다.

약간 불안정한 삶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끊임없이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는 옮길 수 있는 바꿀 수 있는

그런 옮겨가기 위한 떠남의 영성을 항상 갖고 있어야

우리의 믿음이 건강해지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란이나 갈대가 우르라고 하는 작은 정착촌에 머물러 있는 한 사람을

이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도록 이끌어내신 것입니다.

 

올 한 해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어떤 안정된 삶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두렵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가 반응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현실의 삶에서 이끌어내셔서

더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우리의 삶을 불러주심을 믿습니다.

 

2. 믿음의 삶을 살려면 떠남에 대한 두려움과 맞서야 합니다.

믿음의 삶은 두려움과 맞서야 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 나아간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큰 강적이 뭐냐면 두려움입니다.

 

이 한 해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 안에 다양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있어도 두려움이 있으면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 아이디어의 싸움이 아닙니다.

지식과 정보의 싸움이 아니라 두려움이에요.

 

아이디어도 있고 정보도 있고 지식도 많은데

두려움이 있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너무도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이 싸움 한가운데에서

아침에 날만 새면 저쪽에 큰 블레셋의 용사인 골리앗이 쩌렁쩌렁한 소리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막 도전합니다.

그 안에 이스라엘 백성의 안에 있는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들어와 보니까 골리앗이 하나님을 욕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어요. 골리앗에 대한 정보 분석도 하지 않았어요.

전력을 비교하거나 싸움을 할 만한가 분석하지 않았어요.

실패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런 것도 고민하지 않았어요.

 

다윗은 굉장히 단순했습니다. 신속하게 돌을 들고 믿음으로 나갔을 뿐이에요.

순종하는 행동만, 다윗을 보면 순종하는 행동만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멀리 생각하는 게 아니라 순종하는 겁니다.

생각하고 생각하면 답이 나오느냐 생각하면 답이 안 나오고 복잡해집니다.

따지기만 하다 보면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의논도 너무 많이 하면 안돼요.

이 사람 저 사람 얘기 듣다보면 아무 것도 안돼요.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옮겨나가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634절에 매우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은 633절의 말씀이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런데 우리는 이 33절만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 33절의 말씀을 살려고 하면

34절이 필요합니다. 34절의 삶을 살아야 33절의 말씀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승리하는 비결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는 것입니다.

너무 멀리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염려하고 고민하지 말라는 것.

 

염려가 많은 이유는 뭘까요?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는 거예요.

믿음의 삶이란 단순해요.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오늘 하루 믿음으로 옮겨나가는 순종을 하면 그게 믿음의 삶이란 거죠.

 

여러분 계획 너무 많이 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아이들이 보면 방학 때,

부모가 교육을 좀 하고 공부를 좀 하고 놀고 그래야지.

그러면 시간표를 멋있게 막 그려요. 아침에 일찍 6시 기상하고 먹자말자

공부하고 뭐 그냥. 도표 만들어서 시간 단위로 쪼개서 노는 시간 별로 없어요.

 

부모들이 감동해요, 그 시간표를 보면.

얘가 이제 뭐 될려는가 보다.

시간표를 다 지켰을까요? 지켰으면 역사가 뒤집어졌죠.

여러분. 계획을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3.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주님의 계획을 찾으십시오!

<새로운 미래가 온다> 다니엘 핑커라는 분이 썼는데, 미래학자죠.

그런 책이 있습니다. 새로운 미래가 온다.

 

그분이 방한을 해서 기자들이 조언을 해달라,

물어보니 한 말이 뭐냐면 계획을 너무 세우지 마라.’

미래학자가 한 말이에요.

 

미래학자가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말은 특이한 조언입니다.

숨은 뜻은 뭘까요?

 

세상은 너무도 복잡할 뿐만 아니라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나의 예상을 벗어나 돌아가기 때문에

내가 계획을 세운 게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계획을 세우는 일 대신에 멋진 실수를 해보라고 조언합니다.

어리석은 실수는 반복해선 안 되지만

실수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조금씩 배워가면서

자신이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가는 것이

미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많은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 속에서 실수를 하면서

반복하면서 자기가 조금씩 배워가면서 성장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게 믿음의 삶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었습니다.

 

10절을 보시면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시며.

매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길은 하나님이 계획해놓으신 길을 따라간 거예요.

