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크리스천(진짜 기독교인) 1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구원 - YouTube
◈리얼 크리스천 1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구원 롬6:22 약2:24 ☞ ▣ 믿음론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정죄한 한국의 대다수
스스로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단의 목회자들의 복음선포가
사실상 구원파 신학입니다
구원파적인 구원론은 사실은 우리의 행위를
구원의 방정식에서 배제하는
흔히 말하는 ‘오직 은혜’의 도식을 극단화 시킨 것이
구원파적인 구원론입니다
‘한 번 칭의’ 혹은 한 번 구원 받으면
그의 삶, 윤리와 관계없이
‘영원한 칭의’, 구원을 받는 것처럼
그렇게 가르치는 그와 같은 구원파적인 구원론은
이제 교정되어져야 합니다
구원은 무엇인가 당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이전의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스스로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윤리와 분리된 신앙을 가지고 그렇게 가르치니까
(오늘날 크리스천과 기독교회의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현대교회가 안고 있는 참 고민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 인플레이션 현상입니다
돈을 많이 찍어내면 나중에 돈 가치가 없어지는
인플레가 됩니다
교회에서 구원을 너무 쉽게 이야기합니다
‘당신 예수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당신은 구원 받았군요!’
너무너무 쉽게 구원을 남발합니다
입술로는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그 내면에 진정한 변화가 있는 사람인가를 체크하지 않습니다
정말 과거의 죄를 다 주님앞에 회개하고
새 삶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증거를
정확하게 점검하지 않습니다
그냥 입으로 예수 믿는다 하고
교회만 열심히 다니면
다 잘 믿는 사람인줄 압니다
오히려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당신의 믿음은 그만큼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라고 하면서
억지로 구원의 확신까지 강요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독교에 구원, 기독교의 은혜를
너무 쉽게 받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자기가 신앙이 좋고
반드시 구원 받는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데
그 가운데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권연경 교수께서는 『행위 없는 구원?』
이런 제목으로 책을 쓰셨는데
행위 없는 구원이 가능합니까?
행위 없는 구원!
이렇게 느낌표(!)를 찍는 과거 교계 분위기 속에서
느낌표 대신에 물음표(?)를 찍어서 질문을 제기하면서
이 문제를 헤집어 보기 원합니다
전통적으로 많은 사람이
복음의 요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혹은 믿음으로’ 인데
그 도식이 피상적으로 잘못 이해되어있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어서 ‘행위 없는 구원?’이란 책을 제가 쓰게 되었습니다
즉 ‘행위 없는 구원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그 책에서 서술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은
행위 없이 그냥 ‘오직 믿음으로’
그런 방식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는데
그것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그 구원의 길을 가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위 없는’에 너무 꽂히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구원’이라는
그 긍정적인 측면을 놓치는 것이죠
그것은 복음의 요체를 놓치는 것입니다
소위 ‘오직 믿음’이라는 이 말을 잘못 이해해서
순종과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믿음인 것처럼
그래서 순종의 행위를 배제하는 칭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곧 성경자체의 가르침, 혹은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것은 시정되어야 되겠죠
아시다시피 한국교회 상황에서
사실 이런 민감한 주제를 다룬다는 것은
굉장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을 아실 텐데도
『행위 없는 구원?』이란 책을 쓰신 동기는 무엇입니까?
