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크리스천(진짜 기독교인) 2부: 변질된 복음 - YouTube
◈리얼 크리스천 2부 변질된 복음 롬16:26, 갈5:6 ☞ ▣ 믿음론
◑도입, 내용 요약
순종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패지수가 저렇게 높고
거짓과 불의가 그리고 갈등이 저렇게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요?
칭의의 복음 자체가 잘못 이해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심각한 신학적 문제와 심각한 목회적 문제, 영성의 문제, 크리스천의 삶의 문제를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는가요?
대안은 칭의론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칭의의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 해결책입니다
바울이 믿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행위가 없이 믿음으로 라는 의미가 아니었어요
바울이 근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게
바로 구약에서도 그렇고, 중간기 유대교도 마찬가지지만
신약 전체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종해야 된다는 거죠
바울은 로마서 전체를 이야기 할 때는
또 독자들에게 핵심적인 메시지를 이야기 할 때는
그가 말하는 믿음이 결코 순종을 혹은 ‘사랑의 역사’를
배제하는 믿음이 아닌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실 때
반드시 그 사람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수십년 목회를 하면서 목사의 입장에 서면
이름은 요란하지만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을 저 (옥한흠 목사)는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여러분 아시고 싶습니까?
이렇게 하면 됩니다
목사가 말씀을 가르치거나 설교를 하면서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복음이 얼마나 변질되고 있는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둔감해지면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름만 살았고, 행위는 죽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복음이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에는 <진리의 양면성>이 들어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 믿음의 진가는 순종하는 행위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구원에 절대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행위는 구원의 필연적인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따로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가리켜서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로 비유하셨습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믿음’과 ‘순종’을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고
가르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로마서를 설교했으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는 야고보서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믿음이 행위와 함께 간다
혹은 행위를 통해서 완성된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를 읽을 때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바울서신으로 넘어와서 복음을 얘기할 때는
‘우리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라고 얘기합니다
그때는 우리의 행위를 빼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 자체가 행위를 포함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 자체가 행위와 엮어질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거죠
앞뒤(야고보서와 로마서)가 안 맞는 거죠
신약성경 내에 모순이 있다는 거죠 (이것은 잘못 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부터 시작해서
바울 서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문서는
(사실은 바울서신도 다 포함하는데, 우리가 바울서신을 오해한 것이죠)
다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즉 ‘순종’없이는 마지막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이 관점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건 뭐냐면, 순종하지 않으면, 혹은 거룩함을 추구해라
이것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뵙지 못하리라
이런 식의 이야기들!
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의 다른 모든 문서는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목소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다르냐?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신약성경 전체(순종을 포함하는)를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바울서신을 다시 봐야 합니다
바울은 과연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저 권연경 교수는 개인적으로
바울서신을 끝까지 다시 읽어보니까
바울도 똑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믿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행위가 없이 믿음이라는 의미가 아니었어요
바울은 로마서 전체를 이야기할 때는
또 독자들에게 핵심적인 메시지를 이야기할 때는
그가 말하는 믿음이 결코 순종을
혹은 ‘사랑의 역사’를 배제하는 믿음이 아닌 것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의롭게 되느냐, 구원을 받게 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유대주의자들과 날카롭게 대립할 경우에 있어서는 (행위를 배제했죠)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의 행위’를 구원 받는데 있어서 필수적 요소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과 대립할 경우에 있어서는
바울은 철저하게 (율법의) 행위를 배제하는 믿음을 말씀합니다
유대주의자 들이란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 가운데
‘율법의 행위들’, 곧 할례, 절기 준수, 음식규정과 같이
유대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이 3가지 규정을 특별히 강조하고
지킴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행위들’이란
바울이 로마서, 갈라디아서에만 사용한 표현으로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관계를 다루는 문맥가운데서 등장하며
그 의미는, 율법의 도덕적 준수를 의미하지 않고
유대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할례, 절기준수, 음식규정과 같은
율법의 외적 규정들에만 집착하면서
정작 율법의 다른 계명(도덕법)은 지키지 않는
위선적인 종교생활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런 유대주의자들을 향하여
바울은 ‘율법의 행위들’로는 의롭게 될 수 없으며 (*행위, 순종을 반대한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바울이 반대한 것은 유대인의 껍데기 정체성이었습니다
