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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아들을 안은 것 같이

LNCK 2017. 10. 7. 11:14

수영로교회 새물결 새바람 NEW WAVE 이규현 목사 - 자기 아들을 안은 것 같이 - YouTube

 

◈자기 아들을 안은 것 같이             1:29~33            2017.08.27.출처

      

신명기 1장의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다음 세대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가나안에 들어갈 세대들에게

지나간 40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야 할 세대들이 두려움에 차 있는데

그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으로

모세의 관점에서 보면 유언과도 같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본문 앞부분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11일 정도면 갈 수 있는 길을

40년이란 세월동안 걸어갔습니다.

 

그 요인으로 기네스 바네아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이 사건을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부분이 민수기 13장과 14장입니다.

 

가나안 정복하기 보낸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10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 부정적 보고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공포에 사로잡혔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혼란에 빠집니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얼어붙게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본문의 가나안 땅을 내딛어야 할 세대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들 가운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안는 것 같이 하여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부분이 눈에 띱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로 표현되었고

그 아버지가 아들을 안고 통과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여러 곳의 성경에도 발견 됩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는니라

 

이사야 46장 3-4절에 보면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음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하나님이 너희를 안았다는 겁니다.

 

여기 안았다라는 표현은 굉장히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히브리어의 단어를 보면 그저 안아서 이렇게 소극적으로 안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고

길을 걸어가다가 넘어지지 않도록 번쩍 들어 올려 가슴에 품어 주셨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이것을 너희는 내가 업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런 것은 사실 그 시대의 이방 우상들과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바벨론의 신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멸망할 때

내려와서 사람들을 구원해 내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황소신상을 수레에 실어서 성 밖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들이 위기에 있을 때 자신을 안아줄 신이 아니고

도리어 자신들이 신을 안고 가야 할 처지에 대해서 이사야가 비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태어날 때부터 그를 안고 가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품어 돌보듯이 이스라엘을 출애굽 후 광야 40년을

품고 지나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아버지들도 아이들을 안고 업어주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서 애를 많이 씁니다.

어쩌면 부모들은 자식이 일평생 인생의 짐이기도 합니다.

 

자녀를 계속 돌본다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기도 하고

부모의 해야 할 일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자녀들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자식이 부모를 돌보기도 하고

또 아니면 부모가 자녀를 끊임없이 돌보는 이 관계들이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돌봄은 한계가 있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언제까지 돌볼 수가 있을까요그것과 비교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태어날 때부터 백발이 될 때까지 품고 다니십니다.

끝까지 책임을 지신다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가 많습니다.

히브리어에 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도 로 시작하거나 끝나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엘리에셀엘리멜렉나다나엘엘리야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들어갑니다.

 

또 히브리어로 아버지를 아브(ab)'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세의 장남이자 다윗의 형인 엘리압은 과 이 들어갔습니다.

 

은 하나님, '아브'는 아버지니 내 하나님은 아버지시다.’라는 뜻입니다.

아비엘은 하나님은 내 아버지시다입니다. ‘요압은 여호와는 아버지다.’입니다.

아비멜렉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아버지는 왕이시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다.

내 아버지는 왕이시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식의 이름에

하나님이 아버지시다라는 이름을 썼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시대에 통용된 것으로 육신의 아버지가 있지만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야.’라는 겁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아버지여!”라고 하는데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를 가르쳐 줍니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세월이 쌓인다고 신앙이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신앙이 자라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이 자라는 것의 핵심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다는 지식적인 이해가 아니고 교리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아버지라고 하는 아주 친밀한 관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 40년의 이스라엘 격사 속에

하나님이 그들을 안고 지나가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고 혹독하고 척박하며 위험한 곳입니다.

인간의 어떤 재주도 통하지 않는 곳으로

자기의 재주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광야입니다.

어떤 재주와 힘도 인간의 힘과 방식도 통하지 않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곳을 하나님이 백성들을 안고 지나가셨다는 겁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삶을 보면 광야와 같습니다우리의 인생이 정말 광야와 같습니다.