파장이 클 것이라는 예상은 했습니다
저(권연경 교수)도 보수적인 장로교단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충분히 예상했는데
이런 책을 쓰게 된 개인적인 동기는
어릴 적부터 제가 겪었던 교회생활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배운 복음,
교회에서 경험하는 실제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것들이 많은 질문을 갖게 만들어서,
즉 ‘어.. 이건 아닌데’ 하는
배운 것을 신자들 스스로가 배반하는 경험들을 자꾸 하면서
신자들이 실천하지 않는 복음을 자꾸 목격하면서
‘이건 뭐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
자꾸 그 질문을 염두에 두고 읽게 되었고
그러다가 제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신약신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박사과정으로 바울서신을 공부했는데
성경을 읽으면서 제 나름대로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과거에 통상적으로 들어왔던 가르침이, 제가 느끼기에는
설득력이 없고, 논리적이 없고,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구원론의 패러다임은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제 마음에 하게 되었고
제가 갈라디아서로 학위논문을 썼으니까
관련서적 들을 연구하면서
‘아 이건 아니다’ 하면서, 전통적으로 배웠던 이론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던 거죠
그렇게 해서 정리를 하면서 제 나름대로
바울 서신, 바울 신학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게 되었는데
그 결과 『행위 없는 구원?』이란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비전은
뒷짐지고 하늘나라 가는 그런 그림을 그리는게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케 하시는, 그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래서 구원의 길을 가게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것임을.. 나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설교자가 나서서
구원을 얻으려면, 구원 받은 증거로서, 올바른 행실을 보여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행위구원론자’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만약 그런 피상적인 판단을
마태복음과 야고보서에 적용한다면
마태복음에 소개된 예수님과
그 육신의 동생 야고보는
모두 명백한 ‘행위구원론자’들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데 행위가 (구원 받은 증거로서) 필요합니다
‘행위로 구원 얻는다’는 아니지만
구원 받은 증거로서 행위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행위구원론과 다릅니다
행위구원론은 ‘행위로 구원 얻는다’이지만
올바른 성경적 구원론은
믿음으로 구원 얻지만 구원 받은 증거로서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만약 ‘구원 받은 증거로서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두고
‘행위구원론자’로 매도한다면
사실은 신약성경전체가 ‘행위구원론’이요,
저자들이 다 ‘행위구원론자’가 되겠죠(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은 분명히
‘나더러 주여 주여 말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분명히 (행위를) 못 박았습니다
주기도문에서는 은혜의 논리까지 뒤집어 버립니다
즉 ‘우리가 먼저 용서해야, 하늘 아버지께서 용서해 주신다’고 가르치시고
그 다음에 주기도문 드릴 때도
먼저 형제를 용서하고 나서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도록 (용서의 행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까지 행위를 가르치셨습니다
야고보서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사실 표현이 굉장히 셉니다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믿음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다’고 분명히 얘기합니다
약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그런데 그런 구절을 읽고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가 가진 과거의 신념을 버리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사실은 우리가 이중플레이를 하는거죠
(야고보서는 야고보서 대로 믿고, 로마서는 로마서대로 따로 믿습니다)
칼빈도 세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보면
“우리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도 아니고
행위 없이 의롭다 하심 받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 내용을 제가 ‘칼빈이 말했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제 말인 것처럼 말하면
사람들이 제게 당연히 시비를 겁니다
‘권교수가 이상한 소리 하고 다닌다’라고요
그런데 ‘그거 칼빈이 한 얘기다’라고 밝히면
흐지부지 되어버립니다 칼빈은 권위가 있으니까요
요점은 ‘순종은 구원에 필요합니다
이것은 신약 어디를 펴도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신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잘못 배워서
복음을 잘못 배우니까 행위가 빠지고, 그 결과 행위(신앙윤리)가 없게 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우리가
도덕적인 책임조차도 피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것이 복음이라고 오해합니다
◑‘구원파적 구원론에 함몰된 한국교회’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구원파적 구원론’이란
우리의 행위를 구원의 공식에서 배제하는,
흔히 말하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소위 ‘구원파적 구원론’입니다
한국교회 구원론이 상당부분 그런 견해와 맥을 같이 합니다
예를 들어, 유명한 한 목사님의 설교집에
‘사람을 천 명을 죽여도,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일단 선택받은 사람은!’ 이런 헛소리가 나옵니다
그걸 아멘 하고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인거죠
그게 ‘한국교회 구원론’이라면
그건 구원파에 못지 않는, 잘못된 구원론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예정, 선택)을 받은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든 그것에 상관 없이
예수님이 끝까지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것이
구원파적 구원론입니다
문제는 구원파적 구원론과 다를 게 없다는 거죠
대다수의 한국교회가
구원파적인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한국의 대다수 교회,
스스로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단의 목회자들의 복음선포가
사실상 구원파 신학입니다
왜곡된 구원론이라 얘기할 수 있습니다
값싼 구원론!
