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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28 베드로전후서 P2 / 데이빗 파슨 교정 및 자막 예정

LNCK 2018. 12. 27. 20:29

베드로전후서(2)

 

오늘 우리가 베드로전서의 세개 주제를 다시 논하겠습니다. 전회에서 우리가 구원은 견고한 구원의 기초가 필요하며 그래야만 압력에 대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난 받는 것을 논했는데, 고난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서신의 중점은 뜻밖에도 순종인데, 순종을 배워야 하고,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강조하는 순종은 고난을 대면할 때 뿐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우선은 위의 권세있는 사람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시민이고, 아래 사람입니다. 그래서 황제를 존중해야 하고, 왕과 정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전국이든 혹은 지방이든 크리스찬은 법을 지키는 시민의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응당 법을 지키는 시민이어야 하고, 세를 기쁘게 내야 합니다. 당시 바로 납세 때문에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납부해야 할 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응당 기쁘게 해야 합니다. 크리스찬은 납세에 있어서 원망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위의 사람을 존중해야 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응당 충성된 시민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무조건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위의 사람들에게 하는 순종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시키는대로 불도덕이나 혹은 하나님 율법에 위반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종에는 제한이 있지만 크리스찬은 반드시 충성된 백성이어야 합니다. 만약 충성된 백성이라면 위의 사람에게 거스리게 하여 잡히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의 첫번째로 고난 받은 사람들입니다.

두번째 고난 받은 사람은 비크리스찬 주인의 학대를 받은 노예였습니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매우 불쌍합니다. 사람 전체가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노예가 되면 자신의 돈이 없고, 자신의 시간이 없고, 아무런 권리도 없습니다. 많은 주인들은 노예를 악대합니다. 만약 노예가 주를 믿으면 주인이 그를 더욱 나쁘게 대하고, 주인은 그가 노예를 끌고 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압력을 더 가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노예는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순종을 배우고 반항하지 말아야 한다. 무례하거나 불평을 품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주인에게 순종할 뿐아니라 나쁜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이 반드시 좋아야만 순종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인이 비록 가혹하더라도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세번째 고난 받는 사람은 남편이 주를 믿지 않는 아내들입니다. 이것은 아주 힘든 상황인데, 이에 맞추려면 정말로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아내들이여, 당신들 남편에게 순종하라. 비록 남편이 주를 믿지 않더라도 그에게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아주 좋은 충고를 주었습니다. 아내로서 어떻게 주를 믿지 않는 남편을 도와주는 것인지를 말하였습니다. 그의 방법이 우리와 상반되는 방법입니다. 아내들이 남편보다 먼저 주를 믿었을 때 통상적으로 두가지 일을 해야 하는데, 첫번째는 남편에게 끊임없이 설교해야 하고, 두번째는 남편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크리스찬 아내들과 함께 믿지 않는 남편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 두가지 모두가 좋다고 하였습니다. ‘설교는 제일 엉망적인 방법입니다. 그는 당신이 반드시 언어가 아닌 행동으로 그의 마음을 이겨야 한다고 합니다. 많은 크리스찬 아내들은 교회에서 돌아오면 남편에게 잔소리하기를 오늘 저녁 당신이 교회 갔어야 했어요. 목사님이 바로 당신의 문제를 강의했어요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이런 아내들은 대부분이 삼개월 후면 자신이 남편에게 한 설교를 후회합니다. 당신은 반드시 언어가 아닌 행동으로 남편의 마음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베드로가 말하기를 자신을 더욱 아름답게 하라. 그러면 교재하기가 더욱 쉬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크리스찬 아내는 자신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야 합니다. 베드로가 외적인 모습에 많이 얘기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서 아름다움에 특별하게 논했는데,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되고, 눈부시게 아리따움이 아니고 아름다움입니다. 눈부시게 아리따움은 40세 이하에 속하고, 아름다움은 40세 이상에 속하는데, 저는 진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본 제일 아름다운 여자는 해리스 아가씨입니다. 제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이미 84세였고, 얼굴에 주름이 아주 많았습니다. 제가 그에게 말하기를 제가 당신의 얼굴이 매우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대답은 저의 상상밖이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라고 하면서, 이어서 말하기를 제가 젊었을 때 정말로 못 생겼어요. 저와 데이트 하려는 남자가 없었어요. 저와 춤 추러 가려는 남자도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27세 때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 그 주에 저의 심정 전체가 가벼워 졌고, 저는 너무 기뻤는데, 이는 그가 저를 그렇게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심지어 예수님더러 이 기쁨을 가져가라고 하였어요. 