 

그 순종의 삶이 아브라함의 인생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계획 세우다가 볼 일 다 봐요.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계획했던 대로 삶을 이끌어온 분이 있습니까.

저만 봐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길로 왔어요.

 

제가 호주로 갔던 것들도 마찬가지고

모든 길에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길로 가게 됐어요.

 

제 생각에 호주라는 것은 있지도 않았어요.

호주는 우리 아버지가 호주인 줄만 알았어요. 이것을 일명 아재개그라고 해요.

 

희한한 길로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한 번도 꿈꿔보지 못한 세상으로.

앞으로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노 플랜.

 

여러분. 내가 계획해서 여기 온 게 아니에요.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길로 온 겁니다.

 

내 계획이 아니라 다른 계획이 있다는 거 아니에요.

나보다 더 크신 분의 계획이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잠언 169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굉장히 중요한 말씀, 연초에 이런 말씀을 꼭 붙잡아야 해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하는 것은 자유이나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그 절대 주권은 마음대로 폭군처럼 이끌어가시는 게 아니라

아주 정교하게 당신의 계획을 세워놓으신,

그 섭리대로 우리 인생을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잠언 1921절의 말씀도 비슷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있으리라.’

 

여러분 인생을 계획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우리가 계획을 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어요.

 

그러나 우리의 기가 막힌 계획이 어느 한순간 뒤틀려지고 무너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계획을 세워야죠.

그러나 그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해야 합니다.

 

우리가 언뜻 보기에 하나님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여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완전합니다. 계획을 세우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계획이 더 중요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거기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4. 계획보다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준비해야 될 것이 있다면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이미 계획되어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짠 계획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메시지가 아주 선명합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의 생애를 딱 보면

우리 걸어갈 길의 모델이 되잖아요. 아브라함의 메시지가 뭡니까?

 

그가 자신의 머리를 굴리고 자신의 계획과 방법에 충실했던 순간은

최악의 인생이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그대로 순종한 것에는 기가 막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최악의 사건은 뭡니까?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이에요.

자기의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가를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것.

자기 아내를 통하여 하나님이 언약의 씨를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머리를 굴리고 변수를 쓴 거잖아요. 자기의 머리와 계획에서 나온 겁니다.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 이게 역사의 불운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을 제단에 바치라고 하는 이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사건,

이 명령 앞에 왜 죽여야 하는지 전혀 언급이 없는데

 

무조건 제단에 올려 바치라는 그 말씀에

마치 무뇌아처럼 그저 순종만 했더니 거기서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섭리를 보여주는 십자가 사건이 창세기 22장에 나타납니다.

 

우리 생각이 너무 많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면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순종의 삶을 익히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마다 이성과 싸운 경험들이 가로막죠.

 

기독교는 이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상식을 존중합니다.

경험의 세계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성과 경험보다 말씀,

하나님의 진리가 더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정보를 분석하려고 하면 불가능합니다.

더 많이 알려는 태도보다는 더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이 연초에 우리가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태도는

더 많이 뭔가를 알고자 하는 태도보다 순종하려는 태도!

 

믿음의 삶은 우리 이성과 경험의 벽을 뛰어넘게 합니다.

자신의 세계 안에서 믿음 생활을 하려고 하면 아주 어렵습니다.

 

믿음의 삶을 살 때 우리 예상과는 다르게 펼쳐집니다.

그때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길은

세상의 방식과 계산으로 안 맞아야 정상입니다.

세상의 방식과 똑같으면 하나님이 세상과 똑같은 거죠.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방식과 세상이 제시하시는 방식이 달라야 그게 정상입니다.

믿음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12절에 보니까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믿음으로 하루하루 순종할 때

우리의 경험의 세계를 벗어난 놀라운 결과가 열리는 것을 지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없었던 것 같은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허다한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게 된

이 놀라운 출발점이 어디 있었느냐?

 

인간적인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할 때 이뤄진 결과라고 말씀하는 거죠.

믿음의 삶은 노 플랜, 계획이 없어요. 저스트 오베이. 그냥 순종하는 것.

노 플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불확실한 현실이 아닙니다.

 

5.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십시오!

 

아브라함의 삶은 불투명했지만 갈수록 비전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그 비전이 뭡니까? 우리가 비전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가장 확실한 비전이 무엇일까요?

