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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 / 필립 얀시

LNCK 2018. 10. 18. 14:38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                요14:20      2014.10.14. 來韓 설교 정리

 

필립 얀시 

      

제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제 부모님은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로 떠날 준비를 하시면서

수 천 명이 기도로 재정으로 후원해 줄 것까지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제 아버지가 아팠습니다.

저는 그 때 한 살이라서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에이즈나 에볼라가 가장 무서운 질병이지만

1950년대 가장 무서운 질병은 에이즈가 아니라 폴리오(소아마비) 였습니다.

 

단 두 주 만에 24세의 건장한 젊은이였던 제 아버지는

몸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비참한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병 상태가 너무 심해서 호흡도 스스로 할 수 없어서

기계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했던 사람들은,

선교사로 나가려던 사람이 이렇게 고통 받고

죽을 병에 걸린 것은 절대 하나님의 뜻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호흡 기계를 몸에서 떼 냈습니다.

 

그 후 일주일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일평생 저는, 그 사건이

제 어머니와 제게 영향을 끼치고, 그림자로 늘 따라다니며 드리웠습니다.

 

나중에 커서 저는 저널리스트가 되었죠

그러면서 리더스 다이제스트 라는 잡지에서 실상의 드라마라는 시리즈를 썼습니다.

대개는 극적인 이야기를 씁니다. 곰이나 악어에게 공격을 받는다든지

이러한 실제 이야기를 다룬 시리즈였습니다.

 

그때 제가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는데,

그런 극적으로 살아남게 된 경험에서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그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우리 교회 성도들이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자기는 병원에서 수많은 튜브와 장치를 의존해서

그저 나으려고 힘들게 누워있는데

 

성도들은 와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자기들의 생각을 피력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네가 뭔가 잘못했으니까 이런 일이 일어났겠지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것은 마귀의 역사다.

악한 권세의 공격이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아니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므로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고통을 네가 어떻게 견뎌내는지 다른 사람에게 귀감이 되기 위해서

특별히 감당할 수 있는 네게 이런 고난을 주신 것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소원은

나는 그저 빨리 낫고 싶은데,

방문한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더 어렵게 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인터뷰 하면서 제가 그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이라면 그런 환자들에게 어떻게 얘기해 주겠습니까?’

 

저는 답을 몰라서 물은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제가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를 때

저는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왜냐면 필요한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연구하고

성경을 보면서 고민하다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제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은 고통 받는 자를 감싸 안으십니다

 

2012년에 제가 인생의 고통과 그 해결을 주제로 연구하기 위해

방문했던 세 곳이 있었습니다.

 

전혀 다른 장소였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각자 제가 깨달은 것이 있어서

여러분과 나누기 원합니다.

 

처음에 제가 방문한 곳은 쓰나미(2011)가 있었던 일본이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10층 건물높이 같은 큰 파도가 덮쳤다고 합니다.

 

기차, 자동차, 차량, 비행기가 장난감처럼 쓸려 나갔습니다.

교회가 있었던 곳을 방문했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고 평지가 되어있었습니다.

교회 뒤편의 작은 동산 수풀에 그 나무들도 나 휩쓸려 나가버렸습니다.

 

그곳을 저희가 일주일간 방문했는데

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큰 배 한 척이 4층 병원 옥상에 놓여져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파도가 그 큰 배를 병원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죠.

 

그런데 희망적인 것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기 삶의 터전, 직장도 내려놓고

돕기 위해 그 자리에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백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희생되었던 초등학교를 방문해 보았습니다.

아직 물이 찼던 흔적들이 벽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사실 일본이 쓰나미에 대한 경험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큰 쓰나미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쓰나미 파도를 처음 봤을 때, 교사들은 얼마나 높은지를 깨닫고

급하게 아이들을 교실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하지만 꼭대기까지 미처 올라가지 못했던

계단에 있었던 많은 아이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쓰나미 1년 후 그 학교에 체육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일본인들은 꼼꼼해서 쓰나미의 모든 잔재들을 가지런히 체육관 바닥에

박스에 담아 정리해 두었습니다.

 

1년 후이지만 여전히 그 박스 안을 뒤지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매일 거기에 와서 자기 딸에 대한 추억의 조각을 찾기 위해

한 박스씩 열어보며 뒤졌습니다. 공책, 도시락, 인형, 뭐 하나라도

딸의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간절히 날마다 찾았습니다.

