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NNCYQH9M5qg&feature=youtu.be
www.youtube.com/watch?v=BnkwevcAsO0
www.youtube.com/watch?v=kUYR8OU87Ho&feature=youtu.be
◈잘못된 분열과 참된 일치 고전15:1~4 스크랩
마틴 로이드 존스 <진리로 하나>에서 발췌
다음 강연은 1970년 11월 4일에 선더랜드에 있는 베데스다 채플에서 행해진 것입니다.
박사님은 이전에도, 예를들어 1966년의 센트럴 홀과 1968년의 리버풀에서
고린도전서의 메시지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는 지금 분리와 분파의 차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 본문을 사용한 것입니다 분리의 필요성을 강조할 때
그의 주된 요지는 BEC British Evangelical Council에 속한 사람들이
복음에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의견의 대립으로 인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데 있습니다
..............
또 다시 제게 영국 복음주의 현의회의 정기 집회에서 폐회사를 하도록 한 것은
큰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장께서 방금 말씀하신 대로
이 협의회가 지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을 주기 때문에
매우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제게 있어서 이것은 현재 복음주의적인 삶의 가장 격려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대단한 특권의식을 지니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자, 저는 오늘밤 처음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이
전에도 참석했었다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매우 놀랍고 고무적인 날을 지녔으며
우리가 실제로 자기 경험을 말하는 형제들의 말을 들은 오늘 오후
함께 가진 모임에서 특히 그러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정규적으로 이런 종류의 모임을 되풀이해야 한다고
이 협의회의 지도자들에게 감히 제안합니다.
저는 우리가 이론적으로 논의할 뿐만 아니라
경험도 공유하는 협의회에 대한 보다 낡은 개념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의 문제와 어려움 및
축복과 영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 쓰는 적절한 단어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잡한 일반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제의 문제에서 특별하고도 이례적인 안내를 구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로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혼돈의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이 회의가 개최되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혼돈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많은 것들이 있지만,
한 마디 말로 요약하자면, “혼돈”이란 말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40년 간 목회하며 설교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의 생활에서 이상한 것들을 본 적도 있지만,
지금 만연해있는 것같은 것같은 그런 혼돈은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복음주의 협의회에 속해있는 우리는 복음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의
혼란에 대해서는 조금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그들은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기 때문에 복음주의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영역에서도 혼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 사이에도 혼란이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 지상에 완벽한 교회가 있다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에서 그렇게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비춰보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쨌든 일반적으로 이런 혼란의 요소로부터
자유로운 교회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현재 교회가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교회의 혼란을 놀랍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특정한 때, 그리고 어떤 특정한 문제에 대해약산의
혼란을 겪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밤 이점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질문은 오늘밤 세상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일치된 복음주의적 메시지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것은 인류에게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것은 교회에 유일한 소망입니다.
사람들은 혼란, 아주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의 유명한 “묘약”은 그들을 치유하지 못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도 거짓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미혹당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재앙을 몰고오는 이 마약과 알코올의 진짜 의미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권위있는 진술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에 관한 성경적인 견해를 지닌 사람에게서
그런 진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복음주의자들에게서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 혼란이 없어야 하고 이런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일치된 목소리로 말해야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시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저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에서 발견해서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고린도 교회를 더욱 상기하게 되고
여러분에게 그것이 우리가 직면해 있는 상황과 얼마나 비슷한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쟁과 혼란으로 가득찬 교회였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여러가지 문제를 다루어야 했기 때문에 쓴
“다목적” 서신 중의 하나라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글로에의 집과 고린도에 있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곳의 분쟁과 어려움에 관해 말하는 편지와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문학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쓰기 위해 편지를 쓰지 았습니다.
그는 너무 바빴습니다. 그는 설교자요 복음전도자였으며 선생이요 여행자였습니다.
그는 편지를 쓸 때마다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썼던 것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이 비극적이리만치 혼란스러운 교회만큼
도움과 지도가 필요한 교회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요?
그가 실제로 말한 것은 그들의 모든 갈등이 한 가지 사실 때문이었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제 말에 형제 여러분께서도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본질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기본적인 갈등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들은 회심했습니다.
