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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바다 덮음 같이

LNCK 2017. 10. 13. 17:36

물이 바다 덮음 같이              하박국 2:9-14             17.10.01.스크랩

 

이규현 목사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구원의 소식을 알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유는 구원의 복된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의 소식을 알릴 때는 동시에 다른 한쪽에는 재앙, 심판을 알립니다.

구원을 받으라는 말은 구원을 받지 못하면 재앙이, 심판이 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기 전날 밤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피를 바르지 않은 집에는 재앙이 임해

집안의 모든 첫 소생이 죽는 재앙을 만납니다.

그래서 히브리민족 쪽에는 밤에 기쁨의 소리가 있지만 반대편에는 곡소리가 났습니다.

 

성경은 두 가지를 동시에 이야기합니다.

구원과 심판, 축복과 저주, 천국과 지옥입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 가운데 두 부류가 있었는데

거짓 예언자와 참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거짓 예언자는 자기가 말을 만들어 내어서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각색하고 왜곡시켜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합니다.

 

거짓 예언자일수록 말이 그럴 듯합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없습니다.

재앙이 코앞까지 닥쳐와도 백성들에게 평안과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인기 있는 설교자는 누구였을까요?

당연히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참 예언자들의 설교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듣기 좋은 설교를 원합니다.

설교자는 설교를 할 때 청중을 잘 이해해야 하고 청중의 필요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청중의 필요를 읽지 못하면 말씀과 현실의 괴리가 커서 허공을 치는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청중의 필요에만 집중하면 위험한 설교가 됩니다.

청중의 필요가 절대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유는 청중이 항상 옳은 것만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필요와 감정에만 급급하면 거짓선지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백성들의 필요를 무시하지 않아야지만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입니다.

설교자의 일차적 사명은 백성들의 필요나 교회의 성장 보다

하나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권위는 자신의 의도와 생각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때 주어집니다.

 

백성들의 필요보다 하나님의 중심을 전할 때 충돌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거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보다 하나님의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설교자는 담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기나 혹은 청중의 반응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를 통하여 참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다가

고난과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던

그 참 예언자들은 지금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사야로부터 시작해서 예레미야로 쭉 나오는 그런 선지자들은 역사 속에

그대로 남아 오늘 우리에게 귀한 말씀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달콤한 백성들의 귀를 가려주는 말들을 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역사 속에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긴 설명을 하는 이유는 본문의 설교가

그렇게 듣기 좋은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화 있을 진저인데 그대로 쓰면

이 명절 직전의 설교 제목으로는 너무 적절치 않아

매우 고운 단어로 바꿨습니다마는 내용은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바벨론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화 있을 진저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놀랍게도 예수님이 화 있을 진저라는

저주를 7번에 걸쳐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 진저’ ‘화있을 진저저주를 선포하시는 것이거든요.

 

누구를 향해 하셨겠습니까?

이것은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저주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저주를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 영혼이라도 구원 받는 것이고 복을 받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너로 인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기를 원한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왜 저주를 하실까요?

축복을 거절하고 저주를 자청하는 죄인들의 모습 때문입니다.

악한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그리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인간이 망할 때의 모습을 보면 진짜 자신이 나는 저주를 받겠다.”

작정한 것처럼 살아가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을 통해서 바벨론의 죄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바벨론이 어떻게 파멸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보면서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되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지난주에도 살펴보았던 것처럼 교만입니다.

이 폐망하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첫 번째 이유는 이 교만입니다.

이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4, 5절에서 교만을 계속 언급하십니다. 바벨론의 교만

 

9절의 말씀을 보면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 진저에서

높은 데 깃들려 하며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데 깃들려 하며

여러분 파멸에 이르게 되는 가장 빠른 길은 교만이라는 겁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들이는 죄입니다.

 

바벨론은 웅장한 건물들을 지으며 자신의 힘을 자랑했습니다.

대체적으로 왕들은 자신들의 치적을 위해 웅장한 건물을 짓습니다.

애굽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사막에 만들었고 중국의 만리장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그것을 통하여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높은 건물들 속에는 인간의 자랑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행위 속에 숨어 있는 내적 동기를 아십니다.