순종하지는 않으면서, 껍데기 정체성에 집착하며 사는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은 그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구원 못 받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너희는 진정한 믿음이 필요한데
그 믿음이란, 갈라디아서식으로 말하면
믿음을 통해서 성령을 받는 것이고
로마서 식으로 말하면
믿음은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행위를
믿음이라 부릅니다
결국 생명의 약속을 바라보는 거죠
바울은 그런 복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6절 이하에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롬1:5에서는 순종하는 믿음
롬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롬16:26에서는 ‘순종하는 믿음’
롬16:26 ‘..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헬라어 문법적으로 본다면
‘순종 곧 믿음’
믿음이 순종인 것처럼 그렇게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이야기할 때
순종을 배제하는 믿음의 행위를 배제하는 믿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 역시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서
복음을 전할 때
진정한 길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인데
바로 그 얘기를 하면서
믿음과 은혜의 개념으로 소개하고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복음을 선포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사실
우리가 바울을 너무 잘못 읽고(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은혜로, 믿음으로’ 라고 하는 그 말 자체가
순종이나 행함을 면제해 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 믿음’으로만 순종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사도바울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많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믿음과 은혜란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단어를 들을 때 머리 속에 남는 생각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그래서 ‘행위가 아니다’가 남아요
‘은혜’도 똑같아요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그러니까 두 단어(믿음, 은혜)를 다 말해도 효과는 똑같아요
행위가 아니라는 생각을 결국은 가지고 있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행위가 아니라’는
생각만 남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중세에 그 행위를 공로로 봐서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구원을 얻는다는 왜곡된 신앙의 반발로
은혜로만, 믿음으로만을 강조하다가
정작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성경의 가르침, 그 쪽은 외면해 버렸습니다
우리가 최후 심판 때 우리가 행한 행위대로 심판받는다는
내용은 싹 잊어버렸습니다
의의 열매를 안 맺으면
그리스도 안에, 주 안에 서 있는 게 아니고 넘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성경 곳곳에 있는데
그 부분은 다 망각해 버렸습니다
(마르틴 루터 부분 중략)
바울이 가르치는 복음 속에서는
로마서, 갈라디아서가 사도바울의 복음인데
그 복음에서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신 은혜로 주어지는 의' 뿐만 아니라
또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능동적인 의’(순종)까지도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복음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뿐만 아니라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르게 살아가야 될
우리의 삶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에 나타나있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속에서,
즉 산상설교에서 제자도를 가르치신 것처럼
예수님의 복음도 제자도(순종)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칭의’와 ‘성화’가 하나요 동일한 것으로 믿습니다
루터교 운동은 그런 가톨릭에 대항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칭의와 성화를 가능한 멀리 분리시켰습니다
그러나 2세대 종교개혁가들
예를 들면 칼빈 같은 이들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면서도
가능하면 둘 사이를 가까이 연결하였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칭의 없이 성화 없고,
동시에 성화 없이 칭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의 경우에서는
성화 없는 칭의를 어누 순간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동시적으로 생각했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그가 참된 칭의를 받은 자인가?’ 할 때는
성화의 결과를 통해서 칭의 받음의 여부를 알 수 있을 만큼
이 성화의 중요성을 칼빈은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문제는, 서구개신교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에 칭의와 성화의 문제가
칼빈의 견해보다도 루터의 견해가 더 영향을 미치고
마치 루터의 견해가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대변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되고 가르쳐진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입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도 받고
땅의 복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할렐루야 하고 열광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설교하면
성도들은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져 버립니다
그런 내용은 듣기가 싫고, 몹시 거북스럽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는 비슷한 반응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중의 반응에 예민해지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제가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에 죄라든지, 회개라든지
순종이라든지, 거룩이라든지 하는
듣기 피곤한 말씀은 할 수 있으면 피하거나
꼭 말을 해야 할 때는,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하고 싶어하는
유혹에 제가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절대로 바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절대로 원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이 강단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 결과, 저도 모르게 복음을 조금씩 조금씩 변질시키는 설교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믿음'이란 단어를 말할 때는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갈라디아서에 보면
왜 믿음이 중요하냐?