그들은 거듭났습니다.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혼란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의 본질에 관하여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분열과 당파와 분파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그러면 이 분열은 무엇 때문에 생겼을까요? 그 뒤에 있는 원리는 무엇이었습니까?
여러 면에서 매우 뛰어난 교회인 고린도 교회(사도 바울은 그들이 받은
은사에서는 그 어느 교회에도 뒤지지 않다고 말하며
그들 역시 그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가 어떻게 교회의 본질과 관련해서
이 혼란스런 상태로 빠져들어간 것일까요?
저는 우리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모든 분열과 당파는 그들이 잘못된 입장에 서 있고
그것 때문에 분열되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중심적인 신학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저는 그것이 오늘날 우리 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분파와 성경적인 분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예를들어 설명하고 분파와 성경적인 분리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실제적으로 말해서 이 질문은
“우리가 이 중에서 지지해서는 안되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약간 다르게 말해서 “우리의 입장에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반면에 우리 입장에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고린도의 모든 갈등은 이러한 여러 가지 점들 사이에 제대로 선을 긋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입장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됩니까?
여러분은 어떤 이유에서 분리되어야 합니까?
어떤 이유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까?
여러분이 본질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중요하지만 본질적이 아닌 것으로 간주합니까?
그 모든 갈등은 이런 구별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점을 보여주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고린도 교회가 잘못된
것을 지지하고 그것 때문에 분열되어 그런 문제 때문에
집단과 당파를 형성한 방식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맨 처음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저는 이 서신의 처음 14장이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이 해서는 안된 일을
지지하고 있는 방식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해설을 주로 다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 문제들을 다루고난 후에 바울은 15장 첫부분에서 이상의 모든 내용에서 돌이켜
“이제 너희가 어떤 입장에 있어야 할 것인지를 알고 싶다면, 여기에 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내의 잘못된 분열
그러면 부정적인 말로 시작해봅시다. 고린도 교회 내의 잘못된 분열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다음의 세 표제로 분류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육적인 문제로 다투며 그것 때문에 분리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적인 문제로 다투고, 당파를 이루고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파의 죄를 범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육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표현합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전 1:11).
무엇에 관한 말이었을까요?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설교자들, 그들의 특별한 지도자들을 지지하느라
분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당파를 형성했습니다.
그들은 다툴 뿐만 아니라 실제로 당파를 형성하고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사람 때문에 분열되는 것은 순전히 육적인 것입니다.
이런 일을 적용하기 위해 시간을 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 이런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프도다! 우리는 순전히 개성에 따라 형성된 교회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루기 힘든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
남보다 우월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의해 찢기고 분열된 교회를 보았습니다.
교리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사람들이 개성 때문에 분리되고 분열된다는 것은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과 같은 죄를 범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시험해봅시다.
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교회를 명명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사람에게 너무 많은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역시 잘못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복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은 거의 듣지 못하고 바르트나
불트만이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설교되고, 인용되고, 추종되는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젊은 목회자에 대해 제기된 고소의 죄를 범한 적이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한 숙녀가 교회 집회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이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지난 몇달 동안 강단에서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존 칼빈이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친구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을 전하거나
사람들을 옹호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육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것을 그렇게 다루고 그것을 조롱받아 마땅한 것으로 조롱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끼리만 싸운 것이 아니라 그가 6장에서 말하듯이
“세속 법정”으로 송사를 가져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문제를 놓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다투다니!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삶가운데 들어와서 교회의 삶을 혼란스럽게 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육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찬과 애찬 등에서
그들이 같은 죄를 범했음을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먹을 것이 많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먹을 것이 너무 적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마셨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마실 것이 모자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분열의 원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순전히 육적인 것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 요지는 사람들이 이런 일에 대해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을 입장을 취하는 것에 관한 예로써 맨처음에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순전히 육적인 문제들을 제거하기를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서신에서 발견되는 교회 분열 원인의 두번째 범주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이것을 “지성주의”라고 묘사합니다.
제가 “지성주의”라고 말한 것에 유념하십시오.
지식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지성주의는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여기 이 서신에 들어있습니다.
