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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은사

LNCK 2018. 10. 30. 22:24

www.youtube.com/watch?v=r7ganNCoUOM

가장 큰 은사                    고전12:31-13:3                         18.02.04.스크랩

   

세상에는 너무도 문제가 많습니다.

 

사회 문제, 정치 문제, 가정 문제,

종교 도덕 문제, 전쟁과 재난과 기근과 질병 문제 등등.

 

오늘날의 시대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에는 통틀어 <공통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끝없는 문제>입니다. 문제에 끝이 없다는 특징입니다.

 

어떤 하나의 문제가 해결을 보았는가 하면, 그것이 또 다른 문제의 시작 되고,

또 하나의 새로운 원인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는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다하다 지치면 굳이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느니

차라리 그냥 안고 살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까지 생깁니다.

 

문제의 해결이 또 다른 큰 문제를 계속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문제를 안고 살기로 작정합니다.

 

둘째는 <불확실성>입니다. 문제가 불확실하다는 특징입니다.

문제 자체를 놓고 우리는 이렇게도 말해 보고, 저렇게도 주장을 펼쳐 봅니다마는

아무도 확실한 이야기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누구도 이렇게 하면 해결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도 없거니와,

아무도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문제는 불확실하고, 따라서 전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불확실한 상태로 살기로 작정합니다.

 

셋째는 <방향 감각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문제가 막연하다는 특징입니다.

도대체 이 세대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막연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문제의 원인도 모르고 대책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막연한 상태로 살기로 작정합니다.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고민하되 제대로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모든 문제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남편이 나가려는데 아침부터 아내가 바가지를 긁습니다.

쌀도 없고 땔나무도 없고 옷도 없고 뭐도 없고 뭐도 없다고 연신 잔소리를 해댑니다.

 

그러자 남편이 짜증스럽다는 듯이 툭 쏘아댑니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그냥 돈 없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 걸 가지고!”

 

세상 문제 치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만큼 간단하고 쉬운 것도 없습니다.

돈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런데,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야말로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친구 목사님이, 언젠가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하시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고 있는 문제의 90% 이상은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기도하는 제목들이 90%가 돈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농담입니다만) 어느 교회든 그 교회 목사님이 돈만 있으면

목회 잘 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저한테 돈 좀 가지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세상 문제 치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만큼 간단하고 쉬운 것도 없습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야말로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바로 <인간 문제>가 그렇습니다. 비인간화가 문제입니다.

인간성 상실이 문제요, 인간 존재의 파괴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사회 문제, 혹은 다른 사람의 문제로 책임을 전가시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좁혀봅시다.

너무 넓게 생각하지 말고 좀 더 단순하게 좁혀서 생각해 봅시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

사회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내 존재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라는 인간으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변화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 자신에게부터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나의 문제>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건강의 문제도 소유의 문제도

지위의 문제도 명예의 문제도 아닙니다. 바로 <사랑의 문제>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요 그의 유서라고 하는 디모데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미래에 되어질 일을 멀리 내다 보며 예언합니다.

31-5절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사랑의 변질>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있으되 철저하게 <이기주의적인 사랑>입니다. <물질적인 사랑>입니다.

 

자본주의적이며 유물주의적인 사랑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보았고,

<쾌락적이고 향락주의적인 사랑>으로 병들어가고 있음을 내다 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그 예언이 지금 우리 시대에 당한 것입니다.

<사랑의 타락>이 왔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십니다. 24:12절입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온 세상에 불법이 성함으로 믿는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겠다는 것입니다.

불법을 탓하다가 결국은 사랑이 식어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13절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아무리 불법이 성해도 끝까지 사랑이 식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 존재가 파괴되어 갑니다. 이것을 구제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량주의, 업적주의, 성공주의로는 인간을 살릴 수 없습니다.

 

<참 사랑만이 인간 회복의 궁극적 처방>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사랑의 힘>으로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화초를 가꾸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물을 주고 거름을 주지만,

사랑을 주지 않으면 화초는 자랄 수 없습니다. 곧 죽어버립니다.

 

어떤 곳에 나무 열두 그루를 심어 놓고 거기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을 붙였답니다.

그런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의 열한 그루는 모두 잘 자라는데

똑같이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도 가룟 유다의 나무는 번번이 죽어 버리더랍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욕을 하고 미워하니까 그 나무가 말라버리더라는 것입니다.

화초도 사랑을 받아야 잘 자라나 봅니다.

 

모든 일에 사랑이 없으면 그 일이 성사될 수 없습니다.

근본 문제는 이것입니다. 실로 절박한 문제입니다.

 

사랑의 문제, 내 사랑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내 사랑이 건재한가>,

<내 사랑이 변질 되지 않았는가> 반드시 재점검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 흔한 <통속적인 사랑>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중생한 사랑>, <하나님께 뿌리를 둔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8절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그 사랑을 아는 사람만이 <사랑의 뜻>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을 <아가페>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사랑의 태반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사랑>, <하나님께 뿌리를 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목적 삼고,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것으로 방편을 삼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무한합니다.

 

이에 비하여 <에로스>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이요, <수평적인 사람>입니다.

 

<자기 욕망에서 출발하여 자기 만족을 목적 삼고, 인간을 속박하고 구속하며,

마침내 중오와 원망으로 끝나는 사랑>입니다.

