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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18 골로새서 / 데이빗 파슨 교정 및 자막 예정

LNCK 2018. 12. 27. 20:37

골로새서                                                                                                      LCY 번역



 

바울이 직접 교회를 방문하여 문제 해결을 못하고 있을 때 통상적으로 편시를 쓰는 방식으로 처리를 했는데, 하지만 그가 섬김 후기에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교회 방문을 직접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에서의 바울 서신 대다수는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거나 혹은 감금되었을 때 기록했고, 그래서 그가 문제를 직접 처리하지 못했고, 반드시 편지 쓰는 방식으로 처리했습니다.

다음은 우리가 첫번째 서신을 보겠는데, 바울이 첫번째 로마에서 잡혔을 때 쓴 것입니다. 당시 그가 감금되었고, 로마 병사와 함께 묶여 있었는데, 하지만 자신이 임대한 집에 갇혀있기 때문에 손님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디모데에게 썼고, 그리고 디도에게 서신을 썼는데, 어두컴컴한 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릴 때 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 대부분은 감옥에서 기록하였습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의 걸출한 작품들 모두는 옥중에서 썼습니다. 본 요한의 천로역전이 바로 좋은 예인데, 지금 우리가 바로 소히 말하는 옥중서신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첫번째 갇혔을 때 기록한 것이고, 그 때는 감금되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빠르게 앞에서 나누었던 몇 가지를 복습해 보겠습니다. 바울 서신은 세 가지로 귀납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개인에게 쓴 것입니다. 두번째는 교회의 어떤 상황을 겨냥하여 쓴 것입니다. 세번째는 일반서신인데, 일반적인 크리스찬들이 돌려 가며 보는 것인데 위기를 처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세 권 서신은 동시간에 기록되었고, 한 배달원이며 두기고라 하고 동일한 곳으로 보냈습니다. 첫번째 편지는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였으며 그것은 바울이 처음으로 쓴 짧은 편지였고, 도망하는 노예를 논했는데, 이는 우리가 후에 논하겠습니다. 이어서 그가 골로새서를 썼는데, 왜냐하면 골로새 교회에 위기가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은 그가 일반적인 서신을 썼는데, 우리가 이를 에베소서라 합니다. 이 편지에 주소를 표명하지 않았으며, 초기 필사본에 에베소라는 지명이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을 보아 일반 서신이고, 마지막에 에베소에 전달되어 거기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권의 서신 성질이 다릅니다.

지금 보려는 골로새서는 두번째 서신이고, 우리가 단어 행간에서 그들의 환경, 상황, 위기 그리고 필요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왜서 이 편지를 썼을까요? 그가 이 편지를 또한 누구에게 썼을까요? 그가 왜서 편지를 써서 대방의 상황을 처리했을까요? 우리는 매 서신의 원인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 서신은 일정한 격식을 갖우었으며, 그것은 헬라 문화에서 정식적인 서신 격식이며,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있고 받는 사람의 주소가 있으며, 그리고 문안 인사, 편지 본문, 총결, 마지막으로 문안 인사이고 그리고 싸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의 서신을 볼 때 반드시 먼저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이해해야 하고, 교회 실제 상황을 보아야 하고, 그리고 오늘날과 연관이 생겨야 하며, 원칙을 우리에게 인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을 읽을 때 많은 공부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지리 공부를 하겠습니다. 여기는 터키 서쪽입니다. 우리가 이 그림부터 보겠는데, 바울 서신에서 도달한 곳 거의는 이 그림인 갈라디아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에베소서’, ‘고린도서그리고 로마서인데, 이 지명들 모두는 지도에 있으며, ‘데살로니가서’, ‘빌립보서인데, 바울 서신 대부분은 에게 해 지역에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자세히 볼 것은 터키 서쪽인데, 당시에는 로마의 아시아 성이었습니다. 이는 하나의 순환 노선이며, 에베소서,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입니다. 여러분, 매우 익숙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계시록에서 편지를 받은 일곱 교회이며, 배달원이 이 노선을 따라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볼 이 지역에는 산골짜기 하나가 있고, 세 개의 읍인 히라뽀리, 라오디게아와 골로새서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작은 지역과 에베소를 보겠습니다.

바울이 이때 로마에 감금되어 있는데, 하지만 그가 이 지역에 편지를 썼으며, 특별히 이 산골짜기에 하였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드리겠는데, 이는 아주 아름다운 산골짜기입니다. 이 산골짜기의 강을 찔러 가면, 이름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산골짜기가 여기에 있고, 골로새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산골짜기이며,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하지만 산골짜기를 통한 그 강을 곡류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이름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이 강은 많은 곳에 퍼져 있으며, ‘곡절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강에서 온 것이며, 곡절이 많은 하나의 강입니다.

