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출처
- 『오스왈드 챔버스의 산상수훈』 중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산상수훈의 이 말씀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우리는 가난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가난함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영적 전방에 도착한 것이다.
산상수훈을 처음 읽을 때는 그 내용이 매우 간단하고 평이하며
별로 깜짝 놀랄 만한 주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거부감 없이 그 내용들을 우리의 무의식 영역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 말씀들은 무의식 영역 속에서 터질 수 있는 영적인 폭약들이다.
성령께서는 필요한 상황이 되면 다시 그 말씀들을 우리 의식의 영역으로 옮겨놓으시는데,
그때, 우리는 그 말씀들이 얼마나 엄청난 내용들인지 깨닫게 된다.
그것은 성령의 폭약을 담고 있어서 우리 삶의 상황이
이 폭약을 필요로 할 경우 영적인 폭탄처럼 터진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개념들을 터뜨리고 무너뜨려 우리 삶에 대변혁을 일으키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진리가 마음속 의식의 영역으로 옮겨졌을 때
우리가 그 빛에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이다.
우리는 두 세계에서 산다.
우리의 감각으로 접하는 상식의 세계와
믿음으로 접하는 계시의 세계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정확하게 이 두 세계에 잘 어울리며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의 표현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계시의 세계와
상식의 세계가 하나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상식의 세계에서 필요한 기능은 지적 호기심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계시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지적 호기심은 배제되고 의지적인 순종이 가장 중요하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뜻을 행하려 하면… 알리라”(요 7:17)
이 말씀은 우리가 태어나야만 생명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구원을 받아야만 구속을 이해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에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전 우주적인 계시이지만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현실적 actual’이라는 것은 우리의 감각으로 접하는 것들을 뜻한다.
‘실제적 real’이라는 것은 우리의 감각으로 접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딘가에 항상 있는 것이다.
광신자들은 보이지 않는 실제만을 위해 보이는 현실을 무시한다.
유물론자(영적, 내세를 믿지 않는 자)들은
보이는 현실만 보고 보이지 않는 실제를 무시한다.
이 땅을 걸으셨던 분 중에 유일하게 완전한 조화로움을 가지셨던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 현실과 실제는 하나였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거듭날 때 우리는
실제 세계의 빛 가운데서 현실 세계를 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기도가 현실을 바꾼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해 기도는 ‘현실’을 바꾸기보다
현실을 바라보는 ‘사람’을 바꾼다.
산상수훈을 통해 주님께서는 현실과 실제를 함께 다루신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에게 원수가 없을 때, 우리를 저주하는 자도 없고
모욕하는 자도 없을 때는 이 말씀들을 받아들이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당신을 비방하고 괴롭히며
나아가 계획적으로 망하게 하려고 할 때,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당신은 순종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내면을 재창조하지 않으시면
주님의 가르치심은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우롱이 될 것이며,
산상수훈은 단지 이상에 불과할 것이다.
산상수훈이 우리를 절망으로 찢어놓는다면,
이는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의도한 바이다.
곧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없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할 수 없으며
산상수훈에서 계시된 그 기준의 근처도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주님의 성향을 받을 준비가 될 것이다.
주님의 성향을 받게 되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우리에게 심술궂게 행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되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을 선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명령들은 일반인들에게는 완전히 불가능한 것들이다.
물론 잠시 억지로 지켜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성령 하나님에 의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온전한 의미에서 이 명령을 절대로 지킬 수 없다.
당신이 당신의 원수를 사랑한다면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엄청난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고,
당신을 보는 모든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이 찍혀야 하고
하나님께서 쓰신 편지로 사람들에게 읽혀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선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자연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거듭났다는 증거는
우리가 아주 시끄럽고 복잡하고 억울한 일들을 접하게 되었을 때
그럼에도 그 모든 중심에서 조금도 요동 없이
온전한 평강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초자연적인 평강은 초자연적인 선행을 부른다.
몰론 이것은 전에는 우리에게 없었던 것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능력이다.
- 『오스왈드 챔버스의 산상수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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