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크리스천(진짜 기독교인) 3부: 이미 얻은 구원, 미래에 얻을 구원 - YouTube
◈리얼 크리스천 3부, 이미 얻은 구원, 미래에 얻을 구원 롬2:13, 5:1~2 ☞ ▣ 믿음론
◑도입
사단의 나라에서 건져서 그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되는 것
이것이 구속이요, 죄사함이고 칭의입니다
칭의란 로드십 체인지 (주권의 전이 Lordship change) 입니다
칭의라는 것은
미래의 심판에 이루어질 선포를
미리하는 것을 말하거든요
마지막 심판 때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잖아요
그 진노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을 구원이라 불러요
‘이미 얻은 구원’이라는 생각을 벗어나서
구원의 소망,
구원을 받은 자로서가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자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이미 의롭게 되어졌고
지금 계속 의로워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의롭게 될 것입니다...
◑미래적 구원, 종말론적 구원 개념
‘현재적 칭의’ 또는 ‘현재적 구원’
‘미래적 칭의’ 또는 ‘미래적 구원’ 또는 ‘종말론적 구원’
이런 표현들은 사실 일반 신자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습니다
이게 생소한 것 자체가 비극입니다
이걸 설명하자면
갈라디아서가 칭의에 대해서 얘기한 역사적으로 최초의 문서입니다
갈라디아서가 쓰여질 당시에 로마서는 아직 없었고
갈라디아서에서는 의롭다 하심 받았다는 표현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칭의'를 이미 알고 있었어요
유대주의자와 싸운다고 가정했을 때
유대주의자도 칭의를 이미 알고 있었죠
그건 유대교의 개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칭의는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았어요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이 ‘잘 하였도다 well done’ 해 주시는 게 칭의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순종하면, 그는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 때
‘너는 참 잘 했다’ (유대적 개념이 칭의)
복음서의 비유처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게 '칭의'거든요
칭의는 원래 마지막 심판 얘기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썼어요
재미있게 로마서에 가면 현재적인 칭의가 나오죠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는 얘기가 나오죠
우리는 로마서부터 시작하니까
갈라디아서도 그렇게 덮어서 읽으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의롭다 하심 받았다’는 표현만 있는 게 아니고
로마서에서도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다’ 라는 미래적 표현이 계속 나옵니다
근데 우리가 그건 또 무시합니다
제일 처음 마오는게 오히려 미래입니다
롬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shall be justified
야고보서와 똑같아요
바울은 롬2:13지나고 조금 뒤에 보면
우리 한글 성경 번역에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자기 복음이란 사실을 분명히 못 박습니다
로마서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바울도 우리가 율법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 받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얘기를 시작한 거죠
그럼 무슨 얘기를 했을까요?
그게 우리가 찾아내야 될 것이고
(구원, 칭의에 있어서) 미래적인 측면을 우리가 많이 잊어버렸죠
복음서를 읽을 때는 하나님 나라가 핵심주제인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오늘날 우리가 많이 강조하거든요
그런데 막상 복음서 읽어보시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얘기는 별로 많지 않아요
억지로 찾아내려면 많이 있겠지만
액면 그대로 편하게 읽었을 때는 다 <미래>입니다
몇몇 구절이 현재적인 느낌을 주거나
현재로 말하는 구절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미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할 때는 통계가 뒤집어져요
우리는 미래는 별로 얘기 안 합니다
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칭의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하나님 나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좋아하느냐면
그래야 우리 현재가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이미 그냥 받는 것 같고
그러니까 현재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미를 줄 수 있는 개념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개념에 몰두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게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전제하고
여기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를 가르치셨던 거죠
그런 면에서 우리는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으로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조금 더 신중하게 고려해야 되고
바울도 저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요
