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8

<가슴 찢는 회개> 4편 아마존 1기사역 3년의 회고

LNCK 2018. 7. 14. 18:44

www.youtube.com/watch?v=AxLfo9Kpy6w&feature=youtu.be

도서 낭독 <가슴 찢는 회개> 4편 

아마존 1기 사역 3년의 회고

         1991~1993

◑상파울루에서의 언어훈련  1991

 

정확한 정보도 없이 브라질 상파울루에 도착한 우리 가족 4명은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우리는 상파울루에 도착해서 우선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 이원경 목사님 댁에 머물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머물 집을 알아봐야 했는데

1990년 말의 브라질은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화폐개혁을 해야 했고,

그 탓에 월세가 아주 비쌌다.

 

이 목사님은 월세와 생활비가 만만찮다며 곧바로 아마존으로 가자고 했다.

상파울루에 머물면서 우리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작정 아마존으로 들어간다면 언어가 통하지 않을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정착비를 제공했다면 얼마 동안이라도 상파울루에 머물면서

언어 공부를 할 수 있을 텐데 당시 우리 수중엔 1개월 치 선교비밖에 없었다.

 

2주 후 상파울루 동양선교교회(한인 교회)의 창고방 하나가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가족은 일단 그리로 짐을 옮겼다.

교회에서 빌려 준 1인용 매트리스 두 개를 깔고 이민 가방 8개를 들여놓으니

발 디딜 공간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음식은 화장실에서 준비했다.

 

신촌교회에 상황을 설명하고 교회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고 대답을 기다렸다.

일주일 후 교회에서 연락이 왔는데, 두 사람 몫의 언어 학교 등록비를 보낼 테니

일단 언어 공부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1천 달러는 가져야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빌릴 수 있다 보니

우리 가족은 하는 수 없이 교회 창고에 계속 머물러야 했다.

 

얼마 후 브라질에 제일 먼저 파송된 선교사님 내외가 와서

파송 받은 선교사가 남의 교회 창고에서 기거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당장 머물 곳이 생길 때까지 호텔로 가라고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되었다.

 

우리의 불편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김송자 전도사님이

자기 소유의 주택이 있는데 2층은 무너졌으나 1층은 그런대로 살 만하다며

그리로 거처를 옮기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우리로서야 교회에 폐만 끼치지 않으면 아무래도 좋았으므로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교민 중 한 분이 자신의 아파트와 전도사님의 주택을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가족은 교회 창고에서 벗어나 아파트로 짐을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고 보니 창고보다 나을 것이 없는 환경이었다.

아주 낡은 데다 불결했고 주변 분위기가 으스스하고 무서웠다.

실제로 아파트에는 벼룩이 너무 많아서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보가 피에 물들어 있었다.

온몸이 가려운 건 당연했다.

 

어떻게 하면 벼룩을 잡을까 고심하다 벌레 죽이는 약을 다량으로 뿌린 뒤

집을 하룻밤 비우면 좋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언어 학교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리우데자네이루로 버스를 타고 가서

하룻밤 잔 뒤 다음 날 아침 코파카바나 해변으로 갔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오랜만에 한가한 오후를 즐겼다.

 

그런데 바닷가 모래밭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허 선교사가 사색이 되어 나를 불렀다.

우리 가족의 전 재산인 1500달러와 상파울루로 돌아가는

항공권 세 장이 든 가방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잠깐 한눈판 사이에 일어난 도난 사고였다. 경찰서를 찾아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나

경찰은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 망연자실했으나

항공권만큼은 재발급 받아 겨우 상파울루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일찍부터 리우데자네이루의 위험성에 눈을 떴다.

허 선교사는 농촌 교회에서 그랬듯이 아파트의 찌든 때가 낀 바닥을 쓸고 닦고

반질반질 윤을 내고 오랫동안 닦지 않아 흐릿한 창도 말갛게 닦았다.

 

우리 가족은 허 선교사가 허구한 날 때 빼고 광을 낸 그 아파트에서

19921월까지 약 10개월간 살았다.