 

저는 그 어머니를 보면서

아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은 우리 인간의 모습은 저렇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얀시는, 그 엄마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내가 딸을 잃었지만 집에 딸이 하나 더 있으니까 괜찮지 뭐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었을 때는

우리 기억속에 그 사람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땅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우리가 속상하고 가슴아프고 안타깝다면 하나님은 오죽하실까 생각 했습니다.

 

이 땅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실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기 친한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눈물흘리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은 항상, 고난 받는 고통 받는 자의 편에 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런 저런 이유로 벌을 주신다고 속단하기 쉽지만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항상 예수님은 희망과 치유와 감싸 안으심으로

약한 자들, 고통 받는 자들의 편에 서셨습니다.

 

저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힘들 때, 정말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라고 제가 물었습니다.

옥스퍼드의 교수, 철학자, 무슨 박사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은 우리 할머니 라고 대답하시고

그 분이 제 곁에 오래 함께 해 주셨습니다.

제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옆에서 뜨개질도 하시고

꼭 대화를 많이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제 옆에서

자잘하게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욥 이야기를 기억했습니다.

사실 욥도 누구못지 않게 많은 고난을 겪었죠.

그 친구 세 명은 욥의 위로자 Job’s comforter’라고 우리가 얘기하지만

사실 별로 위로는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7일 밤낮을 아무 말 없이 욥과 함께 보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생겨났습니다.

 

많은 경우에 나는 견딜만 했는데 성도들이 와서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부터

더욱 고통스러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옆에서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을 통해 하나님이 이 고통을 어떻게 여기시는지 몸소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 받는 자의 편에 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치유받기 원하시고 온전해지기 원하십니다.

 

 

2. 고난 극복에는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일본을 방문한 후에 또 제가 사라예보에 방문했습니다.

 

너무나 끔찍한 내전이 있었고,  *1991~2001

이제는 유고슬라비아가 7개 나라로 나누어졌습니다.

그 중에 사라예보가 가장 끔찍한 시가전이 있었던 곳이었죠.

그 도시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요.

 

그 산속에서 저격수들이 하루 종일 지나는 시민들에게 총질을 했습니다.

사실 시리아, 이라크에서 지금 우리가 듣는 사정과 비슷한 일이, 그때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4년 동안이나 그 도시는 전기나, 연료를 공급받지 못했습니다.

음식과 물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 시기를 견뎌냈던 사람들을 제가 만나서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까?’

 

그들의 입에서 공통적으로 나왔던 말은 공동체였습니다.

혼자서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힘들 때는 주변에 있는 주변에 있는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폭탄이 떨어져서 14명의 사상자가 났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 정장에 모자까지 쓴 신사분이 와서

폭탄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박스에서 첼로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그 첼로를 꺼내서 거기서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전 날 폭탄이 거기서 폭발했기 때문에 두려워서

그 자리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는 않았습니다.

 

다음 날 같은 시간에, 그 신사는 같은 장소에서

첼로로 또 컨서트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14일 동안 그 신사는 같은 일을 반복했습니다.

희생되었던 14명을 기리면서 한 컨서트 였습니다.

이 연주를 통해 도시 전체에 사기가 올라갔습니다.

14일째가 되었을 때는, 주변에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또 거기서 어떤 여성 분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이었는데,

그 전쟁 와중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를 감쌀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근처 산에 나무를 다 잘라서 땔감은 이미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대로 물려받았던 집안가구들도, 이미 다 뽀개서 땔감으로 써서 없었습니다.

벽의 창틀도 다 떼서 이미 장작으로 썼습니다.

 

그러던 중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는데요.

어느 날 대문에 종이 울렸습니다.

 

이웃이 뭔지 모르지만 흙으로 쌓인 그 무엇을 제게 가져왔습니다.

흙을 털어내고 보니 그 이웃이 가져온 것은

어디선가 깊은 뿌리를 찾아내서, 그 뿌리를 파서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라며 땔감으로 선물로 주었습니다.

 

제게 그보다 더 의미있는 선물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사실 태울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나무뿌리를 제 거실에 전시하면서

공동체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힘들었던 때에

사실은 이웃, 공동체와 하나 됨을 통해서

그만큼 따뜻함을 느꼈다고 얘기합니다.

 

유엔으로부터 지원 받았던 물자를 통해서 매일 먹는 음식은 똑같았습니다.

밥이나 국수를 조금씩 먹는 정도였습니다.

맛있는 반찬은 거의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누가 파프리카 조금 구해와서 위에 뿌려먹는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록색이 뿌려진 국수나 밥이 있을 때는 주변 사람들을 다 초대해서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여러분 중에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분이 있다면

절대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면

건강한 몸은 몸의 가장 약한 부분의 고통을 가장 잘 느낍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장 잘 하는 일은, 그들의 고통을 느끼는 일입니다.

