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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회에 대한 10가지 고발장 中 (3~4장)

LNCK 2017. 9. 29. 20:31

www.youtube.com/watch?v=vyn9OSnPSho

◈현대 교회에 대한 10가지 고발장 (3장, 4)             요16:8

 

 

 

3. 세 번째 고발입니다: 인간의 고질적인 병폐를 언급하지 못하는 것.

 

다시 말하면, 인간은 아주 고질적인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그런 인간의 타고난 상태와

또한 그가 살면서 더하여 짓는 죄를, 계속 언급해서

사람들을 늘 회개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인데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계속 하면서도

자신이 고질적인 죄인(전적 타락)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또 자신이 살면서 짓는 자범죄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는 것이

세 번째 고발장의 요지입니다.

 

성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인 로마서에서

바울이 그 책의 처음 세 장(1~3)

오직 한 가지만을 말하기 위해 썼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 한 가지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점과,

모든 사람들을 정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죄가 바울의 가장 위대한 신학적 업적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결말도 아니고, 최종 목적도 아닙니다.

그것은 독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구원에 내어드리기 전에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바로 정죄아래 있다는 사실이죠.

 

아담의 후손인 사람은 아주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께로 데려가려면

그들의 모든 육신의 죄의 소욕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 없는 영혼 구원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고질적인 죄로부터 돌이킴과 회개가 없다면

당신은 진정 구원받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사실은 모든 면에 있어 중요합니다만

전도에 있어서는 특히 중요합니다.

 

전도할 때,

자연인들은 롬1~3장에서 말씀하듯이, 죄인임을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세주를 간절히 찾도록 해야 하며,

회개하고 예수를 믿도록, 그래서 새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야 하는데요.

 

나는 기억합니다.

제가 21살 때 설교자로 막 부르심을 받았을 때였는데,

나는 교역자들에게 반값으로 양복을 파는 어느 오래된 가게에 갔습니다.

그들은 50~60년을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거기에는 한 늙은 노인이 서 있었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것이죠. 그 양복집에서 마주친 것이죠.

 

저는 그의 이름도 몰랐는데, 그는 걸어 들어와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습니다.

 

젊은이, 설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구먼. 그렇지?”

나는 말했습니다. “, 선생님.”

 

그는 아주 늙은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건물 바로 바깥에 있는 저 건물이 보이나?”

.”

 

거기서 내가 설교했었지.

그때는 하나님의 영이 내려와서, 교회당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고,

영혼들이 구원받곤 했지...”

 

나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것에 대해 좀 더 말씀해 주세요.”

 

그때는 요즘과 같은 인스턴트 전도가 없었어.

우리는 2~3주간 동안 설교를 하고서도

죄인들에게 영접하도록 인위적으로 초대하지도 않았지.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실 때까지 사모하고 기다리며

그들의 마음을 쟁기질하고, 쟁기질하고, 또 쟁기질하기만 했지.”

 

나 폴 워셔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러 오셨을 때를

어떻게 아셨나요?”

 

글쎄, 그냥 예를 하나 들어주지.

수십 년 전에 내가 이 가게에 양복을 사러 왔었다네.

그런데 가게 앞 길에서 낯선 사람이 내게 30불을 주면서 말하더군.

목사님, 양복 한 벌을 사십시오.’

 

그리고 내가 가게 문을 밀고 들어왔을 때

가게를 맡고 있던 젊은 점원이 나를 봤을 때

바닥에 엎드려서 소리쳤다네.

누가 나같이 악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나는 하나님의 영이 그곳에 임했다는 것을 알았지.”

 

즉 과거에는 전도할 때, 결신할 때

성령의 임재의 역사가 있었고, 사람들이 그걸 사모했고,

그 강력한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인스턴트식 전도와 결신은, 그 때는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냥 사람들에게 가서 잠깐 설명하고,

세 가지의 기초적인 질문을 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요청하는

기도를 할 것인지 그들에게 물어봅니다.

 

이렇게 해서 정말 전도가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인스턴트로 영접한 사람은 진짜 신자가 아닌데,

그는 자기가 정말 신자가 되었고, 천국에 가게 된 줄 알고

그렇게 착각하며 남은 생애를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두 번 다시는 복음에 마음을 열지 않을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레너드 레이븐힐이 즐겨하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가 왜 많은 장소에서 오직 한번만

설교하는지 이해할 겁니다.”

 

레너드 레이븐힐이 설교할 때는,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든지 말든지

죄를 강력하게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초청 받지 못한 적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현대교회가 죄를 피상적으로 다룰 때,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령과 대적해서 싸우게 됩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16:8

 

왜냐면 성령은 죄에 대해서 책망 convict하십니다.

죄를 지적하시고, 죄를 드러내시고, 회개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현대교회는, 죄를 피상적으로만 언급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근심하시고, 점점 소멸되시는 교회로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신자들에게 영원보다는 지금 현세에가장 만족한 삶을 주는데

더 신경 쓰는 아주 유명한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설교에

죄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자랑하기까지 합니다.

