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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데살로니가전후서 P1 / 데이빗 파슨 교정 및 자막 예정

LNCK 2018. 12. 27. 20:35

데살로니가전후서(1)                                                              LCY 번역

 


우리 이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써서 보낸 편지를 보겠는데, 총 두 통이며, 이것은 바울이 일찍이 써 놓은 두 권의 서신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일찍이 쓴 부분인데, 이는 여러분이 아마도 모르실 것입니다. 바울이 짧은 몇 개월에 두 통의 편지를 썼고, 모두 동일한 곳에 보냈습니다. 받는 사람이 동일했고, 신약성경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에 신약성경이 없다는 것을 자주 잊는데, 그들에게는 구약성경만 있었고, 그들에게는 사도의 가르침과 설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없었고, 신약성경이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두권의 서신은 아마도 바울 서신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서신일 것이고, 서신에서 몇가지 간단하고도 직접적인 문제를 논했습니다. 한 두 곳 비교적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우리가 설명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두 권의 서신은 동일한 저자가 썼거나 혹은 응당 같은 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문안할 때 실라와 디모데를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그 세 사람은 함께 데살로니가로 왔고, 또한 함께 떠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 사람을 대표해 편지를 썼는데, 그러나 그 자신의 생각을 너무 많이 썼습니다.

이 두 권의 서신은 같은 저자가 같은 시기에 동일한 곳으로 써서 보냈는데, 하지만 두 권 서신의 분위기와 말투는 오히려 크게 달랐으며, 편지에 논한 문제는 심지어 모두 같았지만 말투는 오히려 달랐습니다. 첫번째 편지의 말투는 친절했고, 감정이 중했으며, 편지에 관심하는 정을 강렬하게 표달해 냈습니다. 하지만 두번째 편지는 오히려 분명히 다르게 말투가 냉담하고 날카롭게 변했으며, 배려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상당한 거리가 생겼다고 느꼈습니다. 여러분은 매우 신기하다고 생각할 것이며,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을까요? 바울이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고, 두 통의 편지 사이에서 쌍방의 관계가 이렇게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원인을 한번 연구 토론하겠습니다.

우선 먼저 이 곳을 보겠는데, 여기는 에게해 윗쪽이고, 원래는 매우 큰 항구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항구에 진흙이 조금 막혔고, 더 이상 그렇게 바다와 가깝지 않았습니다. 많은 곳에 이런 현상이 있는데 마치 에베소 같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는 하나의 중요한 도시인데, 왜냐하면 이 도시가 바로 로마에서 아시아를 통하는 대로에 위치해 있고, 이 대로를 이그나선대로라고 하며, 데살로니가가 바로 이 대로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도로로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도시이며, 또한 항구 도시입니다. 바로 에게해의 꼭대기에 있으며, 이 해역에서 모든 무역 노선의 종점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거기에 회사 같은 것을 하나 차려 놓으면 사업이 각 곳으로 반드시 확장 될 것이고, 만약 거기에 천국 식민지를 세우면 반드시 각 곳으로 확장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로 왔습니다. 오늘날 이 도시를 셀로니가 혹은 데살로니키라고 부르는데, 셀로니가든 혹은 데살로니키든 아무튼 여기는 하나의 중요한 도시이고, 알렉산더 대제 이복 여동생의 이름으로 명명하였습니다.