교회 건축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물의 크기나 숫자를 결코 자랑해선 안 됩니다.

오늘날도 나라들마다 누가 더 높은 빌딩을 짓는 가로 경쟁을 합니다.

세상은 번영을 자랑합니다.

자본주의 세상의 신은 번영입니다.

힘을 자랑함으로 감히 침략을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상대에게 겁을 줍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합니다.

이런 인간의 자랑을 하나님을 무시하는 쪽으로 변질되는데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은 상징적입니다.

 

창세기 114절을 보면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건설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건설은 해야지요.

그런데 건설은 하는데 그 목적과 의도가 뭐냐는 겁니다.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오만한 거죠.

하늘에 닿게 하여 하나님에 대한 반항

그래서 우리 이름을 내고, 우리의 이름을 내고.. 이것이 문제에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그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할 때

몰락이 임박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고 한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려한 도시 문명은 하나님을 몰아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름을 높입니다.

 

불행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그 자랑하던 것 때문에 망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교만하기 참 쉽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상태에 놓였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모르게 교만에 이르고 그 교만이 우리를 망가뜨리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교만을 경계하고 또 경계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교만을 경계해야합니다.

 

둘째는 바벨론의 불의를 지적합니다.

9절을 다시 보면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부정직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익을 얻고자 하는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빌딩을 짓는 것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힘을 쌓고 성을 건축해 가는 과정을 묻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면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 진저라고 합니다.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

이 바벨론은 다른 나라 사람들을 포로로 붙잡아 와서 노동을 강요하고 착취했습니다.

 

겉으로는 거대한 제국이었지만 불법 위에 세워졌다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스라엘의 백성들도 애굽의 폭정 아래에서 끊임없이 벽돌을 찍어내야 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왕들 중에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게 합니다.

피로 쌓아올린, 피로 쌓아 올린 성읍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은 모든 것을 동원하여 자랑스럽게 성을 쌓았지만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마침내 사라집니다.

불법으로 세워진 것은 없어집니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끌어 모은 것은 사라집니다.

종업원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는 일,

비인격적으로 대우하는 일들은 다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튼튼하게 집을 지어도 성을 쌓아도 그것은 흔들리게 되어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씨를 뿌리지 않고 거두는 것은 불의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불의로 쌓는 일은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일입니다.

? 그렇게 자기는 혈안이 되어 모든 것을 쌓았지만

마침내 다 불에 타고 사라지고 마니까 얼마나 헛된 일이냐는 것이죠.

여러분 피와 땀을 생명을 청춘을 바쳤는데

그것이 허망한 일로 끝이 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우리도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신없이 살다 보면 정말 자칫하면 헛된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엉뚱한 것에 내 인생을 모든 것을 낭비 합니다.

여러분 헛된 일에 생명을 바치는 삶 자체가 심판입니다.

아무 의미 없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한순간에

불타고 사라져버릴 것을 위해서 내 삶을 바치는 것 자체가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살면 그렇게 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라고 하신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세운 성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자랑을 위해 세운 성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성만 안전합니다.

 

시편 127:1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참 정말 변함없는 진리이지요.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세 번째는 바벨론의 욕망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5절에 보면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여기에 보면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이것은 끝없는 욕망을 말합니다.

 

, 교만은 교만이 무서운 것은

이 교만은 자연스럽게 탐심으로 이어집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탐심이 일어납니다.

, 이 욕망 이 탐심 이 욕심은 좀처럼 멈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병처럼 무서운 병도 없습니다.

 

본문 6절에도 보면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 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 진 자여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영토를 넓히기 위해 야욕으로 혈안이 된 바벨론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바벨론 제국은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나라와 나라를 계속 집어삼키는 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10제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멈추지 않는 욕심이 패망을 불러들인다는 겁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 만족하지 못함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이 중독현상이 참 많이 있는데 이 중독현상이 뭐에요?

