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II 약2:22~23 벤자민 오 목사
◑믿음과 행함은 서로 일치하지, 서로 상반되지 않습니다
▲로마서의 키워드
먼저 지난 주 설교(구원이란 I)를 잠깐 복습하겠습니다.
로마서1:16~17절의 중요성을 말씀드렸는데요.
이 말씀에 로마서 전체의 모든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속에는 로마서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위 키워드들을 이해하면, 로마서를 이해하는데 너무나 큰 도움이 됩니다.
롬1:17절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로마서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믿으니 그 믿음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다’
여기서 ‘의’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다’입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므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요?
그 믿음을 야고보서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약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것이 창15:6절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과
상반되지 않느냐? 역설적 아니냐?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
약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2: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창15장) 말씀이 (창22장에서)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이 말씀은 언뜻 보면
창15:6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매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과
롬3:28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이 두 말씀이 서로 상반되고, 서로 역설적인줄 알았는데
믿음과 행함은 마치 원수지간인 것처럼
믿음과 행함은 서로 같이 갈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배우고 자라왔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왜냐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그 믿음은
행함을 배제하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곧 행함을 산출하는 믿음!
다른 말로 순종을 낳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롬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to the obedience that comes from faith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
faith is pregnant with obedience ‘믿음은 순종을 산출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순종을 산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그 믿음은
순종을 산출하는 믿음이요,
행함이 수반되는 믿음이었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행함과 상관 없는
그냥 지적 동의의 믿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반드시 순종을 낳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약2:22절을 다시 읽어보면
약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
가짜 믿음, 죽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구원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약2:23
약2: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그 말씀이 (창15:6)
(창22장, 모리아산 순종에서)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사’ .. 이 말씀이
창22: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여기서 ‘네 씨’는 예수님입니다.
바울이 나중에 말합니다.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네 씨, 그 예수로 말미암아 영생의 복, 구원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창22:18
결국 그 약속이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because you have obeyed me!
창22장에서 아브라함은 순종으로
창15장에 하나님께 인정받은 그 믿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재천명하시고 맹세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그 일을 이루고야 말 것이다.
내가 내 이름을 걸고 이루고야 말 것이다’
그러므로 창22장 말씀에서 창15:6절이 성취되었습니다.
▲여기서 약2: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여기서
‘이루어졌다’ NIV는 fulfilled
원어는 ‘플레로오’인데,
성령충만 받다 할 때 ‘충만’이 ‘플레로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비유적으로 쓰일 때는 ‘완성하다’입니다.
‘완전하게 하다, 성취하다’
똑같은 단어가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왔다‘
동일한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완성시키셨다. 완전하게 했다! 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그의 순종으로 그의 믿음을 완전하게 했다.
자기 믿음을 완성시켯다. 그 믿음을 성취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그 믿음,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
하나님만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그 믿음은, 어떻게 온 것이냐?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약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얼마 전에 제가 영국 옥스퍼드 대학을 다녀왔는데
거기 세계적 신학자인 엘리스터 맥그래스 교수와 인터뷰를 했는데
이제 제가 우리 성도들에게 짧은 비디오 클립을 준비했습니다.
<엘리스터 맥그래스 교수 인터뷰> * 위 동영상의 8:40~
루터의 위대한 통찰력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이점에서부터 발생되는
매우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
우리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한 사람이거나
구원을 돈을 주고 샀거나, 구원을 벌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루터에게는 매우 중요한 통찰력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똑같은 비중을 두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우리 안에 구원이 일어났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이죠.
다른 말하면 우리는 단지 “오! 나는 용서 받았네,
오! 나는 구원 받았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아무런 변화가 없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터에게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용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점인데요
우리가 이것으로 인해 변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예전의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무엇인가 당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품에 안겨지고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칼빈은 매우 체계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며
그가 말하려고 하는 요점들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믿는 자는 사실상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이미지이며, 신약성경 바울서신 안에 나옵니다.
따라는 바울에게 ‘칭의’라는 언어는
구약의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믿음)으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믿음’은 신뢰, 신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한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며
물론 이것은 선행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우리 안에 살아있는 무엇과 같아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변화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로 만들어집니다. -인터뷰 끝-
◑구원은 변화를 수반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구원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도저히 얻을 수 없고, 값을 치르고 살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 구원이란 선물은, 반드시 변화를 수반합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의해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터뷰 중)
자 그러면 결론적으로 우리가 물어야 될 질문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내 믿음은 의롭다고 하실 믿음인가?’