사람들은 같은 정도의 두뇌와 지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지식에 있어서 사람마다 각기 다릅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중등학교 진학 입학시험의 폐기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아는 것이 많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이러했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해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신, 이러한 차이가 분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장에서 곧장 이 문제를 다룹니다. 그는 어떤 사람들이
옹호하는 철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습니다.
지성주의는 복음의 위력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지적인 사람들은 자신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울은 8장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에 관한 이견들에 대해 자세히 다룹니다.
이 사람들이 이방인이었다면, 그들은 성전에 바쳐진 고기를 우상에게 바쳐진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여기고 그것을 먹는 것을
잘못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후 그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했습니까?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모두 똑같은 식으로 진실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보다 지적인 사람들, 보다 계몽된 사람들은 음식을 먹는 것에는
잘못이 없음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우상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고기들을 먹는 것을 잘못이라고 여기는 약한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상 고린도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지적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지식인들에게 화가 났습니다.
온 교회가 지적인 이해에 대해 분열이라는 이런 비극적인 상태에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저는 이것이 우리와 많은 상관이 있을까봐 염려됩니다.
그것은 수세기에 걸쳐 교회의 생활과 많은 관련이 있어왔습니다.
언제나 복음주의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스콜라 철학의 위험이 있습니다.
제 말은 자신들보다 지적인 면에서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교리와 지적인 이해의 중요성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형제들에 대해 “그들은 교리를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형제들을 멸시합니다.
오로지 거듭남에 대한 자신들의 공통된 경험이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지식의 양과 자신들의 지적인 이해와 분별력에 의존하는
집단과 분열이 있습니다.
함께 다른 면에서처럼 이런 면에서도 다양한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신 그들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시기와 질투로, 다른 한편으로는 우월감과 학식이 덜한 자들에 대한
멸시감으로 분파와 분열을 획책합니다.
그것이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분리의 큰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지식인과 지적인 이해를 옹호하며 이것을 중심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세째, 제가 “거짓 영성”이라고 묘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때문에 생겨난
분열과 분리가 있었습니다.
저는 12장과 13장 및 14장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장 첫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영적인 은사에 관하여는”이라는 뜻이며
12-14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사실상 어떻게 집단과 분파로 분열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이 말하자면 영적인 은사들 때문에 찢기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우리 앞에 그것을 자세히 제출하고 있습니다.
그는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라. 만일 발이 난 손이 아니므로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몸에 속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귀가 난 눈이 아니므로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래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는 걸까?”라고 말함으로써
이런 전체적인 태도가 얼머나 경멸스러운지를 보여줍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상태입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인 그들에게 주신 은사를 함께 즐거워하는 대신
그들은 그 은사들을 분열의 원인으로 삼았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은사들에 기반을 두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른 은사들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하는 것에 관한 질문이 최대의 관건이었습니다.
이 은사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도대체 그리스도인인지 의심스럽다고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심지어 자신들이 이런 혹은 다른 은사들을 지녔으므로 우월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은사를 덜 받은 사람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은사를 덜 받은” 가련한 사람들, 즉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멸시당하는 사람들은 더 놀라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옛날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까?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이 문제를 옹호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삼을 위험조차 없습니까?
자 그것이 고린도교회의 갈등의 세번째 큰 이유였으며 그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분열의 죄를 범한다고 비난할 때 “분열”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잊었으며 그들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특별한 지체임을 잊었습니다. 그들은 분열의 죄를 범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이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이 지지해야 할 것과
지지해서는 안될 것 사이의 구별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예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어야 해.” “그것은 아볼로여야 해.”
“너는 이런 지식을 가져야 해.” “너는 방언을 해야 해.”
“너는 이런 저런 은사를 지녀야 해.”
자 이 놀라운 서신에는 분열시켜서는 안될 때 분열시키고,
나뉘어서는 안될 때 나뉘며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키는 사람들에 관한 놀라운 실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다루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 내의 갈등을 야기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지겹지만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아, 너희가 이런 육적인 문제들과,
지성주의와 이런 거짓된 영성 개념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인가!”
그는 1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들으라, 너희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내가 말하리라.” 저는 이 장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초조한 어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늘 잘못된 것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옳은 것들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올바른 것이란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점들을 상기시켜 볼까 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 밖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습니다.
