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 생활의 믿음 히11:8~22 18.01.28.스크랩
우리는 지난 시간에, 1-7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에 대한 정의」(1,2절)에 이어서
「믿음의 본질인 창조의 믿음.」(3절),
「아벨의 예배하는 믿음.」(4절),
「주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에녹의 믿음.」(5,6절),
「끝까지 인내하는 노아의 믿음.」(7절)을 통해 은혜 받았습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아브라함의 믿음 (8-19절)
(1) 첫째, 아브라함의 「순종」(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① 첫째로, 아브라함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다만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이 유익인가 아닌가
「계산하지 않고, 다만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계산적인 것과 크게 비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철저한 계산에 의해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의 삶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삼등」 이라는 컬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일등은 하고 싶은 일, 이등은 해야 하는 일, 삼등은 하나님 만나는 일입니다.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해야 하는 일도 다 마치고, 그 후에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 줍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도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내 힘으로 한 번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하고,
그나마도 안 될 때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거리에서도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내 자신,
그 다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 다음에야 저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는 일등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십니다.
내가 괴로워 할 때는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오십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다 생각 들 때는 홀로 내 곁에 오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니다.
나는 하나님께 언제나 일등입니다.
나도 하나님을 일등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만나고, 작은 고비 때마다 손을 꼭 붙잡는 내게 일등으로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일등이신 하나님을 나도 일등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순종하여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일등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9장 59~6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제자를 부르실 때에
그를 따르려는 자들에게,
주님을 좇는 것이 그의 「생의 우선권」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주님을 따르는 길」은 계산해서 따를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생의 우선권.을 먼저 드려야 하는 길」임을 기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② 둘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순종하여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 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하나님이 그의 앞날을 인도하시고,
그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미래를 보장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먼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야 합니다.
「믿음」이란 소극적.으로는 죄악된 세상에 대하여 등을 돌리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로 향해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성경은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즉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현세적인 삶에 대한 불만족」에서 시작됩니다.
현세적인 삶에 대해 만족하고 안주하고자 하는 자들, 인생을 단지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은 결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2) 둘째, 아브라함의 「장막 생활」(9,10절).
「순종하는 믿음으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서 어떤 생활을 했습니까?」
① 첫째로, 「아브라함은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9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거류하며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거류한다"는 것은 「나그네가 다른 민족의 땅에서 영주권도 없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약속의 땅에서 주인으로 행세하려 하기보다,
「나그네처럼 거류하며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장막 생활」이란 늘 자주 옮겨 다녀야 하기 때문에 삶이 안정되지 못하고,
「사생활」을 갖기가 힘듭니다.
「문화 생활」을 즐길 수도 없고 「자녀 교육」도 힘이 듭니다.
「장막 생활」에 어려움이 많지만, 그러나 「장막 생활」은 안주하지 않고
군인과 같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언제든지, 어디로든지 떠나 갈 수 있는
「기동성과 순발력과 자유함」이 있습니다. 또한 항상 깨어있는
「생동감있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안주하고자 할 때, 심령이 부패해져서 무기력해지고
욕심에 사로잡혀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장막 생활」을 하게 되면, 늘 흐르는 물과 같이
「생명력이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장막 생활이란 나그네 생활.이요, 사명을 중심으로한 사명인의 생활.입니다.」
② 둘째로, 「아브라함은 부족함이 없을 때에도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족함이 없이 살게 되었을 때」도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신앙 생활 처음부터 끝까지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처음에는 믿음으로 「장막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잘살게 되면, 더 이상 고생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삶의 여유를 즐기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 끝까지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③ 셋째로, 「아브라함의 장막 생활은 당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막 생활」은 「당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후손들」에게도 「장막 생활의 믿음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가장 위대한 유산」입니다.
우리는 후배들과 후손들이 우리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올 수 있도록
「역사성」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현실의 작은 유익」에 연연하거나,
「현실의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면서 「장막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10절.에 보면, 그가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그 땅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소망이 「하나님 나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나라」는 모든 것이 회전하는 그림자와 같이
「허무하고 일시적이고 변화무쌍」합니다.
종국에는 파멸하지 아니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과
인간의 최대의 원수인 죽음을 이기신 부활로 건설된 나라」이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이 친히 설계하시고 건설하신 나라」로서
「낙원」이라 일컬어 집니다.
이 「낙원」은 우리가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영원히 거할 본향」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천국은 「비할데 없이 아름다운 곳」입니다(계 21,22장).
성경의 하나님은 미(美)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그의 지으신 세계를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고 했습니다. 천국에서는 미가 완성될 것입니다.