윤리 없는 칭의론, 심각한 논리 아닙니까!
그래서 아시다시피 본 훼퍼 같은 분은
독일에서 2차대전 전후에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히틀러 같은 그런 나치 체제를 지지하고도
다 크리스천이라고 자처하는데
‘도덕 없는, 윤리 없는 기독교’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된다’는 교리가
얼마나 우리 신앙을 왜곡하고
우리 크리스천의 삶을 왜곡하는지요!
그래서 본훼퍼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죠
‘하나님 은혜를 싸구려 은혜 cheap grace로 전락시켰다’
아무 효과도 없고, 아무 힘이 없는
우리를 새로운 사람 만들고
의인으로 만드는 힘이 없는
정말 독일어로 billige Gnade, 영어로 cheap grace
아무 쓸모 없는 은혜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심각한 신학적 문제, 우리 신앙을 미혹하고
윤리성이 결여된 값싼 은혜론, 잘못된 구원론은
이미 본훼퍼가 상당히 강하게 반대하고
그는 분명하게 제자도를 가르치면서
값싼 구원론이 기독교의 정체성에
상당하게 해악이 된다는 것을 이미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게 전 세계적인 개신교의 현상이거든요
그러니까 지난 1백년 이상을
서구에서 이런 문제가 지속되어져 왔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논쟁이 더 심각해졌습니다
세월호를 겪으면서요
구원파 신학이, 하나님 은혜를 싸구려로 전락시켰는데
즉 ‘법정 court 적 범주로만 해석하는 칭의론’의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한번 영원히 효과있는 칭의, 의인이라 칭함 받아버렸다
구원은 이미 받았어요, 구원은 이미 끝나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됩니다’ 라는 소리는 대놓고 안 하지만
사실상 그 말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 이야기죠
특별히 구원파적인 구원론 이해
즉 '한 번 칭의 혹은 한 번 구원받으면
그 사람의 삶, 윤리와 관계 없이
영원한 칭의, 구원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가르치는 그와 같은 구원파적인 구원론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도 아니고,
성경 자체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현실 교회에서는
또 그런 주장이 어느 정도 상당하게 자리를 잡고
또 만연되어가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요
그와 같은 구원론적 이해는
구원파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상당하게 어느 정도 자리잡고 있다고 봅니다
'세례 때 한 번 받은 칭의는 영원하다'는데
그래서 최후 심판 때 그게 확인될 것이라는데, 구원받는다고요,
의롭게 살면 좋은데 못 살아도 괜찮다.. 이런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어요
◑최근 한국의 어느 신학교에서 신학포럼이 열렸는데
그 주제는
‘이신칭의가 이 시대의 면제부인가?’였습니다
한국교회가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칭의론이
한국에 있는 소위 구원파의 구원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구원론에 의하면
한 번 구원받으면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들의 모든 죄 곧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 이후의 신자의 삶이
과거에 이미 받은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 결과 신자의 윤리적인 타락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전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봅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우리가 행하는 일을 다시 검토하고
모든 면에서 우리가 성경에 충실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루터와 칼빈은, 교회의 가르침을 바로잡고
그것을 성경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과 다시 일치시켜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음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먼저 루터를 살펴보겠습니다
루터의 한 가지 위대한 통찰력은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이점에서부터 발생되는
매우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
우리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한 사람이거나, 구원을 돈을 주고 샀거나
구원을 받을 만한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루터에게서 매우 중요한 통찰력입니다
루터는 똑같은 비중을 두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우리 안에 <구원>이 일어났다면
그렇다면 그 구원은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이죠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단지 ‘오 나는 용서받았다
오 나는 구원받았다’ 라고 말하면서
아무런 변화가 없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매일 다시 십자가로 나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매일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터에게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용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점인데요
우리가 이신칭의로 인해 <변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예전의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뭔가 당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에게는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에 관한
아름다운 이미지가 있었죠
물론 루터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매우 강력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정말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의 뿌리가 깊이 박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신칭의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행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누군가가 ‘나는 크리스천이다’ 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변화되지 않는다면
즉 그들이 뭔가 그릇된 일을 하고 있거나
회개하기를 거부하거나
자기 안에 여전히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삶에 구원의 과정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칭의란
