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O4_GjSKknUQ&feature=youtu.be
◈도서 낭독 <가슴 찢는 회개> 3편
◑농촌교회 목회를 통해 선교사 훈련 받다
1980년대 초 부항에 거주하는 우리 교인들은
나이 드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대다수였고 청년들은 극소수였다.
당시는 대부분이 여전히 전통적인 농사를 짓고 있었다.
봄에는 모를 심었고, 가을에는 나락을 베고 논에 양파를 심었다.
토요일이나 공휴일이면 논두렁에 앉아 같이 밥을 먹고,
할 줄도 모르는 일을 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교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기쁨이었다.
주님은 말씀뿐 아니라 삶을 나누는 훈련을 하게 하셨다.
13가구가 사는 작은 동네였으나 여름철이면 한 달에 한 번 꼴로 부역이라는 것을 했다.
주로 동네 길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공동 노동을 할 때면 나도 같이 나가서 아주 열심히 일하는 척했다.
삽질과 괭이질을 하다 보면 손에 물집이 생겨서 아팠다.
그렇지만 동네 주민들의 마음을 얻고 싶어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언제 어디서나 동네 어르신들을 만나면 고개를 숙여서 정중히 인사했다.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습관은 선친의 가르침 때문이었는데,
훗날 아마존에 가서 인디오 형제들의 관심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허 선교사는 수십 년간 때로 찌든 예배당 마룻바닥을 여성도들과 함께
사포(샌드 페퍼)로 긁어내고 니스를 새롭게 칠했다.
지인들의 후원을 받아 창틀도 새롭게 페인트칠하고
십자가가 걸린 정면의 커튼을 붉은 융단으로 새롭게 달았다.
나름대로 리모델링을 한 것이다.
▲허 선교사는 마을 어르신들의 사랑과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그 계기는 이렇다.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가 있어서 이유를 알아보니,
엄마는 정신지체이고 큰아버지가 함께 살았는데
호적이 잘못되어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있었다.
허 선교사는 김천 법원에 가서 호적을 변경시켜 주었다.
목욕탕에 데려가 때를 벗긴 뒤 집에 데려와 같이 밥을 먹고
딸아이와 함께 공부도 시키고 잠도 재웠다.
선교사로 파송될 때 같이 데려오려 했으나
아이가 혼자 남게 될 엄마가 염려되어 따라가지 않겠다고 해서 이별해야 했다.
허 선교사의 이 같은 섬김은 동네 어르신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교회에 부임한 첫해에 성탄절이 지난 뒤
우리 교회의 젊은 부인이 자살하는 일이 있었다.
어린아이 셋을 두고 목숨을 끊은 젊은 여인은
험담에 참여했다는 구설수에 휘말려 괴로워하다가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교회 목사나 전도사가 교인들의 시체를 염하고 입관하는 것이 당연했다.
우리 부부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설교를 할 것인지,
어떻게 염을 하고 입관할 것인지 밤을 꼬박 새우며 두려움에 떨었다.
아침이 되어 교인들과 함께 그 집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방 안에 있던 허 선교사가 내게 찬송을 불러 달라고 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염을 하는데 무서워서 찬송을 불러 달라고 했던 것이다.
부항중앙교회를 섬기는 6년 동안 수많은 장례를 치렀다.
연세가 많아 돌아가시거나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참 많은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 주면서
몇 십 명도 안 되는 교회에 왜 이렇게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나느냐고
하나님께 절규했다.
한번은 젊은 형제가 오토바이를 타고 김천 시내에 나갔다가
버스와 충돌하는 바람에 즉사했다.
그 형제가 사고로 사망하기 전날 밤,
과연 내가 이렇게 목회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자괴감에 빠져
신문에서 동시통역 학원 광고를 오려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동시통역사가 되면 어떨까 해서였다.
젊은 형제의 장례식을 진행하면서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혹시 내가 목회를 잘못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게 아닌가 하고 질문을 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시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다.
▲우리 부항중앙교회는 2년가량 도시 교회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물론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교인들이 자립에 대한 의지가 나태해지는 것을 보고
도시 교회에 편지를 써서 더 이상 지원금을 보내지 말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에 대한 대책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주님의 도우심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싶었다.