다시 말하면 ‘나의 믿음은 구원 받을만한 믿음인가?’를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신 그 믿음은
머리로 아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자기 전부를 아낌없이 드리는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그렇게 증거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적용/ 내 믿음은 진짜가 맞습니까?
박목사님께서 오래동안 하나님이 안 계신다
하나님이 계실 리가 없다.. 그렇게 여기고 과거에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39세 때, 죽음의 고비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너무 억울한 것은
첫 번째, 지난 오랜 세월동안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살아온
그 세월들이 너무나 후회스러웠고 그게 너무 안타까웠고
두 번째, 궁금했던 것은 박목사님이 하나님이 없다 라고 그렇게 결론 내리게 된 이유는,
그 분이 교회 갔을 때 교인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왜냐면 만약 정말 하나님이 계시고
‘저들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믿으면 저렇게 싸울까? 그럴 수 없지
그러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다’ 라고 스스로 결론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니까, 내가 하나님이 없다 하며 살아온 세월이 너무 아깝고
그 이유는 바로 그 사람들 때문인데
그때 그 교회에서 싸우던 사람들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에서 그렇게 싸우던 사람들은 뭡니까?’
그때 하나님의 대답은 ‘그들은 다 가짜다!
너는 죽을 때까지 이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교회 안에 가짜가 너무 많다!’
여러분, 내 믿음 진짜가 맞습니까?
내 믿음이 진짜인 것을 어떻게 알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은 순종을 낳는다!’
‘믿음은 행함을 반드시 산출하는 믿음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셨던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믿으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옛날에 잘못 배워서) 알고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저도 오랜 세월동안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저는 정말 제가 구원 받았다고 그렇게 거짓 확신 속에 살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로마서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절은
롬1:16~17절입니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바로 이 두 구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로마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롬1:16~17절로 돌아가 봅니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제 앞으로 로마서 1:18~15장 끝절 까지는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풀어갑니다.
복음이 뭐냐?
하나님의 의가 뭐냐?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나타났느냐?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이게 나머지 로마서 전체에 설명되어 나옵니다.
그러니까 롬1:16~17절만 확실히 알면
로마서 전체를 이해하는 겁니다.
▲1.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먼저 우리가 ‘의’ 라는 단어는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
어떻게요? 믿음으로요!
자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의’란 말은
첫 번째로 하나님이 유일하게 우리를 의롭다 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나를 의롭다고 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만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고,
하나님만 우리를 불의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느냐?
믿음을 근거로 의롭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이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롬3:21~22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율법을 지킴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
그런데 이것은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러면 한 사람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여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장차 예수님을 믿으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고 하실 그 일을 시작하셨고,
예수님을 통해서 그 일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것이다.
그러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게 뭐냐?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 말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1:17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ir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자 여기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는 말은 from A to B
시작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노력으로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노력으로 불가능하고, 우리 힘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힘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 힘으로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 힘으로 완성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만 됩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가고, 믿음으로 구원을 완성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그 사람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요, 산 믿음이요, 행함 있는 믿음이요
순종을 낳는 믿음입니다!
우리를 능히 구원할 그 믿음, 그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이제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살게 되어 있습니다.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
그 분만이 내 삶에 구원을 이루어가실 것이라는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은 여정입니다
그래서 자 이 말씀을 우리가 더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짚고 넘어갈 중요한 사항들이 있는데
구원은 여정입니다.
구원은 한 순간에 획득되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구원은 journey 여정입니다.
그러면 이게 1:16절에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헬라어 원문에는 ‘주시는’이 안 나옵니다.
한국어를 번역할 때 임의로 ‘주시는’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원어는 전치사 eis 로 시작하는데 *~을 향하여, ~을 위하여, ~안으로
It is unto salvation
‘구원을 향하여, 구원을 위하여, 구원 안으로’ 그런 말입니다.
‘구원을 주시는’이 아닙니다.
그럼 16절을 다시 이렇게 번역할 수 있어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구원은 여정>입니다.
구원을 우리에게 이루어 가시는, 구원에 이르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더 이해하기 위해서
롬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구원의 시제는 3가지로 성경에 나옵니다.
과거 – 구원을 얻었다,
현재 – 구원을 이루어가고, 처음 믿을 때보다 구원이 가까웠다,
미래 –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지금 구원을 얻은 것을, 신약적 용어로는 ‘현재적 구원’입니다.
다른 말로 ‘현재적 칭의’입니다.
그런데 아직 구원을 다 이룬게 아닙니다.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장차 이루어질 구원은 ‘미래적 구원’, 또는 ‘종말론적 구원’ 입니다.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 즉 현재적 구원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미래적 구원을 기다리게 되어있습니다.