여기는 하나의 무역 센터이고, 여기에서 유통되는 돈은 에게해 해안의 각 도시보다 많았는데, 왜냐하면 무역 왕래가 빈번해지고 은행은 반드시 많은 현금이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각종 다른 종족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유대 상인들이 특별히 많았습니다. 어디에 장사가 있다면 거기에는 바로 유대인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여기에 온 것은 주요로 이 도시가 해륙의 요도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데살로니가에서 많은 유적을 발굴했으며, 그들이 로마 광장을 발굴했고, 경기장을 발견했고, 심지어 문틀 하나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사마리아인의 회당이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외에 심지어 사마리아인도 있었고, 많은 종족들이 거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이 도시에 특별한 관리가 통치하고 있다는데, polytarch라 하고, polytarch라는 이 글자는 아마도 두 개의 헬라 글로 구성되었을 것입니다. Poly는 도시이고, arch는 감독, 통치자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누가가 기록한 역사가 정확한지를 의심했는데, 왜냐하면 polytarch라는 이 글자가 고대 역사상 나타난적이 없었는데, 하지만 고고학자들이 근래에 데살로니가 유적지에서 이 글자를 발견했고, 41번이나 나타났으며, 데살로니가 이 도시에서만 그들 시장을 polytarch, polytarch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이 일을 발견한 후 누가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가 나타났고, 이 도시의 시장만이 이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고고학 증거가 많을수록 우리가 성경에 대한 정확성에 더욱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은 아직 증거를 보지 못하고 먼저 의심하는데 급했습니다.

이제 우리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겠는데,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 안에의 교회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그들의 주소였습니다. 아마도 이 교회는 데살로니가에 있는데, 하지만 또한 하나님 안에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집이었으며 그들의 주소였습니다.

바울이 두번째 선교 여행에서,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조금 복습하겠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 와서 교회를 건립했고, 이어서 그가 비두니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도착한 후 성령이 그들더러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들이 아시아를 가고 싶었지만 도착한 후 성령이 그들더러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앞으로 갔고, 후에 큰 바다를 만나서 더는 앞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이런 인도는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앞으로 가야했고, 그래야 성령이 계속하여 그들을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라디아에서 머물지 않았고, 거기에서 성령의 가리킴을 기다리면서 직접 나가서 기회를 봐서 봉사했는데, 하지만 성령이 그들과 계속하여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을 끊임없이 서쪽으로 인도했고, 후에 큰 바다를 만나서 더는 앞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에 바울이 꿈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행동을 취할 때 성령의 인도가 더욱 분명합니다. 시동을 걸린 자동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 자동차보다 쉽게 회전할 수 있고,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을 때 핸들 돌리기가 매우 힘듭니다. 크리스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어나서 행동을 해야 하고, 일을 찾아야 하고, 한쪽으로 하면서 한쪽으로 성령님이 당신을 인도합니다.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로써 바울과 함께 한 그들은 유럽으로 건너갔고, 네압볼리라는 항구 도시에 왔는데, 하지만 그들이 거기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마게도냐의 주요 도시인 빌립보에 왔고, 빌립보 여기는 비교적 내륙에 가까운데, 이후에 우리가 빌립보서를 논하겠습니다. 바울이 기다리면 빌립보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쫓겨난 것이지요. 그는 앞으로 나아가 주요 도시인 데살로니가에 갔고, 그가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바울은 항상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먼저 유대 동포들에게 빚이 있고, 다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빚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회당에 갔는데, 하지만 매번 이렇게 하면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그의 말을 믿는데, 하지만 어떤 유대인들은 오히려 분노가 가슴에 가득 찼습니다. 모든 회당에서 그의 설교를 가장 듣기 원했던 사람들은 소수인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교 성도들이 아니었고, 할례를 받지 못했는데,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흥취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회당에 간 것은 유대인들의 신은 참 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흥취가 있는 관찰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회중에서 소수이며, ‘경건한 자들이라고 불리웁니다. 우리 성경 번역본 대부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번역했는데, 하지만 이것은 사실 칭호일 뿐이며, 이스라엘 하나님을 믿는 비 유대교인이라는 묘사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쉽게 주를 믿도록 인도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에 비슷한 상황들이 있습니다. 가장 쉽게 주를 믿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소수이며, 표면적으로 아주 진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 흥취가 있어 하고, 진리를 쫓고 싶어합니다. 바울이 각 도시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로 이런 경건한 자들이 가장 쉽게 주를 믿었는데, 하지만 유대 장로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오히려 분통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 경건한 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유개교에 들어갈 필요 없이 하나님께 속할 수 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지도자들은 매우 기뻐하지 않았고, 유대인 지도자들은 모두가 할례 받아 회당 성도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일반적으로 회당에서 2-3주 설교를 한 후 떠나야 했습니다. 대략 2-3번 안식일을 강의하고 쫓겨났습니다. 가끔은 바울이 일부러 회당 옆 학당에 교회를 세워 거기서 회당에서 주를 믿게 인도한 사람들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대단한 기교는 아닌데, 그러나 매우 효과가 있었습니다. 얼마되지 않아서 그가 교회를 떠났고, 다른 곳으로 복음 전하러 갔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주를 믿도록 인도한 사람들을 매우 질투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이방인이었고, 그들이 비록 전에 회당을 가 보았지만 대부분이 이방인이었고, 유대 회당은 성도가 떠나기 시작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마음으로 반드시 매우 질투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한번은 고의적으로 세례 요한에게 말하기를 지금 예수가 세례를 베푼 사람이 너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강에서 그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 너보다 훨씬 많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질투는 매우 무섭습니다. 그래서 이 유대인들은 바울을 적대했고, 이로써 바울은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민을 선동하여 일어나 폭동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주를 믿도록 인도한 이 사람들도 강제로 싸인하게 했고, 화평을 보장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안위를 위해 자원해서 베뢰아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머문 시간이 매우 짧았으며, 그러나 견고한 교회 하나를 남겼습니다. 저는 바울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정말로 알고 싶어요. 교회 세운지 몇 주밖에 안되었는데 손을 떼고 떠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성경에 매우 익숙했고, 많은 사람들이 회당에 머물렀는데, 하지만 바울이 떠날 때 교회가 매우 건전했습니다. 저는 교회가 구원의 기초가 견고하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베드로의 그 구원의 절차를 그들이 모두 했고, 즉 회개, 믿음, 세례, 성령충만인데, 만약 처음부터 이것을 했으면 기초가 더욱 견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앞으로 계속해서 베뢰아로 갔는데, 하지만 그가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두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두 사람에 대해서는 비교적 적의가 없었습니다.