과거에 죄의 종으로 살던 삶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는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살아있는 관계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우리 미래의 구원이
바로 이런 변화된 삶의 길을 통해서 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런 변화된 삶이 없는 칭의나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변화된 삶이 없으면
로마서 식으로 말하면
이전처럼 우리가 변화되지 않고 죄의 종으로 실제로 살아가면
죄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의하면 그 마지막인 죽음인 것이죠
롬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반대로 우리가 이제는 죄에 대해서 해방 되어서
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생이니라'
롬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바울은 그 얘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부패하고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다 신학적인 문제가 그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복음을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이신칭의 구원론 이해는
구원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갱신하고 바르게 세우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고
한국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그 문제(이신칭의)가 분명하게 해결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스스로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고
많은 목사님들이 스스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게 아니라
윤리와 분리된 신앙을 가지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치니까
한국교회가 숫자가 그렇게 많고
그리스도인들이 영향력 있는 위치에 그렇게 많이 있는데
한국사회나 교회의 부패지수가 높고
거짓과 불의가 그리고 갈등이 심각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 자체가, 칭의의 복음 자체가
잘못 이해되어서 그렇습니다
부분적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 결과, 심각한 신학적 문제와 심각한 목회적 문제, 영성 문제, 삶의 문제를
낳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심각한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대안이 있습니까?
대안은 칭의론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칭의의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주제에 대한 글을 매우 잘 쓴 칼빈은
'거룩함 없이는 당신을 의롭다 할 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칭의는 동전의 한 면이고, 성화는 동전의 다른 면인 것입니다
칼빈은 매우 체계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죠
그가 말하려고 하는 요점들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믿는 자는 사실상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이미지이며 신약 바울서신 안에 나옵니다
그리고 칼빈은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는
이중적인 면이 있다고 말합니다
1)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가 의로운 것이죠
그것이 ‘칭의’입니다
칼빈은 그것은 그림의 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또한 그것은 전체 그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면 다른 일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의롭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바꿔말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과정은
1) 우리에게 의롭다는 지위(칭의)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2) 또한 그것은 우리가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의 시작인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성화’입니다
여기서 칼빈이 말하는 요점은 대단히 강력합니다
1)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여전히 어떤 면에서 죄가 있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십니다
2)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과정(성화)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그것 또한 구원의 과정의 일부입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많은 경우에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들,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고
그러다 보니까 또 교인들에게 그렇게 전달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패러다임의 문제
패러다임을 바꿔어야 됩니다
패러다임을 바꾸는데 가장 결정적인데
행위심판에 대한 신념인 것 같습니다
행위심판 사상을 일단 수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될 때
그 다음에, 그 전제 하에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물을 때
비로소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복음에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좀 불편하지만
그 얘기를 계속 담론화 시키면서 설득시켜 나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알고 있는 신학자들이
좀 더 과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 알면서도 (비난 받고 불이익 받을까봐) 침묵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에스겔서의 파숫꾼처럼
‘네가 경고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고 죽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은 것이고 너는 죄가 없다
그런데 네가 경고하지 않았는데 그가 죽었으면
그는 자기 죄로 죽으려니와 그 피값을 네게서 찾으리라’ 겔3:17~19
많은 신학자, 목회자들이
그런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까요..
그런 면을 우리가 두려워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좀 더 목소리를 높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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