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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10장. 겸손과 자아에 대한 죽음 / 앤드류 머레이

LNCK 2017. 11. 25. 10:00

https://www.youtube.com/watch?v=ob_GMsv-ByU 

겸손 Humility

 

앤드류 머레이

 

 

 

10. 겸손과 자아에 대한 죽음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2:8)

 

겸손은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는 죽음이, 겸손의 완전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자아의 죽음이라는 꽃에 맺히는 완전한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어 겸손하셨고

우리도 걸어가야 할 그 (자아 죽음의 겸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복종하심을 증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자기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죽고 다시 살아나서

아버지의 영광에 이른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즉 우리 자아가 죽을 때,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겸손은, 자신에 대해 죽는 길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포기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때 우리는 타락한 본성에서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얻고,

새로운 성품이 완전하게 탄생하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새로운 성품으로서의 겸손은

우리의 호흡이자 기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의 생명을 제자들에게 전해주셨을 때,

또한 영화롭게 되어 보좌에 앉으신 겸손이신 그분이

성령의 강림으로 실제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그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통해, 이 일을 행할 권세를 얻으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생명은

가장 깊은 본질에 있어서는 죽음에서 나온 생명이자

죽음에 자신을 맡기시고, 죽음 후에 얻은 생명이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오셨던 주님은

한 번 죽으셨다가 이제는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생명, 주님의 위격, 주님의 임재는

죽음과, 죽음으로부터 태어난 생명의 흔적입니다.

 

제자들 안에 있는 생명도 마찬가지로 죽음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아 죽음으로 인도하는 성령이, 즉 계속해서 죽는 신앙이

자기 영혼 안에 거해서 역사할 때만,

주님의 생명이 그를 통해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의 죽음의 표지,

예수님을 진실로 따르는 제자임을 보여주는 표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 죽음의 표지인 겸손입니다.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겸손만이 완전한 죽음으로 이르게 하고,

죽음만이 겸손을 완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과 죽음은 본질 자체에 있어서 하나입니다.

겸손에서 싹이 나서, 죽음을 통해서, 그 열매가 완전하게 무르익습니다.

씨앗, 즉 자연의 이치가 바로 그렇습니다.

 

첫째, 겸손은 완전한 자아의 죽음 perfect death에 이르게 합니다.

겸손은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자로서의 자기 자리를 취하는 것인데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복종하셨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죽음을 통해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잔을 받기를

본성적으로 꺼려하는 자아를, 인성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으로 우리와 같이 되셨는데,

죽음을 통해, 그 자아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아에 대해 죽으셨고,

그분을 시험했던 죄에 대해 죽으셨습니다.

 

즉 죽음으로써, 자아를 이기시고, 죄를 이기셨던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현재는 자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나중에 육신의 죽음으로 완성되겠지요.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생명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만약 무한하신 겸손이 없었다면

주님은 결코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어떻게 내 자아가 죽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제시해 줍니다.

 

자신에 대한 죽음은 우리에게 속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상태이고,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나의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해 나타납니다.

 

실제로 믿는 우리는 현재 죄에 대해 죽은 상태입니다.

그러면 부활과 생명이 나를 통해 나타나야 되는데,

아직 완전히 죽지 못해서, 그 능력과 생명이 조금만 나타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자아의 죽음을 통한 능력이

완전하게 나타나는 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을

우리 각자에게 어느 정도 부여하시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충만한 교제 가운데 들어가고

자기 자아로부터 완전히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겸손하게 낮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 중 하나입니다.

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전적 무능, 무기력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죽이거나 살리기에 전혀 무기력한 자라는 사실에

완전히 동의해야 합니다.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자세로,

온유하고 오래 참고 신뢰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마음으로 엎드려야 합니다.