형태와 색채와 소리의 완전함이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상의 그 어느 것도 이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의 모든 감각과 인식 능력은 죄로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속된 몸을 가지게 될 때」에는 모든 감각 능력이 확장되어
완전한 상태로 존재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아름다운 장면들은 많이 있습니다.
설악산, 백두산 천지, 나이아가라 폭포 등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저 영원의 아름다운 성」에서
우리를 반겨 줄 광경과 소리와 향기의 완전한 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자 우리가 그렇게 아름다워하는 설악산은
하나님이 7일. 동안 지으신 것입니다.
런데 천국은 이천년 동안 지금도 지어지고 있습니다.
설악산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가신지 2천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천국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비교도 안되지만 굳이 비교해 본다면 7대 730,000(2,000년 x 365일) 입니다.
천국은 이 곳보다 100,000 배나 더 아름다운 곳입니다.
천국은 비할데 없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 둘째, 천국은 「최상의 교제의 장소」입니다(마 8:11절).
인류 역사에서 가장 순결하고 고상하며 이타적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믿음으로써」 천국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엘리야, 다니엘,
바울, 베드로, 요한, 스펄젼, 무디, 로이드존스, 이기풍,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목사님 등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곳에서 우리는 「천사들」(눅 1:19절, 15:7-10절)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고귀한 존재들, 곧 가브리엘, 미가엘,
그리고 모든 천군 천사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대하 6:30절).
물론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지만, 천국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임재하시는 곳이요,
특별히 자신을 나타내시는 곳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될 것입니다(행 7:56절, 히 4:14절, 히 8:1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나를 위해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온갖 고통과 수치와 배반과 조롱을 다 당하신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천국에 대해 가장 마음이 끌렸던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었습니다(빌 1:23,24절).
찬송가 85장.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때에야 얼마나 좋으랴"(1절)
천국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7절.을 보십시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천국의 교제는 이 땅에서의 교제와는 달리(고전 13:12절) 기쁨에 한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기쁨의 재회(살전 4:17절)를 할 것입니다.
헤어졌던 자들이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찬송 480장).
ⓒ 셋째, 천국은 「영광스러운 자유가 있는 장소」입니다.
천국은 지상에서의 우리들의 삶을 파괴시키는 모든 것들, 즉 죄, 질병, 고통,
가난, 굶주림, 헐벗음, 죽음 등으로부터 벗어난 곳입니다.
천국에는 죄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빈곤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궁 무진한 하나님의 부요를
원하는 대로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8:17절).
천국에는 고역도 없습니다. 이제 고된 노동은 끝입니다(히 4:9절).
천국에는 질병이나 고통도 없습니다(계 21:4절). 연약, 한숨, 신음, 눈물,
고통 등은 이제 끝입니다.
천국에는 죽음도 없습니다.
ⓓ 넷째,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완전한 지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절).
교육을 가장 적게 받은 자라 할지라도 그 진리의 대양을 헤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람, 시간, 영원 등에 대한 난해한 문제들도 해결될 것입니다.
어떠한 의심, 의문, 모호함, 오류 등도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들」이 모두 실제의 존재로 드러날 것입니다.
ⓔ 다섯째,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완전한 사랑을 갖게 될 것」입니다(요일 3:2절).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절).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사랑」은 이땅에서의 사랑과 같이 「망설이거나, 미심쩍어 하거나,
이기적 이거나, 변화무쌍 하거나, 눈물의 씨앗이 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 여섯째, 천국은 「찬양의 장소」입니다(계 7:9-12절).
사람들의 눈이 열려 하나님을 계신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영혼들이 어떻게 찬송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찬송을 힘없이 부르는 성도들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심중」에는 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불탓기 때문」에
「기쁨으로 장막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희망은 「미래적인 것」이지만, 「현실 생활의 삶의 기초와 삶의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사람이 순수하게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때,
그 삶도 순수해지고 영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밝고 힘찬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참된 소망이 없을 때, 아무리 부족함이 없이 산다 할지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심령이 어둡고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3) 셋째, 아브라함 한 사람 (11,12절)
① 첫째로, 사라의 「잉태하는 믿음」(11절)
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습니다. 창세기 18장.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어떻게 은혜를 베푸셔서 자녀를 주시는가를
생생히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한지 오래 되어서 전도와 무관하게 사시는 분이나,
전도는 했지만 열매가 그동안 없었던 분들도 이제 다시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② 둘째로, 「한 사람의 중요성」(12절)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로마서 4장 17-22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이시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이시오,
「바랄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게 하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었기에, 여러가지로 불리한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고,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결국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에 은혜를 베푸셔서 불가능한 가운데서 이삭을 허락하시고,
또 그를 통하여 수많은 생명의 열매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사람.의 믿음의 중요성과 믿음의 가능성」을 봅니다.