 

나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성령은 그들의 사역과 싸우게 될까봐

그들의 사역에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시게 됩니다.

즉 성령이 떠나버리시는 교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오셔서 죄악된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이

성령의 주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아십시오.

여러분이, 구체적으로, 열정적으로, 사랑으로, 사람들과

그들의 타락한 상태를 다루지 않는다면,

성령은 여러분 주변에 절대 거하지 않으십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목자들처럼

우리가 인간의 고질적 병폐를 가볍게 다룬다면

우리는 예레미야시대의 거짓선지자들처럼 됩니다.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건성으로)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6:14

 

누군가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기 싫어서,

그 사람이 자기를 싫어하거나, 자신에게 화를 낼까봐,

그 사람이 슬퍼 질까봐, 신자들의 죄를 책망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마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부인하는 의사와 같이

속이는 자일뿐 아니라, 부도덕한 의사가 됩니다.

 

진실한 의사는,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사실을, 환자들에게 정직히 말해 줍니다.

 

요즘 설교자들은 이렇게 제게 말합니다.

폴 형제님, 당신은 목회 현실을 이해 못하는군요.

우리는 요한 웨슬리 시대의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시대는, 휫필드나 에드워즈가 설교했던 문화와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많이 상처입고 있어요. 현실이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사로서의 자존감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설교는 담대히 전할 수 없습니다.

현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분들의 변명에 대한,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은, 휫필드, 웨슬리, 에드워즈의 삶을 연구해 본적 있으십니까?

그들이 설교했던 것들은,

그 당시 그들의 문화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아무도

그들의 복음적 설교를 듣기 좋아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듣기 괴로운 복음이 정직히 전해졌을 때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다음의 둘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짐승처럼 사납게 설교자들을 대적하거나

-아니면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의지가 박약하고 자존감self-esteem이 낮다는

사람들에 대해서,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지금 현대사회는 자존감의 병폐로 병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존감self-esteem을 병적으로 소중히 다룹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다들 하나님보다 자기 자존감을 더욱 사랑해서

그게 우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self-esteem 타령이나 핑계를 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어쨌거나 설교자가, 죄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을 때

우리는 또한 도둑들입니다. 우리는 도둑들입니다.

참 목자가 아니고, 도둑이요, 강도인 것입니다. 10:1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어제 밤을 비추었던 별들이, 오늘 오후에는 다 어디로 갔나요?

어느 우주의 거인이 바구니를 타고 와서

별들을 다 따서 담아가지고 다른 곳으로 가져갔나요?

 

그것들은 거기에 그대로 있었지만

여러분은 그것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밤이 되어 하늘이 점점 어두워져서 캄캄해지면

별들이 그 영광의 풍성함 가운데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인간의 전적 타락성에 대해 가르치기를 거부할 때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의 십자가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영광은

우리의 타락성 가운데서, 그 캄캄한 흑암 가운데서

가장 밝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여인은, 사랑함이 더욱 많았습니다.

그래서 옥합도 깨트릴 수 있었습니다.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면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 알았기 때문에

더 많이 용서받았던 것입니다. 7:47

 

,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악한지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그로 인해 그들은, 결코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게 됩니다.

 

 

4. 네 번째 고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무지

 

오늘 나는 여러분께 이 나라가

복음 위에 굳게 서 있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미국)는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복음에 대해 무지합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병폐는, 극단적 정치인들도,

사회주의도, 할리우드나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위기는, 복음에 무지한

우리 시대의 소위 복음주의 목사와 설교자와 우리 시대의 전도자입니다.

거기에 병폐가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사회에 어떤 빛과 소금의 역할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교회의 위기가, 사회의 위기로까지 확산되고 있어도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무지는, 사회의 병폐의 근본적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

네 가지 영적인 진리(사영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 원하시는 5가지로 축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가 하는 기도를 따라하면

그들이 거듭났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거듭남 born again’결심주의 decisionism’와 맞바꾸었습니다.

거듭남은 마치 천지창조와 같은, 성령의 신비한 재창조 역사인데

그걸 마치 자기가 결심하기만 하면, 100% 다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복음에 대해 무지한 세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놀라는 것은,

제가 이런 사실을 말한 후에

얼마나 많은 30, 40대의 신실한 분들이

내게 와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폴 형제, 내 인생에서 이런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속과 구원의 역사적(옛부터 내려오던) 교리입니다.

그 복음의 진리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급속히 변질된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인데,

그것은 사람의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복음에는 큰 두 기둥이 있는데,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기둥이 서로 부합하지 않습니다.

둘은 서로 모순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용서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죄인을 또한 용서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면서

동시에 악한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악인을 의롭다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느니라.” 17:15

하나님의 공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은 거의 무시한 채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만 강조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합니다.