바울이 의롭다 하심을 현재라고 얘기하는 로마서에서도
미래가 여전히 나오고
그리고 그 현재가 끝이 아니라
결국은 미래 구원이 나오죠
로마서의 주제는 칭의가 아니라 사실은 구원이에요
그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 로마서 5, 6, 7, 8장에 쭉 나오는데,
다 구원, 칭의의 미래 소망에 관한 얘기죠
그런데 그 부분은 우리가 그렇게 눈여겨 보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패러다임을 바꿀 때
고쳐야 될 것 중 하나가
‘이미 얻은 구원(과거)’ 이라는 생각을 벗어나서
‘구원의 소망(미래)’을 회복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 패러다임 속에서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으면
결국 구원을 받은(과거) 자로서가 아니라
은밀히 말하면 구원을 향해 가는 자로서 (미래)
우리가 신약성경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미래(미래적 구원)를
우리가 너무 오래동안 잊어 왔습니다
‘구원 받았다’ 는 말을 자꾸 하다보니까 생기는 역효과는
구원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어요
내가 이미 구원 받았어요
지금 내가 나를 봐도 좀 시원치 않아요
그런데 구원 받았데요 구원이 시원찮은 겁니다
구원이 심리(관념)적인게 되버린 거죠
그런데 진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그게 아니고
마지막 심판 때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잖아요
그 진노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을
‘구원’이라고 불러요
실제 사건이에요 추상적인 게 아니에요
그 사건이 아직 벌어지진 않았죠
데살로니가전서에 말씀하는 것처럼
‘진노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는’ 살전1:10
그걸 우리가 기대한단 말이죠 이게 구원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바울이
어떤 때 구원을 현재화 시키느냐 하면
이유가 뭐에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걸 현재화 시키는 겁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현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에 참여하니까
그러니까 현재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니까
현재적인 언어를 쓰지만요
궁극적으로 미래적 구원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다 최후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한 행위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칭의도
세례 때 그 첫 열매를 받지만
그러나 종말에 최후심판 때 완성을 받습니다
첫 열매를 이미 받았지만,
완성은 아직 아닙니다
이 구도 속에 있습니다
이걸 ‘종말론 유보의 구조’라 그럽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 칭의, 의롭게 되고
혹은 구원 받게 되는 이 부분을 다룰 때
이미 현재 시제와 미래 시제를 함께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칭의의 의보다
더 포괄적인 구원의 의를 이야기할 때
예를 들면, 빌2:12절 이하에서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하는 이 부분에서는
분명하게 우리의 삶, 우리의 순종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인 것처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칭의는, 성화와 더불어 미래를 말씀합니다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때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게 ‘성화’ 라는 의미입니다
성화는,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그 뜻입니다
세례 때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종말에 그게 (성화가) 완성이 됩니다
그러니까 성화와 칭의는 완전히 병행(젓가락 두짝 같은) 개념입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아까 제가 말한 대로
‘칭의 의’에 과거나 완료시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칭의
구원에 참여한다는 그런 점에서
칭의와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그렇게 이해하고
또 성화에 의해서 바울이 과거나 완료시제를 사용해서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거룩에
믿음으로 참여한다는 점에 있어서
소위 시제 면에서 본다면
바울의 칭의와 성화의 의가 각각 다른 것으로 말하지 않고
동일한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성화 의’ 와는 다르게
‘칭의 의’를 현재나 미래시제를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칭의가 지금도 이루어져 가고 있고
또 이루어져 가야 될 것으로 말씀합니다
즉 윤리적인 부분에 대해서
칭의의 문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칭의에 열광하는 이유가 뭐냐면
이게 심판의 무죄선고가 이루어졌다는 것이거든요
그 무죄선고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초로 해서
이미 현재 우리에게 내려졌기 때문에
그게 사람들에게 반가운 거에요
그런데 궁극적으로 가면, 결국은 미래일 수밖에 없어요
왜냐면 마지막 심판 때 모든 것이 결판 나기 때문에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그 심판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이 얽힐 때는 *심판 때는 '미래'
언어가 현재화 되는 경향이 있어요
십자가와 부활이 얽힐 때!