그들이 텔레비전에서 보고 라디오에서 듣고 신문에서 읽는 것에 비추어볼 때
어떻게 그리스도교에 대해 참된 인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리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과 내가 함께 그들에게 이것을 말하지 않고
우리가 고집해서는 안되는 것을 고집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그들은 여전히 어둠과 죄의 무지 가운데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수해야 할 것들
자, 바울은 우리가 고집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 때문에 분리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서야 할 곳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우리가 적어도 1년에 한번은 이것들을 상기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그것에 대해 기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중도에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1. 성경
우리가 지지해야 할 첫번째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성경에 대해 언급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는 왜 그말을 덧붙였을까요? 왜 그는 그냥
“내가 받은 것을 먼저 전하였노니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왜 그가 “성경대로”라는 말을 덧붙인 걸까요?
그리고 다시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말합니다.
왜 이 말을 포함시킨 걸까요? 왜 잉크와 호흡을 낭비하는 걸까요?
그것이 중요하고 기본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확고히 서지 않으면
우리의 전체적인 위치가 흔들릴 뿐만 아니라 붕괴되고 맙니다.
그는 “성경대로”라는 말을 무슨 뜻으로 사용한 걸까요?
그는 처음 4절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온전히 성경만,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침 받거나 유사 가톨릭교도들이 이 말을 교묘하게
사용하는 방법에 의해 가르침 받은 어떤 모양이나 형태의 전통이 아니라,
온전히 성경만 붙잡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성경을 붙잡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계시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계시에 의해 주어졌다고 말하기 때문에 성경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는 이 말을 얼마나 자주 사용합니까? 여기에 커다란 구분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20세기에 시작되었으며 심지어 그 이전에도 소위 “고등비평”이라고 불리던 경향입니다.
그 토대가 무엇입니까? 그 토대는 여러분이 철학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어린애처럼 성경에 복종하지 말고 진리추구와 탐구에 대해 말하라.
너희는 20세기 사람들이 새로운 지식을 획득했기 때문에 과거에 믿었던
것을 믿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중대한 질문에 매달리고 있다.
여기에 다시 싸워야 할 큰 싸움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철학이나
탐구나 탐색에 두어서는 안 된다.”
사실 바울의 이야기를 보면 그가 그런 입장을 취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고린도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의 연구와 탐구, 조사와 질문의 결과였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넘어져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성과 논리의 과정 끝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매맞고 쓰러져야 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아야 했습니다. 계시!
그리고 그는 여기서 뿐만이 아니라 도처에서 그들에게 전한 것은 자신이
받은 것임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봅시다.
그는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본 입장입니다. 우리는 최근의 연구나 최근의 조사 결과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20세기의 사변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계시된 것이며 계시 없이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영감의 요소가 등장합니다. 그는 2장에서 이미 그들이
“성령의 가르치신 말”로 계시된 것들을 선언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이 주신 일반적인 생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표현된 말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성경에 대한 우리의 견해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 그것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은 개인적인 해석에 의해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에 감동되어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계시, 그리고 심지어 그것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말도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대한 우리의 견해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우리는 그 입장을 고수합니다.
수정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에 무엇을 덧붙여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최근의 역사와 교회가 던진 빛 때문에 성경의 말씀 배후에 있는 것들,
혹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지금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 수 있음을 거절합니다.
성경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간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사도와 기자들이 받은 것처럼 받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결론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성경이 “계시”이고 “영감”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능력을 주어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이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고 영원 불변합니다.
따라서 오랜 세월을 흐르는 동안 성경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가 20세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성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조금이라도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승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번에 영원히 주어진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1세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권위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성경이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최종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또 한 마디 해야겠습니다.
그것은 복음주의자로서는 새로운 내용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수락한다는 말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전체(신약과 구약 전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해 봅시다.
우리는 성경의 교리뿐만 아니라 성경의 역사도 수락해야 합니다.