믿음이 아니고는 성령을받을 수 없으니까
율법의 행위로는 성령을 못 받지 않느냐?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사건을 예로 들면서
믿음이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것’을
믿음이라 그러는 거지
‘믿으니까 행위는 안 살아도 된다더라’는 얘기가 아니었어요
기독교인들이 그 믿음을 표현할 때는
아브라함과 똑같이
'이제는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표현하잖아요
바로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로마서 10:9~10에서
'또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믿음으로 라고 말할 때
결국은 바로 그 생명의 통로가
십자가와 부활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믿음과 은혜의 언어는
실제 바울서신을 살펴보면
행위를 소위 무력화시키거나 도덕적 열성을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믿음이라는 단어가
도덕적(윤리적) 개념과 결합되어요
데살로니가전서에 ‘믿음의 행위’가 나옵니다
살전1:3 ‘너희의 <믿음의 역사 work of faith>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그런데 우리 한글성경은 '행위'라고 번역을 잘 안 해요
그래서 ‘믿음의 역사’라고 이상하게 번역했어요 *work of faith
또 로마서에서 ‘믿음의 순종’이 로마서의 처음과 끝에 2번 나오죠,
롬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롬16:26 ‘..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갈라디아서에서도 믿음을 유일하게 정의하는 대목이 한 구절 나오는데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사랑을 통해서 역사하는 믿음!’
만약에 바울이 도덕적인 행위가 배제된 믿음을 말하고 싶었으면
그런 표현이 나오면 안 됩니다
산통 깨지니까요
결국 믿음과 순종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같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율법의 순종’이라는 말을 대치하기 위해서
‘믿음의 순종’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분리될 수 없다면
'행위 구원론'과 구별되는 점이 무엇인가요?
의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뭡니까?
그러면 그게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하는 행위로써
그게 우리 공로로 하나님께 제시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적 은혜의 구조입니다
‘의의 열매’는 바울의 언어로 보면
갈5:22 성령의 열매,
빌1:11은 ‘의의 열매’
롬6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의 열매’를 성령의 은혜로 맺습니다
‘의의 열매’, 즉 선행
그게 우리 힘으로 맺어가지고 그걸 하나님 앞에 내세워서
이 공로를 인정해 주셔서 나를 구원해 주시든지
아니면 '세례 받았으니 이제 상급에서 하늘나라 아파트의 로얄층에 보내주소서' 그런 말이 아니고
성령의 은혜로 얻는 거에요 롬8장, 갈5장
육신을 좇는 사람이 아니고, 성령을 좇는 삶!
그게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맺는 열매가 선행입니다 ‘의의 열매’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니까 ‘성령의 열매’ ..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행위가 있어야 됩니다
바울이 그걸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는데, 우리가 오해했습니다
행위가 없어도 된다고요!
예수님도 우리가 선한 열매 맺지 않으면 어쩐다고요?