왜냐하면 제가 이 기쁨만 의지하고 그 분을 의지하지 못할까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많은 크리스찬들이 하나님께 그들의 우울함을 가져가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는 제가 들었던 유일하게 하나님더러 기쁨을 가져가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당신이 누구를 사랑하면 누구와 같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이 얼굴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해리스 아가씨의 이 말을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그는 베드로전서’ 3장에서 아름다워지는 비결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당신이 늙을수록 더욱 아름다워진다는 표시입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 아닙니까? 맞습니다. 혹시 다시는 눈부시게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움이 뭡니까? 베드로는 자신을 더욱 아름답게 하고, 그러면 교재가 더욱 쉬워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남편이 예수님이 저의 아내를 더욱 아름답게 하였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남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아십니까? ‘예수가 나의 아내를 빼앗아 갔다. 내 아내는 더는 나에게 속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많은 여자들은 하루종일 교회에 가서 영적으로 끊임없이 앞으로 향해 역주하는데, 하지만 남편은 아직도 출발 지점에 머물러 있고, 자신이 갈수록 이 집의 가장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실제적인 충고 하나를 해도 되겠습니까?

한번은 제가 사우스웰스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후에 어떤 부인이 저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제가 문제 하나 있습니다라고 하여 제가 그에게 당신이 남편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그가 있어요라고 했어요. ‘당신의 남편이 당신의 문제입니까?’라고 하니 그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문제를 남편과 얘기했습니까?’라고 하니 그가 얘기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왜서 그와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왜서 저한테 물으려고 합니까?’라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제가 주를 믿지 않습니다. 저의 문제는 영적인 것입니다라고 하여 제가 그럼 왜서 그를 찾아 얘기하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당신이 모릅니까? 그가 주를 믿지 않습니다. 그는 영적인 일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그런 그에게 어떻게 영적인 문제를 묻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아주 간단합니다. 당신이 그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 당신 남편에게 말을 한다는 것을 당신이 믿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하니 그가 하지만 그는 주를 믿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에게 한번은 하나님이 나귀를 통해 사람에게 말을 한적이 있었습니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귀를 통해 사람에게 말을 하기까지 했는데, 당신을 통해 당신 남편에게도 말을 할 수 있습니다. 10명 여자들 중에서 9명이 이 방법을 받아들였고, 그리고 웃었습니다. 이 점에서 그들이 남편에 대한 생각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예외였습니다. 그는 화를 내면서 갔고, 화가 한달이나 갔습니다. 그가 데이빗 파슨을 절대로 찾아가지 말라. 그는 다른 사람의 배우자가 주를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조금도 동정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18개월 후에 제가 시모어보스턴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가 또 왔어요. 그가 저에게 말하기를 제가 또 다른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저의 남편과 연관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에게 무슨 문제냐고 물으니, 그가 묻기를 만약 남편의 영적 생명이 저보다 많이 성숙되었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하여 제가 그에게 이것이 진짜입니까?’라고 물었어요. 그가 진짜에요. 저의 남편이 바로 제 뒤에 앉아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제가 당신한테 한달동안 화를 냈고, 후에 제가 방법이 없어서 저의 문제를 저의 남편에게 알려주었어요. 결국 그가 이 문제를 해결했는데, 그가 의외인지 아니면 제가 의외인지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날부터 그가 신앙에 대해 흥취가 생겼고, 지금은 그가 주를 믿습니다. 하지만 그가 저를 따라 잡으려고 영적 생명의 진보가 신속했고, 심지어 저를 초월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저는 그가 저를 이렇게 많이 초월했다는 것이 싫습니다라고 하여 제가 당신의 문제는 바로 당신이 이 혼인 관계를 조종하려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가 주를 믿지 않아서 싫었고, 그가 신앙에 불이 붙었다고 또 싫다고 하는데, 당신은 그가 당신과 같고, 당신은 그의 옆에 있는 것을 배워야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이 방면에서 아주 지혜로웠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아내로서의 너희는 자신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데, 이는 너희가 남편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들은 아내가 예수를 믿고 난 후 더욱 좋아졌고, 더욱 아름다워 졌고, 소통이 더욱 쉬워져서 교회를 가고 싶어하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에 아주 잘 이해하는데, 이는 그 자신도 아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네번째 방면의 순종인데, 이런 순종은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앞의 세가지와 함께 강의하지 않았고, 제일 마지막에 놓았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장로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운 자는 그들이 학습을 이끌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이스라엘을 향해 저주하는 중 하나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분부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부녀나 혹은 젊은 자들을 리더하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징계는 정말로 매우 무섭습니다. 