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그 뜻을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축복이 뒤따르게 되어있다.
"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37:4)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을 마음으로 넌지시 바라본다.
그리고 대충 감을 잡는다.
그러나 가끔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내지는 우리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우리들을 끌고 가실 때가 있다. 진정 겸손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때에도, 주님께 순종한다.
"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3:5).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기는 했으나, 그 약속이 이루어져 자식을 얻기까지는 상당기간 기다려야 했다.
결혼과 출산이라는 논리적인 연결이 즉시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많은 자손들의 아비가 되는 꿈을 꾸면서 미래를 어렴풋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심으로
그러한 아브라함의 꿈을 일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셨다!
하나님의 그러한 지령은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명령이다.
아브라함이 그러한 엉뚱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가히 상상이 가는가?
진정으로 통탄할만한 명령이었고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거리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심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했을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함이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의존
둘째로, 겸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완전히 의탁하고 주께 온전히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말한 대로, 다윗은 그의 형들의 눈에는 교만한 것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겸손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삼상17:37).
다윗의 형들은 자신들이 나이도 더 많고 힘도 더 세고 경험도 더 많고
지식도 더 많기에 자신들이 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다윗의 자신감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에 기인했다.
동일한 영적 진리가 갈렙과 여호수아의 이야기에도 발견된다. 이들 둘은 약속의 땅을 정탐하러 파송된
12명중에 두 사람이다. 40일이 지난 후에 그들은 정탐을 마치고 모세와 백성들에게 돌아와 보고를 했다.
12명중에 10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민 13:27-28)
10명의 정탐꾼들이 이성적인 판단으로 정확히 보고하자, 군중들은 소동을 부리며 왁자지껄하였다.
갈렙은 흥분한 군중을 진정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확신에 찬 믿음의 말로 권면하였다.
"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민13:30)
그러나 다른 10명의 정탐꾼들은 다음과 같이 재빠르게 받아쳤다.
"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민13:31).
그러고 나니 군중들의 심기가 불편해지고, 분노가 치솟기 시작했다. "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민14:10)
왜 군중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때려죽이려 했을까?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지나치게 자만하고 자신을 과신하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해 하며 잘난 척 하는 꼴을 눈뜨고 볼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거해 버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땅에는 강한 적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땅이 도저히 취할 수 없는 땅이라고 판단한 사람들의 눈에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정신병자들로 비쳤을 것이다.
그들의 판단에 따르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광신과 환상에 취하여 망발하는 인간들이다.
반면에, 자신들은 현실주의자들이다- 튼튼한 성곽과 잘 훈련된 군사를 가진 나라들을
한낮 유랑하는 목동들이 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말하는 배후에는, 출애굽은 하였으나 아직도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태도가 숨어있다.
"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쓸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민14:3)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겸손하고, 처자를 돌보고, 백성을 생각하는 신중한 사람들로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백성 중에 노약자, 무기력한 사람들의 안녕과 복지를 생각하지 않는
파렴치한 인간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깊이 한번 생각해 보자. 여호수아와 갈렙의 확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민14:9) .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만심으로 가득한 인간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겸손한 자들이다.
겸손, 즉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의존함이라는 것은 사도 바울의 생애를 지배한 영적 원리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고후3:5)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9-10)
사도바울의 일생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살면 살수록,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에는
더 의존하게 되고, 반면에, 자신의 힘, 능력 , 재능은 덜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순복하여 자신을 비우면 비울수록, 그리스도의 영광이 더 많이 그에게 흘러 들어와,
바울은 더욱 더 강하고 담대한 전도자로 변화되었다.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것과 겸손함은 맞물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함을 받았을 때 사도 바울은, 겸손함으로
자신이 성취한 모든 업적과 획득한 신분을 포기했다. 바울은 그런 모든 것들을 쓰레기라고 묘사한다.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얻은 모든 것은 전부 폐물이라는 것이다(빌3:1-8참조)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이룩한 영적인 성과들은 어떤가?