다행히 우리 집 위층에 살던 이경복 목사님의 보살핌 덕분에

그곳 생활에 곧 적응할 수 있었다.

 

상파울루에서 아내와 나는 신촌교회에서 보내 준 학비로

외국인 선교사 언어 학교에 등록해 포어(포르투갈어)를 공부했지만,

아이 들은 무작정 학교에 들어갔다.

 

수산나는 4학년, 지훈이는 1학년으로 들어가

포어를 한마디도 못한 채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는 우리도 현지 적응에 급급해서

아이들이 겪었을 고통을 돌아보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아이들의 고충을 듣고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회개했다.

 

언어 학교는 16학기 과정으로 이 기간 동안 문장 20개가 적힌 종이 80장을

모두 정해진 시간 내에 외우고 검사를 받아야 했다.

 

나는 매일 아침 아파트에서 지하철역까지 20분을 걷고

지하철을 타고 언어 학교가 있는 근처 역까지 간 뒤

거기서 다시 20분을 걸어가 는 1시간여 동안 문장을 외웠다.

문장이 적힌 종이에 코를 박고 걷다가 전봇대를 들이받은 일도 여러 번이었다.

 

이원경 목사님이 아마존으로 오라고 해서

4학기만 마치고 그곳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포어 공부는 즐거웠다.

 

내가 포어를 즐겁게 배울 수 있었던 데는

주님께서 포어를 쉽게 배우도록 먼저 내게 영어를 배우도록 준비시키신 덕분이다.

 

군입대를 앞두고 나는 당시 교제하던 허 선교사와 함께 카투사

(한국에 주둔한 미국 군인들과 함께 근무하는 한국 군인) 입대를 위해 기도했다.

 

논산 훈련소에서 6주간의 훈련을 모두 마친 뒤

별이 쏟아지는 밤에 자대 배치를 받았다.

 

한 사람씩 이름이 불렸고 각자 서라는 줄에 섰는데,

비교적 적은 숫자가 선 우리 줄은 카투사로 간다고 발표했다.

 

나와 허 선교사의 기도에 주님이 정확하게 응답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고 잊어버렸지만 주님은 우리 기도를 잊지 않으셨다.

 

나는 카투사에서 3년간 미국인 목사님의 비서로 일했다.

주일 오후에는 같은 부대 내 한국인 카투사들을 대상으로 목회했다.

 

당시 영어에 능통한 건 아니지만 미국 군인들을 모아 놓고 성경도 가르쳤다.

이들 중 몇몇은 지금도 교제하며 지낸다.

3년간의 영어 훈련이 영어의 어근과 비슷한 포어를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브라질 사람들이 포어를 하면 영어의 어근과 같은 단어를 대충 알아듣고

대화를 시도하는 식으로 포어를 배운 것이다.

 

상파울루에 있으면서 목사가 공석인 한인 교회에 초빙 받기도 했으나

나는 상파울루에 머무는 동안은 언어 공부에 전념하는 시간임을 명심하고

곁눈질하지 않았다.

 

물론 가끔 목회자가 없는 교회에 나가 설교를 하곤 했지만

그것도 낮 예배에만 강단에 섰다.

우리가 상파울루에 머무는 목적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번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파트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집 안에 들어가니 텔레비전을 비롯한 모든 전자제품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낮에 도둑이 든 것이다.

 

경찰서에 신고했으나 주변에선 찾을 가망이 없다고 했다.

얼마 후 전화선을 도둑맞아 2천 달러 이상의 전화 요금이 나오는 일도 일어났다.

 

상파울루 도착부터 주거 문제로 애를 먹고 도난 사고까지 잇따르니

당장에 아마존으로 간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만약 상파울루에서의 생활이 그런대로 괜찮았다면

아마존으로 가는 것을 꺼려했을 것이다.

 

중남미 최고의 도시이자 수만 명의 한국인이 거주하는 곳,

한국 음식도 풍부하고 교민에게 요청하면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

그러나 우리에게 상파울루는 고난의 골짜기였다.