이런 부녀와 젊은 자들더러 리더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상황과 결코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장로들이 리더합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젊은 자들은 장로들을 존주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라는 순종은 맹목적으로 하라는 순종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아시다시피 사람들이 요구하는 맹목적인 순종은 아주 큰 압력을 만들어냅니다. 순종은 하나의 태도입니다. 베드로는 삶에서 자신이 반격하지 않는 태도를 양성하고, 보복하지 않는 태도, 공격하지 않는 태도,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그리고 권리를 쟁취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난이 임하여 올 때 당신이 대면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준비를 잘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 하나를 해 드릴게요. 제가 항상 존중하는 크리스찬 한 분이 있었어요. 그는 지금 나이가 아주 많고, 남해안에 살고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그에게 말하기를 저는 예수님을 위해 사자를 대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장로님의 대답이 아주 지혜로웠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오늘의 작은 전쟁에 충성스럽게 대면하면, 대 전쟁이 임할 때 그가 당신에게 대면할 수 있는 충족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주 지혜롭습니다. 저는 그의 말을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그가 저보나 나이가 많기 때문에 제가 항상 그를 존중하고, 그의 대답은 정말로 지혜로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태도를 양성해야 하고, 이를 기초로 삼아야 하고, 이를 기초로 할 때 고난이 임해도 당신은 대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의 한 구절의 뜻이 분명치 않습니다. 이에 대해 314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ㅎㅎ. 제가 한번 말해볼게요. 당신도 베드로전서에서 이 구절만 이해가 안된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저의 책에서 지옥에 대해 한장 가득히 해석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님의 육체가 죽임을 당했다고 말했는데, 하지만 영적으로는 부활했습니다. 전에 그가 이 영으로 말미암아 노아 홍수 때 배반한 사람들을 전도하러 갔었습니다. 그리고 몇 구절 후의 구절에서 또 말하기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자유파 전도인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사람이 죽은 후에 두번째로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성경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고, 생사 사이에 넘어갈 수 없는 깊은 흑암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님이 죽은 자들에게 전도하여 듣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모든 해석이 이 명백한 뜻을 피하려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각종 성경의 해석들은 모두 이 점을 피하려고 하는데, 이는 이 구절이 참으로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사람이 일단 죽으면 다시 주를 믿을 기회가 없다고 하는데, 하지만 만약 글자체의 뜻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저는 해석할 때 먼저 제일 뚜렷한 뜻을 봅니다. 해석하기가 아주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덧붙이며 변경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까지 이 기간에 여전히 행동력이 있었고, 뜻이 명백했고,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상호 작용했고, 그 사람들도 모두 뜻이 뚜렷했고, 그리고 그와 상호 작용을 했다고 명백하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당연히 이런 가르침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역이 금요일이면 끝나고, 그리고 일요일이면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토요에는 무엇을 했는지를 모릅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항상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까지의 기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아무런 의식없이 무덤에서만 누워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말하기를 그 기간에 예수님의 육체만 죽었을 뿐이지 하지만 그의 영은 살아 있었고, 또한 죽은 사람들의 세계에 가서 전도를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베드로가 처음 부활 주일에 예수님을 만난 상황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고, 어디에서 있었고, 어느 때이고, 그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거의 상상이 되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이 어디로 가셨는지를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세상이 있지 아니하고 음부에 있었고, 죽은 사람들의 세계에 있었노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당신이 음부에서 33일동안 계셨는데, 무엇을 하셨습니까?’라고 반드시 물었을 것입니다.

