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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찢는 회개> 2편 40일 금식기도 후 농촌교회로!

LNCK 2018. 7. 14. 12:47

www.youtube.com/watch?v=CHKSnqFvFuM&feature=youtu.be

도서 낭독 <가슴 찢는 회개> 2

  

◑40일 금식기도 후 농촌교회로!

       

나는 내가 선교사가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더욱이 아마존 선교사가 되어 평생을 살아야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19839월인가, 서울 구의동 넓은 광장에서 대형 천막을 치고

아마존 전시회라는 입간판이 걸린 것을 보고 호기심에 들어간 적이 있다.

 

아주 큰 동물과 벌레들, 그리고 식물들을 사진에 담은 전시회였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내 인생과 상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 아내 허운석 선교사는 기도를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이었다.

나와 결혼한 후 4년쯤 지난 어느 날 그녀가 내게 갑작스러운 선포를 했다.

 

당신이 이토록 기도에 게으르니 장래에 무슨 소망이 있겠소.

각자 헤어져서 자기 길을 갑시다!”

내가 새벽기도를 게을리하자 4년을 두고 보다가 이혼을 결심한 모양이었다.

 

순간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이 큰 충격을 받고 어떻게 하면 이혼당하지 않을까

궁리하다가 금식기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예전에 철야기도를 위해 자주 다니던 북한산 통일봉(기도하는 이 들이 붙인 이름)

20일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올랐다.

 

원래 기도원 자리인데 당시는 헐리고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기도를 했다.

어느 분이 2인용 텐트를 하나 주어서 기도하는데,

1월 초의 겨울바람이 매서운 데다 배고픔과 싸우느라 너무 고통스러웠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눈보라가 치던 날, 허 선교사와 내가 섬기던

구산교회의 고등학생 세 명이 석유 난로와 담요를 가지고 왔다.

얼마나 고마운지 그들이 다윗이 샘물을 먹고 싶다고 했을 때

목숨을 걸고 적진을 뚫고 들어가 물을 떠 온 세 명의 병사처럼 여겨졌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지만 종종 생각이 나면 그들에게 감사하며 축복의 기도를 하곤 한다.

당시 추위는 영하 15를 오르내렸다. 텐트에선 석유난로가 있어도

하루 종일 켜선 안 되었다. 냄새도 고약했다.

 

오리털 점퍼가 나오기 전이니 변변한 외투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도 텐트 하나로 그 추위를 견딘 것이 놀랍기만 하다.

 

더구나 밤이면 바람이 더 거세져서 텐트가 날아가지 않을까 염려되어

주님, 제발 이 텐트만 날아가지 않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거의 하루 종일 기도와 말씀에 전념했다.

게으름과 나도 모르게 품었던 악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회개했다.

 

그 동안 기억나지 않아서 고백하지 못한 죄까지 생각나서 회개하며

주님께 용서를 구했다.

낮에는 양지바른 곳을 찾아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마실 물은 산 아래 졸졸 흐르는 물을 받아서 마셨다.

하루 종일 기도에 전념하고 성경을 읽자,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심기는 경험을 했고,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고 내 영혼에 성령님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그토록 고통스럽던 겨울 추위도 어느 순간 감사하게 되었다.

겨울을 맞아 잎을 벗어 버린 마른 나무들과

그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푸른 소나무들,

눈이 흩날리는 날이면 견고하기만 한 바위들까지,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작정한 20일이 다가오던 어느 날 아직 회개할 것이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20일을 더 기도해야겠다는 감동이 왔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40일을 금식기도하는 동안

 

아내 역시 금식하며 산에 오르내리며 내 편의를 살피다가

장이 흔들리는 병을 얻어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금식 30일이 지나면서부터는 잠깐이라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입에서는 물을 마시는 대로 푸른 물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티슈로 계속 그 물을 닦아 내는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 을 육감적으로 알았다.

 

40일 금식기도가 끝나 갈 무렵 내 마음에 이런 감동이 있었다.

너는 갈릴리와 나사렛의 가난한 삶을 배우라.

목회자 없이 버려진 농촌 교회의 잃어버린 양 떼를 돌보라.”

 

그렇게 40일째 날이 밝았고, 그날은 아내가

이미 40일 금식 경험이 있는 여전도사님 두 분을 모셔 와서

그분들의 간증을 들으며 마지막 밤을 보냈다.

 

하지만 40일 금식기도를 마친 뒤 나는 더 교만해졌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면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나

끝내 이겨 낸 당시를 떠올리며 담대함을 가지곤 했는데,

돌아보면 이것이 교만이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은혜로 이혼당하는 위기를 넘긴 것인데,

마치 내 힘으로 그 위기를 넘긴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또한 40일 금식기도 이후 자기 의가 드높아졌다.