이로써 바울이 홀로 베뢰아로 갔는데, 여러분이 아마 바울이 베뢰아에서 큰 문제를 일으켰고, 또한 강제로 떠나게 된 것을 아실 것입니다. 지금 그가 홀로 남쪽으로 가서 아덴에 왔는데, 그가 거기에 있을 때도 매우 불편했습니다. 그가 아레오바고에서 설교를 했는데 오히려 비웃음을 당했고, 몇 사람이 주를 믿었는데 하지만 그가 거기에서 교회를 건립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그가 고린도로 향했는데, 사실 이때 바울의 사기가 이미 아주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그가 빌립보에 갇혔고, 지진을 만났고, 그리고 빌립보에서 내보내어 데살로니가로 왔고, 또 말성이 생겼는데, 성도들에게 번거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 바울이 떠나지 않으면 안되어서 베뢰아로 왔는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미행했고, 그는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아덴에 와서 많은 철학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그의 예수 부활 이야기를 듣고 그를 비웃었습니다. 비록 그가 몇 명에게 주를 믿게 인도했지만 거기에서 교회를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린도에 왔을 때 기분이 몹시 우울했습니다. 그가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기를 전에 내가 너희에게 갔을 때 연약하고 무서워서 자신에 대해 믿음을 잃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심정을 이해합니다. 우리 모두가 바울은 가장 성공적인 선교사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일파만파의 좌절을 겪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많은 불행을 연달아 만났습니다. 그가 고린도에 왔을 때 그가 말하기를 나는 이미 자신에 대해 믿음을 잃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의 마음은 확실히 매우 우울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디모데와 실라가 마침 왔고, 그리고 그들이 크게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알려주기를 데살로니가 교회 상황이 매우 좋습니다. 그들이 성심성의껏 성경의 말씀을 받았고, 하나님을 충성되이 따르며, 그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비록 한 두 가지 문제를 언급했지만 주요로는 바울의 기분을 격려하고 싶었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에서부터 계속하여 쫓겨 아가야에 왔고, 바로 오늘날의 헬라인데, 바울은 이것이 정말로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봉사하는 크리스찬마다 그가 인도하여 주를 믿게 한 사람이 신앙에서 제대로 서 있다면 모두 격려가 됩니다. 당신이 몇 년 전에 인도하여 주를 믿게 한 사람을 만나면 그들의 영적 생명이 지금 어떠한지를 매우 알고 싶어집니다. 그들이 여전히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신이 격려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디모데와 실라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이 매우 좋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문제 몇가지 있지만 너무 심각한 것은 아니였으며, 이로써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 쓰기를 결정했습니다. 그가 친히 가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의 문제는 너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편지 한 통은 써서 보내야겠다고 결정하였는데, 신약성경이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좋은 소식이 있는데, 그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을 뿐만 아니라 빌립보에서 헌금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정말로 한차례의 단비와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 몸에 한푼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또 가서 장막을 깁는 일을 했습니다. 장막 깁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길거리에 가서 양모 원단을 봉제하여 장막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거기에서 장막을 기우면 생계를 유지하는 유대인 부부를 알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였습니다. 이는 바울에게 격려이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그 세 사람은 거리에 앉아 함께 장막을 기웠습니다. 거기에 이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이 매우 좋다는 좋은 소식을 들었고, 또한 빌립보 교회에서 헌금을 보내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매우 좋게 생각했고, 잠시 장막 짓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기초만 잘 닦으면 되었습니다.