 

창세기 15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라는, 이 환상이 다른 말로 비전입니다.

아브라함이 본 비전은 무엇일까요? 오늘 여기서 말씀이 선명합니다.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라함이 보았던 환상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 속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방패를 찾고 있었습니다.

 

깊은 상실 속에서 위로와 보상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상과 비전은 하나님 당신이었습니다.

내가 너의 방패요, 내가 너의 상급이다.’

 

비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 신자가 길을 잃을 때 언제 길을 잃느냐 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보이면 길을 잃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가장 어려운 순간은 다른 게 아니라

이스마엘을 낳고 난 이후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아무 말씀도 안 하시잖아요.

 

여러분 우리의 삶의 혼란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보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그 비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 동안 우리의 시선에서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다면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분이 책임져주십니다.

그분이 우리 인생의 개런티가 되는 것이죠.

 

7장을 보면 스데반 집사가 청중들을 향해 설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스데반은 이 부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일 땅으로 가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무엇을 보여주세요?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고향과 친척과 모든 것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게 만들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영광의 하나님이 먼저 보였다는 것. 이 스데반 집사가 본 관점이에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이 불확실한 미래를 내딛을 수 있는 용기가 어디서 나왔느냐,

비전이에요. 비전은 뭡니까.

하나님이 보여졌다는 것. 영광의 하나님.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요.

 

아브라함이 확실히 본 것은 영광의 하나님. 비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자가 보아야 할 최고의 비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알아야 할 레슨은 목적지가 아니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보장도 아닙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그분을 더 알아가는 것.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연말 연초에 특별새벽기도를 하는데,

그 동안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 응답이나

내 삶의 어떤 환경 역전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삶의 모든 것들 가운데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배워가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게 매우 중요합니다.

 

핵심 전공. 하나님을 알아가는 레슨. 이걸 전공해야 합니다.

신자의 모든 삶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더 알아가는

그래서 하나님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한순간 한순간 걸어가면

그 길이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찾고 있는 비전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더 확실해지길 원합니까.

 

여러분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아무리 미래를 연구해도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요즘도 연말이 되면 미래에 대한 책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미래에 대한 전망들을 하고 야단입니다. 얼마나 두꺼운 책들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저도 몇 권을 읽어봤습니다. 미래에 대해 훤히 잡히는 게 아니고

그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독후감은, ‘미래는 모르겠다.’입니다. 모르겠어요.

 

아마 미래학자들도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하는데

학자니까 많이 만들어놓은 거죠.

 

여러분 우리 이 땅에 모든 삶에 아무리 고민하고 계획을 하고

데이터를 확보해도 우리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갈수록 삶은 불확실해집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고.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시고.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그 하나님 한 분만이 확실한 분이시고.

그분을 더 알아갈수록 우리 인생은 더 클리어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늘 불확실하고 위험한 길의 도상에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불확실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도 하시고 명령도 하시지만. 구체적인 설명서는 없어요.

결론을 툭 던져놓으시고 시종일관 우리의 순종에 주목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은 초기에 실수를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을 점점 더 선명하게 봅니다.

 

처음에는 아주 희미하게 하나님이 보였다가. 점점 그게 밝아집니다.

아주 HD 화질처럼 선명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믿음의 길에서 때로는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믿음을 선택한 순간에 모든 삶의 근거가 흔들리고 요동칠 수 있습니다.

 

지도를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목적지를 묻지 마십시오.

우리 삶의 이정표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어요.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누가 확실한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면 그건 속이는 거예요.

 

믿음이란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 없어요. 하나님만 확실합니다.

 

괜히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확실하게 하겠다고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해선 안돼요.

우리가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오늘 하루 즐거워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는

이 세상에 특별한 보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을 우리가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가능성을 믿지 마십시오. 신기루입니다.

많은 얘기들이 무엇을 하면 가능성이 있을 거래요.

가능성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건 도박이잖아요.

거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건다는 것은 얼마나 불확실합니까.

 

믿음의 삶은 불확실해보이지만 아니요, 가장 확실한 삶입니다.

우리의 가능성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상황을 믿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조건이나 상황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터닝 포인트죠. 창세기 156절의 말씀.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주 단순한 구절이에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러분 이 말은 많은 게 들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어떤 다른 것을 믿는 게 아니에요.