금식이 길어진 만큼 보호식도 길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처음엔 미음을 먹다가 차츰 죽이나 과일주스를 먹게 되었다.

 

이때 나는 허 선교사가 많이 주어도 절대로 욕심을 내서 과식하지 않았는데,

음식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나 절제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나는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자기 의가 높아졌다.

 

금식이 끝난 이튿날 아내가 여관에 데려가 목욕을 시켜 주었다.

거기서 몸무게를 쟀더니 38kg이었다. 60kg에서 무려 22kg이나 빠진 것이다.

살은 없고 뼈만 남았는데도 씻어도 씻어도 때가 나왔다.

 

금식을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과 지인들이 방문했다.

한번은 성도님 몇 분이 찾아와서 같이 예배를 드렸는데,

그 자리에서 허 선교사(아직 선교사가 되기 전이지만 이렇게 부르기로 합니다)

가 내게 왜 금식하게 되었는지를 간증하라고 했다.

 

나는 차마 이혼당하지 않으려고 금식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어머니가 계셔서 그런 말을 들으면

몹시 당황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허 선교사는 그런 나한테 실망을 했고, 그날 우리 부부는 말다툼을 하게 됐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한 금식의 은혜를 그날 다 까먹어 버렸다.

 

어머니를 의식하고 사람을 의식해서 진실을 잘도 숨기는

간사한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금식 기간 동안 허락해 주신 주님의 임재와 은혜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가난해도 너무 가난한 40일 동안 회복식을 한 뒤

주님의 말씀을 따라 나사렛과 갈릴리의 가난한 삶을 배우기 위해

목회자 없이 버려진 농촌 교회를 찾았다.

 

어머니는 “40일 금식기도가 끝나면 능력 있는 큰 종이 되어

부귀와 영화를 누릴 줄 알았더니 고작 농촌 교회라니 기가 막힌다고 하셨다.

 

허 선교사는 아들이 돌을 넘기면 농촌에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라도 먼저 내려갈 테니 뒤따라오라고 고집을 부리자

아내는 할 수 없이 따라 나섰다.

    

 

◑금식 후 받은 응답으로 농촌 교회로 찾아가다

 

절친한 친구이자 신학교 동급반 최전도사의 소개로

경북 금릉군 부항면 월곡리 학동에 소재한

부항중앙교회를 향해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

 

기차에서 내린 후 김천에서 다시 버스를 탔는데

포장도로가 있는 지례까지 40, 그런 다음 비포장도로인 월곡까지 40분을 달려

겨우 도착했다.

 

거기서도 교회까지는 2km를 더 가야 해서

교회 집사님이 경운기를 태워 주었다.

 

부항중앙교회는 부항면의 여러 동네들 중에 중앙에 세워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부항면에는 버스가 주차하는 월곡리 에 100여 가구,

교회가 세워진 학동 옆의 어전에 89가구, 학동을 지 나 5리 더 가면 나오는 가목에 80여 가구가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가면 전북 무주구천동이었다.

교회는 사람들이 큰 산이라고 부르는 삼도봉을 사이에 두고

전북, 충북, 경북이 나뉘는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교회가 있는 학동에는 고작 13가구가 살고 있었다.

교인들은 학동을 짚은(깊은) 골짝이라고 불렀다.

 

그 짚은 골짝은 큰 산들과 계곡들로 이어져 있었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아름다운 모습은 늘 나를 경탄하게 만들었다.

 

1년 전에 이곳을 담임하던 전도사님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뒤

교회는 한 집사님이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야말로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가난한 농촌 교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 아 20여 평의 교회 건물과

13평의 사택을 건축해 시작되었다는 교회는

십 수 년이 지났으나 화장실도 없었고

교회를 드나드는 입구도 옆집 집사님 댁을 통해야 했다.

 

사택은 방 두 개를 사이에 두고 마루와 부엌이 있었다.

하지만 상수도 시설이 없는지라 식수는 옆집 집사님 댁 펌프 물을 이용했고

세수와 목욕, 설거지는 사택 뒤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논에

고무호스를 꽂아 물을 받아서 사용했다.

 

가끔 물이 나오지 않았는데, 작은 청개구리가 들어가서

고무호스를 막아 버렸거나 고무호스 전체를 갈아 버려야 할 만큼

이끼가 많이 끼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택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옆집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재래식 화장실은 겨울과 봄, 가을에는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여름이면 사정이 달랐다. 구더기가 들끓는 데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엔 화장실로 물이 들어와 일을 보기 곤란했다.

 

산골에서 겨울을 나는 것은 또 어떤가.

방 두 개 모두 창호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바깥이어서

바람이 그대로 새어 들어오는 데다 웃풍이 세서

어린 아들이 감기를 달고 살았다.

