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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크리스천 4부 복음의 회복과 한국교회의 미래

LNCK 2018. 11. 14. 18:59

리얼 크리스천(진짜 기독교인) 4부: 복음의 회복과 한국교회의 미래 - YouTube

◈리얼 크리스천 4부 복음의 회복과 한국교회의 미래   마22:12, 히6:4~6  

    1부,     2,     3,      4

 

◑서론

 

‘잘못된 구원론 때문에 교회가 타락했다’ 라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가 타락한 것은, 우리 죄, 타락한 본성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타락을

사실은 복음이 막았어야 되는데

막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의 잘못된 구원관이

우리의 타락을 방조하는 책임이 있다는 거죠

 

복음에 대한 이해가 확실해야 됩니다

바르고 확실해야 됩니다

 

구원 열차 올라탔으니

이제는 처국행 티켓은 따 놓은 게 아닙니다

양떼를 호도해서는 안 되지요

 

복음의 생명길로 인도해야죠

그가 선한 목자이죠

 

바울이 말하는 그 복음의 능력,

그 복음의 능력으로서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선명해야 되겠죠

 

내가 지금까지 알고 배웠던

그런 가르침에서만 성경을 보지 않고

오히려 성경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내가 바뀌어지고, 내 견해가 새로워져서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가

나아가서 한국교회가 말씀을 따라서

조금씩 조금씩 헌신되고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의 다른 관점

 

“칭의 이후에도 여전히 죄의 삯은 사망이며

만약 칭의 이후에도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이 옳다

칭의 후에도 우리가 예전처럼 육신대로 살면 죽을 것이다”

 

이 말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한국교회의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도발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이단으로 몰릴까봐 염려해서

그래서 너무 말조심하다가, 구원론에 대한 건전한 담론이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개념이 어폐가 있는 것이

저는 구원이 본래적인 의미의 구원은 ‘미래’라고 생각하니까

즉 마지막 심판 때 받는 것이 구원이니까

그 구원은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아직 안 받은 면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 구원 받았어도

‘구원의 소망’(미래적 구원)으로부터 탈락할 수 있죠

 

바꾸어 말하면, 구원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마지막 심판 때

택하신 자가 아닌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잔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22:1~14

초청 받은 사람이 떨어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마22: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4.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현실적으로 초대교회 때부터 배교는 실제 현실이었고

그래서 갈라디아서가 쓰여졌고

히브리서 같은 것이 필요했고

안 그랬다면 쓸 필요가 없었겠죠

 

배교는 현실의 생생한 경험인 상황에서 쓰여진 성경을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자가 구원에서 떨어지냐/안 떨어지냐는 질문은

추상적인 질문이거나

의미 없는 질문일 수 있어요

 

하나님이 1만 달란트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용서해 주신 척 하신 것일까요?

진짜 용서해 주셨을까요?

네 진짜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구원은 취소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요?

 

잔치 초대를 받았어요

잔치상에서 음식을 먹고 있어요

진짜 확실히 (구원의 잔치에) 초대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예복을 안 입었다는 이유로

손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났거든요

그게 뭘 말할까요?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11장에서 감람나무 가지를 얘기하잖아요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안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를 자르셨다' 라고 표현하죠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이 원래 잘 붙어있던 가지(유대인)도 자르셨다

그럼 너희(이방인)들이 접붙혀져 있는데

너희가 타락하면 얼마나 쉽게 자르시겠느냐?

 

롬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이방인, 우리)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런 표현은 굉장히 적나라한 표현이죠

그게 뭘 말해주겠습니까

 

그리고 개혁주의 신앙이 제일 어려워하는 게

히브리서인데

히브리서의 워딩도 분명합니다

 

히6: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제 위 본문에 대한 개혁주의적 주석에서는

그가 진짜 진정한 믿음에 이른 게 아니라고 자꾸 설명하죠

 

그러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진짜 믿음이 아닌 걸 그리기 위해서

이렇게 비슷한 표현을 겹치고 겹쳐서 서술했을까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위 구절의 그는 은혜를 이만저만 받은게 아니거든요

여러 가지 표현이 겹치잖아요

그러고도 타락할 수 있고,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 구원을 끝까지 지켜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얘기하고

예정을 얘기하지만

 

오히려 그 모든 것 속에서

인간의 책임이 똑같이 살아있는 면도

동시에 같이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정을 얘기할 때 조차도

사도바울이 예정을 언급한 이유는

구원 받았냐/안 받았느냐..