 

특별히 어려운 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잘 회복되는지에 대한 통계가 있는데요.

교회나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훨씬 더 빨리 육신도 잘 회복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회복의 적들 enemies of recovery’ 이라고 제가 부르는데요.

 

두려움이라든지, 불안함, 스트레스 이런 것들이

사실은 회복을 방해하는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주변에서

당신의 아이들을 제가 돌봐드릴게요 밥을 제가 챙겨줄게요라고 얘기한다면 제가 당신의 강아지, 고양이도 돌봐드리겠어요

 

그렇게 여러분의 염려들이 하나씩 사라질 때

나의 모든 에너지를 병을 회복하는데 집중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고통에서 회복하는데는

공동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고통가운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는 질문에 대한 또 다른 질문으로

고통가운데 교회는 어디 있는가?’입니다.

 

교회가 자기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고난 받는 자들,

약자들을 품고 감싸안고 치유한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신자)들 가운데 함께 계심을 분명히 압니다.

 

제 친구가 이런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종종 기도가 부메랑이 되어서 내게 돌아온다

부메랑 기도가 뭐냐?’ 라고 제가 물어보았죠.

 

제가 어떤 염려가 있어서

하나님이 지금 에볼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걱정 안 되십니까?’

북한 탈북자들에 대해 걱정이 안 되십니까?’ 라고 기도하면

 

그러나 기도를 하면 할수록 부메랑처럼

그 기도는 제게 그대로 날아 돌아왔습니다.

 

물론 나는 관심이 있고 염려가 된다.

그래서 나는 너를 선택해서 너를 통해서 일하기 원한다.’

 

왜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가 아니라

고통 가운데 교회는 어디 있는가?’ 라고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사라예보에서 저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3. 고난은 사람을 성숙시킵니다

 

2012년에 제가 세 번째 방문했던 곳은 코네티컷 뉴타운입니다.

 

어떻게 보면 3개의 비극 중 가장 작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일본 쓰나미는 최소 2만명이 죽었고

사라예보에서도 1만명 이상이 죽었고요

코네티컷 뉴타운에서는 20명의 어린이들이 죽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정신 이상이 와서 갑자기 학교에 들어가서 6~7세의 아이들에게 총을 난사했습니다.

저는 그 지역 주민들에게 말씀을 전해 달라고 초청을 받은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그 마을에서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직전이기도 했고, 이 일이 일어난지 두 주간 후에 제가 방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눈이 덮여진 상태로 굉장히 침울한 곳이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잃은 부모 몇 명을 만나보았습니다.

 

제가 사는 콜로라도의 한 친구로부터 슬픔, 비통에 대해서 배웠는데

자신은 스쿠버다이빙을 하면서 이 통찰력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사실 스쿠버다이빙 전문가는 수 십 미터 아래로까지 내려갑니다.

그러나 깊이 내려갈수록 위로 올라올 때 천천히 올라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빨리 올라오면 수압 때문에 몸에 이상이 온다고 합니다.

잠수병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통 가운데,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는

그들이 있는 그곳으로 내려가서, 본인들이 원할 때 천천히 올라오도록

그들과 함께 해 줍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너무 급하게 빨리 이 사람들을 위로 끌어올리려고 애씁니다.

갑자기 빨리 그들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있는 그 자리로 내려가서

그 사람들이 할 수 있을 때, 원할 때, 같이 올라오도록

그들과 함께 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초청을 받았을 때,

아침에 학교 잘 가라고 뽀뽀하고 차에 태워서 아이를 보냈던 날,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 비통가운데 젖었던 그 부모들에게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제가 도대체 무슨 말로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나라 전체가 비통가운데 젖는 사건이 있을 때는

뉴욕타임즈 같은 언론사는 무신론자를 고용해서 글을 쓰게 하지는 않습니다.

언론은 목사나 사제 같은 성직자를 고용해서 글을 씁니다.

 

왜냐면 사람들 속에 희망과 위로의 말씀은

결국 성직자들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방금 자식을 잃은 그 부모들 앞에 서서

그냥 받아들여 인생은 원래 그런 거야!’ 라고는

절대 이야기 하지 않을 것입니다.

 

네가 아이를 잃었지만 뭘 기대하니, 원래 세상은 그런 거야,

빨리 털고 일어나야지라고 이야기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진정한 위로, 진정한 희망을 갖고 그들 앞에 섰습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아들, 딸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더 안전한 곳에,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그들은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에 마지막 때 말씀 중에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굉장한 희망과 위로의 말씀입니다.