우선 먼저 그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 한 통을 써서 이 좋은 소식을 들어 기쁜 마음을 표달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두 통의 편지를 보겠습니다.

먼저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보겠습니다. 이는 한 통의 정열이 넘치는 편지입니다. 바울이 소식을 듣고 난 후 너무 흥분했으며, 그래서 편지에 정열이 넘쳤습니다. 1장은 모두 그가 들은 좋은 소식을 논했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특별히 43연사로 이 장의 뜻을 귀납하여 가리키겠는데, 이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계속하여 강조하는데, 그는 그들이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 들였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뻤고, 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진심을 받아 들였습니다. 바울은 받다라는 이 단어를 계속하여 언급했습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받아 들였고,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 들였다는 것은 마침 디모데와 실라가 가져온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첫번째 조의 삼연사는 바로 바울이 말하기를 당시 우리가 세가지 방식으로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 세가지 방식이 바로 말씀, 행위와 기적이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항상 이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우리 대부분은 이런 방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아셔야 하는데, 복음 전파는 입에서 나오는 말만 의지할 뿐만 아닙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입으로 복음을 말하는 것이 바로 복음 전파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아닙니다. 이러면 당신이 일부분 복음만 전한 것이며, 상대방이 당신이 그에게 한 말이 진짜인지를 증명할 수가 없거나 혹은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은 복음을 듣는 외에도 복음 보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언급한 이 세가지 일은 말씀, 행위와 기적인데, 두가지는 눈으로 보아야 하고, 한가지는 귀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는 효과가 듣는 효과보다 배로 효과가 있습니다. 두가지를 보고 한가지를 듣는데, 이것은 매우 좋은 전달 방식입니다. 오늘날 매체는 지휘권을 잡는 시대인데, 바로 이런 방식으로였으며, 그 시대에도 그러했습니다. 바울은 모두가 복음 듣기를 기다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두가 보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행위로 복음의 말씀이 진실임을 증명해야 하며, 하나님은 기적으로 복음의 말씀이 진실임을 증명합니다.