성경은 오직 종교적인 진리에만 관심이 있다고 가르치는
몇몇 복음주의자들이 제안하는 새로운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의 최고의 권위를 인정한다.” 거기에 덧붙여 그들은
“성경은 오로지 종교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성경은 구원에 관한 진리만을 우리에게 준다.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 성경을 집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이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교묘한 변화를 알겠습니까? 우리에게 성경을 구원 문제,
영혼과 도덕적인 행위의 양육에 있어서 완전한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 여기지만,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새로운 가르침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것들에 관한 지식을 얻고 싶으면
우리는 자연으로 가서 현대 과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적인 부분과, 천지창조에 관한 성경의 기사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입장은 심각합니다.
저는 고린도전서 15장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아담에 관해 말합니다.
아담을 한 개인이자 최초의 인간으로 믿지 않는 복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창세기가 시이며 상징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가 신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교리적인 가르침뿐만 아니라 역사에 입각하여
논리를 전개해나가고 있습니다. 그가 아담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와 그 이전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기에 들어있는 세상의 기원과
창조 및 최초의 인간 아담에 관한 기사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구별 짓는 것이 복음에서 떠나는 것,
우리를 우리의 모든 권위로부터 떼어내고 우리 가운데에서 자유주의와
심지어 로마 가톨릭으로 미끌어져 들어가기 시작하는 떠남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이 중요한 원리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구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와 성경의 역사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새 창조와 마지막 영광에 관한 기사뿐만 아니라 창조기사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이 본질적인 것의 명단에서 맨앞에 둔 것이 이것, 즉 성경입니다.
“성경대로”
▲2. 타락
바울이 말하는 두번째 위대한 말은 복음주의자들로서
우리가 언제나 타락의 교리와 구원의 필요성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왜 구원을 받아야 할까요?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일찍이 이 세상에 오셔야 했을까요?
여러분은 그 대답을 아십니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아담-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성경대로”) 여러분이 역사를 부인한다면,
복음을 갖지 못합니다.
모든 논증은 아담 안에서 일어난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것 사이의
이런 병행과 양자 사이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대조에도 의존합니다.
이 세상은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텔레비전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다루는 토론을 본 적이 있습니다.
“왜 이 세상에 고통이 있을까?” 아무도 타락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죄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의 메시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왜 이 세상은 오늘날처럼 되었을까요? 오직 한 가지 대답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완벽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보시고 좋다고 여기셨습니다.
당면한 문제들을 야기시킨 것은 진화의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고 그속에 완벽한 인간을 두셨으며
그와 온 피조물을 바라보시고 좋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사람이 유혹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얼굴에 침뱉고 제멋대로의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서 인간이 타락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현대 세계에 줄 메시지가 없습니다.
아담과 역사성, 창조와 타락, “성경대로”
이 서신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다른 말이 있다고 말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와 심판과 멸망과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전하지 않는다면, 누가 전하겠습니까?
이것이 사도 바울의 설교 내용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그가 그들에게 가장 먼저 전했던 것입니다. “맨처음에”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유식한 주석가들 사이에 논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연대순에서 처음이라는 말일까요?
아니면 중요성에 있어서 처음이라는 말일까요? 저는 둘 다라고 믿습니다.
그는 맨처음에 와야 할 것들을 맨 앞에 둡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고린도 교인들은 사람과 은사,
그리고 이런저런 것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말합니다. “여기를 보라 먼저 올 것은 이것이니라”
그리고 여러분과 제가 이것들을 맨 앞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복음주의자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타락, 죄된 인간, 하나님의 진노 아래있는 인간,
그리고 파멸에 직면한 인간, 죄가운데 죽는다면, 죽는 인간을 맨앞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 즉 타락과 그 결과가 우리의 설교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이 진리를 믿고 따라서 그것을 전해야 하는 것은 복음전도자로서의 우리밖에 없습니다.
▲3. 하나님의 구속 계획
그러나 이제 서둘러야겠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 계획을 전개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물론 “성경대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는 이 문구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주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가 의미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즉, 여기에 고뇌와 고통에 찬 혼란스런 세상이 있습니다.
그것에 어떤 희망과 어떤 메시지가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진실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세상이며
하나님은 이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더 나아가겠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도 이 세상의 구속을 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말합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우리는 비밀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 심지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에게 영광을 가져오게 하신 감추인 지혜에 대해 말한다.”