이 또한 후에 아마존 선교를 위한 훈련이 되었다.
나와 허 선교사는 이때를 계기로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모든 사역을 감당했다.
신실하신 주님은 주님만을 바라보고 도움을 구할 때
항상 때에 맞추어 공급하셨다.
하지만 주님만 바라보는 신실한 믿음 이면에는
더 많이 베풀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있었다.
한마디로 도둑놈 심보였다.
이렇게 양면적인 신앙을 견지하다 보니
사역이 어느 순간 내 자랑, 내 업적으로 둔갑하곤 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철퇴를 맞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농촌 교회를 섬기는 중에도 여러 번 도시의 교회로 옮길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떠나도 된다는 허락의 사인을 보내 주시지 않았다.
한번은 규모도 좀 있고 사례비도 훨씬 많은 교회로 옮길까 했다가
이 사실을 안 두 여집사님이 눈물로 만류하여 주저앉고 말았다.
가난의 유혹에 넘어질 뻔한 나를 두 분의 천사가 지켜 준 것이다.
순박하고 순수한 농촌의 삶은 단물이 든 도시에서의 삶을 희석시켜 놓았다.
가난한 농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나는 여기서 평생 가난한 농부들과 살다가 인생을 마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는 동안 교회는 부흥해서 예배당이 교인들로 가득 채워지는 은혜를 받았다.
▲한국 교회에선 목회자가 설교단에 설 때 양복을 입고 오른다.
하지만 나는 양복은 고사하고 변변한 옷 한 벌 사 입기도 힘들었다.
다만 내겐 양복 한 벌이 있었는데, 오래전에 독일에 간호사로 갔던 누님이
독일인을 만나 결혼한 뒤 그 키 큰 매형이 입던 양복을 보내 준 것이었다.
길이도 품도 맞지 않아 세탁소에서 대충 고쳐서 입었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학교 등록금 60만 원을 제때 내지 못해 곤욕을 치렀다.
한번은 언제까지 등록금을 내지 못하면 자퇴 처리하겠다는 공고문이
내 이름과 함께 종합관 게시판에 게시된 적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이 보내 주신 주의 종들에 의해 가까스로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었다.
큰형님과 독일 누님, 김동환 장로님과 이순례 권사님, 김혜정 사모님과 심봉순 목사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나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다.
특히 신대원 2학년과 3학년 내내 등록금 전액을 지원해 준
영주제일교회 전응옥 권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1980년대에는 비디오플레이어가 아주 귀했다. 웬만한 교회도 소유하지 못했다.
내가 살던 김천에선 유일하게 기독교 서점에 있었는데,
성경학교 때 빌려서 기독교 영화를 보여 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 비디오플레이어가 있으면 겨울철 농한기 때
마을회관을 다니며 동네 사람들에게 기독교 영화를 보여 주고
전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 위해 기도하는 동시에 당장은 빌려서라도 마을회관에
기독교 영화를 상영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교회 출신으로 울산에 살고 있던 장경환 집사가
선뜻 비디오플레이어를 기증해 주었다.
당시는 고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이후 여름과 겨울의 농한기를 이용해 시간이 되는 교인들을 초대해
영화를 보여 주고 전도를 했다. 주변 지역도 다니며 영화 상영을 했는데,
우리 교회 교인 중에 유일하게 봉고차를 가지고 있던 장철환 집사가
교통편을 제공해 주었다.
장철환 집사는 김천 시내로 나가서 경운기 수리를 하면
수입이 더 많아져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교회를 지키기 위해 그 유혹을 뿌리쳤다.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은 장 집사가 포기한 풍족한 삶과 비교되지 않는
하늘의 상급을 주시리라 믿는다.
선교지에 나가서도 나는 영화 상영으로 전도를 했다.
농촌 교회에서 선교 훈련을 한 셈이었다.
▲우리 부항교회 출신들은 지금도 주변의 도시로 나가 기반을 잡은 뒤
선교사로 나온 나를 돕고 있다.
1980년 중반 우리나라는 각 기업에 산업체 고등학교를 세우게 한 다음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도록 주선했다.
당시는 농촌에서 자식을 고등 교육까지 시키려면
큰 맘먹지 않으면 불가능하던 때였다.
