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기독교 도덕 중에서 다른 도덕과
가장 날카로운 차이를 보이는 부분을 다룰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악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사람에게서 그것이 나타나면 누구나 혐오하는 악,
그리스도인 말고는 자신에게 그런 악이 있다는 것을 생각조차 못하는 악이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자기는 성질이 고약하다거나 여자나 술에 약하다거나
심지어 겁쟁이라고 인정하는 말은 들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이 악이 자신에게 있다고 고백하는 말은
지금껏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이 악이 나타날 때
조금이나마 자비를 보여 주는 사람 또한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보다 더 싫어하는 악이 없으면서도,
이보다 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악도 없습니다.
이 악이 많이 있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이 악을 더 싫어 합니다.
▲제가 말하는 이 악이란 바로 교만(pride) 또는 자만(self conceit)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덕목을 기독교 도덕에서는 겸손이라고 부르지요.
기독교 스승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가장 핵심적인 악, 가장 궁금적인 악은 교만입니다.
성적 부정, 분노, 탐욕, 술 취함같은 것들도 이 악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합니다.
악마는 바로 이 교만때문에 악마가 되었습니다. 교만은 온갖 다른 악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 상태입니다.
제 말이 과장처럼 들립니까? 그렇다면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조금 전에 저는 교만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교만을 더 싫어한다고 말햇씁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얼마나 교만한지 가장 손쉬운 방법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쓸데없이 내 일에 참견하거나
은인 행세를 할 때 얼마만큼이나 싫은 마음이 드는가?"
요점은, 각 사람의 교만은 다른 이들과의 교만과 경쟁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연회장에서 거물급 인사처럼 행세하는 사람을 볼 때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내가 그런 거물급 인사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같은 장사를 하는 사람들끼리는 화합이 잘 안되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다른 악들은 이를테면
다만 우연히 경쟁적이 되는 반면, 교만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라는 것
- 본성상 원래 경쟁적이라는 것 - 입니다.
교만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가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옆사람보다 더 가져야만 만족합니다.
그들은 남보다 더 돈 많고 더 똑똑하고 더 잘생긴 것을 뽐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돈 많고 똑똑하고 잘생겼다면 교만할 거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남과의 비교입니다.
즉,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경쟁이라는 요소가 없으면 교만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만은 다른 악들과 달리 본질덕으로 경쟁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좋아할 경우, 성적 충동이 그들을 경쟁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일 뿐입니다. 그 두 남자는 각기 다른 여자를 좋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그 여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더 나은 사람임을 입증하기 위해, 남이 좋아하는 여자를 빼앗아 갑니다.
어떤 물건이 모든 이에게 돌아갈 만큼 충분치 못할 경우,
탐욕이 사람들을 경쟁으로 몰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을 얻었을 때에도
단지 자기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탐욕이나 이기심 탓으로 돌리는 세상의 악들은
사실 거의 모두가 교만의 결과입니다.
▲돈의 경우를 봅시다. 탐욕은 분명히 더 좋은 집, 더 좋은 휴가,
더 좋은 먹을거리와 마실거리를 위해 돈을 갖고 싶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어느정도 까지만 그렇게 만들 수 있을 뿐입니다.
일년에 1만 파운드를 버는 사람이 2만 파운드를 벌려고 안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리겠따는 탐욕 때문이 아닙니다.
1만 파운드는 누구라도 온갖 사치를 누릴 수 있을 만큼 큰 돈이니까요.
진짜 이유는 교만 - 다른 부자보다 더 부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
(더 나아가면) 권력욕 - 에 있습니다. 권력이야말로 교만한 사람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꼭두각시처럼 좌지우지하는 것만큼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예쁜여자가 가는 곳마다 남자들의 마음을 빼앗아 불행을 일으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분명히 성적 충동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여자들은 성적으로 냉랭하기 쉽습니다.
