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
조나단 에드워즈 저,
김보람 역, 좋은씨앗 펴냄, 2009년, 총424쪽
세상 살기 어렵다고들 한다.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재래시장의 생선 파는 아줌마까지.
이생애서는 진정한 행복도 영원한 기쁨도 없음을
꼭 신자가 아니더라도
살다보면 반드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고통이 찾아올 때엔 길고 긴 한숨 속에 죽기부터 사모한다.
수많은 인생들이 차라리 죽음을 사모할 만큼 세상은 살기 좋은 곳만은 아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그도 역시 죽음을 사모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사모한 이유는 분명히 달랐다.
그는 종종 찾아오는 우울증과 영적교만, 영적침체, 무기력감, 죄책감,
질병과 같은 죽음의 속성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연약한 육신의 한계에 갇혀
거룩하신 영광의 하나님을 언제나 그리고 진실로 충만하게 바라보고
힘써 충성할 수 없음에 대하여 깊이 탄식했다.
그는 세상의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죽음을 사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면 거룩한 영광 중에
하나님을 영원히 섬길 수 있게 되리라 확신했다.
주님과의 완전한 동행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죽음을 사모했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는 내용 면에 있어서
살짝 지루함마저 느낄 수 있는 책이다.
1~100쪽 일기와 100~200쪽 일기, 200~300쪽 일기와 300~400쪽 일기가
사이사이의 특별한 사건을 빼면
매일이 마치 그의 생각과 감정을 복사해 놓은 것처럼
지루하리만치 반복되는 것 같다.
그러나 가끔씩 느껴지는 지루함의 원인은 일기 속에 담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신앙으로 민감하게 동행하지 못하고
단순히 육신의 눈으로 어설프게 따라간 탓에 있었다.
400여 쪽을 읽어가며 후반부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것은 반복되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인생의 단순함 때문인 것 같다.
그 단순함이란 그의 인생이 알차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라
인생의 방향이 오직 한결같이 한 방향을 향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책을 읽을 때 느꼈던 양념 같은 지루함은
마지막 쪽이 가까워 올수록 그의 열정적인 생애를
겨우 문자적으로 읽어 내려갔던 나의 부끄러움으로 바뀌고
이내 위대한 믿음의 거장에 대한 진심어린 존경심과 경외감까지 생긴다.
세상이 보기에는 지루하게 느낄 만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았던 그의 생애다.
기도와 말씀과 금식과 복음 전파와 자기 성찰이 호흡처럼 반복되는
그의 일기를 보면 그에게 있어서
하늘에 속한 자원들은 단순하고 지루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요, 전부였다.
그러나 29세의 생애를 산 브레이너드는
그 짧은 인생동안 결코 쉬운 삶을 살지 않았다.
창공 높이 올라가는 독수리처럼 끝없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목말라하며
그러한 영광을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맛보기를 원하는 소망이 있었지만
이 땅에서는 그 소망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한계를 탄식하며 고뇌하며
천국을 그리워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를
실천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겠다.
기독교인들이 국가의 기둥이 되어도 공의와 사랑과 정직과 진리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세상을 정화시키는 교회조차도 부정과 부패 기사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서글픈 이 나라의 현실을 보며
과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고뇌하지 않을 수 없다.
늘 예수와 같이, 그리고 예수를 좇은 믿음의 선진들같이
불꽃같은 인생을 살리라 늘 다짐하지만
세상을 주도하기보다는 세상 물결에 휩쓸려가는 우리들.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기보다 영향 받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우리의 신앙은 자꾸만 보기 좋고 세련된 것만을 추구한다.
그러나 분명히 이 책에서 보이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인생은 거품이 없다.
브레이너드의 삶은 기도의 삶이었고 그의 기도는 생명의 호흡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식은 금식이었다. 그는 복음을 위해 피를 토하며
생명의 길을 걸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진리의 목표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는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달려갔다. 하나님을 향한 충만한 사랑이 동인이 되어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헤치며 천성을 향해 한걸음씩 전진해 나갔다.