33일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수요일 오후에 죽었는데, 각종 증거 모두가 이 점을 가리켰고, 우리 모두는 틀렸습니다. 그는 안식일 전날에 죽었지만 그 안식일은 토요일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그 안식일은 하나의 특별한 날이라고 하였습니다(High Sabbath). 매년 유월절은 모두 그 안식일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AD29년에 죽었는데, 이는 거의 확정되었습니다. 그해 니산월 15, 바로 유월절의 첫날, 그날은 목요일이고, 그 날은 특별한 안식일이었습니다. 14일은 바로 수요일이었고, 유월절 전날이었는데, 이것은 단지 저의 추론입니다. 하지만 모든 증거가 다른 이론보다 부합됩니다. 사실 예수님이 어느날에 죽었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것은 그가 당신을 위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33일 죽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아침까지면 33일이 되지 않았지만 만약 그가 수요일 오후 3시에 죽었다면, 그리고 토요일 저녁 6시에서 새벽사이에 부활했다면 복음서의 기록과 완전히 부합됩니다. 토요일 저녁 6시는 한 주의 시작인데, 이는 로마의 달력에 근거한 것이지 유대 달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주의 시작이고, 아침이 되지 않았는데 무덤이 이미 비어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해석일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이 추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신약성경의 어떤 자료가 맞지 않습니다. 이 추론은 모든 증거에 부합되고, 그리고 명확한 모순이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33일동안 무엇을 했는지를 우리 다시 보겠습니다. 그는 베드로에게 내가 그 몇 일동안 전도하였느니라고 했을 것이고, ‘누구에게 전도했습니까?’, ‘노아 홍수 때 죽은 사람들에게 전도했느니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는 그 죽은 사람들도 뚜렷한 의식이 있었다는 표시인데, 우리도 죽은 후에 뚜렷한 의식이 있을 것이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 것이고, 기억력이 있고, 몸만 죽어 있고, 영혼은 죽어있지 않습니다. 사망은 육체와 영혼은 갈라놓는 것이고, 미래 부활할 때 육체와 영혼이 다시 결합하는데, 하지만 그때까지는 조금 오래 기다려야지요. 예수님이 한주도 되지 않는 시간에 세 단계 전체를 경험했습니다. 그가 태어나서 육체가 있는 영이 되었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영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육체를 무덤에 두었지만 그의 영은 여전히 살아있고, 노아 홍수시대에 배반했던 사람들에게 전도했으며, 그리고 부활하는 주일날 아침에 육체와 영혼이 다시 결합하였습니다.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기까지 뚜렷한 의식이 있었고, 뿐만 아니라 전도하였는데,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단만 육체가 부활하기 전에 영은 잠자고 있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제 밖의 말입니다.

