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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中 사랑 / C. S. 루이스

LNCK 2018. 4. 20. 15:09

◈순전한 기독교 中 <사랑>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中 204p <사랑>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기독교적 의미의 사랑’을 뜻합니다.

기독교적 의미의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의지의 상태로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사랑을)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남에 대해서는 (사랑을) 배워서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용서를 다루는 장에서, 우리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자신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웃을 기독교적으로 사랑하는 것과

그들을 좋아하거나 그들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은 아주 다른 일입니다.


‘호감’이나 ‘좋아 하는 마음’이 절로 생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죄도 아니고 덕도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역시 죄도 아니고 덕도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감정은 그저 하나의 사실일 뿐입니다. 물론 이런 감정을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덕이 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좋아하는 마음이나 애정이 절로 생기는 사람을 사랑하기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애정을 북돋는 것 - 할 수 있는 한 사람들을 많이 좋아하는 것 - 은

우리의 정상적인 의무입니다.

(몸에 유익한 음식이나 운동을 좋아하려고 애쓰는 것이 의무이듯이 말이지요.)


그렇게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마음이 사랑에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그 외의 사람들을 사랑 없이 대하거나 부당하게 대하지 않도록

아주 예민하게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과 그를 참으로 사랑하는 일이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도 생깁니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맹목적인 애착을 가진 어머니는

그 자연스러운 애정 때문에 아이를 망칠 위험이 있습니다.


즉 자신의 애정 본능을 채우려다가 아이가 나중에 누려야 할 참 행복을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 개의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 마음을 북돋워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인위적으로 애정의 감정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것이

곧 사랑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질적으로 ‘냉정’합니다. 그것은 불운한 일이긴 해도 죄는 아닙니다.

소화불량이 죄가 아닌 것과 같지요.

그런 기질을 가졌다고 해서 사랑을 배울 기회가 없거나

사랑을 배워야 하는 의무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법칙은 아주 간단합니다.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나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를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곧 위대한 비밀 하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싫다고 해서 상처를 주면, 점점 더 그가 싫어집니다.

그러나 싫은 사람이라도 잘 대해 주면, 점점 덜 싫어집니다.


그러나 싫은 사람이라도 잘 대해 주면, 점점 덜 싫어집니다.

한 가지 예외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사랑의 범을 따르기 위해 잘 대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너그러이 잘 용서해 주는 사람인지를 과시하거나

상대방이 마치 빚진 사람처럼 자기를 찾아와 ‘감사’를 표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잘 대해 주는 경우에는 실망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것이 과시이고 선심인지 금방 알아챕니다.)


그러나 그가 단지 하나님이 지으신 자아이기 때문에(우리처럼)

나의 행복을 바라듯 그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잘해 준다면,

그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며,

아니면 적어도 덜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적인 사랑은 머릿속이 감상으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는

아주 냉정해 보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애정과 아주 구별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애정을 낳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의 차이는,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친절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려고 애쓰며,

그렇게 하는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 처음에는 자기가 좋아하게 되리라 상상조차 못했던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

좋아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똑같은 영적 법칙이 정반대 방향으로 무섭게 작용하기도 합니다.

독일인들은 처음에 유대인들이 미웠기 때문에 학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들을 학대했기 때문에 점점 더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잔인해질수록 더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게 될수록 더 잔인해지는 법입니다.

이런 악순환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선과 악은 모두 복리로 증가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매일 내리는 작은 결정들이 한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아주 작은 선행을 하는 것은 마치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는 일과 같아서,

몇 달 뒤에 꿈도 못 꾸었던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겉보기에 사소한 정욕에 빠지거나 화를 내는 것은

적에게 고지나 선로나 교량을 내주는 일과 같아서,

바로 그 길을 통해 적의 공격을 받게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저자들은 이 사랑이라는 말을 인간들 사이의 기독교적인 사랑뿐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에도 사용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데 대해 종종 난색을 표합니다.


자기 마음속에서는 그런 감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십시오.

가만히 앉아 억지로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만일 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무엇을 할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래서 떠오르는 일을 가서 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보다 훨씬 더 편한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끊임없이 경건한 감정만 느끼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설사 그렇게 살 수 있다 해도, 감정은 하나미의 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든 인간을 향한 사랑이든, 기독교적인 사랑은 의지(Will)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Will)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곧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감정을 만들어 낼 수 는 없으며,

또 우리에게는 이런 감정을 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감정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죄나 무관심에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또 하나님께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죄를 치료하겠다는 결심을 완수할 때까지 단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