우리는 상황이 힘들면 나 한 사람이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불신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의 믿음에 은혜를 베푸사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인간적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가능한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이 다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을 때」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놀라운 역사가 창조되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상황과 조건」을 바라보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으로 포기해 버립니다.
「상황과 조건」을 보면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고, 힘들지 않은 지역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자의 사고 방법」은 다릅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어떤 절망적인 가운데서도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2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아브라함」 「한 사람」, 그것도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을 통해서
엄청난 일을 이루신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을 능가하는 크고 위대한 일」을 우리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 면에서 로마서 4장 23,24절. 말씀이 큰 도전이 됩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아브라함」의 이 믿음의 역사는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고,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4) 넷째, 조상들 (13-16절)
이 부분은 조상들의 믿음.을 종합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란 「약속의 땅」에서 믿음으로 「장막 생활」을 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말합니다.
① 첫째로,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대에 발붙일 만큼의 땅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기 돈으로 막벨라 굴을 사야 했습니다.
약속이 빨리 이루어 지지 않으면 회의하고 불신하고 원망하고 믿음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거나 불신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결코 부도를 내시는 분이 아니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약속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약속이 성취된 줄 믿고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약속의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에 불과함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은 잠시 머무는 「여인숙」과 같고
「지나가야할 다리」와 같음을 알았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다리를 건너 갈 뿐 그 위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② 둘째로, 약속 자체 보다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삶.
그들은 약속을 믿고 살았으나 약속에 집착하지 않고 약속을 초월했습니다.
이는 약속 자체 보다도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신앙 생활을 하였으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약속에 대한 영적 의미를 깨닫고
참된 소망이 이땅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에
약속이 당대에 성취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안해 하거나 불신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거룩한 나그네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어떠합니까?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냉엄한 현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 치의 방심이나 허점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을 직시하고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다보면 오로지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기 쉽다는 것입니다.
③ 셋째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삶.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며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늘 나라의 소망가운데 이 땅에서 거룩한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하여 더 좋은 곳을 예비해 놓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갈대아 우르로 돌아가고자 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는 갈대아 우르가 참 본향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현실이 어려울수록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이는 인생들이 돌아갈 진정한 본향이요, 영원한 본향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 뵙기를 사모했습니다.
시편 42편 2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심히 기뻐하시고 그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15절을 보십시오.
"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하나님은 자신을 롯의 하나님, 에서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시고
자기를 경멸하는 자를 경멸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삼상 2:30절).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아름답고 빛나는 한 거룩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5) 다섯째,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 (17-19절)
17-19절.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성숙한 믿음」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산 결과 25년만에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이삭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시험은 매우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의 불합리성을 따지면서
마음에 쓴뿌리를 품고 불순종할 수 있는 근거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하신 것이 하나님의 법인데(창 9:6절)
이삭을 죽이라고 하신 것은 윤리적으로 모순이었습니다.
또 이삭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인데 이 언약이 파기되어 버립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한마디 불평없이 묵묵히 믿음으로 순종하여 이삭을 드렸습니다.
이로서 그는 영적 질서를 지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구속의 역사의 조금 더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록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능히 살리실 것을 믿는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절.에서 "생각한지라"는 단어의 원 뜻은 「헤아리다」, 「추리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시험을 받을 때에 감정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가, 자기를 부르시고 자신을 키우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능히 이삭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크게 감동을 받으시고 이삭을
도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반석과 같은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2. 이삭과 야곱의 믿음 (20,21절)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야곱」은 죽을 때에 믿음으로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하고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습니다.
요셉의 두 아들은 손자들이기 때문에 12지파의 조상의 대열에 참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끼이게 되었습니다.
이삭과 야곱의 축복은 삶을 종결짓는 시점에서 유언과 같이 행해진 것입니다.
이는 그들에게 자손들을 축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손들에게 물려 주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물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가 얼마나 가치 있고 귀한 것인가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물질을 유산으로 남겨 줌으로써 자식들이
이 물질 때문에 서로 철천지 원수가 되어 싸우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손들에게 물질적인 유산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유산으로 물려 주어야 합니다.
◑3. 요셉의 믿음 (22절)
22절.은 「요셉의 믿음」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은 17세 때 애굽에 와서 110세 때 죽었으므로 93년동안을 애굽에서 살았고
그중에서 80년 동안을 총리로서 부귀 영화와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애굽 문화에 젖어 애굽 사람이 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선진국 애굽 문화를 이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중심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말하고
그때 자기 해골도 가져갈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소망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있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리해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은 모두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부족하지만 어떤 어려운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순종했으며, 믿음으로 장막 생활을 했으며,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고, 믿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또한 믿음으로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 믿음으로 후손들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므로 말미암아 「새 역사를 창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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