예수님은 33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호흡하다
하나님의 뜻만을 바라보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여기 그 분, 예수님과 같은 삶은 살았던, 29년 5개월 19일을
불꽃처럼 타다가 사라져 간 젊은이가 있다. 짧은 인생을 마친 브레이너드,
그는 예수의 분신, 작은 예수였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분명히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위해서,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본을 보여 주었다. 그는 그의 삶을 통해 훌륭한 이정표를 남겼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목표가 바르고 뚜렷한 사람이었고,
늘 시뻘건 풀무불에 단련된 쇠와 같이 죄에 물들어 가려고 하는
자신을 정련하는 수고와 아픔을 회피하거나 그치지 않았던 회개의 사람이었다.
부흥의 사람, 조나단 에드워즈 역시 그의 신앙과 삶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도록 복음을 위해 젊음을 불살랐던 그는
분명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귀한 귀감을 보여준 훌륭한 모델이요, 믿음의 선배임이 틀림없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좇는 순교자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조차 믿음과 복음의 능력을 상실해 가고,
거대한 세상의 탁류를 거슬러 살지 못하는 수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쩍쩍 갈라져가는 건조한 심령의 소리에 그의 생애의 기록은 분명 단비의 메시지이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처럼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금식을 통해 경건으로 배를 채웠던 그의 영성은
분명히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영성이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에는 하품하며 신앙생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찾아야 할 잃어버린 생명력을 일깨우는 진주가 들어있다.
이 책은 입으로는 '복음으로 충분합니다'라고 외치지만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이외에 다른 자극적인 것을
분명히 찾고 있는 부끄러운 신앙인들의 기름을 빼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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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더 큰 평가를 받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78791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북아메리카 인디언 선교사, 기도의 성자>
(존 손베리 지음/크리스찬다이제스트)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조나단 에드워즈/송용자 옮김/복있는 사람)를 읽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북아메리카 인디언 선교사, 기도의 성자>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작은 책 속에 담은 전기라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펴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는
말 그대로 29세의 젊은 나이로 불꽃처럼 살다간 인디언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쓴 일기와 일지를 담고 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1718-1747)는 미국 코네티컷 주 해담에서
의회의원이던 아버지 해저카이어 브레이너드와 어머니 도로시 호바트의 아홉 자녀 중
여섯 째 아들로 태어났다.
브레이너드가 9살 때 아버지가, 열네 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21세에 온전한 회심을 경험한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예일대학에 입학했고,
1743년 4월 카우나우믹 인디언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면서
델라웨어 강에 사는 많은 원주민들, 뉴저지 주 크로스윅성 인디언들을 위한 사역 등을 펼친다.
델라웨어 원주민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가운데,
원주민 전체가 뉴저지의 크랜베리로 이주한다.
그는 1년에 4천 마일의 거리를 말과 함께 풍찬 노숙하면서
혼신을 다해 인디언 원주민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1747년, 병이 깊어져 더 이상 사역을 할 수 없을 때까지
그곳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살았다.
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인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는 책이 나온 지
거의 3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을 정도로 거룩한 감화로
계속해서 뭇 영혼에 불을 지피고 있는 불멸의 책이라 할 수 있다.
한 개인의 내면일기가 왜 이토록 계속해서 감화와 감동을 주는 것일까.
그것은 철저한 자기부인의 삶,
인디언 원주민들을 향한 복음의 뜨거운 사랑과 눈물의 기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불꽃처럼 생애를 살다간 그의 생애가
각자에게 말을 걸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을 수 없는 그리스도를 향한,
영혼들을 향한 희생 때문일 것이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를 읽으면서도
제정신이 들지 않는다면,
단언하건대, 여러분은 아무 희망이 없는 직업 목사나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에 불과합니다.
이 책은 여러분의 영적 자만심을 막는 해독제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했던가.
존 웨슬리는 "주님의 일이 쇠퇴한 곳에 주님의 일을 다시 부흥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설교자에게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를
주의 깊게 읽도록 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는 "20여년전, 이 책을 처음 접한 이래로,
나는 이 책을 네 번을 사서 여섯 번을 읽었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를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는 눈 덮인 언덕에서 인디언들의 영혼을 끌어안고
각혈로 인해 하얀 눈밭이 붉은 선혈로 물들이기까지 기도했던 복음 사역자입니다.