우리 지역의 청소년들도 이때 부산과 구미, 대구로 나가서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마쳤는데,
이들이 장성하여 교회의 제직이 된 뒤 교회를 통해 나를 돕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랜 믿음의 동역자인 김경애 권사님이 어느 날 우리 딸 수산나에게 피아노를 선물했다.
허 선교사는 피아노를 교회에 두고 반주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고작 13가구가 살아가는 산골짜기에
과연 피아노를 반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기대할 만한 사람은 오직 면 소재 보건소 소장 부인이 아닐까 했다.
하지만 새로 부임했다는 보건소 소장 내외는
한 주일이 지나도록 교회에 오지 않았다. 아내는 낙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내의 기도는 그다음 주에 이루어졌다.
보건소 소장이 자기 아내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나타난 것이다.
그 아내는 바로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이상신 집사님이다.
남편이 근무하는 2년 동안 이상신 집사님이 주일이면
교회의 반주자로 섬겨 주었다.
남편인 소장은 주일이면 오토바이에 아내를 싣고 교회 마당에 나타날 뿐
정작 예배는 드리지 않았다.
아내가 예배당에서 나올 때까지 교회 마당의 감나무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며 아내를 기다렸다.
하지만 1987년 당시 75세인 방지일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을 때,
남편 소장이 회심을 했다.
그날도 역시나 예배당 밖에서 아내를 기다리다가
주기도문 강해가 예배당 벽을 넘어 그의 귀에 꽂힌 것이다.
그가 바로 우리 평생의 동역자인 안정태 집사님이다.
이 안정태 집사님과 이상신 집사님이 2002년부터 매년 아마존 단기의료선교로 다녀간다.
이제는 우리와 한 가족이나 다름없다.
아마존 검은강(Rio Negro) 상류 지역의 인디오 형제들이 안정태 집사님에게
도토르 치아구(Dr Thiago)라는 브라질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안 집사님은 우리 인디오들에게 가장 친근한 사람이 되었다.
1982년 5월인가, 우연한 기회에 하용조 목사님이 이끄시는 기도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하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선교사들을 외국에 파송하기 전에 농촌에 미리 보내서
훈련을 받게 함이 제3세계에 가서 사역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때는 내가 농촌에 가리라고도 선교사가 되리라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흘려들었으나 나중에 선교사가 되어서야 하 목사님의 말씀이 이해되었다.
농촌 교회를 섬기게 하신 것은 선교사로서
사역을 맡기기 위한 주님의 큰 그림이었다고 이해한다.
주님은 어디서든지 우리를 준비시키고 훈련시켜서 그분의 뜻을 이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이 허락하신 환경임을 알고 충성하면 된다.
그분의 뜻이 우리보다 훨씬 크므로 염려할 이유가 없다.
▲농촌 교회 교인들과 말씀과 삶을 나누면서
우리는 농촌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우리 교인들과 함께 살다가 죽어서 양지바른 산 언덕에 묻히면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장신대학원을 졸업하면 대개 그 해에 목사고시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나는 2월 초 농한기를 맞아 방지일 목사님을 모시고
교회에서 부흥회를 가졌다.
다른 친구들은 벌써부터 목사고시를 준비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부흥회를 준비하느라 늘 기도회를 했다.
은혜 가운데 부흥회를 마치고 나는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가 자료들을 구했다.
부항으로 내려가기 전날 밤, 장신대 앞의 분식집에서 친구들과 저녁을 먹었다.
◑선교사로 자원하게 된 계기
그중에 홍순범 (당시) 전도사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선교 훈련을 다녀와서
그 강렬한 인상을 쉴 새 없이 전했다.
홍순범 전도사는 당시 장신대 신대원에서 선교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는데,
선교학을 가르치는 이광순 교수님이 20여 명의 신학생들을 데리고
선교 훈련을 다녀온 것이었다. 그 팀에서 함께 단기선교훈련을 다녀온 터였다.
인도에서 흔히 본다는 소 떼의 행렬과 영적인 어두움, 비참한 생활을 전하면서
인도에 복음을 전할 선교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가 누웠는데 문득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네가 인도에 선교사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생각을 부정하는 말이 쏟아졌다.