 

그곳이 비록 고난의 골짜기였지만 우리에겐 샘이 있었다(84:67).

고난이 깊은 만큼 거기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로 인해 은혜의 샘물을

길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난이 쓴 만큼 은혜의 샘은 달았다.

 

브라질 도착 후 처음 한 달 동안 동양선교교회의 창고방을 빌려 생활한 후

옮겨 간 아파트에서 아마존으로 가기까지 약 10개월간

우리는 동양선교교회 교인으로 예배에 참석했다.

 

담임목사님이 출타하면 설교단에 서기도 했다.

그렇게 만난 교인들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이 공급하신 시원한 생수를 맛본 것이다.

모두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들이다.

 

  

상파울루에서 아마존 정글로!   1992

 

19921월 말 우리 가족은 선교지 아마존으로 출발했다.

나와 허 선교사는 짐을 싸느라 아침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

 

위층에 사는 이경복 목사님 사모님이 만두를 쪄 와서 허겁지겁 몇 개 주워 먹었다.

며칠 전부터 책과 옷가지들을 우체국으로 부치도록 도와준

상파울루의 김태현 장로님이 그날도 아침 일찍 와서

우리가 짐 싸는 걸 도와주었다.

 

짐을 다 꾸리고 보니 수하물로 보낼 수 있는 가방 외에 큰 가방이 8개나 되었다.

공항까지는 안정삼 장로님이 자동차로 태워 주었다.

 

그런데 비행기 탑승을 앞두고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김정숙 권사님은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출발할 때면

언제나 된장과 고추장을 정성껏 담아 주었다.

특별히 우리에게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그후 무려 20년간이나 계속해서 매년 된장과 고추장을 대주었다.

 

그런데 공항에서 권사님이 플라스틱 통에 넣어 준 된장이 문제가 되었다.

허 선교사가 잘하지도 못하는 포어(포르투갈 어)로 한국 사람은 이것을 먹어야 하므로

이것만큼은 꼭 가져가야 한다고 간청했다.

 

공항 직원이 수화물에 싣겠다고 해서 겨우 일단락되었다.

나와 허 선교사는 된장통을 빼앗기는 줄 알고 다리가 휘청거릴 만큼 놀랐지만

무사히 출발할 수 있었다.

 

푸른 양탄자가 끝없이 펼쳐진 것 같은 광대한 정글,

그 사이로 강이 뱀처럼 구불구불 흐르는 곳,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아마존의 첫인상은 너무 대단했다.

 

나는 공중에서 이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에 감탄했다.

 

우리의 사역지는 타바칭가 와 벤자민 콘스탄치 지역이었다.

황색 강물이 흐르는 솔리모에스 강(Rio Solimoes) 을 따라

인구 4만 명이 사는 도시다.

 

이 도시를 둘러싸고 티쿠나 Ticuna 인디오 부족이 생활하는 마을이 형성돼 있다.

티쿠나 족은 브라질 아마존에서 가장 큰 종족 집단이다.

 

솔리모에스 강은 아마존강의 본류 중 하나로 비록 강물은 황색이나

토지가 비옥하고 정글에선 생활에 필요한 목재를,

강물에선 물고기를 공급 받는다.

 

산란기에 특히 물고기가 많은데 카누를 타고 가다 보면

물고기들이 카누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이곳 사람들 은 강물이 빠지는 6개월 동안 여러 작물을 심어 풍성한 수확을 거둔다.

강변을 따라 백인의 후손과 인디오 부족이 혼혈한 히베이링요 Ribeirinhos

라 불리는 원주민들이 살아간다.

 

나는 아마존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다.

이유인즉 첫째는 언어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상파울루에서 10개월간 살면서 배운 포어로 설교와 강의가

어느 정도 가능했다.

허 선교사가 나를 부러워하며

당신은 물 만난 고기 같고 나는 물 떠난 고기 같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둘째, 나는 물것에 잘 물리지 않는다는 것,

셋째, 나는 마른 체질이라 더위를 잘 견딘다는 것,

넷째, 어떤 음식이나 잘 먹는다는 것이었다.