인내함으로써!
롬5:9~10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have been justified, 현재적 칭의, 현재적 구원,
예수님 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예수님이 피흘려서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죄인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면, 의롭게 해 주셨다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종말적인 그 심판에서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당연히 구원해 주시지 않겠느냐!
미래적 구원의 당위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멘!
그래서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은, 칭의(의롭다함을 받다)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었다.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뜻이죠.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은 자로서는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다.. shall we be saved through his life!
로마서는 현재적 구원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미래적 구원도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멘!
▲유1: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성경에는 ‘영생을 얻었다’ 라는 말씀도 있는데, - 현재적 구원
그런데 위 구절에는 ‘영생에 이르도록’ - 미래적 구원을 말씀합니다.
그때까지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는 겁니다.
벧전2: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결론입니다. 우리 구원은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고, 완성이 있습니다.
우리 구원은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 구원을 ‘달리기’에 비유합니다.
왜 그는 구원을 달리기에 비유했냐면
구원은 ‘시작’점이 있고, 구원은 받드시 ‘골인’ 지점이 있다는 겁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그 골인 지점을 향해 ‘달려갈 때’만
우리는 구원의 완성을 보게 됩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세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 따라서 기도원에 몇 번 간적이 있는데
부흥사들이 자주 하는 말이 ‘우리는 구원 열차를 탔다’ 였습니다.
‘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문제는, 성경은 한 번도 구원을 열차에 비유했던 적이 없습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열차에 한 번 타면 그만이라 생각하거든요.
열차에 한 번 타기만 하면, 내가 할 게 아무 것도 없고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열차는 끝까지 목적지로 가니까요.
나는 구원열차를 타기만 하면, 내 구원은 보장된다.. 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그건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단 한 번도, 구원을 그렇게 비유한 적이 없어요.
바울이 구원에 비유한 것은 “달리기”입니다.
빌3:11~14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run after, pursue
이렇게 어떤 여정(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딤후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여러분이 주님이 나타나심을 사모한다면
여러분도 바울처럼 달려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끝까지 우리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여기도 ‘경주를 하며’ let us run 달리자고 합니다.
신앙은 계속 달려가야 하는, 쉼없는 여정이라고 설명합니다.
한 번 어떤 시점에 받아서 획득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달리되 인내함으로 달려야 하고 with perseverance
반드시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이 완성됩니다.
절대로 잊지 맙시다.
‘구원열차’ 같은 소리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끝까지 달려야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은 반드시 시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종착점, 골인지점도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얻었던 분명한 시작이 있었고
장차 우리가 도달할 구원의 완성지점이 있는데,
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중간 어디엔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힘든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에 비추어 볼 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습니다.
출애굽 사건을, 바울은 구원에 비유했습니다.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를 문인방에 뿌리고
순종함으로 애굽에서 탈출했습니다.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얻었지만, 그건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완전히 성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여정을 다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구원을 얻는 사건과
장차 내가 구원을 얻을 사건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광야가 싫습니다.
낮에는 해가 너무 뜨거워서 그늘이 없으면 죽을 것 같고,
밤에는 난로가 없으면 추워서 얼어죽을 것 같은 데가 광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셨으면,
빨리 가나안에 집어넣으시지
왜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예수 믿고 구원을 얻게 하셨으면
빨리 어떻게 해서라도 천국으로 보내주시지
어쩌자고 우리를 이 광야에 두셔서
이 고생을 하며 살게 하지는지요..
▲제가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목사님, 목사님은 구원을 복잡하게 설명하시는데
성경은 구원을 간단히 설명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한 편 강도는 막판에 구원받았잖아요.
한 번 믿고 구원 얻었는데, 왜 목사님은 구원을 그렇게 어렵게 설명하십니까?’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한 편 강도가 구원을 얻자마자 바로 죽어버렸기 때문에 다행이지
그 강도가 살아있었으면, 그가 죄를 짓다가 어떻게 되었을지 누가 압니까?’
우리가 살아있으니까 자기 육신과 매일 싸우면서
그냥 힘들게 힘들게 광야 여정을 통과하면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여정’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는 반드시 광야를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지 않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광야는 너무 힘들다는 겁니다.
구원 얻는 순간은, 출애굽해서 홍해를 건너는 순간은 좋았는데
그때는 홍해 가에서 부흥회를 했을 정도로,
찬양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딱 사흘 지나니까, ‘죽여 주시옵소서, 뭐하러 여기에 데려와서
이 광야에서 이 고생을 시킵니까?’
