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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장막 / 토미 테니

LNCK 2018. 5. 31. 18:00

◈다윗의 장막 / 토미 테니              행15:16              스크랩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

 


행 15: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암 9:11-12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최초의 장막이었던 모세의 장막과 그리고 웅장했던 솔로몬 성전을 복원하시지 않고, 그 대신에 다윗의 장막을 재건하고 싶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윗의 열정을 회복시키는데 있다. 즉 다윗의 장막은 건물이 아니고, 하나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건물인 집과 가족이 있는 따뜻한 가정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듯이, 다윗의 장막은 그 속에 다윗의 열정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가슴에 있던 열정이 회복될 수만 있다면, 그 장막을 재건하는 과정에 직접 나서실 것이다.

다윗의 임시 처소는 모세의 장막이나 솔로몬 성전과 비교해 보면, 장막으로서의 조건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언약궤와 성물들을 햇빛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그저 기둥 좀 세우고 그 위에 방수천 하나 덮은 정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는 그 집을 다시 세우고 싶구나” 라고 하셨다. 사람이 만든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이 무너뜨린 것이 아니고 스스로 무너졌다. 사람의 손은 약해지거나 쉽게 피곤해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강하게 하는 과정을 거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집으로 그들을 다시 다윗이 세웠던 집으로 돌려 보내시는 것이다.

요즘 기독교는 건물에 매이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건물에 감동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궁전보다도 열정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망각한 것이다. 다윗도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짖고 싶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고 분명히 거절하셨다. 삼하 7:1-6, 대상 17:1-5.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는 장면에서도 왕상 9:6-8에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신다.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 헤롯 성전의 크고 웅장한 미관을 자랑했을 때도, 주님은 그들에게 예언하셨다. 눅 21: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무너뜨리우리라”

하지만 다윗의 장막에 대해서는 결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다시 세우시며 복구하며 보존하도록 하셨다. 그것은 건물 보다는 그 장막에서의 추억,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만나셨던 그 감격, 즉 인간과의 만남을 귀중하게 생각하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원하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인 인간과의 만남을 그토록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휘장을 찢으시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당신의 자녀들을 만나러 오신다.

하나님은 다윗이 장막이 실제로 세워지기 오래 전부터 소년 다윗과의 만남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계셨다. 그가 소년 시절 양을 칠 때에, 다윗은 들판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 분과 교제하고, 그 분을 찬양하며, 그 분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올 때, 그 절정에 이르며 활짝 꽃을 피운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를 교회로 되돌리려는 우리들의 노력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관심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써, 언약궤 위에 있는 두 그룹의 펼친 날개 사이에 머물던 파란 불꽃에 있었다. 그 불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영광 이었다.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가 가는 곳에는 그 어디서나 승리와 능력과 축복이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를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에 깊이 감동하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무엇인가를 사로잡은 자였다.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다윗의 열정, 그 열정이 사람들 사이에 충만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신 것이다.

행 13:22, 삼상 13:14 참고 /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하나님 마음을 닮은 혹은 좇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다윗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좇고 갈망하는 자였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자였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는 결심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그의 열정에서 나온 것이다.”

다윗의 장막에 대하여 모세의 장막과 솔로몬 성전의 차이점은 지성소에 있는 휘장이 있고 없음이다. 즉 다윗의 장막은 그 휘장이 없다는 것이다. 휘장은 필요하지만, 하나님은 그 휘장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헤롯 성전의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으셨다.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들을 분리시키는 장벽이며 구분선이었다.

십자가의 날까지 하나님이 휘장 뒤에 숨으신 것은 죄인들이 거룩한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올 때,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과 분리가 아닌 만남을 원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심도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분리를 없애기 위해서 갈보리 산에서 독생자의 육체를 휘장처럼 찢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 만큼 우리와의 만남을 원하시고 있다. 단 몇 시간이 아닌 언제나 열린 상태에서 하나님 당신과 우리들의 깊은 만남을 기대하시는 것이다. 엡 1:14절에서 “하나님은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다” 고 하신다. 모세의 장막은 정해진 식양에 따라서 4.5미터의 높이의 천으로 막혀 있지만, 다윗의 장막은 그 어떤 장벽이나 휘장이 없었다.

사실 다윗의 장막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둘러싸고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예배자들이었다. 거의 36년 동안 일년 365일, 한 주 7일, 하루 24시간 매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들이 있었다. 다윗은 한 밤중에라도 일어나면 언제나 성막으로부터 들려오는 암송과 찬양과 악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다윗은 이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쓴 것 같다.

시 134:1-2절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낮과 밤으로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서 춤추고 경배했다. 마치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경배하는 모습을 본 다윗은, 예배자들의 편 팔과 춤추는 발 사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파란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모세의 장막에선 예배자들이 휘장 뒤에 가려진 것을 예배해야만 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단 한 번 휘장 뒤로 들어가는 일만 있었다. 그러나 다윗의 장막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예배자이든지, 여행자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다 볼 수 있었다. 휘장이 없는 예배는 아무 방해가 없는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가능케 한 것이다.

다윗의 장막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으로 만든 기적이 가능케 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다윗의 열망 때문이다. 삼하 6:9절에서 “어떻게 해야 여호와의 언약궤를 내게로 가져올 수 있을까”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다윗은 이 한가지 열심에 자신의 전존재를 걸었다. 그러나 언약궤를 옮기려던 첫 번째 시도는 재앙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다윗은 [거룩한 운반작업] 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그는 레위인들과 예배자들과 함께 25키로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는 “드디어 해냈다” 는 환희와 안도감 때문에 춤추며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갈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보다도 인간의 명성에 가치를 두고서 다윗을 조롱했다. 그 결과 태의 열매를 갖지 못했다.

오늘날도 하나님에 대한 예배보다도 인간 중심적인 예배를 드릴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보다도 사람의 명성에 가치를 둔 현대판 미갈이라 할 수 있다. 다윗은 언약궤에 입혀진 금을 좇지 않았다. 또 법궤 속의 유물도 아니었다. 그는 궤 위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파란 불꽃을 찾고 있었다. 오늘날 멋진 건물과 큰 규모의 성가대와 웅장한 설교도 좋지만, 그 보다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파란 불꽃의 임재가 없다면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예배의 불꽃을 지펴야 한다.

한 때 목동이었던 예배자 다윗은 두려움과 죽음을 무릎쓰고 휘장의 경계선 너머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란 영역으로 새롭게 다가섰다. 그리고 예배에 대한 그의 개념이 모두 바뀌었다. 법궤를 메고서 수십 키로를 걸어서 마침내 녹초가 된 레위인들은 다윗이 만든 임시 장막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불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위해 예배를 드려야만 했다. 지금도 하나님은 땀을 흘리는 열정을 가지고 당신을 사모하는 그런 자녀들과 함께 만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어도,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하나님이 다윗의 집을 재건하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친밀감을 갈망하신다. 그 분은 사람들의 손이 예배나 중보기도를 통해 하늘문을 붙잡고 있기에 너무나 지쳐서 약해져 있기 때문에, 오늘도 다윗의 장막을 재건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2. 잘못된 결승선과 향기에 젖은 손잡이

소위 좋은 교회들의 예배 모임, 좋은 찬양, 그리고 좋은 설교가 많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현현 가운데 또는 생생환 영광 중에 직접 임재하시고 나타나시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자신이 주인공으로서 당신의 현현과 당신의 영광이 교회 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나야만 한다. 그밖의 것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조연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 은 영적인 일이므로 과학적인 증명이나 수치적인 검증이 필요치 않다. 그 대신에 하나님의 임재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는” 일종의 내면적인 느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가 다가올 때, 우리는 경험이 부족한 달리기 선수처럼 당황하고 불안하여 잘못된 결승선을 향해 달리다가 상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비몽사몽간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영광의 구름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본다. 베드로는 초막을 세우자고 주님께 제안한다. 그는 모세와 엘리야를 예수님과 동격으로 여기듯이 말했다. 그 때 하나님은 베드로의 말을 중단시키고 제자들의 인간적인 관점을 고쳐주셨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눅 9:35. 그리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높임을 받으신 만유의 주님만이 보이셨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자주 잘못된 결승선에 멈춰 선다. 우리의 몸만 흥분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중간에 끼어들어서 그분의 임재의 첫 번째 징조를 기념하겠다는 모래성을 쌓으려 한다. 우리는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를 연발하느라 “내가 그곳에 너희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그저 좋은 예배, 좋은 찬양, 좋은 설교를 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 그분을 만나야 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예배 중에서 하나님 그분 자신을 만나야 한다.

예수님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계 3:20).