그런데 문자적으로 다 완성됐다는 그런 의미와는 좀 다른 의미로
요한복음에도 ‘실현된 종말론’을 많이 얘기합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이미 영생을 가졌고..' 이런 식의 표현이 자꾸 나오는데
그게 예수님이 워낙 중요하니까 그런 거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이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내가 아니면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바로 그 유일한 계시의 통로가 되는 그 분이니까
그 분을 통해서 모든 게 이루어지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생명으로 옮긴 사람이라는 (현재적) 표현이 종종 등장하죠
그런데 이게 시간적으로 이미 그렇게 됐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나중에 보면 <미래>가 계속 그대로 남아 있어요
부활할 것이고, 심판을 받을 것이고...
(예수님께는 현재나 미래가 같은 일직선상에 있는 거죠
하나의 끝없는 밧줄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두 밧줄이 아닙니다
현재지만 미래처럼 말씀하고, 그 미래도 현재처럼 말씀하는 거죠)
많은 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칭의를 이해할 때는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사역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에 근거해서
믿는 신자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법정적인 행위로 정의합니다
또 이미 이루어진 칭의
그래서 이 칭의는 단 번의 칭의이고
인간의 행위 때문에 결코 바꾸어지지 않는
단회적이고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처럼
그렇게 이해를 하고 그렇게 가르칩니다만
바울의 “칭의의 의”들은
시제가 과거나 완료형 시제와 현재 시재와 미래 시제를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이미 의롭게 되어졌고
지금 계속해서 의로워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의롭게 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이 교회를 광야로 묘사하잖아요
광야의 이스라엘과 비교하는 것처럼.
한편으로 우리에게 십자가 라는 위대한 체험이 있죠
그게 구약으로 치면 출애굽 체험이죠
그러고 나서 들어간 곳은 광야이지, 가나안이 아닙니다
그 광야에서 가나안을 바라보죠
거기서 결국은 순종해라.. 고 명합니다
이스라엘은 거기 광야에서 실패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거기에 비유하면서 (믿은 후에도) 순종해야 된다!
히브리서에도 분명히 나오는 것처럼
‘구원에 미치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봐’ 계속 걱정하면서
그런 미래의 소망을 향해 가는
즉 ‘구원의 소망’ 이라는 미래적인 측면을
우리 구원의 패러다임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됩니다
한 편으로는 ‘구원의 소망’이라는 미래적 측면을 우리가 회복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순종의 구원론 적인 중요성’을 우리가 인정해야 되고
이 두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복음이 뭐가 좋습니까?
바로 그 대목에서 사도바울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조건과 관계없이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서 얘기를 들려주면서
이 복음이야말로 모든 믿는 자들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하는
능력으로서의 복음을 얘기합니다
칭의론은
무죄선언, 의인이라 칭함 받음
의인의 신분을 얻음 등
‘법정적 의’만 가진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며 언약의 주이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의 회복이라는
관계적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게 내가 말한 바가
우리 신약학자들의 대다수의 견해입니다
이렇게 칭의는, 법정적 의미도 있고
동시에 (하나님과) 관계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20세기 초반 까지만 해도
칭의를 전통적으로 법정적 개념으로만 이해했어요
종교개혁 때도 그랬고
중세 때도 그랬고
초대교회 때도 그랬습니다
왜 그러냐면 그게 헬라와 로마의 개념으로
‘의’란 말은
법정적 의미로만 해석 되었어요
그런데 그렇게해서 칭의론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무죄선언을 받음
-그래서 의인 이라는 신분을 얻음
이렇게만 (법정적으로) 정의하니까
당장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아 그러면 나는 세례 때 이미 의인이라 선언받고
이미 죄사함 받고
무죄 선언 받고
의인이라 칭함 받았으니까,
최후의 심판 때에 받을 그 의인이라 칭함을 미리 받았으니까
아 그러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최후 심판 때 나의 의인됨이 다만 확인될 뿐이다’
이렇게 되니까
윤리적 의무를 내포하지 않은 칭의론이 이해되고 가르쳐져서
알다시피 우리 개신교 전체의 그 신앙, 그 영성에
‘윤리 없는 구원의 확신’만 강조되는 상황이 되었죠
그래서 사실 19세기 말부터
개신교 신약학자들이