그 여부를 가리고 싶었던 게 아니라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라는 의미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 계획, 꿈이 있었다’

 

저 권연경 교수는 ‘하나님의 꿈’이란 표현을 좋아하는데

‘너희는 지금은 엉망진창이야

그렇지만 너희는 언젠가는 내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돼!’

 

그게 롬8장의 예정이에요

그렇게 예정하셨다는 거죠

 

그런데 에베소서에서 ‘예정’을 얘기할 때는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랑하는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예정하셨다고 나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에베소서에 나타난 예정의 핵심입니다

‘구원’ 측면에서만 예정을 보면 안 됩니다 좁게 보는 것입니다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니까 예정의 내용이 뭐냐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된다>는 게

예정의 핵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으로부터 탈락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할 때

당연히 탈락하죠

 

성도가 지금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친다면

그것으로부터 탈락한다고 말하는 게 맞아요

 

히브리서 식으로 말하면 ‘구원에 미치지 못하는’ 거죠 히4:1

가다가 중간에 엉뚱한 데로 빗나가는 거죠

 

갈라디아서 식으로 말하면 너희가 달리기를 잘 해왔었는데

누가 너희를 막아서 더 이상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했느냐?

 

달리기를 잘 하고 있다가 목표에 이르지 못했는데

이상하게 된 거죠 그게 갈라디아서입니다

 

빌립보서 식으로 말하면

푯대를 향하여, (바울이 대놓고 얘기합니다)

 

내가 아직 얻었다 함도 아니요

그러니까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니라잖아요

아직 목표가 앞에 있답니다

 

그 목표에 이르려고 몸을 앞으로 쭈욱 내밀고

열심히 달려간다고 했는데, 무슨 얘기입니까? *빌3:14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처럼

‘이미 이룬게 아니라

앞에 있는 것을 향해서 달려가는’ 그림을 그리는 게

가장 정확한 그림이고,

그리고 잘 달려야죠 잘못 달리면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게 히브리서가 그렇게 심판을 경고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마태복음도 다 그런 얘기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자라면서 늘 우리가 불렀던

‘나는 구원열차 올라타고서 하늘 나라 가지요’

‘이제는 천국행 티켓은 따 놓은 거다’라고 배웠지만

 

구원은 엄격히 말하면 따놓은 당상이 아닙니다

구원열차 가는데 거기서 장난하다가 열차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자기가 뛰쳐나갈 수도 있고.. 별 일이 다 있을 수 있죠

 

고전9:27절을 보세요

‘내가 구원의 복음을 남에게 전파하고

나는 탈락할까봐 두렵도다’

그렇게 까지 표현하고 있어요

 

그것이 올바른 성경적인 사고입니다

그게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네 구원을 완성하라’ 빌2:13

는 말씀의 뜻입니다

 

거기서 구원이란

공동체적 안녕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 개인의 구원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바울은 ‘다 이루었다’가 아니라

빌3장에

구원의 현재, 내가 경주해야 할 곳을 향하여 가서

종말에 주께서 당시 로마 경기장에 시상대를 그림으로 상상해 봅니다

 

황제가 ‘다소 출신 바울 올라오라

너는 경주를 온전히 일등으로 마쳤어 상 받아라’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달리기다, 순례길이다>

이렇게 보는 게 정확하겠습니다

 

구원의 목표를 향한 현재 삶이 달리기이죠

지금 우리의 삶은, 구원의 소망을 향한 달리기입니다

 

혹은 바울이 즐겨쓰는 표현이

‘걸어간다’는 풀어서 설명하면 ‘행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페리파테오

 

그게 원래 헬라어도 그렇고

히브리어도 그렇고

삶을 살아가는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비유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목표가 있는 길을 걸어가는 거죠