성령님은 교회의 문 앞에 서서 다윗과 같이 성령의 강한 임재를 위해 장소를 예비하는 사람이 있는지 찾고 계신다. 예배자들이 손을 높이 들고 천국 문을 열기를 소망하는 장소, 그래서 주님의 영광이 임하여 머물 수 있는 그런 장소를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분의 부드러운 노크 소리를 듣고 문을 열 사람과 교회와 도시를 찾고 계신다. 성경은 주님을 문 앞에서 노크하는 분으로 끊임없이 묘사한다. 아가서에서 주님은 자신의 집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자신의 연인인 교회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다(아 5:2).

주님은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셨다. 마 16: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주님의 임재에 대한 열쇠가 우리 손에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 문을 열고 지옥 문을 닫을 권세를 받았다. 열쇠는 우리 손에 있다. 그러나 천국 문이 바리새인들의 전통처럼 사람들의 전통에 의하여 굳게 닫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리신다.

그러나 하나님과 약혼한 연인이요 신부인 교회는 지금 너무나 안일해져 있다. 교회는 귀찮기 때문에 문 열기를 거부한다.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아 5:3).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에 대한 대가가 너무나 커 보여서, 모든 것이 귀찮게 느껴지며, 사랑하는 주님이 내 마음 문을 두드리셔도 우리 마음은 냉랭해지고, 걸음은 느려져 마지못해 간다. 안타깝게도 노크 소리는 멈추고 만다. 마침내 우리는 깜짝 놀라서 솔로몬의 게으른 신부처럼 일어난다. 그리고는 문을 연다. 하지만 남아있는 것은 것은 그분이 서 계셨던 자리에서 피어나는 향기뿐이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아 5:6). 이것이 오늘날 교회들의 슬픈 영적인 상황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지나치게 느긋해져 있다. 다윗의 아내 미갈처럼 스스로 마음을 닫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꼴이다. 다윗과 미갈이 친말해 질 수 없었던 것은 미갈의 마음이 다윗을 향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친밀함도 기쁨도 열매도 다 잃어버렸다. 교회에 열매가 없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과 깊이 있는 만남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 만남을 위한 예배가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 큰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는 왕궁에서 왕 없이 사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교회가 첫 사랑에 대한 열정과 갈망을 회복한다면 왕이신 주님이 궁전에 나타나시지 않는 한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은 주님의 노크 소리에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투덜거린다. “아니요, 지금은 안 됩니다. 머리가 아파서요. 좀 기다리시면 안 됩니까?” 라고

그러다가 우리는 하나님이 문을 두드리실 때가 아니라, 문을 두드리던 노크 소리가 멈출 때 깜짝 놀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주님이 더 이상 노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충격과 함께 제 정신이 든다.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아 5:5-6).

사랑하는 주님이 노크하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신다. 그런데 진정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문을 열지 않는데, 통회하는 예배를 통해 천국의 창들을 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세계 속에 들어오시도록 문을 열 마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분이 계셨던 자리의 향기뿐이다. 물론 그 분이 남긴 자리에서 향기라도 맡아서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역사 속에서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발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우리들이 부흥에 대해서 읽고 듣는 것으로만 만족하기 보다는, 이제는 적극적으로 직접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부흥을 주시는 그 분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사랑하는 배우자인 남편이나 아내가 떠난 후에 베게를 끌어안고 그 사람의 체취를 맡으며 흐느끼는 모습이나, 신랑이신 주님이 사라진 후에 그 분의 흔적과 향기만을 가지고 만족하는 공허한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의 모습이다.

눅 13:34에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이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한 연인의 상처와 아픔을 담고 있다. 즉 하나님이 현현의 임재로 우리 가운데 오시는 때를 우리가 쉽게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친밀한 예배와 교제를 말한다.

우리 모두는 소경 바디매오의 정신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자비를 구할 때에 주위로부터 구박을 받았다. 그는 앞을 볼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만난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우리들은 때로는 삶의 분주함이나 안일함 때문에 잠시 눈이 멀게되고 감각이 상실되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감지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감지할 수 없을 때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기회이다.

즉 바디매오가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를 지르면서 주님의 도움을 요청했듯이, 우리는 누군가를 찾고 의지해야 한다.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이 가까이 계세요. 하나님이 오셨어요” 라고 말할 때, 우리는 즉시 그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고, 행동하고, 손을 들고 믿음으로 그분께 부르짖기 시작해야 한다.

때론 그분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만 알아도 된다. 우리의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간절한 부르짖음이 그분을 내 곁에 가까이 오시도록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하나님은 통회하는 마음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긍휼의 샘이 솟게 한다.

반면에 주님이 가까이 오셨는데도 가만히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바디매오가 여리고 시 외곽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소경이었지만, 그는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여리고 사람들은 주님의 방문을 알고 있었지만, 주님께서 그곳을 통과하시기까지 아무도 바디매오처럼 주님을 향해 간절하게 부르짖지 않았다. 그 결과 여리고 사람들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요 4장 수가성에서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후에 그녀와 그 지역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이틀을 더 유하셨다. 하지만 여리고 사람들은 주님의 방문을 무시한 채, 그 분의 임재를 놓치고 말았다. 유일하게 소경인 바디매오만이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고, 동시에 주님을 만나는 기적을 만들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선, 나의 위엄을 버릴 필요가 있다. 체면이나 위엄을 가지고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바디매오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물과 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결국 그의 외침은 주님을 만나는 영광을 가져왔고, 자신의 문제도 해결을 받았다.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는 자신의 영적인 품위와 교파라는 딱지도 떼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가까이 오셨을 때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쳐야 한다. 막 5:25-34에서 혈루병에 걸린 여인은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다. 주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축복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다.

성령님의 방문을 성령의 거주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아야 한다.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 즉 능력 가운데 오심이 아니고 겸손 가운데 오시는 그분을 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오만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소경됨을 고백하며, 소리 높여 주님을 부르짖어야 한다. 종교적인 의식과 체면을 버리고, 영적인 갈망으로 주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임재할 장소를 찾고 계신다. 그리고 지금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당신이 머물 수 있는 가정과 도시를 방문하고 계신다.

아기는 배가 고프면 상황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배고픔만을 울음으로 호소한다. 마 21:14-16을 보자.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여기서 소리 질러 라는 말은 비명을 지르며, 큰 소리로 외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나서 어린이처럼 울면서 소리치고 호소해야 한다. “주님, 저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 나와 함께 동행하소서” 우리는 과감하게 잘못된 결승선에서 벗어나서, 지난 날의 추억인 향기에만 만족하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이 두드리시는 그 방문을 놓치지 말고 우리 안으로 모셔 들일 뿐만 아니라, 그 분과 거주하며 함께 사는 영광된 임재의 축복을 받아야 겠다. 주님을 향한 갈급함으로 영혼의 배고픔으로 주님을 찾아 만나고 그 영광된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겠다.


3. 천국문을 열라 그리고 지옥문을 닫으라

“다윗의 장막” 을 지은 저자 토미 테니는, 텍사스의 한 교회에서 토요예배를 설교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강하게 토미가 과거에 사역하던 교회인 어떤 도시로 가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셨다. 그런데 문제는 주일 밤에도 텍사스에서 설교하도록 예정된 것이다. 토미는 생전에 해보지 않았던 주일 저녁 설교 약속을 취소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라야만 했다. 담임 목사에게 설교를 하지 못할 사정을 이야기했다. 감사하게도 담임 목사는 이해해 주었다.

주일 오전 예배가 끝나자, 토미는 점심도 거른채, 교회 성도들의 차량 도움을 받아 공항으로 갔다. 가장 이른 시간대의 비행기 좌석은 매진되었지만, 어쨌든 간에 표를 한 장 구해서 빈 자리를 얻어 탔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는 비행기가 착륙을 하자 마자, 자기 돈으로 차를 임대하여 성도가 삼 천명 정도 되고, 자신이 예전에 사역하던 교회를 찾아갔다. 차를 몰고 가면서 하나님은 토미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지금 잘 가고 있다” 고 하셨다.

예배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에 교회 주차장에 도착했다. 담임 목사를 만나서 애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주차장을 둘러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교회당을 들어서는데, 안내 위원들이 친절하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유를 물어보니 오늘 아침 담임 목사님이 하나님을 향해 갈급한 마음이 생겨서, 오후 4시에 기도모임을 열고 문을 닫도록 했다. 기도 모임은 6시까지 진행되는데, 지금 5시이므로 들어갈 수 없다는 설명이다.

마침내 안내위원들이 문을 열자 예배당은 400명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토미는 조용히 회중석에 앉았다. 그곳은 눈에 잘 띄지 않는 한쪽 구석이다. 마침내 목사님이 나타났고, 후미진 곳에 앉아 있는 토미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워 했다. 그의 얼굴은 눈물이 가득 흐르고 있었고, 평소에 그의 옷차림은 품행에 빈틈이 없었는데, 넥타이가 비뚤어져 있었다.

