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히11:1-7절 18.01.14.스크랩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구체적인 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아 「현실적으로 타협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 있을 때」, 저자가 「믿음으로 산 선진들의 예를 들어서」
「믿음을 권면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1.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선진들의 믿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그들의 믿음은 「생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 따로, 생활 따로. 따로 따로가 아니라, 믿음이 바로 생활이고,
생활이 바로 믿음으로서 「일상적인 삶 자체가 믿음」이었습니다.
(2) 둘째, 그들의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붙잡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봄으로」(by sight) 산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by faith) 살았습니다.
(3) 셋째, 그들의 믿음은 「앞을 바라보고 전진하는 믿음」(forward-looking faith)
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소극적」으로 「중심만 지키는 믿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역사를 창조하는 「역동적인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고 「더 나은 본향을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
(4) 넷째, 그들의 믿음은 「견인(堅忍)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현실의 유혹과 환란과 고통을 끝까지 견뎌냈습니다.」
◑2. 「믿음」의 정의
어려운 시대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하며,
세상을 이기게 하고, 우리에게 상급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선진들은 어떤 믿음으로 승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까?
(1) 1절은 「믿음에 대한 정의」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서 볼 때 「믿음」에는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바라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① 첫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여기서 「실상」은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인데 「실체」(the substance)
또는 「확신」(the assurance)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체」는 「믿는 대상 면」에서 객관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확신」은 「믿는 자의 자세 면」에서 주관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이는 「믿음」은 허망한 것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실체를 주관적으로 확신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히브리서 3장 14절에서는 「휘포스타시스」를 「확신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바라며 살아갑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 가기를 바라고,
좋은 직장 얻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오늘보다 좀 더 나은 삶,
좀 더 나은 사회를 희망하며 살아갑니다. 건강하기를 바라고, 경제적 안정을 바랍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8:24절에서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라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희망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이어야 하며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라는 것들」은 수동태로서 「소망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바라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을 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평강」(요 14:27절)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영생」(요 10:10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벧전 1:4절).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우리 믿는 자들이 「진정으로 바라야 할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하기에 힘쓰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바라는 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보증 수표」와 같습니다. 보증 수표는 돈이 아니지만
은행이 보증을 하기 때문에 현금과 같이 사용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보증 수표」입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로 시작된다는 것을 바꾸어 말하면,
「현세적인 삶에 대한 불만족에서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세적인 삶에 대해 만족하고 안주하고자 하는 자들,
인생을 단지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순교로 요약 정리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순교란」 기독교가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 진정한 가치, 진정한 영광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 수명이나 건강이나 지위나 명예나 부귀나 영화나
그 어느 것에도 모두 「진정한 가치」가 없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 「순교」입니다.
이처럼 「믿음」에는 현세적인 삶에 대해 불만족을 느끼고,
참되고 영원한 것을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간절한 영적 소원을 가진 자들을 기뻐하시고,
그 「믿음」에 복 주십니다.
마태복음 9장 27-30절에 보면 「두 맹인의 부르짖음」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테스트 하시기 위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맹인들은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이중창으로 부르짖으며 집에까지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맹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소경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 라고 확신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저희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믿음」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영적 소경임을 인식하고 영적 세계를 보고자 하는
간절한 영적 소원이 있을 때 주님께서 그 믿음대로 영적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늙은 나이에 신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장하기에는 너무 늙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세상 만민의 복의 근원이요,
열국의 아비로 성장할 놀라운 소망을 가지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자신에게 희망을 둘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자기에게 두신 희망」을 영접하고 「그 희망을 좇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한번은 「아브라함」이 신앙 생활한지 10년이 되어도 자식을 주시지 않자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시청각 교육을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5절을 보십시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는 현재 딸자식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는 도저히 바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황당무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뭇별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능히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창 15:6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믿음에 복주시사,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놀라운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민족이 로마의 식민 통치하에 있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사도행전 1장 8절의 「예수님의 선교 명령」을 영접하고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가졌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는 이 비전 가운데, 쉬지 않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함으로 이방 세계를 개척해 나갔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개척한 후, 그는 얼마든지 노년을 편히 즐길 수 있었지만,
오히려 이때 「로마 정복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1절을 보십시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이 환상은 쇠사슬에 매이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꺼질 줄 모르는 활화산과 같이 타올랐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 복음화의 비전」 가운데
로마 셋집에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대로 결국 거대한 로마 제국은 복음화 되었습니다.
② 둘째,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여기서 「증거」는 헬라어로 「엘렝코스」로서 「증명」(proving),
「확신」(conviction) 이라는 뜻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도 수동태로서 "보여지지 않는 것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여지지 않는 것들을 증명하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세계에는 보이는 「현상 세계」와 보이지 않는 「실체의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체로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실체의 세계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실체를 보는 것처럼 증명하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배의 갑판에서 두 사람이 서서 먼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다른 한 사람은 멀리 있는 기선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설명합니다.