심판의 불에 태워버린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성령이 은혜로 맺는 의의 열매를
우리가 공로로 하나님께 제출해서
마치 우리 공로인 것처럼
이것을 보시고 우리를 받아주시고
큰 상급 주십시오.. 이게 아니고
당연히 칭의된 (의인의 신분을 얻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으로써 마땅히 할 바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게 의의 열매, 선행입니다
그것 없이 칭의의 완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현재적 칭의’,
성령을 좇는 삶의 따라
예수님의 통치 아래서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거죠
근데 요약하면 '이중 사랑'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라 우상숭배 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 없는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분위기가
행위를 얘기한다던지, 순종을 얘기한다던지,
거룩한 삶을 얘기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이건 바로 ‘행위구원론자’로 직결되는 것처럼
그런 분위기에 너무 오래 젖어있다 보니까
위의 이런 얘기를 들으면 거부감이 생깁니다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렇죠 이것은 패러다임의 문제입니다
패러다임, 소위 말하는 바울
정확하게 해석된 바울이 아니라
피상적으로 오해된 바울 패러다임에 갇혀 있으면
어디를 펴도 거기에 맞춰서 성경을 읽게 됩니다
정 안 맞춰지면, 슬쩍 넘어가 버립니다 건너뜁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통합이 안 되니까 조용히 건너뜁니다
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계속 잘못 믿고, 잘못 가르치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의 많은 부분을 다 무시하고 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을 보면, 히브리서나 마태복음이나
예수님의 혹은 사도들의 경고가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그 주석은 거의 모든 논조가
자꾸 변증적이 됩니다 ‘아 이건 그런 뜻이 아니고
구원에서 떨어진다는 얘기가 아니라..’ 계속 이렇게 갑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설명해야 주석인데
뭔가 특정한 교리를 염두에 두고
자꾸 그 교리를 변호하기 위해서 주석서를 쓴 것 같아요
그럼 히브리서의 성경 주석이 아니지요
그건 성경을 성경대로 보는 게 아니고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틀 안에서 성경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이제 행위가 포함되지 않은 구원의 방정식이
이미 정해져 있는 거에요 자기 머리 속에
‘행위’는 그 방정식 속에 없어요
그런데 '행위'로 가지고 들어오면,
이게 그 구원의 방정식 속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학적 사고에 (행위가) 들어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
결국 그렇게 우리가 칭의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윤리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고
당연히 거룩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저희가 그렇게 배우지 않고
예를 들면 우리가 윤리나 행함이나
또는 거룩함을 이야기하면
‘저 사람은 행위구원론자다!’ 라고 매도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게 큰 과오입니다
우리는 칭의가
세례 때부터 현재부터 최후 심판 때까지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입니다
그런데 현재 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오는 은혜를 덧입어서
선행을 해야 된다고 강조하면
그게 행위구원이라고 하니,
이게 ‘은혜에 의한 구원’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단단히 덮힌 뚜껑처럼
다 덮혀 있습니다
그 뚜껑을 벗겨야 우리가 액면 그대로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해석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칭의는 또는 구원은
행위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분명한 가르침은
미래 구원에는 올바른 행위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과 야고보서 두 성경에서
모두 얻는 결론은
종말론적 구원에는 행위(순종)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칭의 교리는
행위와 무관한 칭의 혹은 구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태복음 야고보서 갈라디아서 모두
행위(순종)없는 칭의나, 행위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신칭의를 가장 날카롭게 설교하고 있는 편지가
갈라디아서입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이 하는 얘기가
갈5:19에 육체의 행위들이라 부르죠
‘육체의 일들’이라 번역되어 있는데, 정확하게는 ‘육체의 행위들’입니다
그걸 쭈욱 열거하고 마지막에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갈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 다음에 6장으로 가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가 업신 여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다’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콩 심으면 콩, 팥 심으면 팥 나는 거죠
그러고는 우리 인생을 두 가지로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씨를 뿌릴 수도 있는데
그러면 파멸, 썩어짐을 수확한다, 끝장 난다는 얘기입니다
반대로 성령에다가, 혹은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리면
그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수확한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영생에 이르는 방법은
성령에다 심는 것 밖에 없습니다
육체에 심으면 끝장납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얘기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받는다는 얘기할 때
바울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행위 없이도 구원 받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했던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위의 5장, 6장에서 언급했던 구절은 나오면 안 돼죠
소위 ‘칭의 의’는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
유대주의자들과의 대립 가운데서 ‘칭의 의’를 사용하지만
‘성화 의’에 대해서는 데살로니가전서나 고린도전후서 등에서
교회 상황에서 ‘성화 의’를 주로 사용할 때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말하는 가운데서
바울은 ‘성화 의’를 말하면서
여러분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진 자들이다.. 그렇게 강조합니다
그런 강조는 당연하게 윤리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미 거룩해 졌으니까, 거룩한 자들이니까
여러분들은 거룩한 백성으로서 여러분들의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에 거룩함(성화)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과연 완벽하게 거룩하게 살아서 구원 받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
이렇게 비아냥거리며, 그런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건 율법주의자와 같은 생각이라고 주장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요?