예배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의 임재가 예배당에 충만하게 넘쳐서 서 있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날 예배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목사를 초빙해 왔으므로, 담임목사는 그를 소개하기 위해 나왔다. “오늘 저녁 광고했던 대로 귀한 강사를 모셨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제 친구 토미가 와 있군요. 저는 이번 주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토미가 이곳에 아무런 예고나 초대도 없이 나타났었는데, 지금 여기 있군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 수 없지만, 토미 목사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토미 자신도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정을 바꾸실 호기를 잡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미는 친구에게 “내가 올라가서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 라고 말하자, 그는 “상관없네” 라고 응했다. 분명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토미는 10분 정도만 회중에게 설교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강단에 올라선지 15초도 안 되어서 천국의 창들이 성전 위에 열리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강하게 임했다. 그것은 토미가 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은 토미에게 바로 지금 여기서 그분을 만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감사하게도 토미와 담임목사, 그리고 초대 강사 등 모두가 “순종으로 세워진 집” 안에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그날 밤 모든 사람을 모으셔서 정확한 역할을 하도록 인도하셨다. 10분 동안 사람들은 강대상으로 물밑듯이 나왔다. 가장 먼저 나온 자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초빙강사였고, 그 뒤를 바로 담임목사가 따랐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달려나와 바닥에 엎드렸다.

하나님이 임하셨다. 하나님은 천국의 창들을 여시고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다. 경험상으로나 교회사를 보면, 이런 일은 예배 가운데 회개와 갈망이 일어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시간 하나님이 임하셨다. 하나님의 임하심은 교회의 프로그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진정한 부흥은 부흥을 주시는 분이 임하실 때 일어난다. 합 2:14절을 보면,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고 했다. 노아 홍수는 하나님의 심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의 손길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기도와 부흥의 영역에서 천국의 창들을 여는 방법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을 터뜨려서 회개와 예배의 물살을 일으키는 것이다. 천국의 창이 열린 것을 보기 위해서 우리 안의 깊은 깨어짐이 필요하다. 이 땅에서 깨어져야 하늘에서 열린다. 열린 천국이란, 하나님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바울은 삼층의 하늘을 말한다. 그는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고백한다(고후 12:2).

세째 하늘은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만이 거하는 영역이다. 그곳은 하나님의 왕국이며 처소이다. 세째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 아래 있는 다른 하늘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둘째 하늘은 사단의 영역이다. 사단은 엡 2:2절에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로 표현한다.

첫째 하늘은 우리 육안으로 보이는 자연적인 하늘이며, 사람들의 영역이며 사람의 힘이 미치는 영역이다.

단 10장은 전쟁 가운데 있는 세 가지 하늘에 대한 뚜렸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다니엘이 첫째 하늘에서 기도하자, 둘째 하늘에서 천상의 전쟁이 발발하여 천사장 미가엘과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인 바사국 왕이 맞붙는다.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방해하는 어둠의 영역을 뚫고서 임하게 된다. 사단은 기도를 방해하기 위해 둘째 하늘에 타락한 천사들을 세워 놓은 것이다.

사단은 제한적인 주권을 둘째 하늘에서 가지고 있다. 우리는 천국의 창들이 열리는 세째 하늘에까지 기도가 올라가도록 지속적인 기도를 해야 한다. 그 기도는 바로 시 51:17절에 나오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우리가 부흥은 원하지만, 진정한 부흥을 모른다. 그것은 누구나가 쉽게 부흥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부흥은 쉽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소가 끄는 수레를 통하여 법궤를 운반되는 것이 아니고, 레위인들을 통하여 땀흘리는 고난으로 법궤가 운반되는 것이다. 다윗은 처음에 수레를 통해 법궤를 운반하려던 것이 실패하자, 두 번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레위인들을 통해 땀으로 범벅된 법궤 운반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소위 교회가 빠른 부흥과 성장을 위하여 무리하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속도를 내다가 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적인 프로그램이나 방법들, 혹은 의식들에 담겨질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별하신 레위족에 의해서, 즉 성령님에 의한 고난이 따르는 십자가의 길이다. 언약궤는 조각목과 그 위 뚜껑은 정금으로 입혀진 길이 122센티, 폭 76센티, 높이 76센티의 아주 무거운 물건이다. 이것을 사람이 매고서 16키로를 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다윗은 웃사의 죽음을 통해 깨달았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시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길은, 또한 거룩한 부흥에 이르는 길은, 아주 험난하고도 땀으로 범벅이 되는 길이라는 것을. 그 행렬 안에 있던 다윗과 레위인들, 제사장들, 예배자들은 그 날 하나님의 임재를 그 도성으로 인도해 들이기 위해 값진 수고의 대가를 지불했다. 마침내 다윗은 그들이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할 때 미친듯이 뛰놀며 춤춘 것이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험난한 여정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본 다윗이 어찌 감사하는 마음으로 춤을 추지 않을 수 있으랴.

땀은 하나님께서 동산 밖에서 생활을 할 때에 가르쳐 주신 원리이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창 3:19. 땀은 이 땅에서 가치를 실물로 바꾸는 수단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법궤가 들어오자 춤을 추며 하나님께 땀을 흘리는 예배를 바친 것이다. 예배는 땀을 요구한다. 예배는 가치있는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땀 흘려 수고한 대가로 돈을 받고, 그 땀이 묻은 돈을 예배의 행위로 드린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간도 그렇게 드린다.

우리의 진정한 예배는 땀이 흐르고 배어 나와야 한다. 인간의 육신이 게을러지면 하나님의 임재를 운반하면서 땀을 흘리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려고 한다. 다윗은 후일에도 하나님께 값을 치루고 대가를 희생한 제사를 드렸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삼하 24:24.

우리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을 흘리며기도하신 모습을 보라. 상황이 변하려면 하나님을 갈망하며 육체의 땀을 흘려야 한다. 땀이 흘러 나올 때에 나의 가슴에서 하나님의 가슴으로 영원한 가치가 이동한다. 우리의 예배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교회에 끌어드리기 위해 무희들과 구경꾼으로 채워져선 안 된다. 구경하고 관람하는 예배를 종결하고, 땀을 흘려 예배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도록 하자. 사울의 딸 미갈은 종교라는 왕궁의 창문 밖으로 춤추는 다윗과 땀으로 법궤를 운반하는 자들을 조소하며 바라보는 콧대 높은 관람객이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갈망은 우리의 첫 사랑과 처음 열정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순종하고 그 분을 위해 살되, 회개의 예배 가운데 땀방울이 드러나야 하겠다. 따라서 열정있는 예배자의 옷은 희생의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다. 무거운 법궤를 어깨로 운반한 그들의 얼굴과 옷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의 새 언약 아래서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하나님은 영이스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주님이 십자가의 희생으로 동물의 제사는 사라졌지만, 예배 안에서 희생의 개념은 없어지지 않았다. 땀을 하나님의 나라에 드리는 또 다른 방법은 헌금이다. 땀 흘리며 수고하여 번 돈을 하나님 나라에 지원하여 드릴 때, 그것은 나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 시대에 구별된 지체들과 합력해서 하늘의 예루살렘까지 법궤를 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과거에 인류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발자국을 참고로하여, 현재에도 새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야 한다. 비유컨대 루터가 중세 시대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계시를 하나님의 발자국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양 그 주위에서 머무르지 말고, 오늘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은혜의 계시로 나아가야 한다. 즉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분의 인격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를 진리의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진리를 따르다보면 마침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보통 구름이 등장한다. 이것은 구름이 우리를 가려서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고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출 33:20). 역으로 내가 하나님을 방문코자 할 때도 역시 자신의 구름을 만들어야 한다. 레 16:12-13절은 휘장 뒤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까이 나아가려는 대제사장을 위한 말씀이다.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향을 뜨거운 숯과 함께 그릇에 넣어두면 연기가 피어오른다. 열정으로 드리는 기도는 연기가 피어오르도록 되어 있다. 대제사장은 휘장 뒤로 들어가기 전에 향로에 향을 넣고 그것을 먼저 휘장 안에 집어 넣는다. 연기가 지성소 안에 가득 채워져서 그가 휘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은좌를 가리도록 해야 했다. 연기가 가득한 지성소 안에서 대제사장은 제사 업무를 볼 수가 없기에 촉각이나 느낌에 의지해서 진행해야 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오직 의인은 봄으로 말미암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다. 합 2:4

향연은 제사장의 육신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가려서 죽음을 면케하고 생명을 살려주는 마지막 보호막이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에 나아가는 길을 여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시는 길을 열고, 그분의 임재를 느끼도록 하는 것은 회개의 예배다. 이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한다. 내가 드리는 회개의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오도록 하자.

전기충격을 한 번 받은 사람은 그 충격을 잊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 성도는 그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향연을 더 많이 피울수록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고, 경배함으로 그분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게 된다.

* 천국의 창들을 여는 5가지 방법인 예배의 요소들을 보자.

