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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마7:13~14 출처
아더 핑크
만약 지금 당신이 죄의 권세와 사탄의 속임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자아를 기쁘게 하는 것에서부터 건짐을 받지 못하였다면,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13-14)
마태복음 7장의 뒷부분은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우리 주님의 가장 중요한 강론의 적용 부분입니다.
이 설교의 주요한 의도는
영적인 본성과 그리스도의 왕국의 참된 주제들의 특징인 순종을
폭넓게 보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한 순종은 하늘의 은혜가 주는
복됨의 최고의 상태를 누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왕국에서 얻는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는 것임을 알리셨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모두 자신들이 메시아 왕국의 주체들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신분에 의해 왕국의 합당한 상속자이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그들이 가르친 종교적 도덕적 의무 체계)는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요구사항들을 충족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에서 이러한 착각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자손에게
영적 왕국의 호칭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초자연적인 왕국의 자격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롬 4:16),
아브라함의 행위를 행한 자(요 8:39),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자들만이(갈 3:29)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녀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 4:16),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요8:3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산상설교에서 주님은 그분의 영적인 왕국에 속한
사람들의 내적 상태를 묘사하시고(5:4-11),
자신들을 입증하기 위한 외적인 행동들과(5:13-16),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개인적인 의를 설명하시고(5:17-28),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죄의 철저한 거부를 정의하고 계십니다(5:29-30).
거룩하신 삼위 하나님의 요구는 너무나 높으며,
그분의 신성한 성품이 요구하는 것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순결하신 눈에 불쾌한 모든 것들을 혐오하며,
거부하고, 돌이키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분과 함께 영원히 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적어도 자아를 완전히 부인하고
가장 소중히 여기는 우상을 버리며,
(비유적으로 오른손을 잘라버리고,
오른쪽 눈을 빼어버리는 것으로 상징하고 있는)
깊이 품고 있는 죄악의 행로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분명하고 날카로운 선언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던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운 말"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의 마음을 꿰뚫고
육체의 욕구를 멸하게 하는 그러한 요구들은
아마도 그들로 하여금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나?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좁은 문이고 좁은 길이다"
라는 생각이 들게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은밀한 반대를 예상하면서 주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협소하다"
라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그 "문"으로 들어가서, 그 "길"을 걷는 것이
너희가 가져야 할 지혜요, 관심이요, 의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들어오도록 청하는
"넓은 문"과 계속해서 걷도록 유혹하는
"넓은 길"이 있음을 아시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문은 파멸로 이끌며, 그 길의 끝은 지옥입니다.
"좁은 문"은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문이며,
"좁은 길"은 하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실로 그 길을 찾는 자는 거의 없으며,
극히 소수만이 그 길로 가고자 할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어찌하든지
부지런히 그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동기를 더해줍니다.
슬프게도 현대 복음전도자들(?)이
이것에 관해 거의 설명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인용한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구원의 길을 정의하시고 설명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이 배운 바와 매우 다르기에,
여러분들은 거부할 것입니다.
되풀이 말하건대, 우리가 지금 살펴보려고 하는 구절에서,
육신으로 오신 진리이신 분께서는 파멸을 피하고
하늘을 얻는 유일한 길,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음으로 얻는 유일한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좁은(strait)"이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스테노스
"제한된(restrained)" 또는 "협소한(narrow)"을 뜻합니다.
"문"은 두 가지 목적으로 쓰입니다.
곧,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거나 들어가는 것을 막습니다.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모두
"생명에 이르는"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에서 영원히 제외됩니다.
이 문의 두 번째 용례는 처녀들의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엄중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필요한
"기름"(마음 안에서 성령의 역사)을 갖고 있지 않는
어리석은 처녀들을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동안,
신랑이 왔고, "문은 닫혔습니다"(마 25:10).
처녀들이 신랑들에게 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달라고 주님께 애원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1. 이러한 "좁은 문"의 그림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우리는 인용한 구절이 육체로 오신 진리이신 분의
날카롭고 엄숙한 가르침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길로 들어가는 것은
그분의 아드님이 제시하신 것 같이
그 마음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굴복할 때만 가능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느냐?”(암3:3)
그리스도께서는 "문"이시며(요 10:9),
중보하시는 직무의 세 가지 주요 기능에 따라
삼중의 방식으로 계신다는 사실은 실로 복되고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내가 문이니...”(요10:9)
그분께서는 대언자, 제사장, 왕으로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십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을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신
대언자로 참되게 받아들일 때이며,
오직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가르침을
참되게 받아드릴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첫째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화평의 왕이신" 것처럼(히7:2)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이시기에 앞서 "길"과 "진리"이십니다(요 14:6).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히7: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깨끗케 하시는 피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무기들을 기꺼이 던져버리고
그분의 거룩한 규칙에 복종하는 이에게만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반드시 사악한 자는 자신의 길을 버려야 하고,
불의한 자는 자신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사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사 55:7)
이는 그리스도를 제사장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반드시 대언자로 받아드려야 한다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2. 왜 이 문은 좁은가?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죄 때문입니다.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시 9:17).