 

높은 것,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하고, 갖지 못하면 빼앗고,

죽여서라도 제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인간적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인간적 사랑이 어떻게 끝나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시작된 사랑은 마침내 남을 죽이고 자기도 죽이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 사랑 끝에 남는 것은 결국 <허무>입니다.

이것을 <인간적 사랑의 극치>라고

오스카 와일드를 위시한 여러 극작가들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살로메>라는 소설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세례요한을 사랑하다가 사랑이 증오로 바뀌어 살해를 요청했다는 소설을 씀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출발하여,

자기 희생을 방편으로 삼고, 그리고 창조적으로 역사 합니다. 이것이 참 사랑입니다.

 

본문은 사랑을 <은사>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로 <카리스마>, <신령한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선물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선물됨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깨달을 수 있는 놀라운 은혜이자 선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물을 받았다 하더라도 선물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선물로 받아 들여지지 않습니다.

 

선물로 인하여 속박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뇌물입니다.

선물이 수도 없고 사랑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에 감격하고 바른 사랑의 응답을 하는 것, 그 응답,

그 사랑 자체가 선물입니다.

 

주어진 사랑도, 사랑을 깨닫는 것도, 사랑을 받아 사랑 안에 사는 것도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을 받고 그 은사 가운데에 살아갑니다.

 

항상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내가 하나님께 감동 받는 것이지,

하나님을 내가 감동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치 성찬식과 같습니다. 무릎을 꿇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을 때 그러한 마음의 자세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까?

감사와 감격으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해야 합니까?

 

무릎을 꿇고 나는 이렇게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구제 불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같은 죄인을 이리도 사랑하십니까?’

하며 감사와 감격과 눈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받아드릴 때에 비로소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은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5:12)

이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깨달을 때에 그 사랑으로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228> 이하에 여러 가지 은사가 나와 있습니다.

병고치는 은사, 방언하는 은사, 통역하는 은사...

 

다 열거한 다음에 결론을 짓듯 가장 좋은 길, <가장 큰 은사>를 보이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확실히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가운데 으뜸가는 선물입니다.

가장 큰 은사입니다. 이 은사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은 유명한 <사랑장>입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함을 말씀합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상고해보면 사랑만이 동기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사랑만이 그 의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 말씀을 문자 그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

 

방언이란 무엇입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다른 나라 말을 하여 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방언입니다.

 

그런데 사랑 없는 대화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은 툭하면 대화 대화 하지만, <사랑 없는 대화> 이기에 소리만 시끄럽습니다.

(언어)의 전시장입니다. 좋게 대화한다고 시작했다가 싸움으로 끝납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똑같이 사랑이 없습니다.

자기 말만 하겠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를 지르다보니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

뜻도 의미도 없이 허공에 흩어지고 마는 소음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의 세태입니다.

 

말이 적어서 대화가 안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대화가 싸움으로 끝납니다. 사랑만이 가치 기준이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식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교만과 남을 멸시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믿음도 기적도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 합니다. 희생도 봉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요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다고

성경은 극단적으로 표현합니다.

 

간결하고도 분명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변론을 일삼습니다.

 

오래 전에 어느 공장에 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남의 집에 사글세를 살면서

몹시 어렵게 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결혼할 때 보니까

신부한테 굉장한 선물을 합니다.

깜짝 놀라서 "자네가 어떻게 이처럼 많은 선물을 하는가?" 하고 물으니

이 신랑 하는 말 좀 들어 보십시오. "어짜피 다 가지고 올 것인데

무엇을 걱정합니까? 필요하면 팔아서 쓰지요 뭐.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이 사랑입니까? 선물은 주지만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 없는 선물은 선물일 수 없습니다. 뇌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여자 분이 결혼해서 20년 동안 살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이 낳아 주고, 밥해 주고, 빨래해 주고..

20년 동안 희생만 했다면서 한숨을 푹푹 쉽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20년 동안 천하없는 수고를 했다 해도

알맹이가 쏙 빠졌습니다. 사랑이 없었습니다.

 

사랑 없는 수고는 한숨과 절망과 원망으로 끝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리한 판단도 있고 수고도 있으나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일은 어떠한 일이라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물론 효력도 없고 유익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만이 인간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만이 사람으로 사람 되게 하는 것이요,

성도로 성도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인간됨의 의미를 창조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은사입니다(5:5).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사랑의 영을 받아야, 사랑의 선물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은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 한 뒤 부끄러워서 갈릴리 바다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앞으로 큰 일을 하여야 할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를 찾아가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 속에 대답이 있습니다. 그 속에 문제의 원인이, 문제의 해답이 있습니다.

 

"네가 왜 나를 모른다고 하게 되었는지 아느냐?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앞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역시 사랑에 있다.”

 

예수님께서 오직 하나의 대답, 하나의 해결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 짧은 질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고 허무가 있고 실망이 있습니까?

진실하게 산다고 하는데 왜 이처럼 허무합니까?

착실하게 사느라고 살았는데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하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낙심도, 피곤도,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험한 세상 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쓰지 마십시오.

 

문제는 나요, 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큰 일은 못한다 해도, 이렇다할 업적, 이렇다할 성공은 없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불붙는 사랑, 이것만은 온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 사랑으로 응답하고, 그 큰 사랑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나의 인간됨 있고, 그것이 성도가 있어야 할 곳이며,

거기에 믿는 사람이 가는 <영광의 길>이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