우리 대다수 사람들은 복음을 전할 때 아마도 대부분은 말씀으로만 할 것입니다. 말하고 쓰고 녹음하고 그리고 노래하는 것처럼일 것입니다. 장황하게 말을 해 주고, 말로 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데, 이는 틀리지 않습니다. 말이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 방식과 기적은 사람과 하나님이 각각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당시 예수님이 두사람씩 내보내어 복음을 전할 때 그가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 매우 간단한데, 각 도시에 도착하면 죽은 자를 살리고, 문등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알려주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먼저 행하고 다음 말을 해라는 것입니다. 먼저 그들에게 보여주고, 다시 그들에게 듣게 하는 것인데, 이 방법이 얼마나 간단합니까.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렇게 하지 않고, 우리 모두는 먼저 말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주 지혜로웠습니다. 그가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의 메시지를 들었고, 나의 생활 방식을 보았고, 또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나타낸 기적을 목격했고, 나는 이미 복음을 완전하게 전달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알바니아로 왔고, 다시 일루리곤으로 왔는데, 여기는 헬라의 또 다른 한 쪽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복음을 전한 방식이었습니다. 말씀, 행위와 기적을 통하였는데, 여기에서 제가 더 나누지 않겠습니다. 저의 크리스찬의 중생이라는 책에 한 장에서 이를 전문적으로 논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가지 측면의 복음 전파를 다시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아, 너희들이 우리가 전한 말을 들었고, 우리 생활 방식을 보았고, 또한 기적을 보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보고 들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보는 것과 드는 것은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말하기를 그것은 너희들이 보고 들은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사람만이 복음을 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들이 보기도 해야 합니다. 복음을 보아야 효과가 있고, 그들이 생명이 변화된 것을 보아야 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바로 믿을 것이고, 그들이 이 말씀이 진짜라는 것을 믿습니다. 말씀, 행위와 기적은 첫번째 조의 삼연사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가 준 것이고 너희들이 받았고, 너희들이 믿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또 한 조의 삼연사인데, 그가 말하기를 결국에는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있게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 세가지를 항상 말씀했으며, 고린도전서13장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만 말씀했을 뿐만 아닙니다. 바울은 이 세가지를 자주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나서 믿음이 성장했고, 소망이 생겼고,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을 들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장 약한 방면을 소망인데, 바울이 뒤에서 다시 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오히려 나무랄데가 없었는데, 이는 매우 좋은 것입니다. 아닙니까? 교회는 믿음이 충만해야 하고, 소망과 사랑도 물론 매우 좋아야 합니다. 하지만 먼저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하고, 이는 매우 좋은 출발입니다. 그들의 소망은 그다지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들의 소망을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소망의 핵심은 바로 주 예수가 다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가 다시 오는 것이 바로 우리 소망의 핵심입니다.

다음 세개의 단어는 하나님, 예수님과 성령님인데, 이 몇 개 단어가 제1장에서 엇갈려 나타났습니다. 데살로니가의 크리스찬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철저히 믿었는데,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몇 년 전에 예수 운동이 있었는데, 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한분이라 생각하며, 바로 예수님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성령만 믿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처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었고, 이렇게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런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예수님을 알았고, 성령님을 아셨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난 후의 몇 주에 그들은 이렇게 믿었는데, 참으로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제가 언급하려는 세개의 단어는 바울이 좋은 크리스찬에 대한 정의인데, 그가 세개의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우상을 버리고영원하신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그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려라”’고 하였습니다. 앉아 계신 전도인들이 이 세가지 중점으로 다음 주일 설교 대강을 만들어도 되겠습니다. 크리스찬들은 우상을 버리고영원하신 하나님께로 나아와야 하고, 돌아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강림하시기를 기다려야합니다.

매우 멋진 세개의 동사가 크리스찬들 생명의 세가지 측면을 표달하였습니다. 버리는 것은 바로 회개이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그리고 그의 아들이 하늘에서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상은 바로 세가지 중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좋은 전도인들은 세가지 중점으로 설교를 한다고 합니다. 이상 몇 조는 당신이 네편의 설교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제1장에서 이 세가지 점을 엇갈려 논했는데, 4조의 3연사 모두가 매우 중요합니다.