1) 십일조는 아브라함 시대에 행해진(창 14:18-20), 하늘을 여는 방법이다.
수입과 농산물의 첫 열매를 드리는 원칙은 말라기 3:10에 있다.“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2) 고난이 하늘을 연다.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을 보자.
행 7:55-58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3) 인내는 천국의 문을 뚫는 효과적인 도구다.
엘리야는 비기 오도록 7번을 기도하면서, 자신의 종이 하늘을 향해 확인해 보도록 했다. 종이 일곱번째 가서 사람 손만한 구름을 발견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 작은 구름이 강력한 비바람이 되어서 하늘을 검게 뒤덮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포기하지 말고, 구하고 찾고 하나님의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릴 것을 가르치셨다(마 7:7-8).

4) 연합은 천국의 창들을 연다.
마 18:19-20 “두 세 사람이 무엇을 구할 것인지,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것이다” 또 벧전 3:7절에 “베드로는 부부간의 연합은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서다” 고 했다.

5) 예배는 세째 하늘을 여는 5번째 열쇠다.
다윗은 시 24:7절에서 “영광의 왕이 이 땅에 오시는 문이며, 영원한 문”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이 예배 가운데 우리를 부르심이다. 우리는 교회와 도시 위에 하늘 문을 열도록 하기 위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연합하는 예배자들이 되어야 한다.


4. 은혜의 보좌를 세우라 / 심판의보좌를 세우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이 일회적인 아닌 지속적인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감당하실 수 있는, 즉 머무실만한 장소를 마련해 드려야 한다. 구약에서 영광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카보드’ 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무거운 영광” 이란 뜻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만한 은혜의 보좌를 말한다. 체중이 100키로 이상 나가는 사람의 의자는 튼튼하게 만들어야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무거운 영광을 감당하기 위해선 우리에게 은혜의 보좌가 반드시 마련되어야만 지속적인 만남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은혜의 보좌를 세우는 교회,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지금도 찾고 계신다. 흔히 하나님이 보시기에 싸구려로 치장된 의식의 예배가 아닌, 하나님을 위해 값을 지불하고 갈망하는 희생의 예배가 있을 때에 하나님 오셔서 안식하신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이전에 보지 못한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각 교회에서 은혜의 보좌를 마련해야 한다. 진정으로 주님께서 오셔서 편안하게 안식하고 거하실 수 있는 따뜻한 곳을 만들어야 한다.

그 동안 우리 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깊은 예배로 들어가는 것을 인색해 왔고, 하나님에게 땀 흘리며 드리는 투자를 값싸게 했다. 예배 시간에 빨리 시간만 떼우고 적당하게 넘어간 적이 많았다. 그 결과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배척을 당하시면서 예루살렘과 백성들을 위해 우셨다. 우리는 경배와 사랑으로 주님께 찬양하는 대신에, 의식과 일정과 약속에 매여 성령을 근심캐 했다.

종교적인 의무감이나 기계적인 종교 행위들을 반복해 왔다. 성령이 아닌, 인간이 운영하는 종교라는 기계가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양치기 소년 다윗은 들판에서 만난 하나님의 영광을, 그가 왕궁에서도 지속되기를 바랬기에 그렇게도 힘들고 어려운 법궤 운반을 감행했던 것이며, 마침내 예루살렘 위로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던 것이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시도록 하기 위해 두 가지를 행했다. 하나는 내부에 벽도 휘장도 없는 장막을 세워서 하나님의 임시처소를 마련했다. 또 다른 하나는 레위인들이 장막에 도착해서 언약궤를 놓자마자, 그 장막에 “살아있는” 은혜의 보좌를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그 초라한 장막에 거하실 수 있도록 했다.

하나님의 현현의 임재의 파란 불꽃은 세속적인 연료로는 태울 수 없다. 그 불꽃은 희생의 예배를 통해서 태우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예배자로 성령에 의하여 희생의 연료가 되어야만 한다. 법궤 위에 있는 그룹은 금을 쳐서 만든 것이다. 이처럼 은혜의 보좌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으로 쳐서 정화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새 언약의 참된 예배의 세 가지 요소는, 순결과 깨어진 심령과 연합이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은 후에 삼층천을 경험했듯이, 인생살이의 망치질은 나를 하나님 쪽으로 휘어지게 한다. 예배가 하늘로 열린 문인데,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잃어버린 예배자를 지금도 찾고 계신다. 바울과 실라가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힌 중에도 찬소과 기도를 하자,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면서 예배자들을 자유롭게 했고, 또한 모든 옥문을 열어 근방에 있는 죄수들을 자유롭게 했다. 이처럼 하늘을 향해 열려진 우리의 예배는 포로된 자를 자유롭게 하고, 간수까지도 구원시킨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자들은 역경과 환난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언약궤의 그룹이 금을 쳐서 만들어졌듯이 오늘도 역경과 시련을 통해 예배자들이 단련되고 정제되면서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들의 예배에 지속적인 영광으로 임재하신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 바울과 실라가 모든 상황과 처지를 초월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와 찬양을 했을 때에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와 영광이 그 감옥중에 나타난 것이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6).

다윗은 24시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의 불꽃을 지폈다. 즉 언약궤 주위에 예배자들이 둘러서서 하나님의 영광이 계속해서 타오르게 했다. 우리는 종종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보다도 사람을 많이 의식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은혜의 보좌를 세우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 사람보다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 사람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한다. 다윗은 구별된 예배자들과 그들의 초점이 찬양과 예배와 경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맞춰지도록 했다.

다윗의 장막이 휘장이 필요없었던 것은 예배자들이 직접 휘장과 보호막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개와 희생의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것이 덮는 구름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둘러쌌다. 겔 22: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두 가지 말씀을 보면, 다윗의 장막이 휘장이 없어도 사람들이 죽지 않았다.

즉 제사장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서 제사를 드렸듯이, 예배자는 사람의 입구와 하나님 제단 사이에서 중보자(눈물 지대)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자다. 죄악이 만연하는 지금은 예배라는 제사장의 향로를 들고 눈물지대로 들어갈 때다. 하나님의 무거운 영광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 많은 육체 사이에 서는 것이다. 주님께서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며 중보자로 서 계시듯이, 당신과 내가 눈물지대로 들어갈 때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시켜 준다.

우리가 무너진 데를 막아서면 하나님의 심판이 멈추며, 하늘에 있는 하늘의 장벽들이 사라지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요 1:14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로 구성된다.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되, 그 은혜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리가 함께 붙는다. 진리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롬 3:23).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면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면 하나님의 진리(심판)가 그 은혜를 소멸시킨다. 마치 빛이 어두움을 소멸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예배자들은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주님과 함께 눈물 지대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화목케 하는 사역이다. 나의 한 손은 하나님을 향해 들고서 상한 심령으로 예배하고, 다른 한 손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들고 서서 그 옛날 광야에서 모세가 백성들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며 중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들을 살려 주셨다(출 32:32).

오늘 우리 교회에게 영적인 자녀들을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어야 한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회개와 희생의 예배를 드리는 우리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소멸하시는 영광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고 서면, 하나님의 영광인 진리와 심판을 여과시키면서 누구나가 살아 남을 수 있다. 이것이 교회에 진정한 부흥을 가져오는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 은혜의 보좌를 세우는 일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지속적으로 임하는 것이다.


5. 주의 영광의 빛을 켜라 / 더 이상 어둠속에서 실족하지 말라.

교회는 어둠속에서 스위치를 찾아 불을 키듯이,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내야 한다. 그것은 열린 하늘을 지속적으로 열어 두어서 하나님의 임재에 쉽게 접속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손으로 켜는 톱과 전기톱의 성능과 능률이 도무지 비교할 수 없듯이, 하나님이 직접 임하셔서 그분의 영광을 우리 가운데 보이시면, 어두었던 흑암의 도시 전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이다.

촬스 피니의 사역은 도시 전체를 변화시키는 부흥운동으로 유명했다. 피니의 삶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뉴욕의 유티카 시내 전체가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는 깊이 있는 기도 생활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불타올랐던 사람이다. 그가 1800년대 말 유티카의 직물 공장 지역을 걸어갈 때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나 강해서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직공들은 무릎을 꿇고 회개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도시 전체와 그 지역 사람들은 그가 담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에 강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사 60:1-3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는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다.

어느 누군가가 회개와 희생의 예배를 통해 값을 지불하고 하늘의 문을 열면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의 빛이 어두운 영혼을 가로질러 비추이면서 이제 해방의 때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것이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할 때 의미했던 말씀이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 9:2).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되면, 우리는 그 열린 하늘로 인해서 순전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어떤 도시나 나라 위로 하늘이 열리면 지상에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감각이 고조되며, 영적 전쟁의 궁극적인 형태가 된다. 하나님의 임재는 어둠의 세력들을 몰아내고 무장해제 시킨다. 막 5:2-6에서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 들어가시자마자 귀신은 즉시 주님을 알아보고 떨었다. 즉 우리 교회나 도시 위에 하늘이 열리면, 전쟁을 벌이는 귀신들의 세력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권세를 잃어 버린다.