이 고백은 나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광야에 두셨는지
그 이유가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너희가 순종하는지, 하지 않는지 내가 테스트 하려 하노라’
‘너희들이 믿는 그 믿음이 진짜인지 내가 시험해 보아야 알겠다.
진짜 믿음의 소유자라야 가나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구원이 여정이라는 것을 알고,
그 여정을, 시험을 이기고,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구원이 여정이라는 사실을 빼버리면
광야에서 멸망 받는 백성처럼 되고 맙니다.
고전 10장에서 바울은, 그들을 구원을 못 받았다는 뉘앙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전10: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구원이 여정이란 사실을 모르니
세례 받고도 제멋대로 살고 있습니다.
버젓이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기가 구원 받았다고
가나안에 들어갈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입니다!
바로 구원론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방자해지고 말았습니다.
▲<한국교회의 도덕적 타락의 가장 주범은 잘못된 구원론입니다!>
신학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마치 면죄부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믿음은 면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올바로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로마서를 올바로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로마서를 제대로 알아야 교회가 살아나는데
로마서를 제대로 설교하지 않으니까 교회가 살지 못합니다.
어거스틴의 삶을 바꾸고
루터의 삶을 바꾸었던 바로 이 로마서를
종교개혁 5백주년에 다시 제대로 설교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구원은 여정이기 때문에, 이 광야를 통과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믿음>입니다. 왜냐면 ↓
◑믿음이 행함과 순종을 가능케 합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은, 정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이제는 우리 노력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행함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다들 이렇게 배우고,가르쳐왔습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행함과 순종을 가능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믿음만이 우리 행함을 가능케 하는 능력입니다.
믿음만이 우리 순종을 낳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행함을 면제해 주는 게 아닙니다.
믿음만이 행함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기 때문에
그 믿음이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신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이 광야를 통과해 나가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애굽에서 구원하신 것을 믿는다면,
그 분이 나를 광야를 통과하게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광야에는 추위, 더위, 전갈과 목마름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광야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광야에서 얼마나 시달렸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을 열 번이나 시험(의심, 불신)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거의 다 죽어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만 살고, 광야에서 태어난 20세 이하 사람들만 살아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가데스바네아 기준
이 광야라는 현재적 구원을, 믿음으로 이겨낼 때만, 버텨낼 때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현재적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1:17
그런 의미입니다.
저 자세히 말하면
내 힘으로, 내 경험으로, 내 노력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힘을 의지하고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내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분으로 믿기 때문에, 그 분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어디서 옵니까?
말씀을 계속해서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한 번 들어서 되지 않고, 내 것이 될 때까지 계속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내 속에서 믿음이 자라날 때까지!
▲그러나 이 믿음에 근본적인 순서가 있습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누가 믿음의 주이십니까?
누가 우리 믿음의 완성자이십니까?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우리 믿음의 완성자는 예수님이십니다. 히12:2
우리가 구원 얻을 때,
그 믿음을 주시는 분도 예수님,
우리가 광야에서 이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시는 분도 예수님,
마지막 끝까지 달려서 구원을 완성할 그 믿음을 주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십니다.
그 분만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이니까
그 분을 바라봐야지 믿음이 오는 것입니다. 히12;2
주님을 바라볼 때만 믿음이 자랍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만 믿음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 됩니다.
주님 앞에,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고
시시때때로 주님을 바라보는 그 믿음의 훈련이 되지 않으면
어려울 때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이게 몸에 배어 있어야, 어려울 때 주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훈련,
그 영적인 순발력이 필요합니다.
도저히 주님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더 주님을 바라봐야만 살아남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는 지금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다루고 있습니다.
1:17절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게 무슨 말인지, 설명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 믿음이 어디서 오는지 히12:2를 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기도/ 주님, 제게 그런 믿음을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그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 말씀 붙잡고 기도할 때,
정말 내 믿음은 진짜인가요?
구원을 얻는 믿음인가요?
순종하는 믿음, 행함을 산출하는 믿음인가요?
아니면 내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보시며, 뭐라고 하실 까요?
의롭다고 하실까요?
광야에서 엎드러질 믿음은 아닌가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주님 이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정말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믿음 없는 자인 것을 고백합니다.
내 믿음이 너무 연약하고, 내 믿음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바람이 불고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저 흔들리고 휩쓸리고 맙니다.
환경이 어려워지면 낙심하고
뭔가 잘 풀리면 살 것 같고
이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완성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가 되십니다.
예수님 그 믿음을 주시옵소서
내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그 믿음을 주시옵소서
순종을 낳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주시옵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