만약 글자의 뜻대로라면 예수님이 그 세대들을 향해 전도한 것인데, 하지만 그 무리에게 뿐이었습니다. 여기에서도 복음은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명백하게 가리킵니다. 그리새 이것은 죽은 후의 두번째 기회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무리에게뿐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 또 어떤 사람들이 이런 기회가 있다고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왜서 그들에게만 두번째 기회가 있을까요? 이제 하는 말은 제 자신만의 추측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믿지 않아도 제가 나무라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저의 추측인데, 나중에 제가 천국에 가면 똑똑하게 물어볼게요.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이 축측이 맞는지 알려드릴게요. 저의 추측은 한 세대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께 불공평하다고 항의할 수 있어요. 당신이 우리 모두를 멸하고, 그리고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공의와 공평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명령하여 그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고 믿습니다. 저도 심판날에 사람들이 제가 불공평하다고 신고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 이것은 단지 저의 추측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이 불공평했던 방법을 보충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는 공의로우시고, 누구 편들지 않는데, 아마 이것이 그의 원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성경을 왜곡하여 우리의 생각에 부합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제일 선명하고, 제일 간단한 뜻으로 받아들어야 하지만 덧붙여 과장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이나 혹은 두번째 기회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영국 딩니슨 남작 시인은 이 구절을 더욱 큰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후에도 여전히 구원 받을 수 있는 소망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보구론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이상은 베드로전서를 논한 것이고, 이제 우리가 베드로후서를 보겠는데, 베드로가 두번쩨 편지를 썼습니다. 이 작은 그림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작은 그림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앞에서 히브리서강의 할 때 너무 복잡한 그림을 사용하여 대단히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모두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 논하기를, 제가 조금 후에 강의하기 때문에 먼저 그리지 마십시오. ‘베드로후서도 똑 같은 사람들에게 쓰는 것인데, 완전히 다른 상황을 논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몇 년 지났고, 성품도 다릅니다. 아마 이 두권의 서신을 다른 서기가 기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바울의 서기더로 서신을 정리하여 달라고 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두권의 서신은 여전히 똑같고, 베드로가 사용하기 제일 좋아하는 단어도 여전히 이 두번째 서신에서 나타났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두번째 편지는 베드로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저는 베드로가 기록하였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베도로의 입버릇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전도인들이 자신의 입버릇이 있는데, 크리스 당신도 입버릇 있어요. 당신이 저의 입버릇이 무엇인지 응당 아실 것입니다. 당신은 베드로의 입버릇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 또한 크리스의 입버릇인데, ‘보배로운’, 맞지요? 당신도 이 단을 사용했었고, 이것이 베드로의 입버릇입니다. 이 두권의 서신을 보시면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계속하여 우리의 보배로운 믿음, 보배로운 예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무엇이든 모두가 보배롭고, 그는 제일 보배로운 진주를 찾았으며, 그는 보배로운이라는 단어 사용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당신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당신이 아끼는 어떤 사람이거나 어떤 물건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나의 제일 보배로운 물건이라고 하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편지는 베드로가 기록하였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다른 서기로 이 편지를 기록하였다고도 믿습니다. 이로써 왜서 성품이 다른지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의 내용은 완전히 다른데, 이는 그가 이 편지에서는 교회 안에서의 위험을 논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면하는 압력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한가지는 교회외에서 오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교회 안에서 오는 것인데, 교회안에서 오는 압력이 비교적 위험합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는데, 사탄은 밖에서 교회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밖에서 오는 공격일수록 교회는 더욱 크게 되고 더욱 견고해집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탄생한 후의 처음 세 세기에는 크리스찬이 자주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교회는 오히려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동독일의 전도인이 말하기를 철막이 넘어지기 전에는 아주 쉽게 교회를 건립했는데, 지금은 모두가 서방 나라처럼 돈을 경배하고, 교회 나가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당시 쏘련의 철막이 넘어질 때 당신은 기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복이기도 하고 화이기도 합니다. 