우리가 곡절이 많은 교회가 바로 골로새 교회라는 것을 곧 볼 것인데, 교회의 상황이 그가 거주하고 있는 곳과 항상 연관이 있고, 현지의 상황이 교회에 스며들었습니다. 이 교회가 곡절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진리를 떠났습니다. 교회가 진리에서 떠나는 것은 자주 보는 현상인데, 이상은 바로 배경 소개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볼 것은 골로새 이 곳입니다. 바울의 첫번째 편지는 빌레몬서이고, 여기에서 도망한 노예를 논했으며, 그가 이 이름을 오네시모의 노예라고 하였습니다. 주인에게로 돌려 보냈고, 주인 빌레몬은 라오디게아 이 곳에서 살았는데, 하지만 바울이 당시에 골로새 교회,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도 편지를 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권의 서신은 동시에 보내졌고, 한 배달원이 한 곳으로 보냈습니다.

이제 골로새서를 보겠는데, 이는 어떤 곳일까요? 우리는 이 도시가 한 길목에 위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시아를 지나 아랍까지 통했고, 매우 중요한 하나의 도로이며, 이런 동서 길목에 위치하여 한가지 상황이 발생했는데, 바로 각종 배경이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거주했고, 그리고 각 곳에서 온 여객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 도시는 대도시 같았습니다. 초기에 여기에 거주했던 빌리키 사람들, 그리고 많은 헬라인, 유대인, 그리고 로마인들이 있었으며, 후에 사라센 사람들이 이 도시를 사라센 도시로 만들었는데, 이 도시는 항상 세계촌이었으며, 이러므로 더욱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다른 종교들이 많고도 많으며, 매우 많습니다. ‘다원종교의 도시입니다. 여러분, 이 단어를 들어보신적 있으십니까? 이 단어가 지금은 매우 보편적입니다. ‘다원종교는 한 거리에 서로 다른 종교의 성도들이 있는데, 오늘날 영국에 이런 현상이 보편적입니다. 버밍엄시의 어떤 거리에서는 시크 교도, 이슬람 교도, 불교도, 인도교, 크리스찬과 유대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 한 거리에서 살고 있는데, 이는 당연히 많은 인간관계의 문제를 가져오지요. 이렇게 많은 다른 종교들이 서로 경쟁하는데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겠습니까?

다원 죵교에 직면하는 상황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과는 달리 같은 이교도들을 믿습니다. 에베소 사람들 대다수는 동일한 이교도를 믿는데, 이 이교도들이 바로 데메드리오 여신을 믿습니다. 하지만 골로새는 다릅니다. 이 곳에는 각종 종교들이 가득 차 있는데, 제가 여기에 열거해 보겠습니다. 범령론이 있는데, 이 종교는 자연계의 만물들은 모두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강에 영이 있고, 나무에 영이 있고, 산에도 영이 있다는데, 현대인들은 아마도 이것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녹색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이 논점들이 죽음에서 되살아났습니다. 생식기를 경배하는 사교, 대자연의 어머니를 경배하는데, 정말로 매우 신기합니다. 대지를 경배하는 사람들은 모두 대지를 여성으로 보고 대자연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지의 어머니에는 범령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고, 모두가 대자연의 영을 경배하는데, 그것은 매우 심상치 않는 자연 현상입니다.

방금 전 그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데, 그 산 전체가 흰 색이며, 그들은 그를 면보라고 부릅니다. 제가 최근에 어떤 가이드북에서 사진을 보았는데, 관광객들이 이 눈처럼 하얀 산에서 수영을 하고, 일광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온천의 염분인 심도물이 산 전체를 뒤덮었는데 기이한 광경을 이루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이드북에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온천에 몸을 담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얀 절벽에서 일광욕을 하는데, 여기를 면보라 하고, 온천이 있습니다. 자연계에 심상치 않는 현상이 나타나니 현지인들은 경배를 했습니다.

다음은 매우 유행하는 별상학인데, 동방의 페르시아에서 전해 왔고, 당시 골로새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점성학에 빠졌습니다. 오늘날 영국에서 남자 10명 중 6, 그리고 여자 10명 중 7명이 매일 점성을 하였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말하기를 사랑하는 브루터스, 문제가 별좌에 있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점을 치고 점성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골로새 이 도시에는 범령론이 있었고, 동방에서 전해온 별상학이 있었고, 헬라와 로마의 만신전이 있었고, 골로새 도시에서 헬라와 로마의 각종 신을 공경했고, 그리고 동방에서 전해온 소히 말하는 신비 종교도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노스디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노스디 종교불가지론이 마침 상반되는데, ‘불가지론은 정확한 답이 없다고 하고, ‘노스디는 답이 있다고 합니다. 노스디에는 많은 비밀 지식과 입회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에는 신비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유대교인데, 하지만 골로새가 성지와의 거리가 멀고, 여기의 유대교는 이미 조금 변질되었는데, 유대교는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방송 프로그램 아나운서 레노브루라비가 바로 전형적인 예입니다. 유대교가 원래의 뿌리를 떠나면 바로 그렇게 변합니다. 철학처럼 변하고, 도덕이 적어지고 신비가 많아집니다. 이미 유대교의 참뜻을 떠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로써 유인을 받게 되었는데,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유대교도 아니고 크리스찬도 아니게 변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에도 기독교가 있었는데, 하지만 바울이 전한 것일까요? 바울이 여기에 오지 않았고, 심지어 아마도 지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골로새 교회는 어떻게 세워졌을까요? 당시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에바브라라는 사람에게 주를 믿게 인도했는데, 이 에바브라가 축복을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바울이 그에게 어디 사람인가고 물으니 그가 골로새 사람이라고 하였고, 이로써 바울이 그더러 골로새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라가 세웠고, 그는 에베소에서 바울의 인도하에 주를 믿었는데,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쓴 이 교회는 그가 건립한 것이 아니고, 그는 가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는 그렇게도 많은 문안 이사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상대방과 친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가 낯선 사람에게 편지를 쓸 때 쌍방 모두가 알고 있는 친구로 언급했고, 그래서 바울이 에바브라를 언급했고, 골로새 출생인 아리스다고를 언급했고, 데마도 언급했고, 그 외 그가 알고 있는 사람 몇 명도 언급했습니다.