이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재기하기 시작했어요
‘칭의론이 과연 이렇게 윤리를 내포하지 못한다면
이게 바울신학의 중심이 될 수 없다
우리 신앙의 중심도 될 수 없다’
그래서 19세기 말부터 칭의론에 대한 심한 비하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19세기 말에 무슨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졌냐면
구약에서는, 의인은 이게 언약(계약)적 개념인데,
(쌍방) 관계에서 주어지는 의무를
관계 속에 있는 (쌍방)파트너들이 계약 준수를 다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의’란 관계에서 주어지는 의무를 다함으로써
올바른 관계를 유지함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헬라어로 편지를 썼지만
‘하나님의 의’를 말할 때는
구약적(즉 언약적)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거기에는 법정적 의미만 있는 게 아니고
관계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칭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면
1) 법정적 의미로 무죄선언 됨
즉 죄용서, 의인이란 신분 얻음 과 함께
이게 '법정적 개념의 의'고요
2) 우리가 이제 드디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
창조주와의 올바른 언약적 관계로 회복되었습니다
이게 '관계적 개념의 의'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을 얻고
그거는 하나님 쪽에서 하는 언약 지킴이죠
우리 쪽에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 은혜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관계속으로 들어감’이 ‘칭의’입니다
그러니까 칭의에 뭐가 포함이 되었나요?
계속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머무름이 (20세기에) 새로 포함된 것입니다
즉 윤리가 그 속에 내포된 것입니다 윤리적 요구가!
자신을 의지하거나
이 세상의 통치자 곧 사탄을 순종할 게 아니고
그게 아담이 한 짓이죠?
그게 아니고 이제는
의인이라는 신분 얻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아바(아빠)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아빠 노릇 해 주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자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런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 삶으로 들어감
그게 ‘칭의’입니다
이렇게 칭의를 <법정적> <관계적> 양쪽으로 다 해석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칭의론의 문제는
바울이 과거나 완료시제 뿐만 아니라
현재나 미래시제를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계속 의롭게 되어져 갈 것과
앞으로 계속해서 의롭게 될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의 칭의가 윤리적인 문제를
필수적으로 요청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충분하게 강조, 가르치지 못한데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구원파 신학이 바로 이런
하나님 은혜를 싸구려로 전락시키는
법정적 범주로만 해석하는 칭의론의 극단적인 이해입니다
그런데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정죄한 한국의 대다수
스스로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단의 목회자들의
복음선포가
사실상 구원파 신학입니다
이 법정적 개념으로만 계속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한 번 영원히 효과있는 칭의,
의인이라 칭함 받아버렸다!
종말에 최후 심판 때 확인 될 일만 남았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얼마나 강조합니까
그러면서 그 다음 말은 안 하지만
‘그러니까 아무렇게 살아도 별 상관 없습니다’는 뜻을
거기에 은연 중에 내포하고 있죠
이른바 정통교단 목회자들도 사실상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세례 때 받는 구원은 영원하다
최후 심판 때 확인만 하면 된다
의롭게 살면 좋은데 못 살아도 괜찮다’
그래서 거기에 무슨 대중신학이 발달합니까?
‘칭의는 우리가 받고, 그 다음에 최후심판까지는
이른 바 성화의 과정인데
의롭게 살려고 거룩하게 살려고 애를 써서 성화하면
상급을 받는다..’ 이제 상급신학으로 갑니다
성화를 옛날 중세에 행위,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상급을 이해를 해서
칭의론 자체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뭘로 전환되냐면
중세 가톨릭 신학으로 돌아갑니다
사실상 ‘상급신학, 공로신학’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런 신학적 왜곡 distortion이 지금 생기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부패하고, 비난과 조롱을 받잖아요
그게 다 신학적인 이유, 즉 복음을 잘못 가르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스스로 잘못 배웠고, 잘못 알았고,
잘못 가르치고..