세상이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교회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 전기에 감전되면 잊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임재를 제대로 경험하면 우리는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또한 하나님이 보시는 영적 전쟁의 관점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온다는 것이다.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사 59:19). 즉 원수 대적이 올 때에 여호와의 기운이 불어와 주께서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신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온다는 것이다.

사 60:12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의 불을 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흥은 이 땅에 있는 어두운 사단의 왕국을 전면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는 곧 영적 전쟁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다.

이미 주님은 마 16:18절에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셨다. 사단은 구원받은 자들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궨세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하늘문이 열리면 대적의 문에 태풍이 몰아붙여 지옥에 갈 사람들을 건져 하늘을 채우는 때가 된다. 사단은 음부의 열쇠마저 빼앗긴 것이다. 타락 전에 루시퍼는 천상에서 예배를 관할하는 천사장이었다. 그 놈이 하나님 보좌에 오를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앞에 죄가 드러나는 순간에, 그 놈은 땅에 떨어진 것이다. 마치 빛이 오면 어두움이 물러가듯이, 죄의 어두움이 빛되신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순간에 땅으로 떨어졌다. 주님은 눅 10:18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고 하셨다.

예배는 하늘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굽이쳐 굽이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면, 사람들은 그 빛에 이끌린다. 우리는 어두움에 거하는 자들을 위해 왕되신 하나님께 중보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자기 생명을 위해 중보했던 에스더 왕비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교회와 도시 위에 비추기를 원한다면 중보의 값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예배 가운데 임할 때마다 거룩한 경외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방 안에 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분의 영광은 무거운 임재가 있는 영광이기 때문에 회개가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죄의 오점들이 있는 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가까이 한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비록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은 몸이지만, 이사야나 사도 요한이 하나님 발 앞에 엎드러져 “망한자’ 로 고백하고, “죽은 자같이 되었다” 는 사실과 같이,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구원받았다는 그 자세가 필요하다.

다윗의 경험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회개하는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만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풍성한 향기이다. 그 향기는 하나님의 방문은 물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거주이다. 그리하여 주님의 영광이 마침내 예배의 문을 통해 교회와 도시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도 어릿광대처럼 기뻐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켜는 것은, 영적 전쟁에서 가장 확실한 승리이다. 그분의 임재를 향한 갈급함과 주님을 향한 사랑과 경배가 만들어낸 은혜의 보좌 위에 주님의 현현의 영광이 임할 것이다. 주님의 영광이 빛이 켜지는 순간에 귀신의 세력은 즉시 소멸된다. 포로된 자들이 즉시로 자유롭게 되어 그들의 구원자이신 주님께 달려간다.

빛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사단이 범죄하는 마음을 먹는 순간 쫓겨났듯이, 영광의 왕의 임재 앞에 음부의 권세는 사그러진다. 하나님이 천성에서 하신 것처럼 우리 교회와 도시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만들어야 한다. 주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기를 천국의 창들이 열릴때까지 하고, 주님께 예배하기를 주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 위에 임하기까지 해야 한다.


6. 하나님께 절름발이가 되라 / 하나님의 섭리와 씨름하라

밧단 아람에서 돌아온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그를 절름발이로 만드신 것처럼, 나를 절름발이로 만드시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현현을 부여잡고 나의 운명이 바뀌기까지 씨름하는 이 시대의 야곱이 되어야 한다. 야곱은 신령한, 소위 거룩한 축복을 아는 자였다. 그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필요했다. 그래서 주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가게 하셨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비록 패했지만,영적으로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즉 하나님과 씨름을 한 후에 온유한 자가 된 것이다.

한편 에서가 야곱을 보는 순간에, 동생 야곱이 지난 날의 야곱이 아닌, 새로운 동생 이스라엘 바뀌어 진 사실을 직감하고, 그는 야곱을 죽일 수 없었다. 이와같이 교회도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꾸어지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어쩌면 지금까지 교회는 거만한 자세로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한채, 세상을 향해 정죄하는 태도를 취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지와 심판이 아닌, 은혜의 보좌를 만들어야 한다. 세상이 절름거리며 겸손한 교회를 보면, 아마도 우리가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온유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던컨 캠벨은 그 유명한 헤브리디스 제도의 부흥을 이끈 자로서 “인생의 목적을 놓고 씨름했던” 사람이다. 헤브리디스의 부흥은 자신의 설교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부흥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지역 전체에 임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다. 그 날 그 섬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설교 한 번 듣지 않고, 교회에 발 한번 들여 놓지 않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 대중매체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1세기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말도 없이 가슴을 찢는” 부흥의 운동이 전 지역을 휩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기적이었다.

그 즈음에 던컨은 40대 중반으로 영국 교계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해마다 캐직 사경회의 주강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15세된 딸이, 왜 하나님은 예전처럼 아빠를 사용하지 않으시죠?” 라는 질문에, 그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그는 지금 영국 교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설교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딸이 질문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섬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결국은 그 문제를 놓고서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그분의 임재를 간구했고, 하나님은 설교를 해야하는 사경회 그 기간 중에 다시금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지금 헤브리디스 제도의 루이스 섬으로 가라’ 그는 음성을 듣고 순종해서 갔다. 이미 6주 전부터 목사도 없는 그 루이스 섬에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포스터를 만들고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던 것이다.

어린 자녀가 부모가 그냥 옆에 있어만 주어도 편안히 놀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내가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사는 것을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기적의 손보다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그 모습이야 말로 가장 높은 차원의 예배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축복보다는 축복을 주시는 분을 찾아야 한다. 선물보다도 임재체험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야곱처럼 절룩거리며 돌아오는 사람이 되아야 한다.

영적으로 야곱의 실패는 거룩한 실패감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듯이, 영적인 굶주림과 거룩한 실패감은 우리의 목적을 뒤바꾸는 씨름 경기이다. 우리는 육체의 싸움에선 지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교회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경험과 의식과 인위적인 장치들에 매여서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단순성을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들의 옛사람, 욕심적인 인생의 목적을 놓고서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하나님의 만지심으로 비록 절름발이는 되었지만, 영적으로 승리한 새로운 인생, 야곱이 이스라엘 변한 승리자가 되어야 하겠다.


7. 기름부르심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에 / 구경보다는 하나님의 만남에

대부분 사역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을 빨리 모으고 끌 수 있는 것을 배우게 된다. 즉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이목에는 무관심하게 된 것이다. 집회를 계획하고 홍보하여 최대한 사람들을 움직이는 설교를 한다. 한편 저자 토미는 이런류의 집회와 사역에서, 자신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죽었다고 표현한다. 이사야의 표현대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 라는 말씀에 그 자신도 망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름부음이 사람을 쉽게 모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보다도 청중 동원을 위한 인간적인 모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 한다. 따라서 우리는 건전한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자신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신 방법이다. “예수님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눅 2:52). 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주님의 우선 순위는 언제나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역 가운데서 예수님의 유일한 초점은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것을 동일하게 따라 하시는 것이었다(요 5:30, 7:16-18, 8:28-29, 12:49-50). 그래서 주님이나 혹은 주님을 따른 자들은 무리를 많이 모으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직 하나님을 알고 그분에게 전적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을 했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람들도 이끌려 오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철저하게 인간적으로 계획되고 진행되는 교회 예배들이나 부흥집회들을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과 허락없이도, 그리고 그분의 임재가 없이도 그럭저럭 잘 진행된다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이런 류의 집회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없으면서도 보여준다고 유혹하며 때로는 거짓을 말하기도 한다.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려면, 그것은 오직 뜨거운 눈물의 중보기도를 통해서이다. 그것은 바로 눈물지대라고 표현한다. 눈물지대는 사람의 뜰과 하나님의 제단 사이에서 제사장적 중보기도를 하는 것이다.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향하고, 다른 한손으론 사람을 향해 서는 자리이다. 이 자리는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자리이며, 소위 세속적인 프로그램이나 쇼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보잘 것 없는 미미한 감동을 가져다 주는 일종의 개울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으로 표현하는 급류나 폭포수라고 속이는 죄를 범해선 안 된다.

우리는 여전히 기적이 나오는 하나님의 손에는 관심이 있는데, 그것을 주시는 분인 하나님의 얼굴은 아직도 무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기름부으심은 우리를 돕거나 격려하면서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는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그 도구에만 의존하고 진정으로 그 본질인 하나님의 얼굴 뵙기에는 모른채 하면서 본질을 놓쳐버리는 꼴이다. 하나님의 손은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반면에, 하나님의 얼굴은 나의 깊은 갈망을 만족시키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경험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직면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기름부음은 사역에 효과적이며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부합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름부음이 잘못 이용되고 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마음을 돌려서, 하나님의 손에 있는 기름부음에만 집착하다보니까, 선물을 주시는 분보다도 선물에만 관심을 가지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다.