 

자신만만한 나에 비해 아내와 아이들은 몹시 두려워하면서 아마존에 들어갔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아마존에 들어가고 나서 며칠 뒤 나는 더위에 지쳐 몸살을 앓았고,

허 선교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반바지를 입고 다니다 물것들에 집중 공격을 당해

눈물이 날 만큼 고통을 겪었다.

 

레위기의 말씀대로 아마존은 교만한 나를 토해 버렸다.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18:28

 

처참하게 무너진 뒤에야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만 오늘 하루도 아마존에서 살아 낼 수 있습니

고 납작 엎드렸다.

 

녹색의 지옥, 아마존은 결코 적응하기 쉬운 환경이 아니었다.

적도의 강렬한 햇빛이 만드는 폭염도 지치지만

강우량이 많아 낮에는 80%, 저녁 에는 90%까지 올라가는 습도로 인해

몸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더구나 시간대별로 나타나서 온몸을 강타하는 독충은

정말이지 살인적인 고통을 가져다준다.

 

이른 아침 해가 뜨고 1시간 동안은 메룽이라는 벌레가 물어댄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귓가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괴롭히는데

물리면 몹시 가렵다.

 

1시간 후부터는 삐융이라는 벌레와 무뚜까가 물기 시작한다.

삐융은 까맣고 아주 작은 벌레로 물리면 붉은 반점과 함께 부어오른다.

 

무뚜까는 청바지같이 두꺼운 천이 아니면

옷을 뚫고 깊은 살을 문다. 물리면 많이 가렵고 큰 상처가 난다.

 

그런가 하면 풀밭에 기생하는 무꿍이라는 녀석은

신발을 타고 올라와 무릎이 접히는 부분과 사타구니 같은 부드러운 피부에

일주일간 기생한다.

 

이렇게 기생하면 붉은 반점이 생기고 가려움이 극심해서 고통스럽다.

해질 무렵엔 메룽이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여러 종류의 모기들이 극성을 부린다.

말라리아, 댕기열 등 갖가지 질병을 옮기는 것은, 바로 모기들이다.

 

아마존의 이 같은 환경을 경험한 미국인들은

아마존을 녹색의 지옥 Green Hell 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은 폭염과 폭우, 높은 습도, 무는 각종 벌레들은

하나님이 아마존을 보호하시는 방식이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이 이 같은 환경이 아니었다면

벌써 오래전에 훼손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존은 지금도 여전히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남아 있다.

 

분명히 아마존은 우리가 살기 힘든 환경을 갖고 있다.

가끔 아마존이 아닌 다른 곳을 여행하자면 더위로 땀을 흘리거나

독충들에 물려서 긁지 않고 하루가 수월하게 지나간다.

 

그럴 때 내가 이런 곳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하지만 수월한 하루를 지나면서

 

나는 오늘 주님을 몇 번이나 찾고 도움을 요청했는지헤아려 본다.

그제야 나는 깨닫는다.

아마존이 비록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에게는 바로 은혜의 장소구나.’

 

그래서 우리 홈페이지의 이름을

아마존 은혜의 강 선교회’(Grace River Amazon Ministries, GRAMIN)라고 붙였다.

 

아마존은 늘 새롭게 적응하는 곳이다.

환경에 결코 익숙해지지 않으므로 마음이 풀어지지 않는다.

그런 관계로 열심히 치열하게 살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신다.

 

주님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최고의 장소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축복하셨다.

 

브라질에 온지 근 1년 만에

아마존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원경 목사님의 사역지에서 그분을 도와 신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당시 그곳에 있던 손영국 전도사님과 함께 모터보트를 단 카누를 타고 다니며

목재를 주문하고 목수들이 학교 짓는 일을 관리하고 감독했다.

 

그리고 주일에는 선배 목사님이 세운 인디오 마을의 예배당을 찾아다니며

예배를 드렸다.