위 잠언 구절은, 여호와께서 그런 사람을 가증히 여기신다고 했잖아요.

 

제가 오늘날 복음에 대해 무지하다고 감히 말씀드리는 것은

사람들이 이렇게 한 측면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복음에 대해 무지하고, 모르는 것입니다.

 

물론 하늘 아버지께서 그걸 깨닫게 해 주셔야 하는데.. 16:17

인간의 지식으로는 복음의 진리를 못 깨닫거든요!

 

마틴 로이드 존스와 찰스 스펄전을 읽어보십시오.

로마서 3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죄성과 죄악을 심각하게 다룹니다.

,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사람들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진실로 공의로우시며

모든 사람들은 정말 악한 죄인인데,

공의의 하나님은 악한 자를 정죄, 징벌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기에 앞서

죄에 대해 무섭도록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강조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위대하신 사랑을 나타내셨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완전한 인간으로 사셨던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대로

그는 그 나무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 위에서 그는 우리의 죄를 지고

그의 백성들의 법정에 서서

우리의 죄악을 지고, 십자가에서 그 저주를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었기 때문에

아들 예수님이라도, 십자가에서 외면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외치신 것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아울러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독생자 친아들이라도 외면하실 만큼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무섭게 보시는, 공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온전하게 제시해야 합니다.

한 면만 강조하지 말고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라고 외쳤을 때,

그 잔에 뭐가 있었을까? , 로마의 형틀인 십자가구나.

채찍이구나. 못이었구나...”

 

나는 그리스도가 그 나무 위에서 겪으신 육체적 고난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잔은, 그 아들에게 부어져야 했던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진노 wrath’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그냥 성 angry을 내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wrath!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내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 잔은 진노의 잔이었고, 예수님은 그 잔을 마시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어떤 분은, 복음을 전하면서, 십자가를 설교하면서

채찍질, 못 박힘, 상함 등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만 강조하는데,

고통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복음을 일부분만 이해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 때문에 우리가 용서 받았다기 보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공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그런 하나님의 속성,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속성을 간과한채

그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만 강조하는 것은,

복음을 일부분만 이해한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면서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한 측면만 강조되고

죄인들을 진노하시는 공의의 측면이 무시되고 있기에

제가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합니다!

 

복음 축소주의 Gospel reductionism!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왜 복음이 능력이 없는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이상할 이유가 없지요.

온전한 복음을 전하지 않으니까요!

무지하니까요!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 메시지에 더 이상 능력이 없을 때,

그것으로 사람을 전도하려면,

전도가 안 되니까.. 편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스턴트식 복음!

 

우리는 그런 복음의 대부분이,

아니 전부가 효과가 없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몇 년 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Ph. D. 박사과정에 진학해야 할지 기도하며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의 영적 삶을 지키기 위해

나를,

학문의 세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페루의 정글 한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저는 거기서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스펄전이 말했듯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만 아는데 집중하겠습니다.

그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서 진정한 Ph.D. 박사과정을 독학으로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페루의 정글 속에서요!

그래서 오늘날 제가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기초가, 그때 다져진 것입니다.)

 

제가 아주 화나는 것은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예를 들면 교회 새신자반에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기독교로 들어오는 기초과정으로 끝내버리고,

그걸로 복음에 대한 설명을 다 끝내버리고,

 

그 다음에 교회생활과 더 다른 여러 가르침들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복음을 아는데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친구여, 재림의 날에야

여러분은 복음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천국에 들어가서도

갈보리 십자가의 복음,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시작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몰라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신비와 오묘함이 너무 커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젊은 설교자들은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그분을 따라 그 십자가로, 그것이 의미하는 것으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그가 그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

그분이 그 나무 위에서 하셨던 그 일을 눈곱만큼이라도 안다면,

여러분은 다른 희한한 불을 지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그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산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전혀 저항하지 않고 누워 있었고,

아버지는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드려

자기 아들의 심장을 찌르려고 돌칼을 가져왔습니다.

 

그때 그 노인은 하나님께서 수양을 준비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 그 이야기의 결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결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막간(intermission)일 뿐입니다.

 

모두가 위 창세기 22장을 설교하면서 여호와 이레, 아름다운 결말

결론짓는데, 그건 복음을 모르는 일입니다.

 

수천 년 후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그가 사랑하는 외아들의 이마에 손을 대고 아브라함의 손에서

돌칼을 취하여 그의 충만한 진노 가운데

그의 유일한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창세기22장 모리아산 사건을

신약에 비추어 해석할 때,

그것이 아름다운 결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을 모르고, 십자가를 모르니까

그 사건을 아름다운 결말, 해피엔딩으로 결론짓고 설교를 마칩니다.

 

이제 여러분이 전하는 그 단편적인 복음이

왜 능력이 없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가십시오.

평생 동안 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떠나십시오.

십자가를 연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