이 책은 내 마음이 건조해질 때면 언제나 꺼내 읽고
그 삶과 신앙에 도전을 받는, 내가 가까이 두고 읽는 소중한 책입니다" 라고 말했다.
성도라면, 성직을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하거나 성도의 삶이
하나의 액세서리처럼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다면,
혹 나태와 안일 속에 빠져있다면 이 책을 꼭 한 번씩은 읽어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얼마나 철저하고도 처절하게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았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분 안에서만 살기를 간절히 갈망했는지,
자기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영원한 천국을 얼마나 사모하며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그 험한 인디언 선교를 하면서 많은 수고와 고생을 감수하면서도
자기가 받는 고난을 당연히 여겼고,
하나님을 모르는 인디언들의 불멸의 영혼들을 위해
얼마나 눈물의 기도를 흘렸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조나단 에드워즈/복있는 사람)는
일기와 일지를 따로 구분해 펴냈다.
1부~8부까지는 브레이너드의 일기로 그의 내면적 삶을,
1.2부, 일지는 원주민들 속에서 그가 행한 선교사역을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이 책을 펴낸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부록인 장례 설교와
브레이너드를 회고하는 회고 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브레이너드는 '30세의 여름이 채 여물기도 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오래오래, 천천히 삶을 살은 사람들도
그 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얼마나 드문 일일까.
그는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타올라
자신을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한 영혼들, 인디언 원주민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그들의 영혼구원에 온몸을 바쳤다.
짧은 생애였지만 그의 위대한 신앙은
오늘날의 많은 이들의 가슴과 영혼 속에 불을 질러놓고 있다.
나태한 신앙인들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고,
교만한 자들의 심령을 낮아지게 하며,
경솔하기 쉬운 신앙인들의 삶의 옷깃을 여미고 깨어있게 한다.
회심했다고 장담하는 자들에게조차
자신을 낮은 자리에서 재를 무릅쓰고
참 믿음인지를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시험하게 만든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서문에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를
'천재적인 통찰력과 명확한 사고력, 면밀한 이성, 정확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브레이너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분별력을 가진 현명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 탁월한 판단력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특별히 내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에서 더 탁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브레이너드의 기도는 끈기와 인내의 기도이자
천국을 향한 결코 굽히지 않는 적극적인 침노의 기도였다 말한다.
그는 기도의 거장이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를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다 보면,
거룩하시고 높으신 하나님,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재를 무릅쓰고 당신은 간절히 기도하고 싶어질 것이다.
열악한 환경, 가능성 없어보이던 곳에서 이룬 열매들
"오늘날 뉴잉글랜드 지역의 주들은 250년 전에는
대부분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했다.
영국의 문화가 이식된 식민지 도시들이
대서양 해변과 내지 수로를 따라 따로따로 흩어져서 번창하고 있었고,
이 정착지 사이에는 널찍한 황야가 펼쳐져 있었다. ...
당시에는 하천만이 골짜기를 누볐고, 개척자가 울창한 언덕들을 헤집고 다니던 곳이었다."
존 숀베리가 전기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그 시대의 인디언 선교란 정말 힘든 것이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그의 일기 곳곳에서
그가 얼마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역했는지 엿볼 수 있다. 작은 예를 하나 든다.
"몸이 몹시 안 좋은데도 입에 맞는 음식을 먹을 수 없어서 더 힘들었다.
빵이 떨어졌는데 구할 수도 없었다. 빵을 얻기 위해서는
10~15마일 떨어진 곳에 직접 나가거나 다른 사람을 보내야 했다.
빵을 많이 얻은 경우에도 때로 먹기도 전에 곰팡이가 피거나 상하기 일쑤였다.
어떤 때는 곁에 아무도 없이 며칠을 보내야 했다.
그러면 빵을 구하러 보낼 사람도 없고 내가 직접 가기 위해
숲에서 말을 찾을 수도 없었다. 지금이 그런 상태다."
"지금의 환경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지금 나는 가장 외로운 황무지에 살고 있다.
영어로 대화가 통하는 사람은 한 명 뿐이다.
음식은 끓인 옥수수와 급하게 만든 푸딩이 전부다.
잠은 짚더미 위에서 잔다. 사역은 힘들고 어렵다.