진짜 이유는 역시 교만에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이나 국가가 왜 한없이 욕심을 냅니까?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은 본성상 경쟁적입니다. 그래서 한없이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보다 힘 있고 돈 많고 똑똑한 사람이
전 세계에 단 한 명만 있어도 경쟁자로 여기고 적으로 여깁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말이 맞습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 모든 나라와 가정을 불행하게 만든 주된 원인은 바로 교만입니다.
다른 악들은 그래도 사람들을 맺어 주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여러분은 술 취한 삶들이나 방종한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지내거나 농담을 주고받거나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언제나 적대감을 일으킵니다.
사실은 교만 그 자체가 적대감입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적대감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면에서든 여러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 - 따라서 자신은 하나님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 - 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항상 눈을 내리깔고
사물과 사람을 봅니다.
그렇게 내리깔고 보는 한 자기보다 높이 있는 존재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두려운 질문이 생깁니다. 분명히 교만하기 짝이없는 사람인데,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아주 신앙적으로 행세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감히 말하지만 그들은 상상속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이 허깨비 하나님이 자신들을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훨씬 낫게 여기며
인정해 준다고 늘상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께 상상속의 겸손을 1페니어치 지불하고는
동료 인간을 향한 교만은 1파운드 어치 얻어내는 것이지요.
저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그를 전파하고 그의 이름으로 귀신까지 쫒아냈으면서도
마지막날에 결국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을 듣게 될 자들이
바로 이런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이런 죽음의 덫에 걸려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이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볼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사람으로 느껴질 때는
- 특히나 다른 사람보다 낫게 여겨질 때는 -
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진짜 시금석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느냐.' ,
또는 '나 자신을 하찮고 더러운 존재로 여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중에서도 더 좋은 쪽은 자신에 대해 완전히 잊는 것이겠지요.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악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부까지 침투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덜 나쁜 악들은 사탄이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이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동물적 본성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옥에서 곧장 나옵니다.
교만은 순전히 영적인 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악들에 비해 훨씬 교묘하고
더 치명적입니다.
▲간혹 교만이 비교적 단순한 다른 악들을 저지하는 데 동원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실제로 선생님들은 바른 행실을 가르치기 위해 아이의 교만,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자존감'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비겁하게 행동하거나 정욕에 휩쓸리거나 성급하게 구는 것은
자기 체면을 깎는 일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즉 교만을 통해 그런 유혹을 극복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악마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비웃습니다.
그는 여러분 안에 교만이라는 독재정권을 세울 수 만 있다면
순결하고 절제하며 용감하게 사는 것쯤은 얼마든지 봐줄 수 있습니다.
암을 유발시킬수만 있다면 동상이 치료되는 것쯤은 얼마든지 봐줄 수 있듯이 말이지요.
교만은 영적인 암입니다. 그것은 사랑이나 자족하는 마음, 심지어 상식까지 갉아먹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 몇 가지 있을 법한 오해를 풀어야 겠습니다.
(1) 칭찬받고 즐거워 하는 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공부 잘했다고 아이의 등을 두드려 줄 때,
사랑하는 남자가 여자에게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영혼에게 "잘했다"고 말씀하실 때
즐거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원래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즐거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즐겁게 해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을 갖는것이 당연한) 대상을
즐겁게 해 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즐거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가 즐거워 하니까 됐어'라는 생각이
'이런 일을 하다니 나도 참 대단해'라는 생각으로 바뀔 때 생깁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기쁨은 커지고 칭찬에서 오는 즐거움은 줄어들 수록
여러분의 상태는 악화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칭찬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지경에 이르면,
그야말로 최악에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허영심이 교만중에서도 가장 표면에 드러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가장 미미하며 용서받기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허영심 많은 사람들은 칭찬과 박수갈채와 경탄을 지나치게 좋아한 나머지
늘 거기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것도 잘못이긴 하지만 그래도 천진하며 겸손하다고까지 봐 줄 수 있는
(좀 이상한 겸손이긴 하지만) 잘못입니다.
