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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 회복 / A. W. 토저

LNCK 2018. 5. 31. 18:49

 

시력 회복                   고후 4:3~4           스크랩

 

A. W. 토저 <능력 : 거듭난 자의 삶에 드러나는 것>

 

길을 찾기 위해서는 빛만 있어서는 안 된다.

빛과 함께 볼 줄 아는 시력도 필요하다.

 

성경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빛의 근원이다.

시편 기자는 "당신의 말씀에 들어감이 빛이니이다",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성경이 처음 주어질 때 완전하게 영감되었다는 것을 믿고

다음과 같은 찬송가를 부를 수 있었다.

 

우리는 신성한 말씀 속에서

비치는 빛을 찬양하네.

이는 우리 발자취의 등불이 되고

그 등불은 온 세대를 비춘다네.

 

"빛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이 말은 신성한 말씀을 비난하거나,

또는 말씀에 오점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빛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빛은 성경에서 간혹 교사들이 "지식"을 말할 때 사용했다.

그래서 무지한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어둠 속에 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지식이 오는 것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침 해가 떠오르더라도 그것을 보는 눈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력이 있는 사람만이 태양에서 오는 빛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빛과 시력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시력이 없기 때문에 빛을 누릴 수가 없다. 바로 맹인이다.

 

한편 어떤 사람은 빛은 없으면서도 시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일시적인 소경이라 할 수 있지만, 언제든 빛만 비추면 곧 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빌립보에 있던 간수장은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빛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을 알아보지 못했다.

 

반면 삼손에게는 별빛과 달빛과 햇빛이 모두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력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밤과 같이 생활하지만,

시력이 있는 사람은 전등만 준비하면 언제나 낮과 같이 생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종교적인 교훈이 아무리 건전하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교훈이 빛이 되어 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성령의 비추심이 없는 말씀만으로는 죄인들을 구원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진리가 없는 구원은 불가능하지만, 구원이 없는 진리는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리 문답은 정성스럽게 배우면서도

내적 조명이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도덕적으로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빛과 시력이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지금도 이런 비극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눈먼 사람도 닫힌 눈꺼풀을 열고 아름다운 풍경 쪽으로 시선을 둘 수는 있으나

실제로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눈먼 마음이 구원하는 진리를 들을 수는 있으나,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바리새인들은 3년 동안이나 직접 "세상의 빛 되신 이"를 보았다.

그러나 그 빛의 어떤 빛줄기도 그들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빛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경을 통해 배웠다. 예수님이 직접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 기자들의 말을 가르쳤지만 제자들이 진리를 파악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내면이 "열려야"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24:45).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는 한 여인이 말씀을 듣고,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즉시 자기 집을 바울에게 내놓았다.

한 절 말씀으로 아주 간단하게 이 모든 일을 설명하고 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16:14). 루디아는 빛뿐만 아니라 시력도 받았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대단히 일찍 깨닫고서

"모든 사람이 다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왜 그렇게 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3~4)

 

사탄은 사람들이 보는 능력이 없을 때는 빛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깨닫지 못하는 머리로는 아무리 진리를 접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적인 사람은 구원의 진리를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는 능력이 없다면

구원의 진리를 파악했더라도 도덕적으로 그 어떤 반응도 나타내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전적인 예를 벤저민 프랭클린과 조지 휫필드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랭클린은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능력 있는 부흥사의 설교를

어떻게 듣고 있었는지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프랭클린 은 휫필드가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멀리까지 들리는지 알아보기 위해

서 있던 광장 주위에서 서성였다.

휫필드는 프랭클린에게 개별적으로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수 년 후에 프랭클린은 그 부흥사에게

"당신이 해 준 기도는 아직도 내게 별 효험이 없습니다"라는 슬픈 소식을 전했다.

그때까지 프랭클린은 회심하지 못했던 것이다.

 

프랭클린이 지적으로 얼마나 명민한 사람인지는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뿐만 아니라 휫필드도 프랭클린에게 진리 전체를 잘 전달했다.

그러나 프랭클린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프랭클린은 빛은 있었지만 시력은 얻지 못했던 것이다.

시력이 없이는 결코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다.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면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벤저민 프랭클린은 아직 그것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되려면 성령의 내적 역사가 필요하다. 복음은 빛이다.

그러나 성령만이 시력을 주실 수 있다.

때문에 우리가 잃어버린 자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려고 할 때는

그들이 빛을 볼 수 있는 시력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아울러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어둠의 영들에 대항해서도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