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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 존 비비어

LNCK 2018. 4. 11. 19:49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벧전 1:15-17       스크랩

 

존 비비어 <여호와를 경외하라 107~116쪽 발췌)           *관련글 : 친밀함은 경외함에 있다

 

 

예수님과 동행했으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심판을 지켜본 베드로는

후에 영감에 의해 이렇게 진심어린 훈계를 기록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였으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1:15-17)

 

그가 "사랑 안에서 지내라"라고 말하지 않은 것을 주목하라.

그렇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한다.

그것 외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을 떠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이 편지의 서두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불타오르는 사랑을 언급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벧전 1:8)".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개인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관계를 맺기위해 부르심을 받았지만,

베드로는 거기에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한다고 덧붙이면서 균형을 잡고 있다.

 

거룩한 경건함이 부족할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제한된다.

우리의 마음을 두 가지 불꽃의 빛과 온기를 모두 지녀야 한다.

 

아마도 이 사랑이 어떻게 제한될 수 있는지 의아할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아는 범위 만큼만이다.

 

만약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 분의

겉모습만을 알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진리가 진정한 사랑의 근원이 된다.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보이시리라 생각하는가?

여러분이라면 그러겠는가?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감추는 것을 선택하셨다 (45:15).

시편기자는 이것을 '지존자의 은밀한 곳'으로 고백하고 있다 (91:1).

 

그분의 거룩함과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오직 그분을 경외하는 자만이 이 비밀한 지성소를 찾을 것이다.

 

말씀하시되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25:14)

 

이제 여러분은 베드로서의 말을 좀더 잘 이해할 것이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는 같이 동행하지 않았지만,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그분을 만난 바울은 '떨림'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이 훈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는 믿는 이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2:12)"고 말했다.

실제로 이 구절은 신약에서 믿는 자와 그리스도 간의 올바른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세 번이나 사용되었다...

 

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서 (표적과 기사에)

놀라고 감탄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확신한다.

모두가 충만한 표적과 기사를 경이롭게 여겼다.

 

하지만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부족할때 표적과 기사도 진부해지기 마련이다.

이 불행한 부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리석게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편 34:11-13을 보라. 그 두려움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변함이 없는 이 두 가지 측면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8)" 그리고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라 (12:29)".

 

바울은 성도들이 심판대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때 경험하는 불을 언급한다.

거기서 우리는 육체로 선악간에 우리가 행한 일들을 계수받을 것이다 (고후 5:10).

그리고 바울은 충고했다.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앎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고후 5:11)".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그분께 다가설 때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성경은 우리가 합당하게 섬기며 다가가야 한다고 덧붙인다.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

경건함과 독실한 두려움을 가지고 (12:28) 섬겨야 한다.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육체의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4:6-7; 12:23).

하나님은 그 점을 명확히 하셨다.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라 (10:30)".

 

아들, 딸들과 함께 사는 한 나라의 왕을 생각해 보라.

궁전에서 그는 남편이요 아버지이다.

그러나 보좌가 있는 곳에서는 부인과 아이들에게도 그는 왕으로서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가 은밀한 방에서 나를 부르시며 팔을 내밀고

초청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이리 온, 내 무릎에 올라오렴. 함께 이야기 하자꾸나."

 

나는 그러한 특별한 시간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도하거나

예배 중일 때 그분의 거룩한 임재에 전율하며 두려워 할 때도 있다.

 

19958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가진 일주일간의 집회 마지막 날이

그러한 예배들 중 하나였다. 일주일 동안의 분위기는 매우 침체적이었지만,

마지막 날 나는 우리가 마침내 돌파구를 뚫었음을 감지했다.

 

하나님의 임재는 건물을 가득히 채웠고, 몇 사람은 기쁨이 넘쳐 흘러 웃기도 했다.

이것은 10분에서 15분 가량 계속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번 하나님의 임재의 물결이 잠시 후에 뒤따랐다.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감동되었다.

 

잠시 조용하더니, 또 다른 물결이 성전을 가득 채운 기쁨과 함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워지고 웃을 때까지 밀려왔다. 그리고 다시 잠시 중지되었다.

 

내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오리라. 그러나 그것은 다른 것들과는 다를 것이다."