 

오전에는 이 교회, 오후에는 저 교회를 다니며 설교를 하고

성찬식과 세례식을 주관했다.

 

당시는 정글에서 벤 다량의 목재가 솔리모에스 강을 따라

외부로 유통되고 있었다.

그래서 강에는 유실된 목재가 떠다니곤 했는데

모터보트나 카누를 타고 가다 잘못해서 목재와 충돌하면 뒤집혀서

큰 사고를 당할 수 있었다.

 

어느 주일, 아이들과 함께 순회예배를 드리러 카누를 타고 가는데

허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달리는 모터보트가 강물을 떠다니는 통나무와 부딪쳐 뒤집혀 버린다면

아이들이 물속에 빠지리라. 나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고 그 아이들을 붙잡으리라.

만일 구하지 못한다면 그 아이들과 운명을 같이하게 될 것이다.”

 

아마존에서 한국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대개는 현지식을 먹었고, 한식은 가끔 밥을 지어 식으면 펄펄 날아가는

안남미 쌀밥에 멀건 된장국을 끓여 먹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자 김치도 다른 한국 음식도 잊어버렸다.

다만 몸이 아파서 식욕을 완전히 잃어버렸을 때 한국 음식이 간절하게 생각난.

 

어쩌다 김치를 먹을 때면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들 지훈이는 한창 성장하는 나이여서 밥을 먹고 나서는

엄마, 밥을 먹고 나면 왜 배가 더 고파하면서 빵을 먹곤 했다.

 

우리는 인디오 마을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뒤 그들이 대접하는 점심을 먹었는데

처음엔 곤충 등 이색적인 식재로를 대하는 것이 솔직히 좀 두려웠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내색할 수 없어 점심시간이 고통스러웠다.

 

생선이나 동물을 잡아서 훈제한 고기와 고추, 개미 양념장을 소재로

탕을 끓여서 먹는 원숭이 개미 양념탕, 악어 개미 양념탕,

생선 개미 양념탕은 더 힘들었다.

 

사냥당할 때 고통이 커서일까?

손을 꽉 쥐고 있는 원숭이가 접시에 나올 때나

원숭이 머리를 대접 받을 때도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형제들의 음식을 기쁘게 먹는 것이

내가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래서 힘들지만 먹었다.

 

특히 예배 후 서로 교제하며 마시는 마까세랴 주스는

막걸리 같은 색깔의 음료다. 붉은 포도주 빛깔의 주스도 대접을 받았다.

 

이 주스는 마시고 나면 이가 빨개져서 저항감이 컸는데,

지금은 아사이 주스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과거에 외국인 선교사들은 우리나라 그릇이 너무 더러워서

밥을 주면 가운데만 파먹었다는 기록을 보고

신학교 시절 그들을 몹시 비판했다.

 

하지만 막상 선교사가 되고 보니 나도 그들과 다를 게 없었다.

우리나라에 파송된 선교사들처럼 나 역시 인디오 형제들과

즐겁게 음식을 나누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여러 형제들의 전통 음식들이 아주 맛있다.

특히 훈제한 생선에 개미 양념장과 고추를 넣고 끓이는 탕은 얼마나 맛있는지

우리 가족이 모두 좋아하는 별미 요리다.

 

모든 음식마다 독특한 맛이 있는데,

각종 탕에 화링야 farinha 를 집어넣으면 국물 맛이 변하고 입맛이 돈다.

 

먹을 것이 없는데 못 먹을 음식은 없었다.

허 선교사와 나는 각오했다지만 아이들까지 내색하지 않고

그들이 준 음식을 받아먹은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견하고 감사하다.

 

언어 차이로 생긴 오해와 갈등

신학교가 개교하고 1년이 지나자 기혼자가 여러 명 입학했다.

그중 한 명이 부인과 아이들을 신학교에 데려오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기혼자를 위한 숙소는 따로 없었으므로 곤란해 하자,

그가 집터만 허락해 준다면 자신이 집을 짓고 살겠다고 했다.