다음은 제2장을 보겠는데, 여기에서 논한 첫번째 문제는 바울과 그리고 그의 명예와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매우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를 훼방하기 시작했고, 물론 이 배후에는 마귀가 훼방을 놓았고,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마귀가 방금 시작한 사역을 파괴하려고 할 때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훼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메시지를 파괴하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 순서대로 파괴합니다. 우선 그가 이 사역을 하는 사람의 동기에 먹칠 하고, 헛소문을 퍼뜨려 이 사람을 중상 입게 합니다. 이 상황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는 반드시 행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제2장과 제3장을 자세히 읽어 보았는데, 저는 행간에서 그들이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를 이해하고 싶어요. 이로써 바울이 반드시 자신을 위해 변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수신자 쪽의 상황에서의 추측입니다. 제가 총 아홉개를 나열했습니다. 1,2,3,4,5,6,7,8,9인데 이것은 그들이 바울을 고소한 아홉가지 죄명이며, 참으로 믿기가 어렵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해 아홉번이나 헛소문과 자신을 위해 변호했습니다. 그 자신의 존엄이나 혹은 자신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반대자가 그의 인격을 공격하는 것을 허락하면 그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메시지를 전한 사람을 없애는 것인데, 이러면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를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소는 아래 아홉가지입니다. 첫째 바울이 일을 성사시키기에는 부족하며, 이 사람이 일을 망치기에는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바울은 겁쟁이이고, 그는 죄를 뒤집어쓰고 도주했고, 너희들에게서 도주했는데, 사실 이는 우리 모두가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떠난 것은 성도 보호를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도들은 반드시 그를 위해 담보해야 했고, 그들도 반드시 많은 돈을 내어서 일이 생기지 않게 보장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떠났으며, 성도들더러 그 돈을 손해보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이로써 고소를 당했고, 겁쟁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번째 그들은 바울을 광신자라고 고소했고, 그가 자기 고집대로 하고, 미친듯이 과격하다고 하였습니다. 네번째 그들은 바울이 여색을 좋아하는 자라고 고소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많은 부녀들을 인도하여 주를 믿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섯번째 그들은 바울이 사기꾼이라고 고소했고, 거짓말이 가득찼다고 하였습니다. 여섯번째 그들은 바울이 아첨하고, 뭇사람의 총애를 얻는다고 고소했습니다. 일곱번째 그들은 바울이 투기꾼이고,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이익을 탐내서 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돈을 탐내서 하는 것이라고 고소했습니다. 여덥번째 그들은 바울이 빈둥거리며, 일을 하지 않고 편하게 살려고 한다고 고소했습니다. 아홉번째 그들은 바울이 폭군 같이 그가 인도하여 주를 믿게 한 사람에게 매우 엄격한 태도로 한다고 고소하였습니다.

이 모두는 매우 심각한 고소였고, 그들이 고소한 이 아홉가지가 한가지도 진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들은 사람은 그에 대해 좋지 않는 인상이었을 것이고, 이 모든 것은 바울이 떠난 후 뒤에서 말한 것인데, 정말로 매우 나쁩니다. 이로써 바울이 이 편지를 써서 자신의 인격을 위해 변호했습니다. 그들이 그가 전한 복음을 믿지 않을까 걱정이었습니다. 중점은 그의 명성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가 불량한 동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일깨우겠는데, 진정으로 이 아홉가지 죄명에 부합된 자는 마귀 자신입니다. 자신이 어떠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다고 말합니다. 마귀가 이것으로 고소하려고 했고, 자신의 불량한 동기를 바울에게 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홉가지가 마귀에게 모두 잘 맞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지 않지요. 바울은 자신을 위해 어떻게 변호했을까요? 그는 아홉가지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초청하였고, 그리고 하나님도 함께 와서 그의 증인이 되어주셨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증거하실 것이고, 너희들도 증거하실 것이니 이 모든 고소는 진짜가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우선 그가 말하기를 누구 내가 일을 성사시키기에 부족하다고 하였느냐? 너희들은 내가 사역한 효과를 보라. 너희는 견고한 교회이고, 믿음과 사랑이 충만하고, 또한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는데, 이렇게 한 것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 것이냐?’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사역에는 큰 효과가 있었습니다.

두번째, 그는 자신의 담력을 논했습니다. 그는 도망하는 겁쟁이가 아니며, 그는 빌립보에서 감옥에 들어갔었는데, 하지만 이어서 데살로니가에 와서 바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겁쟁이의 행위이냐? 만약 그가 정말로 겁쟁이었다면 벌써 국경을 넘어 출국했습니다.