 

나는 계속 침묵을 지키며 기다렸다. 수분 내에 매우 다른 하나님의 임재가

건물 안에 자욱했다. 그것은 놀라웠으며 거의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이끌렸다. 분위기는 긴장되었다. 불과 몇분 전까지 웃고 있던 사람들이

울고, 통곡하며 부르짖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마치 불가운데 있는 것처럼 소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악한 영의 활동에서 말미암은 고통의 신음은 아니었다.

 

내가 단상 위를 왔다 갔다 하고 있을때, 이런 생각이 마음을 스쳐갔다.

", 잘못된 행동을 취하거나 한 마디라도 잘못 말하지 말아라.

만약 그러면, 너는 죽은 목숨이 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런 생각은 긴장감을 주었다.

나는 이 놀라운 임재속에 불경스러움이 존재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날 나는 두 부류의 다른 반응들을 목격했다.

두려워서 그분의 임재로부터 멀어진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놀라운 임재에 더 가까이 나아간 사람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리 온, 내 무릎에 와 앉아라" 하시며

속삭이시는 순간 중 하나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우리는 놀라움에 휩싸여 집회장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로 완전히 변화된 것을 느꼈다.

 

그분의 임재에 강하게 감동을 받은 한 남자는 후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속이 아주 깨끗해진 것 같아요."

 

나는 동의했다. 나도 마음이 정화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나는 이 성경구절을 찾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19:9)"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일어난 일이 교회를 뒤흔들었다.

그것은 각자 마음의 동기들을 끄집어내어 점검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불손함을 자신들에게서 발견한 사람들은 회개했다.

다른 사람들은 예루살렘 신자들의 모임에 가입하기 전에

그 대가를 좀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떠나갔는지도 모른다.

 

온 교회와, 이 부부에게 일어난 일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나는 이 사건이 한동안 도시에서 화제였다고 확신한다. 사람들은 서로 물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들었어요?

부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금을 가져왔다가 죽었대요!"

 

성경은 기록하기를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5:!3-14)".

 

이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아무도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으나,

다음 절은 믿는 자가 더 많이 증가했다고 진술한다.

 

아무도 그들과 상종하지 않을때에 어떻게 믿는 자가 더 증가할 수 있을까?

여기서는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들이 그 대가를 따져볼 때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나는 믿는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가입'하는 일은 더이상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앞으로 나아왔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혹은 무엇을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주님앞에 나아올 때는

불경건한 자세가 나타나기 쉽다.

그것은 축복과 결과에 기초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우리 마음대로 안 되어 갈때-그런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버릇없는 어린애처럼 실망하고, 존경심은 사라져 버린다.

 

불경건함이 심판을 받게 될때, 모든 이들은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잘못된 동기들은 심판의 빛에 의해 정결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참된 회개의 마음가짐이다.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는가?

나는 주의 종들에게 거짓말을 한 사람들을 알고 있는데,

그들은 그다지 심한 심판을 받지도 않았다.

 

실제로 교회사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불경함보다 더한 행위들도 많았고

심지어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아무도 더 이상 예배 중에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는다.

그런 사건은 오늘날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답은 다음의 성경구절 속에 숨어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5:15)".

 

그들은 병자들을 거리에 눕혔다. 거리마다 그저 베드로의 그림자가 지나가며 덮이면

혹시 병자가 나을까 하고 기다리며.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이 논쟁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믿기로는 그 해석이 반드시 베드로의 육체의 그림자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림자는 병자를 고칠 아무런 능력이 없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구름이었다고 믿는다.

 

주님의 임재가 너무도 강력해서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베드로의 그림자를 덮었을 것이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서 빛나서

그의 고유의 이미지가 가리워졌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감추시기 위해 베드로에게 그림자의 구름으로 덮으셨다면?

사도행전 5:15에서 베드로가 했던 것은 그저 병자들을 그림자로 덮었던 것 뿐이다.

그리고 거리의 병자들은 나음을 입은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 자리에서 죽었을 때

하나님의 매우 실체적인 임재가 베드로와 함께 하셨음을 알고 있다.

 

본질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미 드러난 때에

주를 향하여 불경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아담, 나답, 아비후,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경우처럼

우리는 다시 한 번 질서, 영광, 그리고 심판의 패턴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