목마름이에요. 목마름

그래서 뭔가를 채우는데도 목이 마르고 계속 거기에 매달리다 보면

나중에는 내가 자유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 욕심은 만족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터진 웅덩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 두 가지는 같이 붙어 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 하나님을 버린 것

그러면 자연히 밑이 터져버린 물을 가두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어도,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터진 웅덩이

이것이 현대인들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멈추지 못하는 병은 무서운 겁니다.

좀 더! 좀 더!’ ‘좀 더!’ 구하다가 끝까지 가다가 결국은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이 부족해서 망가지는 게 아닙니다.

욕심 때문에 망하는 겁니다.

야고보서 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시험의 출발은 아주 작은 욕심입니다. 아주 작은 욕심!

그런데 욕심에 한 번 끌리면 어떻게 되요? 미혹을 받는다는 겁니다.

, 그러면 이 미혹을 되면 어떤 상태인가? 판단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이게 죽는 길인지 사는 길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그러면 욕심이 내 삶의 운전대를 잡고 드라이브해 갑니다.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욕심이 나를 끌고 가는 겁니다.

그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작은 욕심이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욕심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이 욕심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욕심이 문제에요.

 

, 그다음에 또 하나는 바벨론의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화 있을 진저

12절 다시 봅니다.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 진저

피로 성읍을 건설한다.’는 말은 뭘까요?

바벨론은 포악한 나라였습니다.

역사에 의하면 바벨론은 굉장히 잔인한 나라였습니다.

그냥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만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이웃 나라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걸 즐기는 나라였습니다.

 

폭력의 나라, 폭력으로 세운 나라

폭력은 불법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폭력사회라고 합니다.

갈수록 흉포화 되고 있습니다. 테러가 도처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오늘날의 특성이 폭력성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힘의 과시가 어느 때보다도 팽창해 있습니다.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불러옵니다.

중세기 기독교의 최악의 사건은 십자군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인 전쟁이었지만, 그 피의 전쟁을 통하여 이슬람을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패배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전쟁이었습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폭력적 세상은 말기적 증세입니다.

요즘은 분노사회입니다. 분노조절장애자들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분노를 조절을 못하는 거예요.

 

잔인하고 폭력적인 범죄가 많이 증폭되어졌습니다.

얼마 전에도 10대 여자아이들 둘이 8세 여자 아이를 유괴해서 끔찍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엽기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17, 18살로 동성애 관계로 둘이 작당을 한 거예요.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끔찍한 범죄를 모의하여 저질렀는데 너무도 태연스러웠습니다.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도 우리 사회의 어두움의 단면입니다.

그저 어쩌다가 이런 사건이 일어났겠지 생각하고 넘어가면 안 됩니다.

청소년 범죄율이 높아지고 죄의 질이 굉장히 나빠지며 나이도 계속 어려지고 있습니다.

통계가 나와 있어요. 1112살이 끔찍할 정도에요.

사람을 쉽게 죽이는 이 폭력성은 위험한 증상입니다.

우리사회에 굉장한 아픔입니다.

 

나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폭력성이 넘치면 그 사회, 그 국가는 말기입니다.

여러분 개인에게도 열등감과 우월감이 있는 것처럼

민족에게도 우월의식이 있고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어느 나라에 가면 괜히 우울해지잖아요.

대한민국 이라는 게..

또 어느 나라 가면 좀 약간 기가 죽고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우월감과 열등감이 있는 겁니다.

 

이 열등감에서 폭력성이 나옵니다.

열등감이 심할수록 폭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열등감을 누가 지적하면 못 견디는 겁니다.

너 죽고 나 죽자 에요. 이거 무서운 거죠. 여러분

 

, 이 바벨론 안에 우월의식이 있지만 이 우월의식이 사실은 열등감입니다.

그게 폭력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을 한 인격을 가진 고귀한 존재로 보지 않고 무참하게 죽이는 그 순간

그 폭력성은 하나님에 대한 반항입니다.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반항으로 그 심판을 자초하는 겁니다.

그냥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죽이는

여러분 우리는 요즘 인터넷이나 이런 것에 악풀을 달 때 보면

그 단어나 그 묘사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인격적 살해를 해버리는 거예요.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회에요.