 

기가 막힌 계획으로 우리의 인생을 대비하지만 갑자기 인생의 길이 없어져 버립니다.

혹독한 시련이 예기치 않는 곳에서 불어 닥치면 한순간에 무방비가 됩니다.

내 전공도 내 경륜도 내 나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순간이 올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은 더 앞을 전망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도 전망할 수 없는 광야 같은 인생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모세는 40년을 백성들과 함께 해 오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보았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하늘 문이 열리고

2백만이 되는 사람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습니다.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인도하셨든 하나님의 손길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모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뭘까요?

광야를 지나왔던 백성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가나안 정복을 향해 나아가는 그들에게 다른게 아니라 너의 아버지가 누구냐는 겁니다.

 

가나안을 정복할 세대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더 분명히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미래가 아무리 험악해도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다면 걱정할 것이 없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다 할지라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 되심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그 땅은 그들에게 축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점점 복잡하고 어려워져가고 다원화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도 지금 총체적 어려움에 놓여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미래를 분석한 학자들의 책이나 강연을 들어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집니다답이 없습니다.

 

민수기 13-14장에서 나오는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과 탄식에 빠졌던 것처럼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는 사실이었습니다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그대로 보고한 겁니다.

 

그런데 모세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안으셨다.”고 하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비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딱 한 가지입니다.

너희가 너희 실력으로 광야를 지난 것이 아닌 것처럼

가나안 정복도 너희의 실력과 방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분이 누구인가를 알고

그분이 과거에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

그분과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확인하라는 겁니다.

 

우리 신앙의 매우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누구와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정말 멋있는 표현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시다!”라는 것이 가슴에 와 닿습니까?

 

이스라엘을 가슴에 품고 자나가셨던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이 정말 내 가슴에 와닿습니까?

 

가끔 우리는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너무 크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에게 주목할 리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나와 거리가 먼 분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은 지금 나에게 일어난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아버지로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왜 염려가 일어날까요염려할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기만 한다면

우리 삶의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모세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상을 하도록 이전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는 역사로 끝나지 않고 오늘의 현실의 삶에 영향을 끼칩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그때 그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발견하는 교훈은 인간이 잘 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치명적인 약점이 망각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장 32절에서 처녀가 어찌 그의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이라고 합니다.

 

처녀가 그의 패물을 어떻게 잊겠고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습니까?

그런데 내 백성은 나를 잊었다는 겁니다.

 

모세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난날을 반추하게 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계속적으로 누리는 비결은 기억보존입니다기억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잘 기억하고 보존하고 있습니까?

 

현대사회가 너무 바쁘기 때문에 그 은혜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는 바로 전 날,

모든 애굽의 첫 번째 태어났던 것들이 죽어갈 때

어린양의 보혈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가정에는 재앙이 지나가고

그들을 구원해 내신 날이 유월절입니다.

 

이 유월절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대로 기념하고 지키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우리를 애굽의 노예에서 건져내신

그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잊지 말라는 겁니다.

 

구약시대에 유월절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처럼

신약시대에 우리에게 기억해야 할 것은 성찬식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그 백성들을 구원해냈던 것처럼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는 성찬식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내신 2천 년 전십자가 사건을 우리는 기억하고 또 기억하면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이 행하신 인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으면

오늘 우리의 삶은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은혜란 이스라엘 역사의 한가운데에 우리를 참여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과거의 역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역사 안에

우리도 참여 시켜서 구원의 드라마 안에 우리를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전의 하나님으로 끝나지 않고

여전히 우리의 인생에 역사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계획하셨던 그 드라마로

오늘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들이시는 겁니다.

 

신앙생활이 힘들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점점 나와 동떨어져 있는 분으로 여겨지는 겁니다.