사역자는 스스로 하나님의 감동하시는 자리에 들어가야지, 다른 사람의 삶에서 일어난 감동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역자는 특히 기름부음을 통해 사람들의 초점이 하나님보다도 나에게 쏠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사역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기까지, 그 자신이 예배를 드리는 자세가 필요하지, 본인 스스로가 설교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또한 청중은 하나님과의 만남, 즉 친밀함보다도 자기 집착과 만족에 빠져선 안 된다. 본질적인 하나님은 구하지 않고 바라만 보는 구경꾼에 머무는 수준에서 빨리 탈피해야 한다.

하나님보다도 여전히 사람들 앞에 서려는 마음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하다. 하나님은 나의 유능한 재능보다도 나의 인격에 더 마음을 가지신다.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경험이 없으면서도 들은 이야기를 하거나, 영적이야기를 하면서도 인간적인 수준에서 머무르는 잘못을 고쳐야 한다. 출 30:25-32절에 보면, “기름을 바르라는 말” 과 “사람의 몸에 붓지 말라” 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구별되지 않은 몸에 기름을 붓지 말라는 뜻이다” 즉 구약 시대에 제사장이 기름을 구별된 곳에 바르듯이, 사역자는 더 이상 사람들의 인기에 빠져서 하나님의 기름을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사역자 자신이 하나님께 헌신하여 자아를 죽인 육체라면, 그는 이미 기름부음을 받을 준비가 된 자다라고 할 수 있다.

시 133편에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렸다” 고 말씀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기름은 풍성하여 머리로부터 옷까지 흘러 넘친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개입하심은” 우리 곳곳을 만져주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바로 초대교회의 예배현장의 모습이다. 그곳은 제자들이 성령에 취하여 비틀거리며 거리로 나왔다.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성령의 기름을 뚝뚝 흘리면서 집회 장소에서 나왔다. 오늘날도 예배당에서 이런 모습이 재현되어야 하겠다. 우리의 모습이 형식과 의식으로 단정한 머리처럼 꾸미지 말고, 바록 기름멈벅으로 머리가 산발되어 있어도 그 머리에서 향기가 물씬 풍겨나오는 기름부으심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인간적인 나의 모든 체면을 포기하고,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겠다. 진정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를 원한다면, 분만실에서 생명을 잉태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곳은 생명이 나오기 위해 죽음의 문을 통과했던 곳이다. 우리가 믿는 갈보리는 바로 생명을 얻기 위해 피흘린 언덕으로 예수께서 죽음의 문턱을 넘어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신 곳이다.

주님은 모든 체면을 포기한 채 고통 가운데 죽어 가시되, 벌거벗은 채로 죽으셨다. 주님의 옷은 채찍으로 심하게 두들겨 맞은 몸에서 흘러 나온 피에 물들었고, 그옷은 현대인들의 요구대로 깔끔하게 살균 처리된 옷이 아니었다. 이런 고난의 과정을 통해 내가 구원받은 것이다. 이제 그 주님의 손길이 나를 만지시면서, 나도 야곱처럼 절름발이가 되어야 한다. 부흥에는 다른 지름길이 없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날 뿐이다. 이것이 유일한 부흥이라 할 수있다.

성도의 기도와 찬양과 예배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향기로운 기름부음이 있다. 성경에는 “기름을 붓다” 는 말이 구약에서 131번, 신약에서 18번 나온다. 신약의 기름부음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1) 하나님의 어린양(거룩한 제물)으로 그분의 사역과 죽음과 장사를 구별한다(막 14:8, 16:1, 눅 7:46).
2) 사람에게 능력을 주어 하나님의 일을 시키든지, 왕이 하나님의 권세로 다스리도록 한다(눅 4:18, 행 10:38).
3) 하나님의 인증이다(고후 1:21).
4)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와 구원을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린다(막 6:13, 약 5:14-15).
5) 하나님의 의와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구별하고 축복하는 의미이다(히 1:9).
6) 우리 안에게 거하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 은사이다(요일 2:27).

에스더가 왕비가 되기 위해선, 그녀는 왕을 위해 일 년간을 기름부음을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자신을 위함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한 것도 이니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기름부으심을 통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모세 시대에도 기름 부음은 하나님의 성물을 구별하고, 사람을 구별하는 용도에만 사용했다. 다른 용도에 사용하는 것은 범죄였다.

우리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하나님의 기름을 구별하지 않고 다른 용도에 사용하는 실수를 해선 안 된다. 즉 회개하지 않은 육체에 함부로 부어서 잠시 냄새가 나다가 썩는 냄새로 대치해서도 안 된다. 오직 우리의 기름부음 목적이 하나님과 사람이 거룩한 연합 가운데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기름은 바로 왕을 위해 신부를 단장하고 예비하는 데만 사용한 사실이다. 모세는 기름부음과 영광의 차이를 바로 알았다. 기름부음을 통해 기적과 이사가 나타나는 감동이 있었지만, 그는 기름부음이라는 좋은 것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 그분의 얼굴을 구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라고 기도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선, 회개라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회개는 죽음에 상응하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보혈로 얼룩진 회개의 문 뒤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날마다 회개를 통해 자신을 죽이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9) 고 하셨다. 결론적으로 기름부음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회개하도록 이끈다. 반면 회개는 나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한다.

이제 내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면, 나의 설교에도, 기도에도, 사역에도, 예배에도 탁월함과 자유함이 따른다. 그러나 이것이 최종 목표는 아니다. 기름부음은 주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도록 부으시고, 덮으시고, 넘치게 하신다. 하지만 기름부음은 여전히 육체 위에만 머문다. 그러나 영광은 다르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면 나는 순식간에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는 말씀을 이해하게 된다(고전 1:29). 이것은 “아무 육체도 하나님의 알굴 앞에서 영광을 누릴 수 없다” 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면 나의 육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과의 대면에서 이사야가 “망하게 되었다” 는 고백과 요한이 “죽은자처럼 엎드러진”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기름부으심과 그분의 영광의 차이점은 작은 전선의 불꽃과 고압선에서 나오는 불꽃과도 같다. 후자는 나를 죽이든지 아니면 나의 인생을 변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고압선에서 나오는 그 불꽃과도 같은 하나님의 임재를 이 세상 가운데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교회가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에스더가 오직 왕만을 위해 일년간을 기름부음으로 준비했듯이 말이다. 그러면 왕은 그녀에게 묻는다.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에 5:6). 바로 하나님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교회, 그런 신부를 찾으신다. 그런 신부를 찾으시면 마치 페르시아 왕이 에스더에게 나라를 주겠다고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그 도시의 열쇠를 주고 그 나라의 생사를 허락하실 것이다.

기름부음을 통해 나의 나의 모든 관점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 쏠려서 열정적인 예배를 드리면,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의 교회와 도시와 나라에 임할 것이다.


8. 그 날 천상에서는 음악이 멈췄다 / 그러나 음악이 회복될 날이 올 것이다

B자매의 찬송은 기름부으심이 넘쳤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진정한 예배자였기 때문이다. 그이 목소리나 음정은 보통 사람보다도 못했지만, 그녀의 찬양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갑자기 강하게 흘러 넘쳤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교회에 다니는 기계적인 신앙에 빠져서 예배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그저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예배는 그분의 영역이고, 말씀은 우리의 영역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배를 놓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영역을 놓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설교보다 예배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예배는 하늘의 신선한 빵을 담을 수 있는 광주리나 그릇을 만들기 때문이다. 은혜의 보좌를 세우고 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보좌를 세우는 것이 예배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보다도 “복주소서” 라는 기관으로 전락시켜 버린 느낌이 든다. 주님이 수가성의 여인과의 만남에서,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고 하셨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발 벗고 찾으시는 유일한 대상은 예배자들이란 말씀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사랑과 찬송과 예배와 경배를 즐거이 드리는 예배자 한 사람을 찾으신다.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녀들이 순전한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은 너무나도 귀하고 값진 것이다. 하나님은 천상에서아름다운 찬양을 했던 타락전의 루시퍼의 찬양을, 이제는 예배자들을 통하여 회복되길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욥 38: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 하였었느니라” 이 말씀은 우주의 창조, 즉 루시퍼의 타락 직전으로 추정된다. 사단이 추락할 때 음악도 추락했다. 그러므로 음악의 영역에서 사단의 영향력이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의 음악이 세속적인 음악처럼 탁월하지 않아도 우리의 가치는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에 초점이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완벽을 위해 탁월한 음악을 고집하다보면 소모전이 될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마음과 기술이다. 다메섹 도상의 임재하심은 살인자 사울을 순교자 사울로 바꾸었음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선 완벽한 음악보다도 완벽한 찬양을 더 원하신다. 사단이 추락할 때에 음악이 함께 추락했으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헌신적으로 드리는 그 찬양에 더 감동을 하신다. 부모에겐 어린 자녀가 낙서한 글자라도 그 누구의 편지보다도 감동을 하는 이유는, 그것은 바로 자기 자녀라는 사실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녀들인 우리들이 드리는 그 찬양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마21:16) 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들으시기 위해 천상의 보좌를 떠나 보잘것없는 우리의 찬송 가운데 좌정하신다. 천상의 예배 인도자가 반역으로 추방될 때, 음악도 함께 천상에서 추락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구원의 계획을 통해 천상의 음악을 회복하실 계획을 세우셨다. 거룩한 도성에 들어갈 때, 우리는 천사들이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계 15:2-3). 루시퍼는 불법적으로 하나님의 수준에 오르려 했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려 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어린양과 함께 그 보좌에 앉히시고, 비록 불완전한 찬양대를 통해서 타락한 계명성인 루시퍼를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람을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더니, 모든 천사들보다 높이셔서 주님과 함께 주님의 보좌에 앉도록 하실 것이다(시 8:4-5, 엡 2:6, 딤후 2:12).