 

모든 굴욕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자기를 시험하고 고통을 주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을 겸손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이 붙여주신

은혜의 방편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이웃 앞에서 자신이 겸손할 수밖에 없는 모든 기회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머무르기 위한

도움의 수단으로 이롭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기 낮춤을 나타내는 자들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겸손을 전심으로 바라고 있다는 증거로,

겸손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의 사역을 위해

자신을 준비시키는 사람으로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께서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계시하시어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상으로 우리 안에 나타나시고

우리 마음속에 내주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완전한 자아의 죽음에 이르게 하고,

온전하고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경험에 이르는 길은

바로 겸손입니다.

 

둘째, 자아의 죽음만이 겸손을 완전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자신이 기꺼이 겸손하려고 하지만

지나치게 겸손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참된 겸손이 무엇이며,

이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너무 많은 조건과 제한과 추론과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신을 전적으로 겸손에 내맡기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를 주의해야 합니다.

그냥 죽기까지 겸손하면 됩니다.

 

겸손이 완전해지는 것은, 자신에 대한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더 많은 은혜를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진정으로 거룩하게 구별되고,

예수님의 형상을 더욱 닮아가기 위해서는

그 근본 바탕에 자신에 대한 죽음, 자기 자아의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활의 생명으로, 부활의 능력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이

우리의 성품과 습관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설교자가 멸시당하고 거부당하신 예수님,

그분이 십자가를 지신 것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어린 양의 온유하고 비천하신,

온유하고 겸손하신 찾아보기 어렵고

또한 실제로 자기가 추구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온유함죽음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어린 양 안에서 이 둘은 분리될 수 없고,

우리 안에 동일하게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이 온유’, ‘죽음을 감당해야 한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본성은 은혜의 도움이 있더라도 자기 본성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중생한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자아를 결코 완전히 내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 일을 행하시고 이루시고 영원히 완전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번에 영원히 자아에 대하여 우리가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또한 가장 거룩한 성소에 단번에 영원히 들어가신

예수님의 승천 사건을 통해

자아 죽음의 삶을 사는 능력을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허락해 주셨습니다.

 

겸손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영혼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가면

다른 무엇인가가 더 필요하다는 그의 의식이 깨어나지만

그걸 자신의 힘으로 이루려는 소원과 희망은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는 <예수님의 영>의 참된 충만함을 바라고 구하고

얻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영>으로 인해 매일 그분의 충만한 능력 가운데

자신과 죄에 대한 죽음을 이어나가게 하며

겸손이 삶 전체를 아우르는 정신이 되게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6:3)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1)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6:13)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의식 전체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생명력을 불어넣으신 <>으로 가득 찬 가운데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야 합니다.

 

주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육신에 지니고 다니는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로서

자신을 영원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의 삶에는 늘 이중적인 표지가 나타납니다.

1) 그의 삶은 참된 겸손으로 예수님의 무덤까지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의 삶은 죄와 자아에 대해 죽은 가운데

2) 부활의 능력으로 예수님이 계시는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살아나심이 자신의 것이 되도록

믿음으로 요구해야 합니다.

 

자신과 여러 수고로부터의 안식과

하나님의 안식에 이르기 위해

앞서 예수님의 무덤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손에 영혼을 맡기셨던 그리스도와 함께

매일 자신을 겸손하게 하고 낮아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을 일으키시고 높이실 것입니다.

 

매일 아무것도 아닌 자로서 깊이 있게

예수님의 무덤으로 빠져들어 가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살아나심이 우리 안에 나타날 것입니다.

 

사랑이 넘치고, 안식이 있고, 행복이 넘치는 겸손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한 세례를 받고

장자의 명분을 가진 자임을 주장하는 증거가 되게 하십시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10:14)

 

그리스도의 굴욕 humiliation 으로 들어가는 영혼들은

주님 안에서 자신을 죽은 자로 보고 여기는

능력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받은 자들로서

서로를 사랑 안에서 용납하는 가운데

전적인 온유와 겸손으로 행하는 능력 역시 찾아낼 것입니다.

 

죽음의 삶은 그리스도와 같이 온유와 겸손 속에서 발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