 

몇 년 전 제 자신도 죽음에 직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책 출판하고 투어 하며 고향을 향해 운전하며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는 콜로라도는 험악한 산지 지역인데

그 때가 2월인데 제 차가 빙판에 미끄러졌습니다.

제 차는 길을 벗어나 낭떠러지로 떨어져 5바퀴 굴렀습니다.

 

모든 창문이 다 깨졌고요

저도 정신이 없어서 안전벨트를 풀고 주변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앰뷸런스가 와서 저를 근처 작은 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저는 시골 작은 병원에 CT기계가 있다는 것을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에는 CT사진을 판독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진을 호주로 전송해서,

그걸 보내는데 1시간이나 걸렸고

호주 의사들이 분석하는데 1시간 걸렸고

그때까지 저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팔까지도 묶인 채로 꼼짝 할 수 없었어요.

 

그때 저는 의사가 하는 말을 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의사가 하는 말이 얀시 씨 문제가 있는데 목이 부러졌습니다.

정말 나쁜 소식이네요!’

 

의사는 연이어 설명하기를

뼈가 조각이 나서 그 조각이 중요한 혈관 근처에 있는데

그래서 그 작은 뼈 조각이 어디에 뚫고 들어갔는지 확인하는 중입니다.

만약 그 조각이 뇌에 들어가면 곧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정밀 검사를 다 시작할 텐데, 상태가 악화되면

비행기도 대기하고 있고, 덴버로 수술을 위해 이송할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혈관에 뼈 조각이 침투했으면 덴버까지도 가지 못하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게 자기 전화기를 건네주면서

혹시 모르니까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화 통화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의사의 말을 듣자, 이렇게 꼼짝없이 누워서 묶여 있는 내가

지금 곧 죽을 수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절체절명의 시간에

제가 남은 시간을 보람있게 보낼 수 있는 것이 3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누구를 사랑하지? 내가 누구에게 전화하지?

-두 번째는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지 에 대한 생각

-세 번째는 내가 다음에 일어날 일(죽음)에 대해 준비가 되었는가?

 

제가 점점 깨닫게 된 것은, 이 세가지 질문은

우리 모든 사람의 삶에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내 삶이 그 세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살아져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평소에는 우리가 잊고 사는 질문들이죠.

 

저는 그때 단 1분도 그날의 주식 장세에 대해서도,

내가 책을 몇 권 팔았지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 부서진 내 차에 대한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깨닫게 된 것은 그런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우리 삶 가운데 우리 염려로 다가온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우리를 방해합니다.

 

저는 그 경험을 회상하면서 사실은 현재 나날이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는 마치 보청기를 꽂은 것 같습니다.

진짜 보청기가 아니라 비유입니다.

우리는 고통 가운데 그 보청기 볼륨을 올리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집중하게 됩니다.

 

사실 그 경험이 제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제게는 고민도 있었고, 부부간에 제가 산처럼 크다고 여겼던

사실은 작은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검사 결과가 다행히 좋게 나왔습니다.

제가 실제로 큰 위험이 없고, 이제 깁스만 하고 다니면

나중에 완쾌되어 스키고 타고 건강하게 살게 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저는 그냥 걸어다니면서 구름, 풀 보이는 모든 것이 감사의 제목이고

제가 누리는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보청기를 켜면서,

내가 중심 삼아야 될 가장 중요한 질문들이 무엇인지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때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도

평안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위로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마치 거름 같은 것이죠.

누구도 그 거름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 거름을 통해서 우리는 성장하게 됩니다.

 

오래 사신 분들에게 영적으로 가장 성장했던 때가 언제입니까?’ 라고 물으면

대부분 자신이 힘들었던 시간이라고 대답합니다.

 

마치는 말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 받는 자의 편에 서 계십니다.

우리 편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 증거나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가운데 계십니다.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라는 질문의 일부분은

고통 가운데 교회는 어디 있는가?’ 라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제가 위에서 언급한 그 고통 받는 장소들을 방문했을 때

나는 이 사람들에게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거기 있는 믿는 자들,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이들에게 우리가 해 줄 말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저는 또 깨달았습니다.

 

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은 우리가 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라는 질문에는

우리가 답을 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 소망은 한국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던져지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되기를 원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임재이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여러분을 통해서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이 사실을 묵상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고통 받는 자들,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고 감싸 안을 때

마치 하나님은 당신이 그 일을 하시듯이 기뻐하십니다.

이 땅 가운데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한국이 아시아 및 세계 전역에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