 

너무 추워서 연탄난로를 방 안에 놓았더니

아침이면 바깥 기온과 방 기온의 차이가 너무 나서

창호지가 흐물흐물 흘러내렸다.

 

계단식 논의 물을 끌어들여 쓰는 일도 겨울엔 불가능했다.

고무호스가 얼어 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빨래는 냇가에 가서 얼음을 깨고 해야 했는데,

면장갑을 안에 끼고 다시 고무장갑을 끼었어도 손이 얼마나 시렸을까.

하지만 당시 나는 모든 여인이 그렇게 하니까 고마운 줄도 미안한 줄도 몰랐다.

 

방 하나는 연탄을 땠으나 나머지 방 하나는 장작을 패서 방을 덥혔다.

장작은 가을걷이를 마친 교인들과 함께 큰 산에 올라 해 왔다.

 

경운기가 들어가는 곳까지 가서 나무를 베고 경운기에 실어서 내려오면

장작을 패 추위를 대비했다.

하지만 장작이 충분히 마르지 않은 상태일 경우 불을 피우기가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바람이 반대로 불면 눈썹과 머리를 태우기 일쑤였다.

 

선교사로 파송될 때까지 이 덜 마른 장작 때문에 불 피우는 데 애를 먹었지만

교인들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늘 땔감을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

 

나는 당시 장신대(장로회신학대학교) 4학년이어서 월요일 오후에

서울로 올라갔다가 금요일 저녁이면 집에 돌아왔다.

 

허 선교사와 세 살 된 딸 수산나와 7개월 된 아들 지훈이를 두고

방학 때를 제외하고 학부 4학년, 신학대학원(신대원) 3년을 마칠 때까지

주말 부부로 살았다.

 

허 선교사는 내가 주중에 학교에 가면 매일 새벽종을 치고 새벽예배를 인도했다.

아이 둘을 예배당에 눕히고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잠을 잤다.

남편 없이 농촌에 홀로 있는 전도사 사모들이 성폭행을 당하는 일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월요일 오후만 되면 서울로 올라가는 나를 얼마나 따라 나서고 싶었을까.

아들을 등에 업고 딸은 걸려서 한 길까지 나와 작별 인사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작별 인사를 한 뒤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쟁기를 잡고 뒤를 보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해서 그랬다.

그때부터 가족들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훈련을 한 모양이다.

 

허 선교사는 그렇게 헤어지는 게 힘들었음에도 내가 금요일 오후에 돌아오면

금요 구역예배에 가라고 내몰고 토요일엔 교인들 가정을 심방하라고 독촉했다.

 

우리 아이들은 농촌 아이들과 함께 자랐다.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냇가에서 수영을 하고 물고기를 잡았다.

 

도시 아이들처럼 과외를 하거나 학원에 가는 일이 없다 보니

학교만 다녀오면 노는 게 일이었다.

 

덕분에 선교지에 나갔을 때 아이들은 별 어려움 없이 현지의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아이들도 선교사 자녀로서 미리 훈련을 받은 셈이다.

 

주님이 나사렛과 갈릴리의 삶을 배우라고 하셔서 농촌으로 갔지만

농촌의 삶은 정말이지 가난했다.

 

교인이 많지 않은 부항중앙교회가 제공하는 생활비는

우리 네 가족이 생활하고

내가 매주 서울로 학교를 다니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다행히 교인들이 농사를 짓다 보니 성미는 늘 넉넉해서 배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것은 다 부족해서

당시 내 소원은 달걀 부침개를 실컷 먹어 보는 것이었고,

허 선교사 소원은 고등어자반을 먹는 것이었다.

 

허 선교사는 아들을 등에 업고 딸을 걸리며 산과 들을 찾아 나물을 뜯었다.

이른 봄의 쑥을 시작으로 취나물, 미나리 등 제철 산나물과 야채를

원 없이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주님이 몸에 좋은 무농약 무공해 채소를 양껏 먹이신 것이었다.

지나가다 뱀을 만나면 잡아서 팔았다.

 

이렇듯 나는 농촌 교회에서 철저하게 가난을 훈련 받았다.

그리고 이 가난 훈련은 아마존에서 사역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느끼는 부끄러움을 알았다.

작은 일 중 하나를 소개한다.

 

우리는 집을 개방하고 식탁에서 인디오 형제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인디오 형제들은 우리와 함께 식사할 때

쑥스럽고 부끄러워서 음식을 접시로 잘 옮기지 못했다.

 

그럼 내가 그들 접시에 음식을 가득 담아 주었다.

그리고 형제가 먹다 남은 음식은 가족들이 먹을 수 있도록

식탁에 있는 모든 음식까지 싸서 보내주었다.

이런 행동은 내가 가난했기 때문에 가능한 배려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