사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이면에는
소위 개신교적인 어떤 의미에서 완벽해야 된다는
어떤 강박관념, 도덕적 완벽주의!
그 완벽 개념이 왜 필요하냐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어쨌든 우리 공로로는 안 되어야 된다는 전제하에서
그런 완벽주의 논리를 들고 나오는 거죠
‘거봐, 우리는 아무리 해도 완벽하게 못 살잖아
그래서 믿음으로만,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 받는 거야!’
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
그 정도로 완벽을 요구하신게 아닙니다
성경에도 ‘온전하라’고 말씀할 때 마5:48
그것은 일상적인 의미에서 온전하라는 뜻이지
아무 결점이 하나도 없는 순도 100%의 완벽주의는 아닙니다
구약에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결점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행위를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했을 때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하나님이 정말 엄격한 눈으로 보시면 구원을 아무도 못 받겠죠
당연히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시고
그 순종을 근거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하실 때는
그 순종을 보신다고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어떤 순종의 수준을 놓고서
하나님이 소위 접어주고 (봐 주고) 들어가시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거지
소위 무슨 컴퓨터 다루듯이 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그건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제가 이런 강의를 할 때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바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 얘기입니다
그는 진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다가
막판 죽을 때 말 한마디 잘해서 천국 가는.. 수지를 맞았습니다
그 사람을 보라는 거죠
그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임을 말해주는 겁니다
근데 그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선하신 뜻으로 구원하시면서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신 거죠
만약에 그 강도가 십자가에 있다가
갑자기 판결이 바뀌어서 빌라도가 석방했다면
그래서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왔다면
그는 순종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다만 그럴 시간이 그에게 없었던 거죠
그건 특수 상황이라 봅니다 일상적 상황이 아니라요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주는 목적의 사건이라 봅니다
그것으로 순종이 필요없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많은 가르침은
순종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죠
하나님이 우리를 주권적으로 구원하시고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데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그 요구를 피할 수 없는 거죠
몇몇 목회자들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우리가 정말 우리의 이 구원 이후의 삶에
정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 거룩한 삶, 그리고
행함을 중요하다고 얘기를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교단의 교리와 안 맞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단 교리를 고쳐야 합니다
이것도 한국에 지금 개신교의
중세 가톨릭 교회로 회귀 현상입니다
종교개혁 때의 구호 중 하나가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성경으로!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성경이 교회의 전통 위에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우리 개신교가
성경을 우리 교단의 전통적인 신학에 근거해서만 해석을 하고 있어요
거기에 맞게만 해석하려고 해요
그렇다면 그건 더 이상 개신교가 아닙니다
바울이 근본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바로 구약에서도 그렇고 중간기 유대교도 마찬가지지만
신약 전체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신다는 거죠
우리는 순종해야 됩니다
그 전제는, 행위 없이는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 전제는 바울에게서 선명하게 나타난다는 거죠
한국교회가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온전한 복음을
다시 회복하면
온갖 더러운 죄로부터
그 죄에서부터 나는 악취로부터
이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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