사역의 열매라도 본다면 위로가 될 텐데….“
홀로 인디언 선교를 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고
굶주림과 추위, 노고 속에서 힘에 넘치도록 수고하는 그의 모습을 쉽게 목도할 수 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철저한 자기부인 속에서
자기가 맡은 인디언 원주민 사역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 모두가 겸허한 마음으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영혼사랑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싶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힘을 다해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썼으나,
만 2년이 넘도록 단 한 명의 회심자도 없었다고 고백한다.
인디언들의 영혼을 위해 밤낮없이 부르짖고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험한 산과 계곡을 넘으며 굶주림과 추위와 피를 토하는
몸을 돌보지 않으면서까지 혼신을 다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사명을 준 선교협회에 짐이 된다고 생각하고
자리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가 나타났고,
많은 사람이 회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의 첫 열매는 모세스 핀다 포토리라는 그의 통역자로,
그는 쉰 살 즈음에 회심했다.
그는 원래 술 주정뱅이었으나 브레이너드의 말을 여러 번 듣는 가운데
구원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작은 물방울에 불과했다.
그 뒤로 많은 사람이 '전능자의 화살'을 몸에 맞았다.
그때의 상황을 브레이너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후에 원주민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 수가 남녀노소를 합해 65명 정도였다...
회중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눈빛에서
영혼에 대한 관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 후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느꼈던 사람들과 한 사람씩 이야기를 나눌 때
하나님의 능력이 회중 가운데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임하시는 것 같았다.
실로 놀라운 능력으로 그들 앞에 임하셨다.
나는 거의 청중 전체를 사로잡는 영향력에 놀라서 다만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강력한 급류와 용솟음치며 쇄도하는 홍수의 저항할 수 없는 힘 같았다.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그냥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
이는 우리가 아니라, 도구와 수단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에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혼자서 일하고 계시는 것 같았고,
나는 이 일 가운데 어느 부분도 피조물이 한 것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었다..."
이 놀라운 일들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2년 넘게 그가 얼마나 인디언 원주민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 영혼들을 위해 힘썼던 그 눈물 젖은 기도의 열매였다는 것을
그의 일기를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다
그 후로도 더 많은 사람들의 회심자가 나왔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길지 못했다.
원래 약한 몸을 인디언 선교에 힘쓰면서 너무 돌보지 못한 까닭에
깊은 병을 얻었고 결국 그의 사역은 4년밖에 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집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불꽃처럼 남김없이 자신을 인디언 선교를 위해 바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오늘도 복음을 들고 선교지에 나가는 이들의 손에 들려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기 원하는 심령들의 손에 들려지고 있다.
성도로서, 목회자로서...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할지,
어떻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해야 할지,
어떻게 더 자신을 내려놓고 철저한 자기부인 속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할지...
그들의 손에 들려지고 있다.
오래 오래 전, 말을 타고 강과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건너면서
연약한 몸으로 피를 쏟으면서까지 자신을 희생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신앙 속에서 길을 찾는 마음으로 말이다.
아름다운 만남, 그리고 영원...
조나단 에드워즈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인 것 같다.
1차 대각성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31세 되던 해인 1734년 겨울 전후에 이미 300명이 회심하였고,
200가구였던 노스햄튼 주민전체가 중생을 경험하는 강력한 부흥이 일어났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21세가 되던 해,
조나단 에드워즈와 조지 휫필드 1차 대각성운동이 한창이던 1739년 7월에
회심을 경험했고,
그는 예일대학의 졸업기념예배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만났다.
그리고 인디언 선교를 하다가 4년 뒤 폐결핵을 앓았던 그는
병든 몸이 되어 조나단 에드워즈의 집을 찾았고,
5개월 동안 조나단 에드워즈의 딸 제루사의 간호를 받던 중 이 세상을 떠났다.
제루사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죽고 난 일주일 후
그녀 역시 병을 얻어 이 세상을 떠났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맡긴 내면의 일기와 일지를
조나단 에드워즈는 책으로 펴내게 이른다.