“성경대로”-이것은 나중에 덧붙인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전체의 본질적인 메시지입니다.
이 완전한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성경에 계시하신 바에 따릅니다.
그는 성경 어디에서 그것을 계시했습니까? 다시 역사로 돌아가봅시다.
성경 어디에 첫번째 구속 약속이 있습니까? 창세기 3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아담이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행해졌으며
그의 아내의 이름은 하와였습니다.
“성경대로” 그 남녀는 죄를 범했으며 죄를 자각하고 부끄러운 나머지
그들은 가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저녁 시원할 때 내려오셔서 정원을 거니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어리석은 바보는 죄와 수치 가운데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리석음의 결과와 그에 뒤이은
고난의 결과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담의 타락 때문에 오늘밤 이 나라에서 무법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의문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역협정에 속해있는 사람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지 않는 방법과 아담의 타락 외에
왜 아이들이 부모 말씀에 순종하려 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개인적인 논란을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그 이후부터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죄와 죄와 수치 가운데 있는 아담과 하와를 바라보시고
그들에게 첫번째 구속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갈등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그는 발꿈치만 상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시겠지만
사단은 파멸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내려오셔서 그들에게 여자의 후손(즉 남자없이,
동정녀 탄생)이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온다고 말씀하신 구약 성경의 기사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경대로”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담과 하와, 그리고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거부한다면, 여러분이 성경의 교훈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에 대한 신앙을 거절한다면,
여러분은 결국 구속에 관한 성경적인 교리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의 이 위대한 장뿐만 아니라
로마서 5장을 이해하는 데에도 열쇠가 됩니다.
이제 구약성경 전체를 개관해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죽으신 것일까요?
가인과 아벨-왜 한 사람의 제물이 다른 사람의 제물보다 더 나았을까요?
레위기에서 이 모든 일-번제와 희생에 관한 이 모든 것은 왜 있는 걸까요?
저는 그런 것을 읽으려고하지 않는 피상적인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은 우리와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왜 상관이 없을까요?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명하시고 그것을 지시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러셨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약속을 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장차 임할 하나의 완벽한 제사의 예시입니다.
여러분이 레위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저는 고린도의 지식인들과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성경이 취하는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모든 번제와 희생, 모든 그림자와 예표-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고후 1:20).
그 약속들은 모두 그를 가리키고 있으며 그는 그 모든 것을 일일이 성취했습니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성경에 따른 것입니다.
▲4. 주님의 인격
이제 우리는 베들레헴의 아기이자 목수요 30세의 나이에 설교하기 시작한
젊은이인 주님의 인격에 관한 위대한 핵심 진리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는 누구인가요? 세례 요한은 두 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질문에 대해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매일 제공하는 어린 양들이 아니고,
황소와 염소의 피와 어린 암소의 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어린 양입니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예수는 누구인가요? 바울은 이것을 핵심으로 삼습니다.
그들 모두 전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예수와 부활입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권능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은 “첫사람은 땅에 속하는 땅의 사람이며
두번째 사람은 하늘에서 온 주님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장하고 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다음에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한 것을 강조할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받은 사람 예수, 곧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무엇을 전했습니까?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수님에 관해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의 가르침이었습니까? 그의 모범이었습니까?
평화주의자로서의 그의 죽음이었습니까?
여러분은 그가 한 말을 알고 있습니까?
그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삶을 살고, 산상수훈을 주시고
우리에게 이 놀라운 모범과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의 본을 주셨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어나서 그를 따르고 모방하는 것이다”고 말합니까?
마치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을 얻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아니,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그의 삶과 가르침은 중요하며 그래서 우리에게 4복음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을 때,
그 속에서 중심적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출생에서 그의 죽음까지 갔습니다.
왜일까요? 가르침이나 모범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제외한 구원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음과 매장과 영광스런 부활을 가려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의 전체적인 요지는
부활이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15장은 매우 실제적인 장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향이 그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다거나 다시 포장되었다고 그들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는 몸의, 문자 그대로의 육체적인 부활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몸이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악마가 승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몸과 영혼과 정신으로 지음받았고 완벽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 세 가지 측면에서 타락한 것입니다.