 

주어진 상황이나 가능성을 찾고 지금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주변 상황은 아무것도 믿을 게 없는 거죠. 자기는 나이 많고. 자식은 없고.

점점 늙어가고. 주변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져 가는 현실밖에 없었어요.

근데 아브라함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 번 다른 단계로 나아가는

하나의 출발점이 바로 이 구절이에요.

 

여호와를 믿으니.’

아무것도 믿을 것 없는 상황 속에서 오직 그분을 믿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의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하나님!

 

확실한 미래는 아무것도 없어요. 확실한 미래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언제나 옳은 분이시고 언제나 선한 분이시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 모든 것입니다.

 

현재도 미래도 하나님밖에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그가 믿었다는 것. 그래서 그를 의로 여기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미래가 불안하십니까.

미래를 위해서 무엇인가가 준비 안 되어 있어서 불안하십니까. 그게 아니에요.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내 삶을 온전히 맡기지 못해서 찾아오는

불안일 수 있어요.

 

우리 지금 형편도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믿음의 눈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거예요.

 

우리 시선이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면 두려움 없이 용기 있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길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면 우리는 그 순간 길을 잃어버려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이고

그리고 믿음을 가졌다면 두려움 없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 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의 길을 나서라는 겁니다.

 

마치는 말

올 한 해 우리가 해야 할 많은 계획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내일 내 삶에 주어진 말씀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결단을 해야할 순간입니다. 그것이 미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준비입니다.

 

가장 확실한 삶은 말씀에 단순히 반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매일 주어진 말씀을 따라 한 걸은 한 걸음 묵묵히 걸어가는 삶보다

더 확실한 미래를 위한 준비는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순종이 미래가 되는 거예요. 순종이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삶입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하는 거고.

지금 맡겨진 일에 충성하라고 하면 충성하는 거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매일 주시는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는 것이

내 인생의 미래가 된다는 겁니다.

 

여호수아 1장에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가나안을 정복하기 직전에.

네가 발로 밟는 땅을 다 너에게 주겠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가나안 땅을 다 허락해놓으셨어요. 가면 다 되게 되어 있어요.

중요한 건 발로 밟아야 합니다. 발로 밟아야 네게 주겠다.

 

발로 밟는다는 건 순종입니다.

가라고 하는 명령 앞에 순종하면 순종한만큼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먼 미래를 생각하고 너무 많이 생각하니 복잡한 거에요. 믿음의 삶은 단순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주는 메시지도 단순합니다. 발로 밟으려면 어떻게 해요.

백 미터 날아갑니까. 아니에요. 한 걸음입니다. 에브리데이 한 걸음이에요.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 앞에 한 걸음 순종해나가는 것입니다.

 

거창한 계획을 내려놓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그 길을 가다보면 그 삶이 내 인생의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계획을 해서 내가 그 길을 걸어가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에 구체적으로 순종의 발걸음을 옮기면

그것이 내 인생의 미래가 될 줄로 믿습니다.

 

가장 확실한 미래가 내 삶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순종하는 것이 축복이 됩니다.

 

순종한 것이 내 미래가 됩니다. 순종하는 것이 내 인생에

모든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멈춰서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속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의 약속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동사형으로 움직였던 것처럼

미래에 대한 계획보다 매일 순종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또 움직이는 삶을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놀라운 일들을 행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끊임없이 옮겨갔어요. 다소 위험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위험한 발걸음을 내딛었어요. 믿은 것은 하나뿐입니다.

안정된 현실이 아니라 영원히 견고하신 하나님.

그것만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뚜벅뚜벅 매일 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

거기에 놀라운 역사와 기적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순종이 미래입니다. 순종이 비전입니다. 순종이 여러분에게 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머리를 단순화시키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순종하도록

여러분의 인생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한 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 삶 가운데 주신 하나님의 말씀들을

붙잡고 올 한 해 살기 원합니다. 두렵지만 믿음으로 발걸음 옮기기 원합니다.

주님 너무 많은 계획으로 우리의 머리가 복잡해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우리 삶에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순종하여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첫 걸음은 두렵지만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고.

주님의 말씀 앞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그러면 순종하는 만큼 위대한 역사가 우리 앞에 열릴 줄로 믿습니다. 아멘.

 

 

타자 J.H.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