“아니 내가 지금 돌았나? 내가 왜? 그건 절대로 안 되지.”
그런데 이 질문과 대답은 잠이 드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네가 인도 선교사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 하면 다시
“아냐 그럴 수 없어. 가난한 농촌에서 목회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내가 왜 인도 선교사가 되어야 해?” 하며
새벽 3시까지 씨름하느라 몹시 피곤하고 힘들었다.
“주님 그렇게 원하십니까? 내가 인도 선교사로 가기를 그렇게 바라십니까?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입으로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마음에 평화가 깃들면서 곧 잠이 들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고속버스를 타고 부항으로 내려가는데
여전히 어젯밤 씨름한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데 아내에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주님, 지혜를 주십시오.”
먼저 친구가 그랬듯이 인도 이야기를 하리라.
그런 다음 기회가 되면 선교사로 나갈 것을 말해 보리라.
계획대로 나는 허 선교사에게 인도 이야기를 한동안 했다.
한참 듣고 있던 허 선교사가 그곳이야말로 선교사가 필요하겠다고 대꾸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어젯밤 씨름한 일을 말했다.
그랬더니 허 선교사가 그건 아니라며 반대했다.
다음 날 새벽부터 나는 농촌 교회 마루에 엎드려 주님과 씨름을 했다.
“주님 왜 저입니까? 그 많은 선교사 후보자들을 두고 왜 하필 저입니까?
저는 여기서도 몇 년째 고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 아내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아내가 반대하여 선교사가 될 수 없다는데 누가 시비를 걸 수 있겠어?
주님도 할 말이 없으시겠지. 아내의 반대로 갈 수 없다는 것만큼 합당한 이유가 어디 있겠어?’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내가 반대할수록 내 마음이 조금씩 열려서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의 두 주 동안 씨름한 뒤에 새벽에 기도하는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네가 북한산에서 금식할 때 네 목숨을 내게 바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네 목숨을 받기를 원한다.”
“오 주님!”
그 순간 더 이상 변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내는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날 인도의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5월의 어느 날, 경서 노회에서 선출된 몇 분과 함께
여름성경학교 교사 강습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
총회 백주년기념관에서 숙박하며 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같은 건물에 있는 세계선교부를 방문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인도에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저를 파송해 주십시오.”
세계선교부 간사가 잠자코 내 말을 듣더니 뜻밖의 제안을 했다.
“인도에 갈 마음이라면 아마존에 가 주십시오.”
아마존에서 6개월 전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는데
아무리 연락을 하고 요청을 해도 누구도 가겠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인도에 갈 마음이라면 아마존에 가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존이라니, 충격이었다.
거대한 정글과 강, 큰 뱀이 사람을 통째로 삼키고 창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아마존!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 없어서 에둘러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
“기도해 보고 전화하겠습니다.”
세계선교부 문을 나서는데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어려운 부탁은 만만한 친구에게 한다는데
‘주님이 나를 그렇게 믿으시고 만만하게 여기나’ 싶어
감사하는 마음과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위험한 곳에 나를 가라고 하시나’
하는 섭섭한 마음이었다.
교사 강습회가 끝난 뒤 다시 돌아가
새벽마다 마룻바닥에 엎드려 주님께 묻고 또 물었다.
“주님, 힘겹게 인도에 선교사로 가는 것을 결정했는데
세계선교부는 제게 아마존으로 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답답한 마음에 하루는 장신대 이광순 교수님에게 전화해서 물었다.
“세계선교부에서 제게 아마존 선교사로 가라고 합니다.
교수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교수님은 오래전에 자신의 친구가 아마존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다면서
“거기 사람들은 자기 나이도 모르고 복음도 듣지 못하고 있다”면서
“갈 수 있다면 자네가 가면 좋겠네”라고 했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는 격이 되고 말았다.
그 후로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기도하다가
어느 날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주님, 인도에 가서 죽으려 했는데 아마존에 가서 죽겠습니다.
뱀에 먹혀 죽든 창에 찔려 죽든 죽기는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다음 날 세계선교부에 전화해서 아마존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이 지나도록 세계선교부에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신촌교회에서 나를 입양하여 선교사로 파송하려고
당회에서 의논했으나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서 거절되었다고 했다.