동유럽의 교회는 이전만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 복음을 전하는 문은 이미 열렸습니다. 사탄은 교회안에서 파괴하고, 적을 만드는데, 이것은 단순한 압력입니다. 이단이 오히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압력입니다. ‘베드로후서는 바로 이런 더욱 큰 위험을 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여러분이 베드로후서를 읽을 때, 특히 제2장을 읽을 때 내용이 유다서와 거의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다섯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는데, 성경에서 두 저자가 동일한 내용을 기록할 때 다섯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는데, 이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느 해석을 선택하느냐입니다. 예를 들어 미가서이사야서인데, ‘이사야서’ 2장과 미가서’ 4장을 여러분은 주의하셨는지요. ‘보라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와 미가가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인 성경에서 이런 상황을 보았을 때 다섯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바로 첫째는 베드로가 유다의 말을 인용했으며, 둘째는 유다가 베드로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셋째는 베드로와 유다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했거나, 넷째는 베드로와 유다가 이 문제를 함께 토론했는데, 즉 해결 방법에 대해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그리고 각자 편지를 썼습니다. 다섯째는 성령님이 그 두 사람에게 또 같은 말을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자유적으로 선택하십시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다섯번째 해석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사람을 문자 처리기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게시는 사람을 타자기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님이 베드로와 유다 두 사람에게 똑 같은 말을 주었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베드로와 유다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가 누구의 말을 인용했든지 아니면 두 사람 모두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했든지 그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었다는 증거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일 가까이 있는 제자중 한명이고, 유다는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알고 있던 사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러분도 유다서가 아주 짧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과 같은 분량이에요. 두 교회가 같은 문제에 부딛혔는데, 여러분이 네가지 공통점을 귀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제가 강의한 유다서테프를 들으셨다면 제가 무엇을 강의하려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유다서는 제일 쉽게 소홀히 할 수 있는 짧은 서신인데, 오늘 우리가 시간이 없어서 더는 논하지 못하겠네요. 하지만 교회에는 네가지 부패한 상황이 있는데, 교회안에 네가지 병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찬들의 지체가 암에 걸렸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부패한 신념, 부패한 신념입니다. 신념이 변했는데, 주요는 두 방면입니다. 첫번째는 일방적인 희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고, 두번째는 그리스도를 많은 신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비교적 복잡한 단어를 사용하여 양해 부탁드립니다. 먼저 다른 한 방면을 보겠는데, 즉 그리스도를 많은 신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유일한 주가 아니고, 그는 단지 많은 신들 중의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비교적인 종교입니다. 그는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인데, 하지만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많아서 그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유일이라는 이 단어는 쉽게 미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깎아 내렸고, 그를 구원 받는 하나의 길이라고 하였는데, 하지만 유일한 길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일방적인 희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기를 좋아한다. 죄를 범했는 안 했는지 상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무슨 영향을 가져오는지 상상해 보세요.

부패한 신념은 부패한 행위를 초래하고, 당신의 신념이 당신의 행위에 영향을 줍니다. 당신이 만약 기독교 신앙을 변질시키면 부도덕적인 행위가 교회에 들어가게 됩니다. 부도덕적인 행위가 베드로와 유다가 편지한 교회에 이미 들어갔습니다. 만약 현재 삶의 방식이 중요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미 천국 가는 티켓이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했든지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완전히 일방적인 생각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주 보편적입니다. 이로써 크리스찬들은 당연히 계속 죄를 범해도 되고, 하나님의 긍휼을 이용하여 부도덕적인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행위가 부패하기 시작하면 성품이 바로 부패해집니다. 여기에서 이런 부패한 신념이 성품에 대해 영향 주는 것을 묘사했습니다. 수성이 인성보다 많고, 인간은 본능에 의해 행하고, 개성이 탐욕스러워지고, 머릿속에 사욕이 가득하고, 성품이 변하고, 더는 신뢰할 가치가 없다고 하고, 쉽게 물결을 따라 흐르고, 바람에 흔들리게 됩니다. 여기에 각종 묘사가 있는데, 성품이 명백하게 부패했습니다.

네번째 부패는 언어입니다. 교회 사람들은 불평하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원망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전도인에 대해 순종하지도 않고, 각양각색의 혼란을 가져옵니다.