우리 한국 사회는 많이 들끓어 있어요. 좀 잔잔히 가라앉히는

가라앉힐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엇보다도 약자를 짓밟는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입니다.

우리나라도 외국인 노동자 200만 시대입니다.

동남아국가 그 연약한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

많이 회자되고 있잖아요.

임금 착취, 부당한 대우들이 문제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 약자들의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겁니다.

우리는 결과만 보면 안 됩니다. 과정이 중요한 겁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그 과정, 그 쌓아온 과정

하나님이 바벨론의 그 화려함을 보지 않아요.

어떤 과정에서 너희들이 그 나라를 세웠느냐는 거예요.

피의 성읍이라는 거예요. 너희가 피를 흘리고,

다른 사람들의 피를 흘리면서 세운 나라라면 그 나라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칙과 기준을 지켜야 하고

불법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죄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악인은 계속 형통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의 힘이 아주 셉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이 죄의 힘이라는 게 조직적으로 죄가 역사하면

그 죄의 힘이 대단해요.

조직 전체가 인간의 교묘함으로 거짓으로 똘똘 뭉쳐서 죄를 범하면 거대한 거죠.

 

그러나 여러분 죄가 아무리 세다고 해도 하나님이 더 세십니다.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진리가 이깁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행하므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악인이 나를 아무리 힘들게 해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원리와 법칙을 붙잡고 있어야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편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는 매우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하박국서의 큰 주제 중 하나가 전쟁의 문제입니다.

이전쟁의 문제는 다루기가 참 힘이 듭니다.

매우 어려워요.

전쟁이 벌어지면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이슈 중의 이슈는 그 전쟁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가 입니다.

 

지금 하박국 선지자 역시 더 악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 악한 바벨론에 의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백성이라고 하는

이 유다를 침략하고 유린할 수 있는가?

종종 하나님이 어떤 나라를 통해 다른 어떤 나라를 치시도록 허용하실 때도

치는 그 나라가 더 의롭기 때문에 허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벨론이 결코 유다보다 의로운 나라가 아님에도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가나안 정복을 하도록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의 시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의를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불의를 행할 때가 많았습니다.

인간이 주장하는 정의는 불완전합니다.

내가 주장하는 정의를 절대화하면 그것이 곧 불의를 답습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 역시 그가 본 정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사용하여 유다에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는 것을 하나님이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 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 인간이 해석하기 어려운 영역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북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군을 이끌었던 링컨, 남군의 리 장군이 있었고 남북의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때 이야깁니다.

북군의 링컨 쪽에 있는 부하가 링컨을 찾아와 심각하게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런데 링컨은 부하들에게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있도록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끌어들이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바로 서 있는가를 확인하는 겁니다.

 

사실 이 남북전쟁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이슈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탑 이슈는 흑인 노예 제도의 문제였습니다.

링컨은 노예 제도의 해방을 부르짖었고 남쪽은 반대했습니다.

그 반대하는 데에는 논리가 뭐에요?

남쪽은 흑인 노예들이 없으면 모든 일들이 스톱될 수밖에 없는

농사를 감당할 수 없는 노동력의 문제였고 북쪽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이슈가 다르고 접근이 다릅니다.

 

그들은 서로 하나님을 자기의 편에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정의는 쉽게 굽어지는 것을 봅니다.

법이 아무리 좋아도 법을 다루는 인간이 굽어져 있기 때문에

공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를 보면 힘을 통해 정의를 행할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힘을 가진 자들의 편에서 정당화되고 약자를 침략하는 전쟁도 많았습니다.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서 유다는 철저히 망가졌습니다.

누가 더 의로운가는 우리가 판단할 영역이 아닙니다.

가나안을 징벌하라고 하셨을 때도 가나안이 악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스라엘이 의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상대의 악을 비난할 때도 빠지기 쉬운 오류는 무엇입니까?

나는 의롭다는 착각입니다.

바벨론을 통하여 유다를 심판하셨다고 해서 바벨론이 의롭거나

혹은 바벨론의 손을 들어주신 것은 아닙니다.

바벨론 역시 그들의 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역사 속에 사라져 버립니다.

