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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겸손과 믿음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저는 최근에 어떤 분의 설교에서,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축복은
상점 진열대에 놓여 있는 물건과 비슷해서
그걸 선명하게 볼 수는 있으나
만질 수는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손을 뻗어서 진열대의 물건을 가져가라는 말하면
그는, 중간에 두꺼운 판유리가 가로막고 있어서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평강과 안식,
넘쳐흐르는 사랑과 기쁨,
영원한 교제가 주는 복된 약속들을
분명히 보지만 여전히 중간에
뭔가 가로막는 것이 있음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그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우리의 교만입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은 거저이며 확실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믿음으로의 초청과 격려는 매우 강력하고,
믿음이 주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아주 가깝고 값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축복이
우리의 소유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유일한 장애물은
믿음을 가로막는 어떤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음의 말씀에서 우리의 ‘믿음’을
쓸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교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려고 너희끼리 다투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교만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5:44
위 구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교만’과 ‘믿음’은 본질적으로
도저히 서로 병립할 수 없습니다.
한 개가 있으면, 다른 한 개는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믿음과
겸손이 뿌리를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즉 <참된 겸손>을 소유하는 분량만큼
<참된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을 것입니다.
혹자는 진리에 대한 높은 지식과 강한 확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 마음속에 교만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는 그저 지적인 사람일 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지 못함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믿음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믿음이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갓난아기처럼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두 손 들고 기다리는 자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이란
가장 겸손한 사람의 자세이며,
즉 자기에게 은혜를 통해 주어지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스스로 행할 수 없는
완전히 주님께 의존자로서의 자기 처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겸손은
우리 각자의 영혼이
참된 믿음 가운데 살아가도록 만드는
어떤 몸과 마음의 자세입니다.
교만은
자기를 추구하고, 자기의 뜻을 이루고,
자기를 신뢰하고, 자기를 높이는 것인데
그런 교만이 가장 은밀하게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자신을 더욱 강한 자로 만들어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은총(복)들을 소유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자기를 높임으로서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시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와 그 축복을 인식하고 이해하게 해 주는데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만 구하며
오직 그분만 높임을 받으시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영광만을 추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서로 서로에게서 오는 세상 영광을 구하고,
현세적 영광, 사람으로부터 얻는 명예와 평판을 좇으며 사랑하고,
그것 때문에 질투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도 않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믿음’을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구원은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옵니다.
구원은 십자가 신앙인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겸손과 연합하고,
그분의 겸손을 즐거워하고
Salvation is union with and delight in the humility of Jesus!
그 분의 겸손에 자신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Salvation is participation in the humility of Jesus.
교만은 우리를 강력하게 지배할 때는,
우리 믿음은 약해집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복된 구원을 얻게 하는 겸손한 믿음’을
갈망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배운 적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교만한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교만과 믿음은, 서로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그토록 연약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겸손’과 ‘믿음’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성경에서 더 많은 깊은 상호연관성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속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신 적은 두 경우입니다.
1) 백부장이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겸손한 ‘믿음’에 놀라워하셨습니다. 마8:9~10
2) 가나안 여자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하자
이렇게 자신을 개의 수준까지 기꺼이 낮춘 여인에게
예수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마15:28
두 경우 다
지극한 겸손을 나타내었던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은 ‘네 겸손이 크도다’ 라기 보다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겸손이며,
교만한 믿음은, 사실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서두에,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수많은 은총들이 있지만
그것은 유리진열장에 들어 있는 것처럼,
우리가 보기는 보아도, 그것을 취할 수 없다고 했는데
하나님 앞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자’로 나아오는 겸손은
우리 믿음이 가지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 줍니다.
그래서 순수한 믿음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은총을, 장애 없이 취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위 백부장과 가나안 여인 처럼요!
▲형제들이여, 거룩을 추구하다가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헌신이 금방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믿음을 그토록 피상적이고, 곧 사라지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교만과 자아가 살아서
우리 안에서 얼마나 은밀하게 역사하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조심하지 않습니다.
또 어떻게 하나님이 그분의 강력한 능력을 통해
나에게 임재하심으로써
나의 교만과 자아를 몰아내시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옛 자아를 완전히 대체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만이
우리를 실제로 겸손하게 만들 수 있음을
깊이있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완전하고, 끊임이 없고, 모든 경우의 겸손이
사람을 대할 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아가는 신앙의
근본 바탕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삶의 모든 면에서, 마음의 겸손과 낮아짐이 없이
하나님을 믿거나 그분께 가까이 가고,
혹은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려고 하는 것은
눈 없이 보려 하거나
숨 쉬지 않고 살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늘 범하는 실수가 있는데,
우리는 자기가 교만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풍요를 소유하려는.. 실수와 착각입니다.
자기의 교만한 옛 자아가 늘 살아서 역사하는데,
우리가 순수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 지식적인 믿음은 가질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건 참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에서 스스로를 낮춰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셨던 십자가와 죽음과 무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르는 (높아지시는) 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낮아지고, 예수님처럼 낮아지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원과 열렬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무엇이 우리를 낮춘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기쁘게 여기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의 복된 경험을 한 적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겸손이 부족한 어떤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갈망하는 모습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역을 그럭저럭 해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진실하고 강한 믿음을 가졌는지의 여부를 묻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그럭저럭 열매가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이에 대한 제 답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어느 정도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 축복은
그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사와
그들이 지닌 믿음의 분량에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축복 가운데 일어나는 주님의 역사는
자기 ‘겸손의 부족’으로 방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사역을 그럭저럭 해 나가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매끄럽지 못하고, 풍성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은총이 충만하지 못하고
뭔가 삐걱거리고 흔들거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겸손이 자기 신앙바탕에 자리잡지 못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종종 피상적이거나 일시적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전부가 되시도록 길을 내어드리는,
즉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깊은 겸손은 의심할 바 없이 더 깊고,
더 완전한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진열대의 상품을, 즉 하나님 나라의 은총과 신령한 복을
방해 없이 다 취하게 합니다.
성령께서 능력의 영으로 그들 안에 역사하실 뿐 아니라
은혜의 충만함과 특히 겸손의 충만함으로
그들 안에 거하심으로
거듭난 자들이
이 시대에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능력과 거룩과
확고부동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은 그들과 늘 교통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5:44
이 말씀의 뜻은
사람이 교만하면, 진정한 믿음도 갖지 못하게 된다고
위에서 말씀드렸죠.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려는 욕망과
영광이 주어지지 않을 때 오는 민감함과 고통과 분노를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 후에야 사람과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데서 자유롭게 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에 만족하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무것도 아닌 자세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가운데
믿음이 강해질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으로 더 깊이 낮아질수록
하나님이 믿음의 모든 소원을 이루시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오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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