그들의 소중한 만남은 오늘까지도 독자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위대한 선교사 데이빗 브레이너드
김홍만 (국제신대원, 역사신학)
교회사 속에서 가장 탁월하고, 감동적인 선교사를 든다면,
데이빗 브레이너드 (David Brainerd)를 제 1순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복음사역자들이 타 문화권으로 건너가서 사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음에도,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18세기에 그는 인디언에게 가서 사역을 하는 가운데 성령이 부어주시는 부흥을 경험하였고,
이로 인하여 인디언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다.
그가 병으로 사역을 오래 할 수 없었으며,
결국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일기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손에 의하여
편집되어 책으로 출판되었고,
이 책을 통하여 19~20세기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해외선교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가 죽은 이후에 그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을 선교사로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교회사 속에서 가장 탁월한 선교사인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신학에 대해서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의 선교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성장배경
브레이너드는 1718년 4월 20일 미국 코네티컷트 주의 하뎀에서 태어나
청교도 가정의 배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청교도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영적인 것에 대해서 상당한 고민과 생각들을 한 것으로 보인다.
7, 8세에 구원에 대해서 고민하였으며,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그
는 청소년기를 지나서 20세에 이르기까지 외적 종교적 의무를 다하고
목회자가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도 했지만 그는 아직 회심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1738년 초겨울, 그는 늘 하던 대로 기도하러 산책을 가고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리라는 생각에 압도되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한 성령의 책망이 그의 영혼 위에 계속되었다.
이러한 죄에 대한 책망의 역사가 거의 1년 이상이나 지속되었고,
1739년 7월 12일 금요일에 드디어 자신의 죄가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
용서받는 체험을 하였다. 브레이너드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이
자신의 영혼에 비추어지는 것을 체험하였다.
이러한 회심의 체험으로 인하여 이제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신적인 것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님의 주권의 위대하심과 그의 능력의 강력함을 맛본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탁월함과 충족성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고
그것은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과 그 은혜의 무한하심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이 크게 일어났다.
브레이너드는 이제부터 주를 높이려는 심령이 간절하였으며,
자신의 생애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예와 영광에 두었다.
그래서 브레이너드는 자신이 전에 세웠던 계획을 버리고
이제부터 오직 구세주의 영광을 높이고자 하였다.
영적대각성의 체험
그가 예일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740년에 조오지 휫필드가 와서 설교하였으며,
1741년에는 길버트 테넨트가 와서 설교하였다.
그들의 설교는 불과 같아서 많은 대학생들로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게 하였고,
이러한 영적 움직임 가운데 학생들이 크게 영적으로 각성하였으며, 회개가 일어났다.
이러한 은혜 속에 있으면서 대학에 와서 설교한 강사에 대해서 부주의한 말로 인하여
제적을 당하였다. 그에게는 어려운 시련들이었다.
이때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때까지 브레이너드는 인디언 선교에 대해서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면서 더욱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며,
영적 성장에 있어서 더욱 진보를 이루는 시기가 되었다.
그의 1742년 4월 27일자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인자하신 나의 주님, 인자하신 나의 주님,
하늘에서는 주 밖에 누가 나에게 있겠으며, 땅에서는 주님 외에 내가 사모할 자가 없습니다.
내가 천 번을 산다고 하여도 나의 영혼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하여
천 번의 삶이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단번에 드리겠습니다.
사역으로 부르심
1742년 7월 브레이너드는 장로교 목회자 협회로부터 교리들과
신앙의 체험에 대해서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시험을 통과한 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면서 이때부터 브레이너드는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있는
인디언 부족들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고자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인디언의 회심을 위해서 벌써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당시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으며,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면서 인디언에 대한 복음전도 사명이 더욱 분명하여 졌다.
바로 이 당시 장로교의 뉴욕노회의 목사인 에벤에젤 펨버튼이 브레이너드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찍이 인디언 선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던 펨버튼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에 대한 문의였다.
1742년 11월 25일 브레이너드는 펨버튼과 그 협회의 사람들로부터 심사를 받았고,
인디언을 위한 선교사로 지명 받았다.
그리고 그해 뉴욕의 롱아일랜드에서 교회를 섬기면서
1743년 봄부터 인디언 사역을 하기 위해서 준비하였다.