 

때로는 삶이 너무도 힘들고 가혹하여 숨이 턱턱 막히는데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 같을 때입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인 것 같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가해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수없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게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우리에 대해서 문관심한 하나님으로 오해하시는 분이 없습니까?

 

너무 멀리 떨어져 계셔서 내 삶은 정말 치열한데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시고 아버지라고 느껴지지 않는 분 계십니까?

 

우리의 현실과 동 떨어져 계시는 하나님으로 느껴져 우리를 안고 지나가셨다는 표현이

우리에게 와 닿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방황하고 고통할 때

하나님이 내 인생의 답이 되지 않는 것 같은

멀리 계시는 그분이 나의 아버지 맞습니까여기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우리의 그런 오해를 한 방에 날려버릴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2천 년 전갈보리 언덕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면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십자가 앞에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얼마나 가까이 가까워지고자 하셨는지를 알려주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만나면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대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너무도 가깝게 해 주는 그 일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복음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을 놓칠 수 없는 이유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사랑이 어떤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갈보리 언덕이고 십자가입니다.

 

창세기 22장에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친 사건이 나옵니다.

22장에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로 올라가는 과정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아브라함의 마음은 전혀 다루지 않고 순종하는 행위만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본문을 잔인한 하나님으로 묘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자식을 재단에 올려놓는 과정 속에

아버지의 고뇌와 번민과 고통과 절망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다 압니다.

 

그 사건을 기록하신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도 그 아들을 갈보리 언덕에 매다시는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아브라함의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 주려고 하시는 겁니다.

 

누가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놓을 수 있을까요하나님이 바치신 그 아들이 누구입니까?

우리 죄인을 위하여 내어 놓으신 그 아들이 누구입니까?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경험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정면으로 마주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거리가 멀고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무관심하시며

나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분이라고 느끼십니까?

 

십자가를 만나면 그 모든 질문이 다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내 주신 복음의 한가운데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장을 만납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면서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불길에 휩싸여 버립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8장 39절에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를 깨달은 겁니다.

 

오늘 우리 삶의 현실이 쉽지 않고 갈수록 더 힘들어 지는 게 사실입니다.

매일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는 현실은 답답하고 기가 막힙니다광야와 같습니다.

 

가나안을 이야기하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 듯한 10명의 정탐꾼의 보고처럼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두려움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유언처럼 모세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견고하게 붙잡고 우리가 그분의 품에 안겨 있기만 한다면

우리의 인생의 책임은 그분이 지실 것이라는 겁니다.

 

로마서 8장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두려움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염려한다면 아버지의 아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방황을 끝내고 가나안 정착을 앞두고 있습니다.

 

문제는 두려움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도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지만 우리 안의 불신앙으로 인한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에 그 미래는 어두워 보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확인시켜 주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왜 힘듭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약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벼랑 끝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는데 과연 나는?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에 그 아들을 내어 놓으신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우리에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입니다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장 선명하게 알려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이고 내적인 깊은 확신 가운데 그분을 신뢰하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본문 29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의 적입니다.

사단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30~32절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불신앙의 문제입니다.

 

조금만 어려우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하는 불신앙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에 두려움을 주는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두려움을 주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한다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은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시라면 우리는 우리의 방법과 수단을 강구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면

그다음에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등에 업고 가다가 떨어뜨릴 때도 있는데

그것은 더 강하게 하려는 훈련일 뿐이지 죽이려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삶이란 절대자 하나님 그분의 품에 안겨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품을 벗어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까지 우리에게 내어 놓으신 좋으신 아버지시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 앞서 행하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본문 33절 “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시편 23편 6절에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합니다.

 

한순간이 아니라 지금부터 영원까지 책임을 지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시고 영원히 인자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수단과 방법과 재주를 피우며 고집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분의 말씀을 따라 그분의 지시하시는 손끝을 따라

그분의 품에 안겨 믿음으로 살아가면

그분은 정말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책임을 지실 것입니다.

 

끝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고 우리의 앞서 행하시고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타자 JY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