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거룩한 전쟁을 소극적으로 행하면 안 된다 왕하13:17 스크랩
프랜시스 프랜지팬 <지금은 싸워야 할 때> 중에서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단순히 억압을 견디기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복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소극적이 되라고 부르신게 아니라 전쟁을 하도록 부르셨다.
그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기름부으셨고
예수님은 모든 원수의 세력을 제압할 권세를 우리에게 부여하셨다.(누가복음
1:19)
주님의 이 권세는 단순한 경계근무나 방어전술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를 때에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원수들을 대항하여 전투해 나가기를 갈망하신다.
시편 18편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으로 인하여
"놋 활을 당길 수" 있었을 때, 그는 또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 가리니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돌아서지 아니하리이다"(37절).
이것을 분명히 집고 넘어가자.
다윗은 처음에 하나님의 예배자였다. 하나님을 먼저 추구하지 않은 체
적들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럴 때 주님께서 전쟁터에서 적들을 철저하게 쳐부수게 만드셨다.
여기에서 나는 당신에게 분명한 진리를 말하려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적들을 쫓지 않는다면 그들이 우리를 쫓는다.
우리는 악을 대했던 그리스도의 태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분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요한일서3:8) 오셨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시편97:10).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결단을 보기를 원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도 다윗처럼 원수들이 진멸 될 때까지 그들을 쫓을 것이다.
사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투적인 태도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실패를 용납하셨고 그것을 용서하셨지만,
악한 영들이 그분을 제어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영적인 원수들에 대항해서는 아주 공격적인 분이셨다.
중립지대는 전혀 없었다. 하나님의 군대 안에서 소극적인 영은 발 붙일 곳이 없다.
현재의 태도 그리고 미래의 승리
구약시대의 이야기 중 하나가
소극적인 영의 영향에 관한 나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엘리사 선지자가 죽기 직전,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는
남다른 애정을 보이며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 술수에 한 술 더 떠서 요아스는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하던 그 순간에
엘리사에게 했던 말을 그에게 그대로 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열왕기하 13:14).
왕이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특별한 은총을 구하는 것은 가능하다.
엘리사는 왕을 달래고 나서 그를 시험하였다.
왕으로 하여금 활과 화살을 잡도록 한 다음, 그에게 손으로 활을 잡으라고 말했다.
왕이 활을 잡자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위에 얹은 다음 말했다.
"동편 창을 여십시오." 요아스가 창을 열자 엘리사가 계속 말했다.
"활을 쏘십시오." 요아스가 그렇게 하자 엘리사가 외쳤다.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열왕기하13:17)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하여,
요아스 왕이 하나님의 선지자의 기름부으심을 깨닫고
그에게 축복을 구한 것에 대하여
요아스 왕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셨다.
하지만 한가지 시험이 더 남아 있었다. 엘리사는 다시 왕에게 말했다.
"화살들을 취하여 땅을 치소서."
요아스는 화살들을 취하여 땅을 쳤는데 단지 세 번만 치고 그쳤다.
그러자 선지자는 그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열왕기하13:19)
엘리사는 요아스 왕의 소극적인 영 때문에 화가 났다.
그는 왕에게서 원수들을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
적을 추격할 수 있는 인내와 끈기를 지니고 있지 못함을 보았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선자자의 분노는 오늘날 우리의 소극적인 모습과 게으름을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그의 교회들에 대하여 이처럼 분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운가?
그렇다면 영적인 실상에 대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만족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신 주님을 말씀을 한번 살펴보자.
"네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
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요한계시록 3:15-16)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미지근하기 보다는 덥든지 차든지 하기를 원하신다. 책망했던 그들을 주님은 여전히 사랑하실까? 물론이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의 태도가 변하기를 바라시며 그것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소극적인 것이나 게으름은 살인이나 간음과 같은 심각한 죄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태도는 믿는 자들속에 심리적인 감옥을 만들어서
결과적으로는 다른 죄악들에 포로가 되도록 만든다.
주님은 믿는 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소극적인 모습들과 무관심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이 언제든지 대량 살상 공격을 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우리의 문화 속에 침투해 들어오는 온갖 악한 것들을 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지 않으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음을 본다.
만약 우리가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며 정직한 기도를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사 강하게 하시며
우리는 원수들을 추격하여 진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주님의 약속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대신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소극적인 영에 사로잡혀 꼼짝도 못하고 있다.
나는 지금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에너지의 많고 적음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순종의 불fire 의 정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사는 요아스 왕이 화살을 가지고 땅바닥을 치는 소극적인 태도를 통해
그가 곧 쉽게 포기해 버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독자들이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세를 주셨으며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또한 주셨다.
이제 우리는 일어나서 싸워야 한다. 우리의 소극적인 영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권세를 가지고 오늘날
우리가 당한 전쟁을 위해 싸우라.
만약 우리가 기도와 행동 중 하나라도 실패한다면
실제적으로 우리는 우리나라의 영(soul of our nation)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의 패배는 불보듯 뻔 할텐데
그것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악한 영의 진군을 보고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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