인디언 사역의 시작
1743년 4월 1일 브레이너드는 메사추세추 주의 카우나우미크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인디언을 위해서 일 년 동안 통역자의 도움을 받아 설교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브레이너드는 언어를 배웠으며, 시편의 일부분을 번역하였고,
인디언을 위한 학교도 시작하였다. 그는 사역에 앞서서 항상 기도하였는데,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숲에 들어가 기도와 묵상을 하였다.
1744년 5월 1일 카우나미크를 떠나서 델라에워 지역으로 옮겼다.
이 당시 카우나미크에는 백인들이 인디언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함으로
인디언들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5월말에 뉴왁으로 가서 목사 안수를 받을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1744년 6월 11일 브레이너드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때 펨버튼이 설교하였는데, 이 설교는 그의 사역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펨버튼은 사도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강권하라는 내용으로
설교하였다. 그리고 강권하는 것은, 인간이 본성상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라는 것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성령의 역사 가운데,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그래서 그들에게 죄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복음의 사역자들은 죄인들로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죄에 대해서
주께서 심판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영적으로 각성된 죄인들로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도록 만들어야 하며,
이때에도 복음 사역자들은 복음 안에 있는 용서와 위로를 잘 드러내야 하는데
이것이 복음 사역자의 의무라고 하였다.
펨버튼이 브레이너드의 목사 안수식에서의 설교는 그 당시 영적 대각성 가운데
전도자들의 설교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전문가들이었으며,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일하시는 원리에 대해서 정통해 있었던 자들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이제 목사 안수 받는 브레이너드에게 선교의 원리로 강조하였던 것이다.
안수를 받은 후에 브레이너드는 델라웨어 강을 중심으로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광야에 흩어져 있는 양들을 찾아 나섰다.
이 당시 브레이너드의 기도는 인디언의 회심에 온통 초점을 두고 있었다.
단 한명의 회심을 위해서 그는 간절히 숲속에서 거의 날마다 기도하였다.
인디언들 가운데 우상 숭배와 마법을 행하는 자들과 무당들이
브레이너드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독살시킨다는 위협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브레이너드는 실망하지 않았으며,
인디언의 회심은 피조물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서 내려오는 능력에 의해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렇게 1년 동안 델라웨어 지역에서 사역을 하였지만,
브레이너드는 단 한명의 회심자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파송해준 선교협회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내년까지 성공의 기미가 포이지 않는다면 사역을 포기할 것을 고려하였다.
크로스윅숭 부흥
브레이너드는 1745년 6월 19일 뉴저지 주의 크로스윅숭으로 가서 설교하였다.
그곳의 인디언들은 다른 곳의 인디언과는 달리
브레이너드의 설교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으며, 귀담아 들었다.
브레이너드의 설교에 대한 관심은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가 도착한 지 삼일 만에 청중이 17명에서 3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들 모두는 브레이너드의 설교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브레이너드는 자신의 설교 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듣는 회중 가운데, 죄의 각성이 일어나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울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는 이도 있었다.
브레이너드는 다시 8월 3일에 크로스윅숭을 방문하였다.
지난 6월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8월 5일에 설교하는 가운데 설교를 듣던 인디언들 가운데,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울부짖는 소리들이 일어났고,
설교 후에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 후인 8월 8일에 약 65명가량의 인디언들이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설교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을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말씀을 전파할 때 한 사람씩 더욱 힘있게 역사하시는 주님의 도우심을 느낄 수 있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이 하나님의 능력이 모임 위에 내리는 듯하더니
모든 사람을 압도해 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놀라운 힘에 사로 잡힌 듯했다.
불어난 홍수나 휘몰아치는 격류가 견디기 힘든 무게와 압력으로
그 앞에 거치는 것들을 휩쓸어 버리는 현상에나 비유할 수 있을 까?
그들은 거의 한 결같이 집안 곳곳에서 하나님께 긍휼을 간구하며 울부짖어
기도하고 있었다.”
즉, 크로스윅숭의 인디언에게 부흥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성령의 부흥의 불길은 델라웨어의 휙스 지역에서도 그해 (1745년)에 일어났다.
그리고 10월에 다시 크로스윅숭에서 성령의 역사가 더욱 강력하게 일어났다.
부흥을 통해서 인디언들 가운데 신실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났다.