이것은 그가 아직 자화자찬에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를 봐 주 길 바랍니다.
즉 그는 아직 인간적인 것입니다.
정말 흉악하고 악마적인 교만은 다른 사람들을 얕본 나머지
그들이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물론 남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옳을 때가 있고,
심지어 의무적으로 그렇게 해야 할 때도 가끔은 있습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 예컨대 남의 말보다 하나님의 생각에
훨씬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경우에는 그렇게 해야 하지요.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이와는 다른 이유 때문에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는 “저런 어중이 떠중이들이 환호하건 말건 무슨 상관이야?
저런 자들의 생각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아니 가치가 있다고 해도 그렇지
나 같은 사람이 풋내기처럼 겨우 칭찬한마디에 얼굴이 빨개져서야 쓰겠어?
나는 인격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사람이야.
내가 이런일을 한 건 나 자신의 이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구.
한마니로 내가 원래 이런 인간이기 때문에 했을 분이라는 거지.
그게 다른 사람들 눈에 좋아보였다면 그러라고 해.
어쨌든 그 사람들은 나한테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이처럼 정말 철두철미한 교만은 허영을 제어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마귀는 더 큰 악을 심기위해 작은 악은 기꺼이 ‘고쳐’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허영심을 갖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을 고치겠다고 교만을 불러들여서는 안 됩니다.
(2) 아들이나 아버지나 학교나 부대를 ‘자랑스러워 한다’(is proud of)는 영어 표현이
이런 의미에서 ‘교만’(pride)의 죄에 해당 되느냐는 질문도 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따라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문은 ‘애정 어린 마음으로 어떤 것에 경탄을 느낀다.’는 뜻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경탄이라면 죄와 거리가 멀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유명하다거나
자기 부대가 유명하기 때문에 잘난 척 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그렇지만 순전히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보다는 그래도 낫습니다.
자기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사람은
완전한 영적 파멸에서는 한 걸음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찬양하는 한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3) 하나님이 교만을 불쾌하게 여기셔서 금지하신다거나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 겸손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하나님 자신이 교만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체면을 조금도 염려하지 않으십니다.
요점은 여러분이, 하나님 자신을 알기 원하신다는 것이며
여러분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이라는 두 요소가 어떤식으로든 참으로 만나게 될 때
여러분은 체면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 평생 여러분을 불안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들었던
그 모든 허튼 생각에서 한순간 벗어남으로써
한없는 안도감을 누리는 가운데 기쁜 마음으로 겸손해집니다.
바로 이런 순간을 주시기 위해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들고자 애쓰시는 것이며,
우리 모두가 걸쳐 입고 바보처럼 우쭐대며 돌아다니고 있는
우습고 추한 가장무도회 의상을 벗기시고자 애쓰시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보다 조그만 더 겸손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가장무도회 의상을 벗어던질 때의
그 안도감과 편안함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즉, ‘나 좀 봐주세요’, ‘나 정말 좋은 사람이죠?’ 하는 식의 모든 불안,
겉치레나 허식과 함께 거짓된 자아를 내던져 버릴 때)
그러나 잠시 그 근처에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사막에서 시원한 냉수를 한 모금 들이키는 것처럼 얼마나 시원한지 모릅니다.
(4) 만약 여러분이 정말 겸손한 사람을 만난다면
‘요즘 사람들이 흔히 겸손하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겠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저야 정말 부족한 사람이지요.”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느끼하고 역겨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주는 인상은,
여러분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쾌활하고 지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만약 그에게 호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인생을 너무 쉽게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데
약간의 질투를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그는 자신의 겸손을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아예 자기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겸손해지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제가 그 첫걸음을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 첫걸음이란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간 보폭이 큰 걸음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이 한 걸음을 내딛기 전에는 아무 진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은 우쭐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사실은 아주 우쭐대고 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