여기에도 주님의 뜻이 있으셨다.
1990년 9월 초 홍수로 인해 한강의 수위가 위험하다는 뉴스를 본 다음 날이었다.
아침 일찍 이광순 교수님의 전화가 왔다.
“아내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허 선교사와 함께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 교수님 방에 들어섰더니
신촌교회 당회장이신 오창학 목사님과
아마존에서 처녀 시절 10년간 사역한 박광자 선교사님이 함께 있었다.
오창학 목사님이 아내에게 왜 아마존 선교사로 가는 것을 반대하느냐고 묻자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교사로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인데
어떻게 쉽게 결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대뜸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이 기쁘다고 하신 것처럼
내 마음이 기쁩니다. 맞습니다. 선교사는 그렇게 죽을 각오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며 이광순 교수님과 박광자 선교사님이 함께
우리 부부더러 아마존에 선교사로 가라고 권했다.
아내는 그때 ‘주님이 나를 이렇게 코너에 몰아넣으시는구나,
선교사로 가는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날로 교회에 양해를 구하고
총회 세계선교부 파송 선교사 교육 12기 훈련에 합류했다.
4주간의 합숙 훈련 동안 우리는 매우 진지하게 임했다.
아마존으로 가면 살아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각오로 임하는 만큼
모든 과정을 충실하게 참여했다.
나는 다만 살아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아마존에서 주님과 형제들을 더 사랑하고, 제자로 살며,
자아가 모두 죽어서 주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했다.
4주간의 훈련이 끝나고 1990년 11월 1일, 나는 서울 서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 동시에 신촌교회 단독 파송 선교사 후보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는 이유로 한때 선교사 입양을 거절당했는데
어떻게 다시 선교사 후보가 될 수 있었을까?
오창학 목사님이 새벽에 기도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전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 선교사가 될 수 없다면
우리 교회는 세계 선교를 하지 말아야 한다.
지방색도 초월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계 선교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목사님은 그날 바로 당시 선교부장 장로님을 만나 합의했고,
그렇게 해서 나는 신촌교회 선교사로 입양될 수 있었다.
전라도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선교사 파송을 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그것이 선교지에 갔을 때 은혜가 되었다.
인디오 형제들은 500년 넘게 백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지 않았는가.
내가 차별 받은 경험이 그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이다.
더 나아가 나도 경험한 것이어서 그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고 위로할 수 있었다.
1991년 1월, 총회와 자매결연을 맺은 브라질 장로교회로부터 초청장이 왔다.
이때부터 나는 선교사 비자를 받기 위한 서류를 준비하고
브라질로 보내는 등 본격적인 파송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세계선교부가 나를 불렀다.
세계선교부 간사 한 분이 대뜸 왜 현지 정착금을 많이 요구해서
세계선교부를 곤란하게 하느냐고 따졌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신촌교회 오창학 목사님이
선교사 정착비로 2만 달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는데,
당회원 중 한 분이 세계선교부에 전화해서
일반적으로 선교사 정착금이 얼마냐고 물어보면서 불거진 일이었다.
드디어 아마존으로 떠나기 며칠을 앞둔 1991년 3월 17일 주일 저녁,
세계선교부 부장님과 총무님이 파송예배를 주관하고
당시 서울 서노회 회장님이 축사를 해 주었다.
“북아메리카는 영국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떠났고
남아메리카는 포르투갈인들이 금을 찾아서 떠났으나
그 결과가 오늘날 매우 현저하다. 브라질에 가서 주님을 찾고 주님을 전하라.”
이 말씀을 지금까지 가슴에 새기고 있다.
오창학 목사님(현 신촌교회 원로 목사)은 선교사 파송을 받는 날 우리에게
태극기와 흙을 선물로 주었다.
1991년 3월 20일, 우리는 교회에서 내준 봉고차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는 가족은 물론 신촌교회 성도님들이 나와서 배웅해 주었다.
오창학 목사님이 떠나는 내게 마지막으로 읽어 준 말씀은 이사야서였다.
앞으로 이 말씀이 우리의 선교 여정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이었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8-10
마침내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 나리타를 거쳐 LA에서 환승하여
상파울루로 가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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