육안으로 본 사람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지만, 망원경으로 본 사람은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불신앙」으로 보면, 영적인 세계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앞에 제시한 것들은 모두
「허구적이고, 모호하고, 쓸데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망원경」으로 볼 때 하나님의 세계는 너무나 생생하게 보이기 때문에,
도무지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과거에 믿음이 없어 거듭나기 전에는」, 성경은 한낱 시대에 뒤떨어진,
수면제 역할을 하는 책에 불과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거듭나서 영적인 눈을 뜨고 성경을 볼 때」,
「성경은 구원의 계시를 주는 엄청난 보화가 담긴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보게 해 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세계」는 인간의 이성이나
지혜로는 알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 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2) 2절을 보십시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여기서 「선진들」은 믿음으로 산 조상들을 의미하며,
「증거」는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선진들은 오직 믿음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사회적인 지위와 권세, 그리고 물질의 소유가 인정과 칭찬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조건에 관계없이 「믿음이 있는 자」를 인정하시며 귀히 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면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믿음의 능력」
그러면 「믿음이 있을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 첫째, 천지 창조의 믿음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천지 창조를 알게 됩니다.」
저자는 믿음의 영웅들을 열거하기 전에 먼저 「천지 창조를 믿는 믿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창조 신앙이 믿음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해 왔습니다.
여기서 물리학, 천문학, 철학 등이 발달되었고 진화론, 빅뱅 이론 등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세상을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고 설명되어지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믿음의 눈으로 볼 때만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이 세상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알 수 있습니다.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게 되었고,
"하늘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자 까마귀, 독수리 등 온갖 종류의 새가 날게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말씀으로」 눈에 보이는 이 물질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만,
믿음이 있으면 이는 「아주 명백한 사실로」 받아 들여 집니다. 할렐루야.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믿음의 세계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무슨 말씀이라도 다 믿을 수 있고,
성경 66권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4장 2항을 보면.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은 말씀 안에서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 때문에,
말씀 안에 계시되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으로 믿으며,
그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각각의 구절들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제 14장은 「믿음」에 대해 다루고 있고,
그 중에 2항은 믿음의 정의라고 할 수 있는데, 믿음이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고로
성경에 계시된 모든 것이 참되다고 믿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성경 속의 기적은 신화적 요소라며
이를 이제는 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에게 「천지 창조의 믿음」이 없다는 사실만을 말해줄 뿐입니다.
「천지 창조의 믿음을 가질 때」 우리가 말씀의 능력의 세계로 들어가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켜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믿지않고 「진화론」을 믿게 될 때에,
모든 것이 허무하고 우리 인생은 운명적이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세계는 온통 혼동과 흑암과 공허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 가운데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때,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생각하는 가치 기준과 삶의 양식이 달라집니다. 인간은 더 이상 운명의 노예가 아니라,
분명한 존재 의식과 목적과 사명을 가진 복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2) 둘째, 아벨의 믿음 (4절)
4절을 보십시오. 최초의 믿음의 선진인 「아벨의 믿음」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창세기 4장을 살펴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사는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사는 열납치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아벨의 제사」는 피의 제사고, 「가인의 제사」는 곡식을 드린 제사이었기 때문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레위기」에서 곡식을 드리는 「소제」도 있는 것을 보면,
제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믿음으로」드렸기 때문이라고 간단, 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사」는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제도」입니다. 「제사」는 「십자가를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죄를 범한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심정」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심령이 가난하고 겸비한 자세」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입니다(시 51:17절).
「아벨」은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하고 다만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믿음으로 드린 제사를 받으시고 그를 의로운 자라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회개치 않고, 자기의 의를 내세우며 교만한 자세」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무성의한 제사」를 열납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회개하는 심정이 없이 굳어진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나,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는 형식적이며 습관적인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사는 열납하시고, 「가인」과 그 제사는 거절하셨습니다.
「가인」은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는 시기심의 노예가 되어 이성을 잃고, 하나님의 경고하심(창 4:7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벨」의 뒤에서 돌로 그를 쳐 죽였습니다.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고, 「아벨」은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최초의 살인이 최초의 순교를 만들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살았지만, 그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의 육신은 죽었지만 그의 믿음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살아서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만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의롭다 인정해 주신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벨」을 통해서, 믿음으로 살지만
그 결과는 좋지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면 복 받고 모든 것이 잘되고 해피 앤딩으로 끝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살았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 생활에 회의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조심해야 할 것 한 가지는,
「결과가 좋지 않게 끝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믿음」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부터
엄청난 고생을 하다가 나중에는 목 베임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믿음 때문에 모진 고문과 대못이 박힌 널판 위를 걸었고
결국에는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을 우리가 의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한국교회 안에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소위 「성공 신학」, 「번영 신학」이 자리를 잡으면서
사람들은 은근히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을 보면 뭔가 문제가 있었던게 분명해 라고 하면서
「믿음의 사람」을 호도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것에서 조심하여 스스로 삼가야 할 것입니다.