그래서 복음 자체가 ‘호도스, 길’ 이라고 말씀합니다

복음 자체가 걸어가는 길입니다 즉 개념이나 생각이 아닙니다

삶이란 뜻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제자를 삼으실 때

제자들이 하는게 ‘아멘’ 하는 게 아니고

따라나서는 것이었습니다

 

‘내 말을 듣고 아멘 해라’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의 삶이

바로 광야 여정과 같이

가나안이라는 구원의 목표를 향해서

우리가 순종함으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이제 아직 구원 안 받은 거다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한) 그러면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이미 받은 것처럼,

너무 당연히 생각해 왔기 때문에

 

사실 '구원의 소망'(미래적 구원)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서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의 ‘소망(미래적 구원의 완성)’ 이야기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살전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롬8:24 ‘우리가 소망으로(소망가운데)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미래 구원의)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러면 정말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의의 열매, 또는 거룩한 삶이 없다면

그는 구원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고 바울은 경고합니다

‘바로 서 있다고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2

 

성경이, 또한 바울은 이중으로 가르쳐요

1) 한편은 그렇게 경고해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재판석 앞에서

우리가 몸으로써 행한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 것을 경고합니다

 

롬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위 두 구절에, 거의 같은 문구로 신자의 심판대를 경고하고 있는데요

 

롬2:5~10절까지

행위대로 심판하심을, 신자도 탈락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인들이 그럴까봐 바울이 걱정해서

너희들은 탈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때 누구를 예로 들었느냐면

옛 이스라엘, 그들도 홍해를 건너는 출애굽의,

우리의 세례에 해당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도 영의 양식, 우리 성찬식에 해당하는 성령의 양식을 먹었어요

광야에서 만나와 므리바의 물을 마셨어요

 

근데 어쨌다고요?

도중에 구원의 완성인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우상숭배하고, 음행하고 해서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것이 경고입니다

성경은 경고도 합니다

 

2) 그러면서 당시에 바울은

설령 우리는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시리라

 

그래서 그가 우리 구원을 예정하시고

때가 되매 구원하시고

종말에 심판대에서 그의 십자가의 속죄의 죽음과

그의 아들의 중보로 구원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구원이 확실하다

 

이렇게 성경은 양쪽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느 하나를 약화시키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만 후자(위 2, 구원의 보증, 확신)을 누릴 수 있을까요?

지금 하나님을 의식하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행사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그의 뜻을 의식하고

그것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즉 순종하는 사람에게

2)번이 적용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패도 하지만

여전히 신실히 믿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후자 2)가 적용이 됩니다

 

그런데 아예 난 세례 때 이미 칭의 받았으니까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니까.. 그러면 위 1)의 경고가 적용됩니다

아무렇게나 살아야 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건 구원파(한 번 구원 영원 구원) 적으로 믿는 거지요

 

주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성령이 지금 나에게 하는 말에 귀를 딱 닫아버리고

사탄의 통치아래서, 사탄의 종노릇하며 살면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주신다.. 라고 자꾸 주장하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엄연히 그런 사람은 멸망한다고 써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믿음의 현재 속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함에도 가끔 실패하고 실수하고 죄를 짓고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다시 뉘우치고

이제 정말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올바른 삶을 살아야지..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끝까지 용서하시고 지켜주시고

최후심판에 주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우리 구원이 완성이 됩니다

그 말에 위로가 되는 거지요

 

이미 구원을 따놓은 당상으로 생각하고

세례 받고 칭의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마치 세례의 물이 마치 옛날 중세 가톨릭교회에서 그랬듯이

무슨 마술적으로 작용해서 아무렇게 살아도

최후의 심판 때 나를 보장해준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책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논리적으로 사실 그게 얼핏 보면 어긋나 보이죠

성경이 그 두 가지를 다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측면이 있죠

 

때로는 <주권>이 강조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책임>이 강조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예를 들면 굉장히 힘겨워하는 그런 성도들,

열심히 살려고 하지만 인생이 힘들어서 많이 지쳤어요

 

그런 성도들에게 가서 무슨 얘기를 하겠습니까?