세번째, 그는 자신이 성실하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말한 것은 모두 진짜이니라. 무엇을 말하고 싶으면 바로 말하고, 나는 사람을 속이지 않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건하다고 하였고, 설령 그를 위해 증명할 사람이 없다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위해 증명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겸손하다고 하였고, 그가 말하기를 나는 자신의 권리나 혹은 존엄을 붙잡지 않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온유하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너희를 마치 어머니가 아이에게 대하듯 너희를 대하였고, 어머니가 아이를 대하듯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심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시간, , 그리고 자신을 너희에게 주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이익만 위한 것 같습니까? 그가 말하기를 자신이 수고하였고, 어떠한 게으름이나 혹은 태만이 없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바삐 보냈고, 해가 떠서부터 해가 지기까지 바삐 보냈습니다. 당시는 전력이 없었고, 날이 어두워지면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날이 어두워지지 않으면 나는 항상 일을 했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가 거룩하고 공의롭고 흠이 없다고 하면서, 너희들은 나의 무슨 죄명으로 고소하느냐? 주 예수님이 당시 말씀하신 것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는 그 마음에 진실이 충만하다고 하였고, 그는 어머니 같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같기도 하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바로 부모처럼 너희가 위로가 필요할 때 나는 어머니처럼, 너희에게 징계가 필요할 때 아버지처럼 하였느니라.

마지막 그가 자신의 엄격함을 논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의 표준으로 말하자면 나는 타협하지 않느니라. 어떤 일에서든 나는 너희를 절대로 속이지 않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왜서 지신을 위해 말했을까요? 이는 그가 복음을 위해 변호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를 공격하여 그의 메시지를 파괴하게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를 고소했고, 앞에서는 좋은 말을 하고, 그러나 일단 떠나면 그들을 잊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너무 악렬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너희를 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항상 너희를 위해 기도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느니라. 떠난 후에도 너희들을 잊지 않았고, 나의 마음은 항상 너희들에게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마귀가 무슨 방식으로 사역 파괴하는 것을 좋아하는지를 볼 수 있는데, 그는 크리스찬들을 충동질하여 전도인에게 의심을 가게 하는 것을 좋아하고, 동기를 왜곡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의 이 계교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정말로 자신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승낙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런 고난을 받는 것은 사실 예상했던 일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가 데살로니가 사람들더러 마음에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크리스찬들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증명이며, 이것은 영광스러운 표시이며, 믿음의 인치심이며, 크리스찬들이 응당 착용해야 할 훈장입니다. 그는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걱정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곤경에 부딛히지 않았고, 적을 세우지 않았으며, 어떠한 대가도 지불해 보지 못했는데, 이런 사람이야말로 응당 걱정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고난을 받는 것은 정상이니라. 하지만 나는 그들이 성취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것, 채찍에 맞은 것, 사람들의 돌에 맞아 땅에 엎드려 죽기를 기다린 것에 아랑곳 하지 않는데, 하지만 만약 누군가 그의 사역을 훼방하면 그는 그의 사역을 힘껏 반격하여 보호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있는 이 구절에서 어휘가 매우 강렬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이 서신의 세번째 부분을 보겠습니다. 1장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것을 논했고, 2장과 제3장은 그의 사역 방면의 인품을 논했는데, 이것이 제2장과 제3장입니다. 4장과 제5장은 그들이 성장하도록 도왔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이 성도들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두 방면을 특별히 관심했는데, 우선 먼저는 그들의 거룩입니다. 주요는 부녀와 사역인 이 두 방면을 논햇고, 이것들은 매우 실제적인 측면입니다. 어떤 사람은 거룩을 말하면 바로 수도원을 생각하는데, 이는 현실 삶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부녀와 사역인 이 두 방면 일을 논했습니다. 바울이 관심하는 두번째 방면은 그들의 소망인데, 그들의 믿음이 매우 컸고, 또한 사랑이 충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마음속의 소망은 때로 흔들리기도 했는데, 바울은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했습니다.