 

이방 나라에 의해서 유다가 전쟁에서 패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 합니다.

왜냐하면 고대사회의 전쟁은 나라와 나라간의 싸움이 아니라

그 나라가 믿는 신과 신의 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신이 진짜 신인가의 대결입니다.

신과 신의 대결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편에서는 사실 모욕적 일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이 실패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것은

이방의 신이 더 탁월하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방치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예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유다가 정복을 당하는 것은 유다 백성들의 편에서 억울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을 당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유다가 자랑하는 여호와의 신을 이길 수 있었다는 것에 환호를 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믿는 신이 어디 있느냐?

 

가끔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열심히 믿고 새벽기도 열심히 다니고 헌금 열심히 하고

누구보다도 교회 봉사 많이 했는데 사업이 실패하고

때론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너의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지금 유다가 그 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영광을 이방 나라 백성들에게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오늘 14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기가 막히는 말씀이 나오는 거지요.

이건 성경에 줄을 쭉 그어야합니다.

 

이것은 뭘까요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말씀하는 겁니다.

악이 번성할 때 사람들은 낙심합니다.

약한 자가 현실 속에서 살아갈 때 그 악인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를 당할 때

절망하지요.

간당간당한 믿음을 가지고 현실 속에 뛰어 들어가 보면

악이 번성하고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불리하게 작동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한순간 믿음을 잃어버릴 번한 순간들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은 잠깐 동안만 승리하는 듯 보일 뿐입니다.

속지 않아야 합니다.

악인의 자랑은 한순간입니다.

인간의 모든 자랑과 영광은 초라하게 끝나고 맙니다.

 

베드로전서 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여러분 모든 육체는 풀과 같아요.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바벨론이 자랑하던 영광은 쇠하고 맙니다.

그렇게 기세등등했던 바벨론은 꺾이고 그 영광은 쇠하고 맙니다.

 

그러면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도다.

여러분 이것이 뭐냐면 유다만이 아니라 바벨론까지도 아니 그 주변의 모든

나라마저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날이 올 것이다.

 

여러분 이 앞의 바다 해운대바다가 가깝잖아요.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위에 물로 가득 차 있는 이 바다

물로 덮여져 있는 바다 거기에서 누가 물을 부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이 바다 덮음같이 어찌 그 앞에서 그 물을 부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한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그날이 곧 올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불의에 눈을 감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스라엘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이방의 노략거리가 되어 비참한 지경까지 갔지만

그것으로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유다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 당신의 섭리의 손길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악한 자 마음대로 힘을 가진 악한 자들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 되고 모든 것이 돌아가는 것 같아 보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초조해집니다. 나 이러다가 끝나는 거 아닌가? 나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닌가?

종종 내가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심, 회의가 들 때가 있을 겁니다.

 

이 거칠고 악한 세상, 교묘하고 거짓이 난무하는 이 세상 한가운데서

내가 믿음을 지키고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신자로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우리의 삶 속에 밀려올 때 우리의 연약한 믿음이

휘청거릴 때가 있습니다.

어려운 현실 속에 무엇이 어떻게 될지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한 부분만 보고 이해가 안 된다고 우리의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헛된 영광이요. 한순간에 불타고 말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한 날이

올 것이라는 겁니다.

 

악한 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결코 가려지지 않습니다.

당장 눈앞에 벌어진 상황만 보고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권자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 위에 우리의 삶을 올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통치해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드시 모든 열방 가운데 드러내실 것을 믿고

때로는 혼란하고 복잡하고 이해되지 않아도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는 믿음으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 드러나는

그날이 속히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 하에 모든 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바깥에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이세상의 그 어떤 사건, 생물 하나도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돌아가고 있는 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이유는 우리가 흔들리지 말아야 할 이유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고 그 바깥에 있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통치 가운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날마다 바라보고 현실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땅에 충만한 그 순간을 바라보며 지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 믿음의 눈을 오늘 일어나는

현실에 두지 않게 하시고 영광으로 충만한 하나님,

그 주권적 통치로 모든 것을 완성하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에서 요동치 않고 승리하는

마침내 승리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타자 : JY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