저는 단지 영적인 의미에서만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내 몸도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은 내 겸손의 몸입니다.
그리고 내 몸이 구속받지 못하고 회복되지 못한다면,
악마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안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문자 그대로의 육체적인 부활을 전하고
우리는 비록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보여졌습니다.
증인이 있었고 그는 여러분에게 그 내용을 전해줍니다.
육체적인 요소가 핵심이고 중요하지 않다면,
왜 그가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걸까요?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이니.”
이것은 첫번째 것, 중심적인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알리겠다.”
그는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매장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라는 포스터를 붙이면서 돌아다니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대속에 대해 명심하십시오. 대속이란 복음적인 명제입니다.
“…을 대신해서”라는 말은 형벌적인 대리를 표시합니다.
“그는 나무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내 죄를 담당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우리 모두의 허물을 지우셨다.”
이사야는 성경에서 그 말을 했고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죄를 알지 못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해서 죄로 삼으셨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고대 역사에 근거한 완전한 메시지의
이 위대한 사실들을 전했습니다. 그는 사실을 진술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에 의미도 부여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복음주의적인 설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 장에서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궁극적인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개인적인 구원과 우리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죄의 권세와 죄의식으로부터 구원얻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화(죄의 더러움으로부터의 점진적인 구원)도 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복받은 소망을 기대합니다.
다음과 같은 놀라운 정점으로 제시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5-26).
오늘날 이 악한 옛 세상에서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거룩한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그곳으로 돌아가 심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온 우주의 재판관이시며 모든 적들, 즉 악마와 그의 추종자들과 악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죄가운데 죽은 모든 사람들을
판결하고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그들은 형벌을 받게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온 우주를 죄의 모든 잔재로부터 깨끗케하실 것이며
아버지께 회복되어 완전해진 우주를 돌리시고
하나님께서 만유 안에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속, 즉 우리가 전하는 구속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구속이기도하며
죄의 모든 흔적들과 영향력은 영원히 사라지고 멸하고 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들이 여러분이 지지해야하며 결코 타협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여러분이 그것을 수락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구별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 일을 할 것입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자세히 말할 시간은 없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속지 말아라. 악한 자와의 교통은 선한 방식을 타락시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악한 회사를 경영한다면, 여러분 자신이 악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행동과 행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신앙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먹고 마시고 결혼하자. 내일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악한 삶을 사는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면,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면, 이 진리의 중요한 본질적인 요소들을 부인하는
사람들과 뒤섞이는 것은 얼마나 더 위험한 일이겠습니까!
오늘날 환경과 바다와 강의 오염문제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지요!
하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훨씬더 위험한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오염, 영혼의 오염, 정신의 오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더러운 교리와 뒤섞여 있다면,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에서 병들고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악한 자와의 교통은 선한 방식을 타락시킨다.”
바울은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자기 위치를 고수할 수 있을까요? 악한 자와의 교통을 피하십시오.
여러분은 그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본질적인 진리를 거절하는 사람에게 행운을 빌지 말고,
그런 자를 집 안으로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그밖에 여러분이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는 다음 장에서 우리에게 “깨어 믿음에 굳게 서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깨어있습니까? 여러분은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교묘한
세력을 알고 있습니까?
그들은 텔레비전에서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몇년 전에 텔레비전으로 교황 요한 23세를 본 몇몇 복음주의자들에게 말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그가 매우 멋진 노인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감명받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가 그토록 멋지게 보이기 때문에 그의 교리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해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깨십시오! 우리 주님은 이 명령을 남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깨어 믿음에 굳게 서라”고 말합니다.
다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마십시오. 믿음 안에 굳게 서십시오.
남자답게 강건해지십시오. 여러분에게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교묘하게 박해당하고 비웃음당하고, 조롱당하고 공격당할 것입니다.
남자답게 강건해지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십시오.
한편 이것은 복음주의자로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도 바울의 명단에 만족합니다. 이것은 나의 명단이 아니라
그의 명단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명단이 사도들의 명단보다 대체로 더 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분열을 야기시키는 것들을 덧붙이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십시오.