 

그래서 목재를 내주며 동료 신학생들에게 그가 집 짓는 것을 도와주라고 권면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단 한 명도 그를 돕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허 선교사가 답답한 마음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친구가 혼자 집을 짓는데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들이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마음에 도울 생각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학생들이 마음이 없다는 말을 심장이 없다는 말로 오해해서

거세게 항의를 했다.

포어로 마음은 심장(coracao)을 일컬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그렇게까지 분노한 데는 뼈아픈 역사적 경험에 기인했다.

남미를 점령한 백인들이 인디오는 들판에 뛰어다니는 영혼 없는 짐승이다

좋은 인디오는 죽은 인디오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백인들의 멸시와 학대는 오랜 세월 인디오 부족들의 잠재의식 속에 분노를 키웠고,

그날 허 선교사가 말한 마음심장으로 오해한 이들은

오랜 역사적 감정을 터뜨린 것이다.

 

겨우 수습해 오해를 풀 수 있었지만 언어 장벽은 여러 곳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그들에게 사랑과 용서, 평화와 같은 개념을 이해시키기가 어려웠다.

 

누군가 진실한 사랑과 용서를 삶으로 보여 주어야 비로소 이해될 개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오해를 불러일으켰듯이,

우리 역시 그들의 언어를 우리 식으로 해석해서 오해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로 인해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용서를 구한다.

 

브라질 사람들은 외국인을 부를 때

그들의 이름보다 그들의 나라를 이름처럼 부른다.

 

이를테면 나를 꼬레아노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그들이 꼬레아노라고 하면 몹시 불쾌하게 여기는데

그들의 언어 습관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듯 선교 현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1기 사역 중에 있었던 일들

 

       

19932월 말 신촌교회 (파송교회) 오창학 목사님이 선교지를 방문하셨다.

일주일 동안 신학교에서 주변 인디오 마을 교회 지도자들

100여 명을 대상으로 집회를 인도해 주셨다.

 

시집간 딸이 오랜만에 친정아버지를 맞는 마음으로 우리는 목사님을 맞았다.

시간 시간이 아쉬웠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냈다.

 

우리가 드릴 말씀도, 목사님이 남기고 싶은 말씀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일주일 집회가 끝나 버려 목사님은 떠나야 했다.

 

열흘간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목사님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날엔 비가 내렸다.

공항으로 가는 길가에 수북이 떨어진 분홍색 점보 꽃이

이별의 아픔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비행기 탑승장 근처까지 따라가서

오래도록 떠나가는 목사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한 손에 우산을 쥐고 묵묵히 길을 가던 목사님이

불현듯 돌아서더니 우리에게 와서 양복 주머니에서 200달러를 꺼내

허 선교사의 손에 쥐어 주고는 다시 돌아섰다.

 

그러는 목사님도 우리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눈가가 촉촉해질 뿐이었다.

 

목사님은 우리를 자신이 못한 선교를 대신해 주는 사람으로 여겼다.

신촌교회 선교사로 입양되는 순간부터 평생을 선대해 준 고마운 분이다.

 

아마존 정글은 뱀의 천국

나는 어렸을 때 가끔 두 종류의 악몽을 꾸었다.

하나는 관에 든 시체를 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뱀을 보는 것이었다.

 

그런 내가 뱀이 많은, 그것도 큰 뱀이 많은 아마존에서 살게 된 것이다.

아마존에는 수십 종의 뱀이 서식한다.

공해가 없고 뱀을 잡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까닭에

아마존은 그야말로 뱀 천지라고 할 수 있다.

 

사람과 염소를 통째로 삼키는 아나콘다,

한국의 살모사처럼 알을 낳지 않고 새끼를 낳지만

그 새끼가 어미를 잡아먹는 독사도 있다.

 

나는 치명적인 독사에게 물려서 다리를 절단한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지지 못해 죽은 사람도 많았다.

 

나는 자주 정글을 혼자 걸었다.