많은 목사님들이 스스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윤리와 분리된 신앙을 가지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치니까
한국교회가 숫자가 저렇게 많고
그리스도인이라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그 영향력 있는 위치에 그렇게 많이 있는데
한국교회가 부패지수가 저렇게 높고
거짓과 불의가 그리고 갈등이
저렇게 심각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복음 자체가
칭의의 복음 자체가
잘못 이해되어서 그렇습니다
부분적으로만 이해되었기 때문이죠
(관계적 측면은 무시하고, 법정적 측면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이죠)
심각한 신학적 문제와, 심각한 목회적 문제, 영성의 문제
삶의 문제가 .. 이렇게 다 문제가 되는데
그 바탕에 ‘칭의 신학에 대한 오해, 또는 칭의에 대한 부분적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죠
사실 막상 우리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해 왔던 그 구원론은, ‘이미 얻은 구원’이고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얻을 구원’에 대해선 거의 배우지 못했는데
그런데 자꾸 이렇게 ‘우리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미래적인 구원을 얘기하면
이게 너무 부담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구원을 줬다가 다시 빼앗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런 한국교회 상황 가운데서
심리적인 저항이 큽니다
결국 유일한 방법은 성경말씀을 읽는 방법 밖에 없어요
그래도 말씀에 수긍할 의사를 가진 분들은 꽤 많거든요
‘실제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씀하고 있나?’
예를 들면, 로마서에서 바울이 의롭다 하심 받았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가 하면
5:1절에 들어가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평화를 누리자’를 얘기하고 싶었던 거죠
그게 끝입니까? 아닙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미래)으로 기뻐합니다!’ 롬5:1~2
하는 얘기가 이어지죠
그 다음부터 모든 얘기는
‘구원의 소망’입니다 *미래적 구원
그런데 이 소망이
우리가 이 소망을 기뻐하는데
잘 나갈 때만 기뻐하는게 아니라, 환란 중에도 기뻐합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환란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할 줄
알기 때문에 롬5:3
우리가 환란 중에도 기뻐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 소망은 가짜 소망이 아닙니다
진짜 소망입니다 어떻게 압니까?
롬5: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5:6절에 ‘우리가 연약할 때에’
:8절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10절에 ‘우리가 원수였을 때’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내어주신 그 정도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 봤냐?
그럼 바울은, 이 정도의 사랑이면
그러면 다 된 거나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가 원수, 죄인이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았느냐
그러면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이 진노로부터 구원 안 받겠느냐?
그게 5:9~10이죠
결국 그 구원이 확실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데
그 근거가 바로, 하나님이 지금 우리가 죄인인데
지금 우리가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주셨다 이런 사랑이다
그 사랑이 결국은 확실한 거죠
그게 롬8장에 가면 길게 늘어지지 않습니까?