하나님은 바로 예배에 굶주려 계셨다. 주님은 바로 수가 우물에서 그 예배자를 찾으시고 굶주린 배를 채우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먹을 양식에 대해서 말할 때에,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고, 예배자 한 사람을 찾았다. 예배의 만찬이 있었으니, 이제 너희가 주는 양식은 필요치 않구나. 요 4:31-34.

하나님이 이땅에 오시는 예배를 향한 그분의 배고픔이 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련된 찬양이나 호화스런 건물보다도 사랑에 가득차고 헌신된 찬양에 감동을 받으신다는 사실이다. 우리 예배자들은 루시퍼가 추락한 이후에 천국에 계속해서 빠진 부분을 다시 채울 자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예배자들을 차고 계신다. 예배만이 하나님을 천상에서 지상으로 모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예배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을 세우기 위한 건축자재다. 예배는 바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주님과 함께끊임없는 예배와 경배를 드려야 하겟다.


9. 보좌의 영역을 확대하라 /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환도뼈가 부러진 가운데서 절름발이 삶으로 살았던 것처럼, 유명한 부흥사였던 저자 토미 역시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절름발이가 되어 갈급함으로 살아가는 자로 변했다. 그는 깨진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추적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는 한 사람이 설교하여 사람들이 모이는 그런 부흥보다도 “부흥을 주시는 분” 하나님을 그리워 한다. 그분이 한 지역에 임하면 부흥은 자연스럽게 따라 오기 때문이다.

토미는 모세가 경험했던 불타는 떨기나무 체험을 좇고 있다. 모세의 그 체험은 하나님의 보좌의 영역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노예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보좌의 영역이란,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일어나는 예배를 말한다. 우리들의 모임과 예배가 하늘에서처럼 보좌의 영역을 재현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강력해지고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가 임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지역 전체에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비로소 잃어버린 자들이 주님께로 돌아온다. 주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고 하셨다. 우리의 초점은 주님이 들리는 것에 두어야 한다. 에스겔은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강물이 하늘의 성소 문지방 밑에서부터 세상으로 흘러가며 가는 곳마다 생명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강물의 깊이는 성소 문에서 가장 낮았으나, 바다로 더 흘러갈수록 깊어져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부흥”의 청사진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도시 위에 임하면, 에스겔의 환상에서 영광의 물결이 예루살렘과 열방에 영향을 준 것처럼, 진정한 부흥이 도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부흥은 먼저 교회에서 일어나야 한다. 엡 3:20절 말씀처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 규모나 차원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부흥과 기름부음에 대한 오해들이 있는데, 던컨 캠벨은 부흥이란 것이 전도 캠페인이나 특별집회가 아니라고 한다. 수천의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기로 결정했을지라도, 그 지역은 아무런 변화가 없고, 교회들은 그런 전도활동 이전과 별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부흥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그 지역에 임하신다. 갑자기 지역 전체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을 사로잡아서 결국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모든 일까지 내려놓게 된다.

루이스 섬의 대각성 운동, 소위 헤브리디스 부흥 운동 중에 교구 목사들은 이런 글을 남겼다. “주의 영이 이 지역 다른 마을 들에 강하게 임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임재가 사람들의 가정에도, 농장에도, 황무지에도, 사람이 많은 거리에도 계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이 직접 일으키시는 부흥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수백명 사람들 중 4/3은 모임에 오기도 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나나 교구의 다른 목사에게나 설교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기 시작하자, 모임에 오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대한 흐름으로 도시 한복판을 흘러 길 위의 모든 것을 휩쓸어야 한다.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던 초기에 있었던 일이다. 던컨 캠벨이 사람들이 가득찬 교회당에서 예배를 마쳤는데도 아무도 흩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건물 밖에서 흩어지지 않고 깊은 침묵 가운데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교회당 안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한 젊은이가 자기 친구들의 영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마음을 쏟아 중보기도 하고 있었다” 캠벨은 그 젊은이는 기도하다가 주저앉더니 결국에는 교회당 바닥에 엎드러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다시 교회당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 가운데 깊은 회개의 물결이 일어나서 완고하던 남자들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젊은이는 “오 하나님,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라고 외쳤다. 그 외침은 마치 마차가 교회당 지붕 위를 지나가는 것처럼 강하게 울렸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나중에 들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가다가 갑작 발걸음을 돌려 교회당으로 가서 기도해야 겠다는 부흥을 느꼈다는 것이다. 헤브리디스 부흥 기간 중 많은 회심자들이 교회에 온 것은 그들이 회심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들은 집에서, 혹은 밭에서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심시키신 것이다. 그들은 와서 물었다. “뭘 하면 되죠?, 어떤 모임에 참석하면 되죠”

교회에서 사람들의 조작이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해선 안 된다. 근본적인 역사는 하나님이 일으키신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임재하시면 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종 목회자들 보다도 하나님을 더 기다리고 하나님을 구해야 한다.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터져 나올 때까지 말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계속되어서, 그들은 그 지역 전체를 뒤흔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

하나니의 영이 오순절 강림 때처럼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임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고, 그 열린 하늘 아래 길가에서 기도소리가 회개하는 신음소리와 뒤섞여 들려왔다. 그러자 갑자기 섬 전체가 성령의 강한 움직임에 사로잡혀 죄를 통회 자복하고 하나님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루이스 섬에서는 주님의 현현을 보고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했다면, 여기서는 단지 성령의 임하심으로만 역사가 나타났는데, 그 결과는 더 지속적이었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이 시대가 하나님의 목적을 잉태하는가는 교회에게 달려 있다. 교회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만남의 장소가 되는 것이었다. 교회는 바로 당신이 하나님께 당신 자신을 드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교회를 본래의 능력으로 회복시키는 것은, 대하 7:14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기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하신다. 하나님의 도움보다도,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즉 보좌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오락적인 예배를 내려놓고, 자기의 욕구를 채우는 예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한다. 그리하여 집단적인 다메섹 도상의 체험이 필요하다. 전 도시를 회개로 사로잡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영광의 빛으로 그들을 사로잡으실 것이다. 이것이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길이다. 예배가 바르게 드려지면 영혼 구원과 구원으로의 초대에 큰 역사가 나타난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부르며, 하나님의 임재는 다른 모든 것을 몰아낸다. 보좌의 영역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바르게 드려지는 예배를 인도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갑자기 임함은 사람들의 기다림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데 기다림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목마름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다 망하게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가 하늘의 방식을 따라, 은혜의 보좌를 세우는 날,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보좌의 영역을 세우실 것이다. 이 땅에 보좌의 영역을 세우기 위해 내 심령이 깨어져야 한다. 하늘 문을 열고, 우리 지역에 어둠의 권세와 악한 영들을 향해 지옥의 문을 닫기 위해서, 기도하고 회개하고, 중보하고, 하나님을 예배하자. 하늘의 빛이 들어오면 사단의 세력은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이 웨슬리에게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그저 하나님을 위해 나 자신을 불 태울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불에 타는 나를 보러 오는 것이죠” 하나님의 영광이 어느 한 장소에 거주하기 시작하면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난다. 한 여인은 교회에서 800미터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거실에 앉은 그녀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들어왔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TV를 보고 있었다. 임재를 피하여 부엌으로 도망갔다.

그녀는 첫 주간은 임재 때문에 부엌에서 거실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2주 후에는 거실의 임재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침실로 도망갔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침실까지 임재가 들어왔다. 더 이상 도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임재가 교회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고 교회로 오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 여인은 그 날밤 구원을 받았다. 그녀의 간증은 “임재 전도”가 한 도시에 침투해 들어가는 방식을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의 영역을 세우기만 한다면 도시 전체에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흘러 넘쳐서 저들을 구원할 것이다. 누군가 모세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내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소서” 지상의 깨진 그릇만이 천상의 영광을 담을 수 있다. 깨진 마음으로, 목마름과 갈급함으로 기도해야 한다. 마 5:6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영광은 배부른 곳에 임할 수 없다. 자아라는 컵을 깨끗이 비우고, 주님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그것은 하늘을 열고 하나님의 영광이 전 도시 위에 임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10. 천국의 문지기로 사명을 다하라.