하늘의 문은 너무 좁아서 그러한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약도 분명하게 동일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엡 5:5-7)
▲2. 율법 때문입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된 오류가 있는데,
필자는 어느 것이 더 위험하고 비참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율법에 복종함으로 천국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율법이 요구하는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경건이 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러한 일치가 없는 곳에는,
율법의 강한 손이 하늘 문을 닫아버릴 것입니다.
▲3. 아무도 그분과 더불어 세상을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은 너무나 좁아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들어올 수 없습니다.
◑3. 이 좁은 문을 "들어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그리스도께서 밝히 드러내신 진리와 의무와
행복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마음을 꿰뚫으며, 육체를 멸하게 하는
가르침의 핵심을 진지하고 실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같이 받아드리는 것은 매우 힘들게
제한된 문을 통해 자기 길을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매우 힘들게 "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명령이 거듭나지 않은 마음에는
극도로 불쾌한 것이며, 반드시 자아를 단호히 부인하고
죄악된 쾌락과 오락과 흥미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마땅히 자아는 거부되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골 2:6).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2. 넓은 길이나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기꺼이 버리지 않고는,
어떤 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누가복음 15장에서
이에 대해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오기 전에
"먼 나라"를 떠나야 했습니다!
야고보서 4:8-10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
너희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정결케 하라.
고난을 당하며 애곡하며 슬피 울라.
너희 웃음을 애곡으로, 너희 기쁨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너희 자신을 낮추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8-10)
아, 친구여, 실제로 이러한 좁은 길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지 말고,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지속하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리니"(요 6:27).
이 말씀은 구원이
간단하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누가복음 13:24에서
강조하신 권면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
그 분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극복해야할 힘겨운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넌지시 비추며,
입술로만 신앙을 고백한 자들의 특징인
게으름과 나태를 분명하게 암시하고자 함입니다.
누가복음 13:24에서 "힘쓰라(strive)"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agonizomai")는 고린도전서 9:25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로 쓰였으며,
골로새서 4:12에서는 "열렬히 수고하니"로 번역되었고,
디모데전서 6:12에서는 "싸우다"로
번역되었음을 주의해서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좁은 문에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힘써야 하는가요?
일반적인 대답은 "법대로"입니다(딤후 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 2:5)
그러나 자세히 말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것으로부터
구출되기를 부지런히 구하며 기도와 간구로 힘써야 합니다.
우리를 이기려고 애쓰는 적들로부터 구해달라고
그리스도께 진지하게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오른손을 잘라내고 오른쪽 눈을 뽑아버릴지라도,
끊임없이 은혜의 왕좌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돌아서게 하도록 돕는 은혜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명령하신 것들을 행할 수 있도록
돕는 은혜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모든 것에 절제하되",
특별히 육체가 갈망하고,
세상이 사랑하는 것들을 절제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왜 그렇게 애써야 하는가요?
▲1. 사탄이 당신의 혼을 파멸시키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리며, 깨어 있으라.
너희를 대적하는 자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그러므로 반드시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사탄을 물리쳐야 합니다.
▲2. 자연적인 욕망이 당신을 파멸시키려 애쓰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거류민와 나그네인 너희에게 권하노니,
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들을 멀리하라"(벧전 2:11)
▲3. 온 세상이 당신을 거슬려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소멸되지 않을 경우, 세상은 매혹적인 약속과
들릴라와 같은 교활함과 파멸로 이끄는 유혹으로
당신을 돌아서게 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당신이 세상을 이기지 못하면,
세상이 당신을 이겨서 당신의 혼을 영원한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러한 것에서 우리는
왜 주변의 사람들과 신앙고백을 한 그리스도인의
대다수가 하늘에 도달하는데 실패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걷기보다는
육체의 정욕에 빠지며, 그리스도보다는 자아를,
하나님보다는 세상에 더 빠져서
거룩보다는 죄를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사람들은 자아를 부인하고,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복종하기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이같이 행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늘을 향해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가르침을
마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이,
좁은 길을 걷는 것은 마음과 삶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가르침에 의해 통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좁은 길을 따라 걷는 것은 믿음 안에서 꾸준히 인내하며
주 예수님께 대해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반대를 이겨내고, 그리스도께 대한 신실함을
포기하게 하려는 모든 유혹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자아를 즐겁게 하고
자아를 추구하는 모든 것들을 막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 불립니다.