‘너 제대로 안 살면 죽어!’ 그러겠어요?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얘기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는다

어렵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이끌고 가실 것’이란 얘기를 하면서

힘을 내게 해야 합니다

 

반대로 약간 교만하고, 방자하게 살면

그런 사람들에게 가서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은 변치 않으셔’ 라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너 정신 안 차리면 끝장난다’ 하고 경고하는 거죠

 

신약성경도 그 상황에 맞는 얘기들을 합니다

일례로 로마서 8장 끝에 가면,

사실 사도바울이 지금 나는 마치 도살자 앞에 선 양처럼, 죽을 목숨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처럼 얘기합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신뢰하죠

하나님의 사랑이 변치 않을 것임을 아니까요

그런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전부인 것처럼 얘기하죠

 

그런데 바로 그 앞에 보면, 성도들을 향해서

또 제대로 순종 안 하면 끝장난다고 경고를 계속 하죠

 

바울도 한 편으로는 그런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린도전서 9장에 보는 것처럼

나 역시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는 자기도 부정 못합니다

 

(상황에 따라 두 가지를 다 말씀합니다

구원의 탈락에 대한 경고 와 구원의 보증)

 

왜냐면 하나님이 구원자이신 한

내가 내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 겸손함 속에는

자연히 하나님이 구원의 주권자인 한에는

구원이 내 마음대로가 아니다

 

나 역시 하나님의 그 뜻에 어긋날 때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겪은 하나님은

적어도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그 십자가는 바울이 감동하는 것처럼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까지

아들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우리가 신뢰하는 것이고

그것을 우리가 미래를 보면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많겠지만, 쉽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의 그 사랑을 신뢰하면서

우리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거죠

 

바울이 롬8장에서

‘그러니까 지금 열심히 잘 하자!’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지

‘그러니까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신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시지만

그러나 우리의 책임에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함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역설적인 표현이 가끔 등장하죠

예를 들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가라’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소원을 두고 행해 나가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가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두 개가 서로 충돌하는 상황은 논리적으로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보는 관점의 문제인 거죠

 

 

◑우리가 너무 안타까운 것은

칭의와 구원론에 대해서

왜곡된 구원론, 전통적인 부분적인 이해의 구원론

구원파적인 값싼 구원론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런데 대해 다른 얘기를 하면 ‘행위구원론자’ 라고 비판받는데

그래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목회자들의 복음에 대한 바르고 깊고 넓은 이해가 있어야 되고

이 복음을 해석해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신학적 사고 능력을 길러야 됩니다

 

그런데 이러기에는

신학교 3년 목회학 석사 과정이 너무 짧습니다

자기가 신학교에서 다 배웠다고 자만하지 말고

계속 평생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구원론에 관련된 서적을 계속 읽고 공부하든지

동료 목회자들과 스타디그룹을 만들어서 함께 토의하고

연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바르고, 깊고, 넓게 선포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의) 부분적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복음 전체가 왜곡되는 일이,

우리 믿음생활이 왜곡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복음 회복 운동이

나아가 교회갱신운동으로까지 이어지리라 봅니다

 

교회갱신은 무슨 운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이 바로 서는 그 토대 위에서

복음에 대한 이해가 확실한 그 토대 위에서 되어질 것입니다

그 토대가 없으면.. 기초가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론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참된 믿음과 참된 구원의 복음의 전파!

그것이 목회자로서 하나님께 대한 소명의 자기 의무를 다 하는 것이고

자신의 양떼들에 대한 목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양떼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말고

양떼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지요

그게 책임감 있는,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목회자죠

 

 

◑한국교회의 구원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경전체의

로마서도 로마서 전체의

갈라디아서도 갈라디아서 전체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전서와 빌립보서와

혹은 고린도 전후서 전체의 가르침을 충분하게 생각하면서

 

왜 이 성경에서, 이 신약교회에서 이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충분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이 구원론을 이해할 때

바울의 어떤 특정한 서신(로마서 나 갈라디아서) 뿐만 아니라

야고보서의 가르침도 주목해야 되고

특별히 복음서, 마태복음의 가르침도 주목해야 됩니다

 