먼저 그들의 거룩과 여인들을 보겠습니다. 말하자면 정말로 너무 창피합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한가지 마음 태도가 있었습니다. 디마스니라는 남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창녀와 노는 것은 향락이라. 내연 녀를 찾는 것은 육체 만족 필요이며, 아내를 취하는 것은 그더러 아이를 낳고, 그더러 집안 일을 잘 하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헬라인들의 방법입니다. 그들은 매우 정상적이라 생각하고, 모두가 이렇게 한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의 크리스찬들이 바로 이런 배경에서 왔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두가지를 알려주었는데, 첫번째는 남자는 한 아내만 있어야 하고, 일부일처제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으로 말하자면 이런 말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아주 웃기는 이야기 하나를 들었는데, 한 남자아이가 일부일처제를 영어로 단조롭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크리스찬 안에서 일부일처제의 관념은 복음의 가르침이며, 남자들은 반드시 창녀, 내연 녀와 다처의 상황에서 떠나야 하고, 단지 한 아내만 있어야 하며, 많은 아내는 안됩니다. 이는 고대에서 이혼이 매우 보편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라도 옛 사랑이 지겨워서 새 살마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 상황은 마치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 바꾸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말하기를 아내에게 충성하고, 그를 창녀나 혹은 내연 녀 같이 대하지 말라. 혼인의 침대를 존중하며, 그것은 거룩한 한 면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매우 실제적인 거룩이며, 일상 생활에 반드시 정착해야 합니다.

바울이 논한 다른 한 면의 거룩은 매일의 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에 저는 매우 공감하지 않는데, 아마도 1개월 전에 제가 여기에서 230명 남자들에게 직업에 대해 논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남자들의 특별 회의를 자주 하는데, 여기에 앉아 계신 분들 중 어떤 분들은 참석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 중의 주제 하나가 바로 직업이었는데, 이것은 언급하지 말아야 할 두 글자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직업에 관한 설교를 어느때에 들어보셨습니까? 어느때에 교회에서 직업과 연관된 찬송을 불러보셨습니까? 전도인들 대부분이 설교에서 직업을 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출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의 뜻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진짜입니다. 교회에서 설교하는 사람들 대부분 월요일 아침 8-9시에 출근하러 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아마도 교회를 위해 매일 16시간씩 일을 할 것인데, 하지만 그들은 나가서 출근하지 않아서 출근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가 많은 제자 훈련 교재들을 보았는데, 이 제자 훈련 교재들에서 직업에 대해 논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직업 외에 어떻게 해야 좋은 크리스찬이 되고, 어떻게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간증하고, 교회에서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를 논했으며, 사람더러 주를 섬기는 것은 퇴근 후의 일로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크리스찬더러 안절부절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빨리 퇴근하고 싶어지는데, 이래야 그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알려드리겠는데, 당신이 만약 크리스찬이라면 이미 전면적으로 섬기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제가 이 점을 먼저 설명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냐하면 제가 매번 이런 모임에서 전면적으로 섬기는 일에 참여한 사람이 몇 명이 되냐고 물으면 일반적으로 6명 정도가 손을 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시 한번 전면적으로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이 몇 명 됩니까라고 물으면 이때 몇 명이 더 많아 지고, 제가 모든 사람이 손을 들때까지 계속해서 묻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택시 기사든지 선교사든지 모두 마찬가지로 직업이 바로 당신의 성직이며, 전력을 다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직업은 주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이 낭비되고, 당신이 깨어있는 시간 60%가 낭비이고, 당신이 직업은 바로 성직이라는 것을 아는 외에는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사람들더러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고, 직업을 잘하기를 결심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크리스찬은 다른 크리스찬이 베푸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몸이 건강한 크리스찬은 응당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하며, 돈을 벌어서 가정을 양육해야 하고, 힘이 남아 돌아야 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 해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울이 권고하는 사람은 직업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을 말하였습니다. 이 두 사이는 크게 다릅니다.

우리가 데살로니가후서를 볼 때 더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거룩한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반드시 여인과 직업 등 실제적인 일들을 논해야했습니다.

좋아요. 우리가 여기까지 하고 잠시 멈추었다 다음에 다시 계속 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