이 길은 ‘주의 길’(창 18:19), ‘그 길’(출 13:21, 32:8),
‘선하고 의로운 길’(삼상 12:23), ‘그의 길’(시 25:9),
‘지혜의 길’(잠 4:11), ‘의의 길’(잠8:20), ‘생명길’(잠 10:17)
‘거룩한 길’(사 35:8), ‘선한 길’(렘 6:16),
‘진리의 길’(벧후 2:2)‘바른 길’(벧후 2:15)로 불립니다.
좁은 길이 아무리 나의 세상적인 관심을 거스릴지라도,
반드시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자연인에게는 육체를 탐닉하고
우리의 세상적인 경향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쉽고 즐겁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미명 아래
육체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넓은 길은 안락하고
평탄하며 매력적이지만, 그 끝은 "멸망"입니다!
"좁은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지만, 그 길을 걷는 이는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고백을 하고 구원받았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삶은 하늘에 "보물"을 두고
이 땅에서는 "낯선 자요 나그네"로 사는 증거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들은 편협하고 별나고, 엄격하고,
금욕적인 자로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탄은 그들을 속여 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보다
더 쉬운 길로 하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세상을 최대한 이용하고, 두 주인을 섬기며,
두 "길"을 결합시키려고 애쓰는 수많은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생에서 자아를 만족시키고
영원 안에서 하늘의 행복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이름뿐인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권능으로 몸의 행실을 죽은 것으로 처리함으로
입증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신앙고백은 헛된 것입니다(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함으로 증거되지 않는 믿음은
마귀의 믿음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랑은 속이는 것입니다(요 14:23).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14:23)
하나님의 뜻에 진정으로 복종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분별한 억측에 불과합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이가 적은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에서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여, 많은 낙담과 실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좁은 길을 따라가려고 애쓰는 자만이
올바르게 생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인용한
두 길의 바로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주의해서 살펴봅시다.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먹이를 찾는 이리들이다"(마 7:15)
왜 이 구절이 뒤이어 나오는 것일까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영혼들이 경계해야 할
"거짓 대언자들"은 누구인가요?
그들은 바로 좁은 길을 걷지 않고도
하늘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영생을 훨씬 더 쉬운 조건으로
얻을 수 있다고 큰 소리로 외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옵니다.
그들은 (분별하지 못하는 혼에게)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분의 보배로운 피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죄를 미워하는 상한 마음만이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을 수 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구원하는 믿음이 마음을 정결케 하며(행 15:9),
세상을 이기는(요일 5:4) 살아있는 것임을 밝히 드러내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행15:9)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러한 거짓 대언자들은 그들의 열매로,
곧 육체적인 수고의 열매인 그들의 회심자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회심자"들은 넓은 길에 있는데,
그 길은 드러나게 악하고 부도덕한 길은 아니지만
육체를 즐겁게 하는 종교의 길입니다.
그 길은 "(많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입니다(잠 14:12)
이러한 넓은 길에 있는 사람들은
진리에 대하여 머리에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길을 걷지는 않습니다.
좁은 길은 성경의 명령들과 가르침들에 의해 구속된 길입니다.
넓은 길은 성경의 경계 너머로 무너져 버린 길입니다.
디도서 2:11-12는
우리가 어느 길에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딛2:11-12)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난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고 말할 것입니다(요 14:6).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어떻게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는가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는 이유
1.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율법의 장애물들을 제거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로 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본을 남겨,
우리로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단지 문이 열린 것만으로는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반드시 하늘로 인도하는 길을 걸어야 하며,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드려 순종함으로
하늘로 인도하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목자가 자기 양들을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 10:4).
3.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든지
그 길을 걷도록 은혜와 힘을 기꺼이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순종하는 것을 필요 없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 후로는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15). "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으니"(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죄에서부터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만약 지금 당신이 죄의 권세와 사탄의 속임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자아를 기쁘게 하는 것에서부터 건짐을 받지 못하였다면,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복을 더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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