이렇게 부흥을 경험한 브레이너드는 그해(1745년) 11월에 부흥에 대해서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점에서 인디언 가운데 이 일을 시작하신 것이 분명하다.
내가 알기로는 이 시점은 나의 힘이 한계에 도달해 있을 때였다.
하지만 이때가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였다.
모든 희망과 인간적인 소망이 완전히 깨어져 버렸을 때,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역사하셨다.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함을 하락하여 주셨다.
여기서 나는 흑암과 절망의 늪에 있을 지라도
맡은 일을 끝까지 감당해야 함을 깨달았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 146)
자신의 사역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하여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27세의 젊은 청년 선교사의 고백이다.
교리 설교의 중요성
1745년에 부흥을 크게 경험한 브레이너드는 부흥의 원인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살폈다.
그는 사역의 초기부터 말씀을 가르칠 때
인디언들로 죄인 됨을 깨우치기 위해 역설하였다고 하였다.
더욱이 죄를 회개함에 기초를 두지 않은 신앙은
모래위에 성을 쌓는 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막 2:17절 말씀과 같이 주님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달았을 때
그들을 주님께 초대해야 하며, 이때 죄인 됨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1746년 3월에 다시 크로스윅숭에서 가서 설교할 때에도 부흥이 일어났는데,
이때에는 회중이 14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때에도 부흥의 수단이 무엇이었을까를
그가 신학적으로 생각하였다.
그것은 교리 설교와 함께 교리문답식의 성경공부가
그들에게 영적 각성의 수단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브레이너드는 교리 설교와 강의가 그들에게 성경적 지식의 진보를 있게 하였고,
이로 인하여 그들이 진리에 대하여 궁구하도록 만들었으며,
그들이 이러한 궁구함 속에 있을 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영적 각성이 일어난 것으로 확인하였다.
사실 이러한 그의 사역은 이미 그가 영적대각성 당시에 체험하였던 것이며,
더욱이 그를 목사 안수하였던 펨버튼으로부터 사역에 있어서
지침으로 당부 받았던 내용들이다.
마지막 사역
브레이너드는 이렇게 사역을 하는 가운데, 자신을 잘 이해하고 항상 도와주었던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서 그의 둘째 딸인 제루사를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기보다는
광야에 흩어져 있는 인디언들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더욱 계속되었다. 1746년 8월 11일 전도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은 그의 마지막 사역이었다. 서스퀴한나의 패스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그의 병은 깊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언들을 향하여 주께 돌아오라고 설교하였다.
11월에 서스퀴한나 사역을 마치고 뉴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봄까지 계속 휴식을 취하고 쉬었지만, 병은 더욱 깊어갔다.
1747년 6월 보스톤을 방문하는 동안 의사로부터 진단을 받았는데,
폐에 궤양이 생겨서 소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병이 깊은 브레이너드를 받아 준이는 조나단 에드워즈이었다.
1747년 7월부터 에드워즈 집에서 간호를 받았다.
그에게 있는 시간들은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피를 토하면서 때로는 혼수상태에 있으면서도,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었다.
1747년 8월 23일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늘 아침 나는 생각이 매우 상쾌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시키고 싶은
기대와 희망을 가졌다.
내 바벨론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으리만큼 망해버린 때가 가까이 왔음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나로 영적인 묵상을 하게 하였고, 나를 새롭게 했다.”
결국 브레이너드는 1747년 10월 9일 금요일 오후 6시에
그렇게 그리워하던 주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임종 직전까지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선교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중요한 수단인 부흥을 갈구하였다.
그래서 보스톤의 목회자들을 향하여 부흥을 위하여
왜 기도하지 않느냐고 한탄하는 말도 하였다.
브레이너드는 29세의 청년선교사로 주님 품에 안겼지만,
오늘날에도 그의 선교의 정신과 방법은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비록 그의 사역이 4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인 성령의 쏟아부어주심을 경험하였다.
그의 사역은 기도로 시작하여 철저한 하나님 말씀의 강해와 성령의 역사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교회사 속에서 어떤 성도보다 탁월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위한 기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도전을 주고 있다.
한국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브레이너드가 갔던 그 길을 따라감으로
역시 선교지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인 부흥을 경험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