베드로후서유다서모두는 부패한 신념을 논했습니다. 신념이 부패하면 행위가 부패해지고, 행위가 부도독하게 변하기 시작하고, 이어서 성품도 따라서 부패해지고, 성품이 부패히지니 언어가 바로 부패해지고, 이로써 교회에 많은 혼란과 원망이 나타나고, 전도인에 대해 비평하며 불평하고, 전도인에 대해 불순종합니다. 이 모든 것에는 살상력이 있는데, 오늘날에 많은 교회에 이런 상황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발견했을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유다서모두에서는 이런 상황을 엄하게 비평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교회를 파괴하는데, 외적으로 오는 압력이 필요없고, 안에서만으로 교회를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핍박을 절대로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후서의 양식이 베드로전서와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사람이 기록했다고 믿습니다. 어느 한 구절에서 구원을 논했는데, 그리고 다음 한 구절에서는 위험을 논했고, 그리고 자신을 응당 어떻게 예비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며 인용했습니다.

이 그림은 베드로후서의 첫부분을 귀납한 것인데, 바로 구원을 논한 부분이고, 이 그림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고, 믿음의 기초위에 세워졌습니다. 여기에 몇급되는 믿음의 계단이 문앞까지 통했습니다. ‘베드로후서에는 이 계단들을 논하지 않았고, 이것은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논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를 여기에 넣었습니다. 첫 걸음은 회개이고, 두번째 걸음은 세례이고, 세번째 걸음은 성령 받음인데, 대문까지 통하는 믿음의 계단은 이 세개뿐입니다. 제가 쓴 크리스찬의 중생이라는 책에 아주 명확하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 걸음을 넘어야 합니다. 회개, 세례, 성령 받음으로 믿음의 기초인 하나님 집에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면 안에 계단이 하나 있는데(일곱계단), 베드로가 말하기를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래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였습니다. 한면으로 이 계단을 올라가면 다른 한면에서는 소망이 건축되는데, 그는 영광의 문으로 통하여 우리더러 부르심과 택함에 확고부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부르심과 택함에 확고부동해지고 싶다면 계단 아래쪽에 서 있으면 안되고, 반드시 위로 올라가야 확고부동해지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있어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가 강조하기를 한면으로 이 계단을 올라가면 다른 한면에는 미래의 소망이 건축되고, 더욱 오를수록 하나님 미래의 역사에 더욱 확실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믿음 중심으로 기초를 닦아야 하고, 한면으로 오르면 다른 한면은 소망이 건축되고, 제일 높이까지 올라가면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제일 위에는 발코니가 있는데, 당신이 바로 그 발코니로 영광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 당신은 영광스럽게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리고 거기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계단의 소파에만 앉아있지 마시고, 계단으로 올라가서 위에 거주해야 합니다. 가능한 한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단을 대처하는 방법은 바로 성숙된 영적 생명입니다. 아랫층에 있는 사람은 틀린 가르침을 아주 쉽게 믿습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이단과 틀린 가르침을 쉽게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틀린 가르침을 듣고 믿으면 자신이 뒷문으로 나온 것을 발견하게 되고, 줄곧 언덕을 굴러 내려가고, 줄곧 아래로 굴러 내려가고 결국에는 타락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여기에서 중한 말들을 했는데, 이런 사람들은 공의로운 진리를 듣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것이 침몰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한 말이 확실히 듣기 힘듭니다. 이런 사람은 개가 돌아서서 자신이 토한 것을 먹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개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신 분이 계십니까? 그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바로 이러하니라. 이미 죄에서 나와서 다시 죄로 돌아가는데, 마치 개가 돌아서서 자신이 토한 것을 먹는 것과 같고, 돼지가 깨끗하게 씻고 다시 돌아서서 흙탕물에 뒹구는 것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주 생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진실해야 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이 진리를 알면서도 돌아온 길로 다시 가는 것보다 낫고, 은혜를 모르는 것이 은혜의 맛을 보고도 떠나가는 것보다 낫고, 진리를 듣지 못한 것이 진리를 듣고도 다시 죄로 돌아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은 사람을 나쁜 길로 인도할 수 있고, 믿음의 기초를 파괴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바른 길로 가다가도 뒷문으로 나와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어떤 사람은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위층까지 올라가서 소망이 더욱 커지고, 결국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고, 거기에서 영광의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돌아온 길로 다시 가서 하나님의 분노와 그리고 심판을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빛 같은 은총을 누리는데, 매우 경계하게 되지 않습니까?