분명하게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나무는 열매를 통해서 봐야 된다

 

뿐만 아니라 소위 열 처녀의 비유라든지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순종, 제자도, 행위(순종)가 없는 자들은 분명하게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거든요

그런 가르침과 같이 생각해야지

 

마치 성경 특정한 어떤 부분에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엡2:8 등

그 부분 만을 너무 절대화시켜서

다른 성경을 보지 못하고

복음서의 예수님의 교훈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편협된 구원론을 가지고 있는 이 문제가

해결되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폭 넓게 보고

폭 넓게 가르치고 또 설교될 때

한국교회의 잘못된 칭의구원론 문제가 조금씩 개선되리라 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울이 말한 복음의 능력,

구원의 능력으로서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선명해야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에 대한 자신감이죠

 

신학적인 이해 이런 문제를 떠나서

실제로 이 복음이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래서 하나님을 얘기할 때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죽은 몸, 사라의 죽은 태를 살려내서 아들을 주셨던

바로 그 생명의 하나님,

 

혹은 마른 골짜기의 엄청난 뼈들에게 생명을 주어서 살아나게 만드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스토리가

복음의 스토리 라는 것을

사실 분명히 확신하는 것이 목회자들에게 필요합니다

 

저는 <확신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그 자신감이 많은 분들에게 없을 수 있어요

 

그 확신이 있을 때, 그 확신을 가지고 선포하겠죠

우리 문제에 대해서도 뒷 걸음을 치면서

하향평준화 방식으로 복음을 값싸게 전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목회자의 책임을 분명히 선포하고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초대의 길을 누리고..

 

저는 그러면서 능력으로서의 복음 자체를

우리 목회자들이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하도록

좀 더 치열하게 말씀과 씨름해야 합니다

 

혹은 말씀의 도전 앞에 우리가 마음을 열고

신학적으로 변호하려고

자꾸 방패를 치지 말고, 신학의 틀에서 좋은 의미로 벗어나서

그 적나라한 성경의 메시지 앞에 자신을 오픈해야 되겠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2;12에서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강조하지만

바로 13절에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제 그리스도께서 하신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이루신

그 예수 그리스도나

혹은 오늘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우리의 의를

현재 시제를 통해서 이루어가시는 그리스도나

 

혹은 장차 재림해서 우리의 최종적인 의와 구원을 완성하실 그리스도

그 분은 히브리서 저자의 말처럼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어제 이루신 그 분이

오늘 우리 안에서 이루시고

또 재림하실 때에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의와 구원은

아무리 인간의 순종과 행위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와 인간의 합작품이 아니고

전적으로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고

삼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라는 말이

잘못되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부분적 측면으로 맞습니다 이런 면도 반드시 있습니다)

 

결국 구원을 얻는 것도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도

구원의 완성도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 조차도

우리의 순종함 조차도

은혜로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주장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책임을 요구하는 윤리적 문제

즉 순종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시고

이루어가실 일을 위해서

'너희는 성령을 좇으라

성령을 따르라'

하고 말씀하고 있고

 

성령을 좇고 따라야 할 것은

역시 또 우리의 책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7: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왜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항상 긴장을 느낍니까

첫째는 그들은 신앙고백이 분명했는데

버림 받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들은 주여 주여 상당히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긴다고 섬긴 사람이지만 버림 받았습니다

그들은 봉사하는데, 사역하는데 있어서

남다른 은사와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큰 열매를 맺은 사람이었습니다만

나중에 버림 받았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가는 문은

많은 사람들이 인기를 끄는 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고 가니까

나도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이 얼마든지 큰데

그 길이 바로 잘못된 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안하고

또 하나는

마지막 주앞에 서는 그 날까지

그들의 진실한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는 불안을 느낍니다

‘나도 그럴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교회안에

이런 불행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확률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 교회에 수천명 신자 중에

과연 이와 같은 거짓된 성도의 부류에 들어갈 수 있는 위험을 가진 사람이

도대체 몇 %나 될까요? 우리는 정확히 모릅니다 하나님만 아십니다

 

진짜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Real Christians obey Jesus’ teachin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