신자들은 종종 그러한 것들을 자랑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태도를 한번 살펴보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것을 잡으려고" (빌3:13)
회심한 후에 사도 바울은 안수를 받고 파송된다 (행13:1-4을 참조하라).
그에게 풍성안 영적 계시가 임하고 많은 은사와 지혜가 쏟아 부어졌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동부 유럽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라는 편지의 내용을 보면 그가 얼마나 겸손한 인물인지 가히 엿볼 수 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침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고전 15:9)
당신의 귀에는 위의 말이 진정 겸손함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들리지 않는가?
이는 위장된 겸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세상에는 가짜 겸손이라는 것도 있다.
정치적인 전략상 겸손한 척 위장하는 것 말이다. 아니면 비굴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
겸손한 척 하면서 , 은근히 자신을 높이 세우려고 술수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 진실성이 결여된 말뿐일 겸손으로 사람들을 속여 먹으려 드는 게 아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 성경을 기록하면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진정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성령님은 그렇게 쓰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럼으로 " 사도중에 가장 작은 자" 라느니 " 사도라 칭함을 받지 못할 자" 라느니 하는 말은
외교적인 수사 용어가 아니라, 진정한 겸손을 표현해 주는 말들이다.
사도바울 자신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10).
사도바울이 말하는 " 모든 사도" 는 누구인가?
그 말 그대로 다른 모든 사도들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뻐기는 것인가 허풍을 떠는 것인가?
마치 겸손을 가장하여 잘난 척 하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할 것이다.
얼마 전에는 "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 라고 했다가 이제는 말을 바꾸어 자기가
"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고 하니 혼란스럽지 않은가?
그냥 얼핏 보기에는 사도바울의 교만함이 드러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럼으로 바울의 말은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자세로 부터 나온 말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
사도바울은 자신이 기독교인으로 많은 종교적인 업적을 쌓았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업적과 자신의 자존심을 분리시켰다.
그가 무엇을 이루었든지 그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 라는 사도 바울의 자기소개는 소화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객관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사를 통해서 보든지 성경의 기록으로 보든지,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사도 중에 한 사람이다. 그런데 고린도 전도 후에 기록했다고 추정되는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언급하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보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엡3:8)
7년 전에 쓰여진 고린도서에서는 자신이 '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 라고 하더니,
이젠 '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 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아라.
잘못 읽으면 위선자의 아첨 떠는 글처럼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사도 바울은 진실한 사람이었다.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한 성자인 사도 바울은
진실로 자신을 그렇게 낮은 자로 여긴 것이다!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사도바울은 자신의 부족함을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
예수님께 아주 가까이 접근했을 당시, 이제 사도바울은 죽음의 문턱에 있었다.
그 당시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비추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성경을 한번 읽어보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1:15)
처음에는 '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로 시작해서 , '성도 중에 가장 미천한 자' 가 되더니,
이제는 ' 죄인의 괴수' 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면 가면 갈수록 사도 바울의 신앙이 더 나빠지고
인격이 험악해졌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사도 바울은 점차 신앙이 자라나 예수님을 닮아가고,
인격이 고매해져서 성자의 위치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말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사도 바울이 갈수록 더 겸손해 졌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갈수록 더 겸손해진 이유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리고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더욱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께 크게 빚진 자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았던 인물이다.
은혜를 더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사람은 더욱 겸손하게 된다.
동시에 겸손하면 할수록 더 많은 은혜를 받게 된다.
"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4:6)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겸손함이 갈수록 깊어졌다는 것은,
그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강하여졌다는 증거이다.
바울이 겸손해지면 겸손해질수록 하나님은 더욱 바울에게 친근하게 다가오시고,
놀라운 하늘의 비밀을 알게 해주셨다.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한번 방문해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거주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실때 , 우리는 하나님과 아주 친해지게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