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나는 예수님 눅2:40-52 18.01.07.스크랩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성장할 때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성장을 멈춘다는 것은 퇴보요 죽음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는 것은 산 자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자라날 수 있으며 또 어떤 점에서 자라나야 합니까?
본문은 「자라나는 예수님의 소년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사는 『누가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성장하는 데 있어서도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어린 시절 예수님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자라나는 아기 예수님 (40절)
40절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나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가지 면에서 성장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1 첫째는, 육신의 성장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셨으므로 육신도 성장하셔야 하셨습니다.
육신이 성장하려면 잘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집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맛있는 반찬이나 좋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 먹고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몸과 마음이 점점 강하여졌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강해져야 합니다.
몸이 약할 때 사탄에게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
▲2 둘째는, 정신적 성장입니다.
지혜가 충족하다는 것은 정신적인 성장을 뜻합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성장과 아울러 정신적인 성장이 있습니다.
정신의 성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고 성숙하게 합니다.
육신은 자라지만 정신의 성장이 없는 사람을 보면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유치하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에게 부담을 줍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성장과 함께 정신적으로 막힘이 없이 성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모든 것을 배우셨으므로 하루가 몰라보게 자라나셨습니다.
지혜가 충족했다는 것은 지각의 힘과 지성의 힘이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악의 분별력과 사물을 이해하는 이해력이 점점 깊어 지셨습니다.
육신의 성장은 한계가 있지만 정신적인 성장은 한계가 없습니다.
인간의 지성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배우기만 한다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동물과 달리 이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성을 활용하여 끊임없이 공부함으로써 정신적으로도 성장해야 됨을 배우게 됩니다.
▲3 셋째는, 영적인 성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이는 「예수님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말해 줍니다.
아무리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하더라도 영적인 성장이 없다면 불완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통하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셨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지식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과학 문명은 놀랍게 발전하여 인간 스스로가 그 발전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입니다.
이렇게 지식은 발달하였지만 인간의 도덕성은 전혀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도덕성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오히려 더 퇴보를 하였습니다.
과학적 지식의 발달과 비례하여
인간은 점점 교만해 졌고 영적으로 더욱 무지하여 졌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버림으로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그 내면은 짐승과 같이 어리석게 되어 버렸습니다(롬 1:21,22절).
오늘날처럼 영적인 것이 외면을 당하고 영적으로 전락한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영적 성장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통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할 때 영적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 영혼은 기쁨으로 뛰놀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 18절>에서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사람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할 때
한 인간으로서 온전하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서 정상적으로 성장하셨습니다.
◑2. 자라나는 소년 예수님 (41-52절)
이 부분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의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첫째,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시는 예수님 (41-47절)
41,42절을 보십시오.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 밑에서 비참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사랑으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유월절은 7일동안 행해졌는데, 이날에는 12세 이상되는 남자들이
전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고
각국에 흩어진 유대인들도 순례의 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 유월절에는 부모가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때 올라가신 것은 이때 성인식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12살이 되면 <성인식>을 행하는데 이를 <바르 미쯔바> 라고 합니다.
<바르>는 아들, <미쯔바>는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인식> <바르 미쯔바>는
「율법의 아들이 되는 예식」입니다.
「12살난 남자 아이가 율법책을 두 손으로 들고 가면, 뒤에는 부모와 친지들이 따라갑니다.
그리고 제사장 앞에 가서 율법의 모든 의무를 지킬 것을 선서를 합니다.
그 후에는 모두 아이의 손을 잡고 돌면서 신나게 춤을 춥니다.」
이렇게 해서 성인이 되면 회당에서 공식적으로 율법을 낭독할 수 있고,
절기에 참석하고 결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모든 규례들을 지킬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이후에는 계명(율법)의 아들로서 법적으로 사회의 완전한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43-45절을 보십시오. 유월절 행사가 끝나고 모든 사람들은 각각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갈릴리 나사렛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당시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따로 무리를 지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예수님이 요셉과 함께 있으리라 생각하고,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룻길을 간 후 함께 야영을 하게 되었을 때에야
예수님이 동행 중에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방불명된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혹시 친족과 아는 소년 친구들 사이에 있는가 찾아보았으나 없었습니다.
그들은 큰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부모는 근심으로 밤새 기도하느라 뜬 눈으로 새우고
다음날에는 오던 길을 되돌아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사방으로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흘째 되던 날 최후로 성전을 찾아 갔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소년 예수님이 선생들 중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년 (한국나이 14세) 예수님을 찾은 것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러면 소년 예수님이 성전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4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셨습니다.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습니다(47절).
여기서 우리는 「소년 예수님의 진리를 향한 열렬한 탐구심」을 볼 수 있습니다.
12살은 사춘기 때입니다.
그런데 소년 예수님은 사춘기 시절인데도 보통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소년들은 명절 분위기에 들떠서 신나게 놀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축제가 끝나자 모두 서둘러서 부모와 함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소년 예수님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성전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이나 계속해서 성전에 머물면서 선생들 중에 앉으셔서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들은 랍비들로서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박사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시며 또 그들의 질문에 대답도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장하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먼저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셨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남이 말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다 자기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성경 공부를 할 때도 상대방의 말은 잘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좋은 성경 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목자가 되는 비결>은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때로 카운셀링을 할 때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기만 해도
절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깊은 겸손과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들을 때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히 듣기도 하실 뿐만 아니라 묻기도 하셨습니다.