정글이 시작되는 강변에 있는 신학교 본관에서 사택으로 가려면

300m의 정글을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내 몸엔 언제나 떼싸두라는 큰 칼이 있었다.

혹여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뱀이나 표범과 같은 야생동물과 싸우기 위해서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포에 떠는 겁쟁이를 위해

특별히 아마존의 모든 뱀을 숨겨 주셨다.

 

아마존에 들어가서 3년 동안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뱀은

이미 죽은 코로아 Coroa 라는 색깔이 현란한 독사가 유일했다.

 

평생을 괴롭히던 무좀이 낫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여름이 시작되는 6월부터 8월 말까지 발의 무좀으로 고생했다.

병원에 입원도 하고 갖가지 방법을 강구했지만 소용없었다.

 

1991년 상파울루에서 무좀이 발생했다.

우리가 공부하던 선교사 언어 학교에는 쏘냐 라는 중국인 한의사가 있었다.

그때 인연을 맺어 그녀와 우리 가족은 자주 왕래하며 지냈다.

 

우리가 상파울루로 휴가를 가면 쏘냐는 자기 집을 내주고

김치를 구해 와 먹여 주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늘 감사한 마음이다.

 

하루는 쏘냐가 무좀이 난 내 발에 침을 놓아 주더니

내게도 침을 놓는 자리를 알려 주었다.

 

이후로 나 혼자 침을 놓았는데,

놀랍게도 수십 년간 나를 괴롭히던 무좀이 사라졌다.

 

사실 아마존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했을 때

가장 염려되었던 것이 무좀이었다.

습도가 높은 아마존에서는 무좀이 더 극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쏘냐를 만나지 않았다면

무좀 때문에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시는 분이다.

우리의 약함을 당신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치료해 주신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를 그분에게로 인도하신다.

죄를 회개케 하고 죄로부터 돌아서게 하신다.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를 광야로 데려가서 당신의 참 사랑을 계시하시기도 하신다.

 

무엇이 우선순위인가?

하루는 한국 장신대 <3세계 지도자 과정>에서 1년 반 동안 같이 수학했던

현지인 다미방 산토스 목사님이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상파울루 동양선교교회 당회장 목사님이 결혼식 주례를 서기 위해

아마존에 온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12일 동안 목사님을 모시고 다니며

선교지를 보여 드리기로 했다.

 

마침 허 선교사가 여행 중이어서 집에는 수산나와 지훈이만 있었다.

그런데 수산나가 며칠 전부터 열이 나면서 심히 아팠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간염 같다고 했다.

 

다음 날이면 목사님을 모시고 선교지를 다녀야 하는데

아픈 딸을 두고 가자니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여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딸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혼자 심각하게 갈등하다가 결국 당회장 목사님과의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딸은 간염이 더 진행되어 결국 상파울루로 나가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딸에게 너무 미안하고 부끄럽다.

아무도 돌봐 줄 사람이 없는 줄 알면서도 약속을 지키러 집을 나선

무정한 아버지였던 것이다.

 

나는 허 선교사와 아이들이 온몸이 벌레에 물려 피와 진물로 범벅이 되어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볼 때도 일부러 외면했다.

 

가족의 고통을 통감하면 마음이 약해져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때 너무 고생이 많구나. 우리 함께 고통을 잘 견디자. 미안하다했으면

가족들이 얼마나 위로를 받았을까?

 

그때는 마음 약해지지 않으려고 사역에만 몰두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너무 후회가 된다.

 

당시 나는 영적인 소경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계백 장군처럼

아니 그보다 더 충성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가족의 고통은 돌아보지 않았다.

 

아마존 인디오 형제들의 아픔은 돌아보면서 가족의 아픔은 외면했다.

가족은 내가 돌봐야 할 약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란 말인가.

 

내가 그토록 악한 사람이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아이들이 장성해서 내 곁을 떠났고 아내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뒤였다.

 

우리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는 말이 있다.

소를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라는 말이다.

이미 소도 없는데 외양간을 고쳐서 무엇 하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