「아벨」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들은 다 죽었으나
그 믿음은 오늘도 그들이 옳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 드리기에 힘쓰므로,
「아벨」과 같이, 우리의 삶도 하나님으로부터 증거 되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벨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삼중의 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① 「살면」 그리스도를 전해서 복이고,
② 「죽으면」 그 죽음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서 복이고,
③ 「죽고나면」 천국에 들어가니 복입니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절)
(3) 셋째, 에녹의 믿음 (5-6절)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믿음」입니다.
5절을 보면,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에녹」의 아들 이름은 「므두셀라」인데,
그 이름의 뜻은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When he goes, judgement will come.)입니다.
「므두셀라」는 969살까지 살았는데 과연 그가 죽은 후,
그의 손자인 노아 때에 홍수 심판이 오게 되었습니다.
「에녹」은 그가 65세가 되기까지, 즉 「므두셀라」를 낳기 이전까지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삶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에녹의 삶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었습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는 노아 홍수 이전의 시대로, 불경건하고 부패가 만연하며,
강포가 횡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창세기」는 「에녹」이 이런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서」(1:14,15절)는 「에녹」이 거스리고 강팍한 시대에 경건한 생활을 하며,
의를 전파하는 생활을 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법대로 살지않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부모와, 친척과, 친구들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의 생활을 심히 기뻐하시고,
죽음의 고통을 피하여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너무 달콤해서 시간과 공간 저 너머에 있는 낙원까지
함께 동행했던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에녹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어떠한 믿음인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의 의미는.
「믿음이 없이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① 첫째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반드시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일이 왜 세상에서 가장 쉽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생득적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만물을 통해 그의 신성과 창조의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일이 왜 세상에서 가장 어렵습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는 인본주의에 근거한 불신앙의 교육을 철저히 받아서
훈련해야만 비로서 가능합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교육과 훈련을 받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이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가 쉽습니다.
특히, 핍박을 받거나 형통하지 못할 때, 또 사회에 불의가 성행할 때,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시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불의가 성행하는가?」의
의문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분」으로서, 「항상 살아 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고
「항상 살아계시는 하나님」임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않는 불신은 하나님이 보실 때 큰 죄입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을 때, 인생을 함부로 살지 않고,
옷깃을 여미며 경건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할렐루야.
② 둘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반드시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받기 위하여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치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지 않을 때 「눈에 보이는 상급」을 바라게 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피해 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기 쉽습니다.
「진정한 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 자신」(창 15:1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 자체」가 큰 상급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았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상급」을 믿었기 때문에 애굽의 모든 보화를 버리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고 믿음으로 사는 자를 결코 외면치 않으시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상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 때,
눈에 보이는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4) 넷째, 노아의 믿음 (7절)
「노아」는 믿음으로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이때 경고를 받아들이고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았을 때
「경외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120년 동안 방주를 예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비웃고 「노아」를 비웃을 때
홀로 방주를 짓는 것은 사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다수를 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왠지 사람이 몰리는 쪽에 신뢰가 갑니다. 혼자 있으면
자의식이 들고 자신이 지은 죄도 없는데,
자신이 뭔가 잘못되지 않았는가 하는 회의를 품게됩니다.
온 세상이 물에 뒤덮이는 홍수 심판이 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노아」도 한 명의 사람인지라 이 경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죄악된 세상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남이 뭐라고 하든 오직 믿음으로 우직하게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방주 짓는 「노아」를 미친 놈, 어리석은 놈하며.
갖은 조롱과 멸시를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대패질을 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의 믿음은 끝까지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자 하나님은 경고하신대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홍수 심판 이전」에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생각이 모자라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여졌지만, 「홍수 심판 이후」에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생각이 깊은 「지혜로운 사람」임이 증명되었습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으로 인해 자기 집을 구원하고,
온 세상의 불신앙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세상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의 믿음은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얻는 복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하나님이 심판하고자 하심에는 조금의 변함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장차 망할 장망성에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2장)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뜨거운 불심판을 받을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심판에 대해 이야기하면 "기독교는 치사하게 겁주면서 믿게 한다" 며
겁주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설마 심판하시겠는가 하며 자기 나름대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그런 심판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며 심판 자체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무서운 심판을 면하고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경외함으로 받고
타협 없이 변함없는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실제 생활에서 믿음의 증거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것이 많지만, 「실제 생활」에서 믿음으로 살므로
증거를 얻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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