이것은 “첫번째” 것,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차이점들
그러면 우리가 복음주의자로서 구별되는 것들은 어떤가요?
저는 사도 바울이 제시한 대답을 여러분에게 알려줄 수 있습니다.
그의 대답은 8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
다시 귀를 기울여봅시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고전 8:11).
어느 특별한 교리에 대해 여기 여러분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할 계획입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제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내 형제임을 확신한다면, 전 그를 참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저는 그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가 같은 혈통, 같은 정신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성령에 의해 같은 가족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런 사람이 내 형제입니다.
저는 그의 지적 능력이 저보다 못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로부터 분리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를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그를 참고 견딜 뿐만 아니라
저보다 더 지적인 사람에게 주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에게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이해를 잘 못하는 형제가 있다면
여러분은 그를 쫓아내겠습니까? 여러분은 그와 이야기하기를 거절합니까?
여러분은 그와 협력하기를 거절합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주의적인 사람들이여, 형제애가 우선합니다!
그것이 지적인 이해를 능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악하게 분열되었던 것은
그들이 그것을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내 형제라면,
그도 나처럼 다시 태어났다면, 나는 그와 분리되기를 거부해야 합니다.
저는 그가 매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종종 그렇게 생각해왔으며 우리는 종종 서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만,
저는 그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로부터 분열되거나 그를 쫓나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저보다 지식이 부족하다면, 저는 그를 가르치고 그를 교육하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제 형제가 아닌 사람이 거듭날 때까지 제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저는 그에게 전할 한 가지 것만 갖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죄인이며 그가 회개하지 않으면
영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형제에게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 첫번째 규범입니다.
제 두번째 원리는 사도 바울이 다음에 제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그들이 양심적인 이유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양심에 순종해야 해.
당신은 내게 예언이나, 세례나 거룩함 등등의 문제들에 있어서
나와 일치하지 않는 이런 견해들을 용납하라고 요구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내게 양심의 문제다.”
여러분도 그런 말을 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고린도 교인과 같습니다.
그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말하고 있던 것이 바로 이것 “내 양심”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양심은 너희 소유가 아니며 다른 사람의 소유도 아니라”
고 말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난 이 고기를 먹을 권리를 가졌다. 나는 이것을 알기에 충분히 깨어있지만,
고기가 내 형제를 화나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화나게 하지 않기 위해
이 세상이 있는 동안 살을 먹지 않을 것이다.”고 말합니다.
복음주의 친구 여러분, 나는 내 목회적인 삶 대부분을 교리와 이해의
중요성을 위해 싸워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교리에 대한 이해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약한 형제를 화나게 하는 원인으로 삼고자 한다면,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양심을 앞세우고 그의 양심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아주 비성경적이며 비영적이고 비기독교적입니다.
형제 여러분, 조심합시다. 우리가 중심에 놓고 있는 테스트는
우리 주님과의 복받은 관계에 대한 테스트입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가족은 이상한 혼합체이지만 우리는 가족,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똑같은 삶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본성을 지닌 자들입니다. 우리는 위에서부터,
성령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갈 것입니다.
함께 거기로 행진하고 서로의 짐을 짊어져서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합시다.
“양심은 당신 자신의 것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기도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도 바울이 중심에 놓은 것들을 중심에 놓읍시다.
흔들리지 않고, 수정이나 절충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 위에 굳게 서십시오.
죽기까지 그 위에 서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분열의 죄를 짓게 되거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사랑하는 형제를 화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여러분이 붙잡고 있는 것에 대해 신중을 기하십시오.
여러분이 그가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인내하면서
조용히 기도하는 자세로 그를 가르치고 그를 도우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양심을 소중히 여기고
늘 그것에 순종하려고 한다면, 그도 양심을 지녔으며
그의 양심을 화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서로 사랑합시다. 서로 견디고 중심적인 것, 첫번째 것을 담대히,
용감하게 그리고 흔들림없이 함께 붙잡으십시다.
여러분, 제가 보기에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사도 바울의 명령이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마땅히 지녀야 하는 것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사람들이므로
우리가 영원한 영광에 함께 동참할 것으로 기대하는 분리된 형제들에
대항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진리로 하나-마틴 로이드 존즈의 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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