마지막 결론이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느니라’
미래는 불확실해요
하지만 그 하나님 사랑은 확실합니다
그 중간에 있는 5장, 6장, 7장, 8장이 다
미래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어요
5장 후반부도 결국 영생에 이르게 되는 얘기죠
그래서 5장 제일 마지막 구절이 영생 이야기입니다↓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지금은 우리가 죄의 통치를 받아서
죽음에 이르는 길에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죄의 자리에서 건져서
은혜가 통치하는 자리로 바꿔주셨죠
그래서 이제는 은혜가 의를 통해서
우리를 다스려서 영생에 이르게 한다.. 그게 롬5장의 결론입니다
6장은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니까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설명합니다
6장 뒷부분에 가도, 우리가 사실 부정과 불법의 열매를 맺으면
당연히 죽죠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 종이 되어서
혹은 의의 도구, 병기가 되어서
거룩함이라는 열매를 맺죠 그 마지막은 영생이죠
죄의 마지막 (텔로스) 결과는 죽음이고
거룩함의 마지막 (텔로스) 결과는 영생입니다
롬7장은 거기서 율법은 뭐했느냐? 그게 7장입니다
롬8장은 결국 성령의 언어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거죠
그래서 생명의 성령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낸 얘기를 하면서
우리가 결국은 더 이상 육신을 좇지 않고
이제는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얘기를 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의 소망>에 이르게 되는지를 얘기합니다
그게 8장입니다
사실 5장부터는, 다 <미래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부분을 생각 안 하고 로마서를 읽는 거죠
계속 이미 얻은 구원을 생각하면서 그 부분(5~8장) 읽으니까
의미가 와 닿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신양성경 읽으면서 막연해 합니다
나는 이미 구원 얻었다고 전제하고 자꾸 읽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그거 머리 속에서 지우고
‘구원의 소망’을 향해 가는 나그네라는 (미래적) 입장에서
신약성경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훨씬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그냥 읽으시면 됩니다
그런 면에서 그런 <미래 구원의 소망> 측면들을
우리가 선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올바른 구원론을 정립하는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롬8장에도 사실
‘아미 구원을 얻었다’ 라는 그런 표현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8:13
이런 표현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순종 없이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롬2:6~11절이 유명하지만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그건 시62편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구절을 인용하셨고
베드로전서도 그 구절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결국 행한대로 갚아주시는 거죠!
참고 인내하면서 선을 행하면
그리고 영광, 썩지 않는 것.. 이런 미래적인 구원 개념이죠
이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으로 갚아주시고!
롬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그런 전제하에서 바울의 복음을 우리가 읽지 않으면
바울이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우리는 놓치게 됩니다
칭의 자체가 이런 <종말론적인 유보>의 구조속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통적인 칭의론을 교정하는데 있어서
1) ‘의’라는 것은, <법정적 개념>만 아니고
<관계적 개념>도 거기에 들어 있습니다
2) 또한 칭의가 세례 받을 때 다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최후심판 때 완성되는 '벌써와 아직도 아님'의 already not yet
유보의 구조속에 있습니다
한 번 다 이루어졌으니까 이제 아무렇게나 사는 게 아닙니다
그 두 가지 통찰이 중요합니다
지난 백 년 동안에 신약연구에서
이 종말론적 연구가 많이 발전했어요
그래서 이제는 다 아는 바에요
3) 셋째 나 김세윤 교수가 주장하는 것은
이게 언약적 개념이면
단순히 이방인들도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그렇게만 해석할 게 아니고
제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전 된 것입니다
골1:13에 너무나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칭의는, 곧 다시 말해서
사탄의 나라에서 건져서 그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됨입니다
이어서 :14절에서
이것이 구속이요 죄사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골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죄사함이란, 아주 소극적인 의미로 표현된 칭의입니다
이게 칭의입니다
칭의란, 곧 로드십 체인지 Lordship change 입니다
이 세 번째가 제가 새롭게 해석하는 칭의입니다
그러니까 칭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인데, 그 말은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됨입니다 주권의 전이 Lordship change 입니다
그 전까지는 사탄을 섬기면서 사탄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살았어요
사탄의 나라에 속해 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탄이 죄를 짓도록 하고, 사탄의 용병으로 사람들을 부렸어요
그리고 죄를 지으면 뭘로 품삯을 줬어요?
롬6:23절, 죽음으로 품삯을 줬어요 헬라어로 ‘용병이 받는 품삯’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아담적 존재로 죽고
새 아담적 존재로 부활했으니까
이제는 롬6장
‘사탄의 죄의 통치를 받을 게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통치를 받아야 된다’
이게 로마서 6장입니다
주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통치를 받아야 된다!
그러니까 칭의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통치’의 카테고리로 해석을 해야
칭의와 윤리가 유기적으로 통합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칭의와 윤리가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칭의론의 약점이 드러나서
의인이라고 살지 않으면서 의인이라 자처하는
싸구려 은혜! 행함 없는 믿음!
이런 쪽으로 빠지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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