하늘의 문이 열려졌으면 다시 닫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접근하시는 그 곳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소위 영적 체험의 위치인데, 그것은 자신의 마음의 위치와 갈급함을 표시해 두는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깬 후에 쌓은 돌단이나, 이스라엘이 여리고 도하 후에 강 바닥에서 기념으로 건진 돌들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표식의 돌들은 대대로 하늘이 열리고 강물이 갈라지던 날을 기억하게 해 주었다.

이제 하나님을 좇는 자들이 하늘이 열렸던 장소를 표식하는 또 다른 종류를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문지기가 되는 것이다. 다윗은 문지기로 만족하며 신앙고백을 한다. 그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라고 말한다. 다윗은 영향력있는 왕이었지만, 그 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 안 문지기는 바로 하늘 문 앞에 서 있는 문지기이다.

홍수로 불어난 물이 댐 뒤에 갇혀 있듯이,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에 가득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이 온 세상에 범람하도록 하시고 싶으신데, 그 영광의 문이 열리는 곳을 대부분이 모른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흔히 쉽고 좋은 것 때문에 최상의 것을 잘 놓치고 만다. 최상의 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흐르는 홍수를 말한다.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대신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좋은 것(기름부으심)이 최상의 것(하나님의 영광)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름부으심을 주시는 하나님 그 자체를 구해야 한다. 내 머리에 손을 얹는 것과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기는 것은 큰 차이가 나듯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사건은 곧 영광의 홍수는 임한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의해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짤랑거리던 열쇠를 발견할 것인가?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누군가가 열쇠로 그 문을 열면 하나님의 영광의 홍수가 지구를 덮을 것이다. 그 누군가는 바로 나 자신이며 바로 이 자리에서 열려야 할 것이다. 그 문은 설교로도, 화려한 인물로도 할 수 없다. 다윗이 고백한 대로 나 자신이 문지기가 되어서 그 문을 열라고 하신다. 친절한 식당의 문지기가 손님을 위해 문을 열아 주듯이, 나는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과 경배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문을 열어젖혀야 한다.

다윗이 발견한 그 열쇠를 우리시대에 찾아야 한다. 다윗은 휘장도 없는 그의 장막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되찾았으며, 거의 36년 동안 그 초라한 장막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즐겁게 해 드리고, 모든 이스라엘 가운데 하늘이 열려 있도록 만들었다. 다윗의 시대는 다윗의 예배로부터 유익을 얻었다. 이제 우리 시대는 우리의 예배를 통해 천국의 창들을 열기 위해서 그 예배 가운데 지킴이를 세워야 한다. 지킴이는 문지기를 말한다. 다윗 시대에 레위인 예배자들이 끊임없는 예배와 찬양으로 언약궤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열려있는 하늘의 유익을 누릴 수 있었는데, 그것은 누군가가 그 문에서 문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린 하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자유로이 접근하는 것이며, 사람의 세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자유로이 흐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곳은 사단의 방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이다. 교회 지도자나 중보 기도자나 예배자들은 천국의 문지기로서 천국의 창들을 열어두는 책임을 진 자들이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문지기였다. 롯이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창 19:1). 롯이 거주할 도성은 잘못 선택했어도, 롯은 분명히 천사 나그네를 만났을 때 “의” 를 인식했다. 그는 특별히 의에 이르는 “문을 열었고” 거룩한 나그네들을 자기 집으로 모셨다. 롯은 불의가 무엇인지 알았지만, 그 도성 전체를 불태우고 있는 죄악에 이르는 “문을 닫는 것”에는 실패했다. 롯은 바른 곳에 서 있지 않았고, 그 도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소돔 고모라의 영향을 받았다. 마침내 소돔이 불로 망한 것은 하나님의 문지기가 제 책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윗이 또한 문지기였다. 그는 자기 직무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시 84:10절의 고백한 것이다. 이처럼 내가 문지기가 되어 교회와 지역사회 앞에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의 문을 열어 놓는다면, 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자리에 위치한 것이다. 레위인처럼 우리는 문을 지키는 족속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사람들로 부름을 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에 이르는 걸어다니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오벧에돔은 문지기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자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집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자기 집에 거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방문이 거주가 될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부수적으로 모든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여서 마침내 예루살렘의 다윗 왕에게 들렸다. 오벧에돔은 3달 만에 백만장자가 되었다. 다윗은 다시금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도록 했다. 오벧에돔 개인이 복을 받았다면, 이 궤가 제 자리로 와서 모든 국민이 복을 것으로 생각했다.

진정 다윗은 오랜 기간동안 그 장막을 지켰고, 이스라엘은 많은 축복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교회 안에 제 자리에 돌려 놓아서 온 국민과 세계가 복을 받도록 해야 겠다. 다윗이 왕으로 다스리던 시절, 궤가 어디로 가든지 그 궤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대상 15-16장에 6번 나온다. 그는 바로 오벧에돔이었다. 대상 15:24절에 “제사장 스바냐와 요사밧과 느다넬과 아미새와 스가랴와 브나야와 엘리에셀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나팔을 부는 자요 오벧에돔과 여히야는 궤 앞에서 문을 지키는 자더라”

궤가 이사하자 오벧에돔은 같이 이사했다. 그는 아마도 주의 임재를 깊이 사모했기 때문에 궤를 따라 나선 것이었다. 그가 많은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물질의 축복 자리가 아닌, 하나님의 궤를, 즉 임재를 따르는 문지기로 계속 수고한 것이었다. 오순절의 강한 성령의 바람은 행 5:28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행 19:10. 초대 교회는 누군가가 문을 발견했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하늘의 문지기는 하나님의 임재가 각 나라로 흘러갈 때에 문지기 자신도 하나님과 대면하는 유익을 부수적으로 빋는다.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의 문을 열어 줄 문지기가 꼭 필요한 시대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정과 교회와 도시와 나라 가운데 들어온다. 다윗은 다시금 이 환상을 기술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시 24:7).”

문에는 머리가 없다. 여기서 문이란 우리를 말한다. “너희 영원한 문들아 열릴지어다. 우리가 이 명령에 순종하면 영광의 왕이신 그분이 들어오실 것이다” 우리 교회는 온 세상을 대면해 주는 통로의 문이다. 내가 예배의 자리에 설 때, 나는 영적인 문, 부활하신 주님을 세상을 향한 통로로 활짝 열어주는 것이다.

밤중에 다윗은 다윗의 장막에서 예배하는 무리들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춤을 추며 손을 들고 예배하는 무리였다. 그는 영감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34:1-2).

나의 교회와 지역 가운데 하늘이 열리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가? 우리는 저 반대편에서 주님이 기다리는 것만큼 기다리지 않았다. 제 위치에 설 문지기로서 우리는 천국 열쇠를 가지고 천국을 열고 지옥을 닫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바리새인처럼 정 반대로 “지옥을 열고 천국을 닫아선” 안 된다(눅 11: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하나님만을 위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가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결정하는 일들은 교회를 영적 파산으로 몰고 가며, 천국의 문을 닫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단이 지상에 세운 문들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시는 유일한 때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다.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 동쪽문이 주님 앞에 열릴 것이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 주님이 우리 도시에 임하시는가 아니가는 나에게 다려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우신 것처럼, 나도 나의 도시를 위해 울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손 안에 열쇠가 있다. 주님은 처음으로 베드로에의 손에 열쇠를 넘겨주신 이래로, 그 열쇠는 성령에 의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천국의 창들을 열고, 지옥의 문을 닫아서, 영광의 왕이 친히 내려오셔서 그 분이 기뻐하시는 집, 예배로 지어진 집을 재건하도록 해야겠다. 교회가 제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느다면, 하나님은 세상에 감추어진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교회들이 회개하는 예배자들로 가득차서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중보자들이 눈물로 성을 쌓을 자들을 찾으신다. 우리 안의 웃사가 죽고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손으로 천국에 이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상에 이르러서 눈물의 영역에서 기도하며 천국의 창을 열어 젖히는 문지기가 되도록 하자.

사람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셔오는 예배가 되도록 하자.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고 그 임재를 사람들은 밀려 올 것이며, 내가 그 임재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임재의 걸어다니는 창이 될 것이다. 웃사가 죽었듯이, 이제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환영하고 경외하는 바른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미 천국 문을 발견했고, 그 열쇠를 소유했다. 거주지를 찾고 계시는 하나님께 천국의 문을 열어 드리고 지속적인 거주하심이 되도록 회개하고 상한 심령으로 찬양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천국의 문이 열리면 교회와 도시와 온 땅을 그분의 영광의 지식으로 가득 채울 것이며 모든 사람을 주께로 이끌어 오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