이는 진리를 향한 불타는 탐구심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자는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으며, 우주의 기원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재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누구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 마음이 없는 자들은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습니다.
이런 자들의 마음에는 아무런 질문도 없습니다.
이런 자들은 아무 생각이 없는 짐승과 같이 먹고 자고 인생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런 자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과 권세와 명예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골치 아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질문을 하지 않는 자들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교만하여서 어느 누구에게도 물어보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존심이 강하거나 자의식이 강합니다.
그들은 묻지 않기 때문에 잘 배우지를 못합니다. 그들은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고
물어보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은 몇 년이 가도 성장하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물어보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배우는 마음으로 질문하는 것은
자기를 비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배우는 마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탐구합니다.
이런 자의 눈동자는 빛납니다. 이런 자는 날로 날로 몰라보리만큼 성장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쥐꼬리만한 자존심과 자의식 때문에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질문도 없습니다. 이런 자는 성장이 없고 비참합니다.
육신도 늙고 마음도 늙어갑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얼마나 배우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셨습니까?
예수님에게는 얼마나 질문이 많으셨는지 집에 갈 생각도 않고
사흘 동안 계속해서 질문하셨습니다.
이 배우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예수님의 지혜와 지성과 총명이 빛이나
박사들조차 놀라게 했습니다. 소년 예수님은 진리를 찾는 구도자였습니다.
▲2 둘째, 아버지 집을 사모하시는 예수님 (48-51절)
요셉과 마리아는 소년 예수님이 성전에 있는 것을 보고 너무나 반갑고
놀라 뛰어가서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모친 마리아가 말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절)
예수님은 지금까지 아버지 요셉을 도와 힘든 목수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부모의 말씀을 어기거나 무단 이탈한 적이 없었습니다.
소년 예수님은 너무나 충성스럽고 순종적이어서 가정에 큰 보배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허락도 없이 이탈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고 가볍게 책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49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를 찾아 헤맨 부모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나는 당연히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깊은 영적 소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을 바로 앞에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요셉이 그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육신의 아버지 외에 하늘의 아버지가 계심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소년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인식하고 성장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부를 만큼 인격적으로 깊은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스펄젼이나 링컨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소년 시절에 영적인 눈을 뜨고 성경을 가까이 하고 기도에 힘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영적인 환경 가운데서 자라나 하나님을 인식하며 성장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실만한 위대한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때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부른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오늘날 어린 아이들은 영적인 환경 가운데서 자라지 못합니다.
불신 가정에서 자라나 불신이 마음 속 깊이 박혀 있습니다.
또한 학교 교육도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본주의 교육을 받고 자랍니다.
대부분 창세기는 신화로 알고 오히려 허무맹랑한 진화론을 믿고 있습니다.
이는 학교에서 그렇게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무의식 세계에 깊이 박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더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이는 그릇된 인본주의 교육의 영향으로
우리의 무의식 세계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이 영적인 환경 가운데서 성장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의 어린 아이들은 마음이 순수하고 진실됩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을 보면
마음이 순수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음란하고 죄악된 분위기 때문에 점점 순수성을 잃고 마음이 복잡해지고
더러워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낭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낭만이 아니라 타락하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한다면
얼마나 큰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할렐루야.
또한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란 「내 아버지의 일」(my Father's business)(KJV)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연히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불타는 영적 소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까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함께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깊은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목수 일은 부업이고 하나님의 일이 마땅히 해야 할 주업으로 생각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무의식 세계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비로소 심령에 참 기쁨이 있고 사람으로서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의 일만 할 때
피곤하고 허무하고 아무런 열매가 없게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수요일 성경 교리 학교, 목요일 새생명 아카데미, 금요일 기도회,
토요일 청년들의 모임이나 여전도회의 성경 공부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일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또 가정과 직장과 학원에서의 일은 부업이고,
하나님의 일이 마땅히 해야 할 주업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 일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요,
하나님의 일은 생의 목적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깊은 영적인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50절).
<5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한가지로 부모와 함께 나사렛에 가셔서 전과 같이 변함없이
부모님을 순종하여 받들어 섬겼습니다. 예수님은 순종하는 소년이었습니다.
모친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3 셋째, 하나님께 사랑스러워 가시는 예수님 (52절)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는 예수님이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균형잡힌 성장」을 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혜>는 「인격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이고, <키>는 「육체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는 「영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이고,
<사람에게>는 「사회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차원에서 균형있게 성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균형이 잡혀 있습니까? 균형잡힌 성장을 하고 있습니까?
또한 <누가>는 <52절>에서 예수님이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의지적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 개인을 보더라도, 제가 하나님과 우리 성도님들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과 성도님들에게, 특히 성도님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기쁘시고,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행복합니까?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라 가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40절).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스럽게 성숙해야 하겠습니다(52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라나야 하겠습니다(벧후 3:18절).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성장해야 하겠습니다(엡 4: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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