다음은 베드로후서의 마지막 한 장인데, 여기에서는 미래의 소망을 논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부의 한가지 압력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항상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시는데, 하지만 왜서 아직까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까?’라고 합니다. 1세기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왜서 아직도 오지 않냐고 이미 물었습니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물으셨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더욱 그렇게 물을 것입니다. 이미 이천년이 지났고, 예수님은 아직도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맞지요? 사람들 앞에서 비웃음을 당했는데, 이것은 정말로 참기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까?

베드로후서 3장에서 사람을 비웃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가 강림한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열조가 죽은 이후부터 태초에 만물을 창조할 때와 여전히 똑같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비웃으며 말하기를 기독교는 이미 이천년이라는 역사가 있는데, 하지만 상황은 좋게 변하지 않고, 아무런 변화도 없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소망이 있고, 우리의 소망은 미래 어느날엔가 우주 전체가 큰 불에 탈 것이며, 큰 재난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홍수로 죽이지 않고 큰 불로 태워 죽입니다. 저는 한차례의 핵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주의 모든 원자 에너지를 석방하고, 그가 에너지를 원자에 넣었는데, 단지 그가 에너지를 석방하면 모든 것이 타 버리고 없어집니다. 하지만 미래에 나타날 이 대 화재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는데, 마치 다시 태어난 봉황 같습니다. 저는 새 땅을 강의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여호와 증인들 강의하게 남겨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진리인데,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새 하늘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새 땅도 임한다고 하였고,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할 때 강의할 것입니다. 이 지구는 곧 미래의 중심으로 변할 것이고, 우리가 곧 새로운 지구에서 살게 되는데, 우리만 이 점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오존층, 해양 오염과 살림이 사라지는 문제로 걱정하고, 아주 긴장해 하는데, 그들은 이 지구만 있는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의 진상을 아주 똑똑히 알고 있고,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새 하늘 새 땅이 우리가 일고 있는 지구와 조금 다를 것입니다. 다른 곳은 공의가 새 하늘과 새 땅에 거주하고, 다시는 악이 없고, 죄악도 없고, 더러움도 없고, 어두움과 교활함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만약 너희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것을 정말로 믿으면, 다른 사람이 비웃는 것에 아랑곳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진실을 알았다면 응당 어떤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답은 아주 간단한데, 즉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고, 짐 꾸밀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저는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에 가져다 주는 부도덕 행위를 막을 수 있는 길은 이 점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새로운 세계를 주목하고, 이것은 공의로운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이 점을 알면 공의를 지킬 수 있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을 품고 위층에서 살아야 하고,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잘 예비해야 합니다. 나팔소리가 들리면 바로 무료로 성지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정말로 멋있는 모임이구나!’. 이것은 저의 조부 무덤 비석의 글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 찬송가의 가사인데, 저의 조부 이름 밑에 이 것을 새겼습니다. ‘정말로 멋있는 모임이구나!’ 라고, 당신이 만약 싫으면 큰 소리로 경배하고 절대로 가지 마세요. 그 때면 천사장이 크게 웨칠 것이고, 나팔소리가 죽은자가 일어날 정도로 클 것이며, 그 때면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앞 좌석에 앉게 됩니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먼저 죽어도 걱정하지 마세요. 그 때면 당신도 앞 좌석에 앉게 될 것인데, 이는 당신이 먼저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지막에 모두 예수님과 한데 모이고,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강림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우리더러 이 점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응당 가지고 있는 양식대로 살 수 있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잘못된 가르침을 들어도 믿지 않고, 더럽힘도 당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비록 말씀에서 떠났어도 당신은 여전히 자신의 순결과 흠을 지킬 수 있고, 이 부패한 세계를 상대하지 않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이 두개의 서신을 주셔서 감사하고, 이 두 서신은 우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만약 교회에 이단이 나타나면 외적으로 오는 압력보다 훨신 무섭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가 오늘날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멀지 않는 미래에 베드로전서가 우리더러 믿음, 소망, 사랑을 지키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