에바브라가 바울에게 골로새 교회에 문제가 있다고 알려주었는데, 하지만 에바브라가 정식 사도 신분이 없었고 그는 복음 전하기만 했으며, 이웃 몇 명을 찾아서 함께 모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현재 교회에 문제가 생겼고, 에바브라가 실제 상황을 바울에게 알려주니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 스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 교회에 어떠한 권리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그가 건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교회 사람들이 그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신의 어투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매우 냉정하고 온화하였으며, 그가 고린도에 쓴 편지 어투하고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낯선 사람과 말을 하기 때문에이고, 강렬한 어투로 못하고, 강렬한 어투는 익숙한 사람과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는 비교적 완곡했습니다.

그럼 골로새 교회가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요? 성경 학자들이 실제 상황에 대해 어떠했을까요? 항상 다른 견해들이 있었는데, 그러나 이 교회가 신념과 행위에서는 확실히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신앙이 당신의 행위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신앙이 만약 잘못되면 행위가 반드시 편차가 있게 되고, 신앙이 만약 정확하면 행위가 바르게 됩니다.

신앙이 만약 잘못되면 행위가 반드시 편차되고, 그래서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에 들어오면 어떤 이단 가르침이 있을까요? 어떤 성경 학자들은 확실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신비한 종교입니까? 아니면 노스치 종교입니까? 이 문제의 답은 일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울이 열거한 잘못된 신앙과 행위에서 어느 것이 이미 존재한 이단이나 혹은 사교인지를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이단들은 곧 간파할 수 있는데, 하지만 골로새 교회의 문제는 한번에 꿰뚫어 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떤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에 들어왔을까요? 유대교가 아니고, 신비 종교가 아니고, 별상학도 아니고, 마치 많은 것들이 합하여 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 학자들은 해석하기 힘들다고 느꼈는데, 하지만 이는 신세기와 매우 비슷합니다. 여러분이 신세기를 아십니까? ‘신세기는 하나의 마음 상태이며 운동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의 마음 상태이며 운동이 아닙니다. 잡탕, 가지각색, 모두 있고, 채식주의, 여성주의 그리고 대지의 어머니 주의 등 같습니다. 제가 골로새 교회의 이단에 침투하고 싶다는 것처럼, 이런 모양인데 그것은 하나의 마음 상태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대 잡탕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진정한 문제는 자고로부터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너무 많은 외부의 것들을 기독교에 끓어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이단에 있지 않고 종교 잡탕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단을 아실 필요가 있는데, ‘종교 잡탕은 바로 많은 종교들을 함께 혼합하여 대 잡탕을 형성한 것입니다. 무엇을 보면 곧바로 잡고 뒤섞는데, 이것은 무슨 이단 사교가 아니고 좋지 않는 대 잡탕입니다.

당신이 기독교 신앙에서 다른 종교를 섞고, 거기에 당신의 이방 배경을 더하면 결국 얻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래도 당신은 아마도 그를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거에요. 하지만 그것은 사실 이미 약간의 정수를 잃은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골로새 교회의 문제이며, 또한 오늘날 교회에서 특별하게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서 가져온 메시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서신은 매우 이성적인데, 하지만 오늘날에는 정말로 냉정한 사고력이 매우 필요하고, 따뜻한 마음과 냉정한 사고로 문제를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것들이 교회에 끊임없이 침투해 들어오고, 반사구 건강요범이 이미 교회에 들어왔으며 많은 크리스찬들이 하고 있고, 요가까지도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반드시 분명하게 봐야 하고, 이렇게 하면 어떤 후과를 가져오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골로새서는 우리에게 좋은 도구를 주었고, 이로 우리더러 신앙에 섞인 위기를 분석하게 하였고, 특히 오늘날 사회가 우리더러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섞이게 하고, 우리더러 각종 종교인 불교, 인도교, 기독교와 유대교가 함께 믿고 섞여라고 주는 압력이 있습니다. 종교가 아시시에서 기도회를 열었는데,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호소했고, 모든 종교가 출석했습니다. 캔터베리 교회에 수림이 있는데, 각 종교가 각자 다른 길로 교회당을 들어가서 이 나무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장연계와 연관이 있는 종교들이 많았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만물에게 영이 있다는 신앙이 침투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인데, 이런 현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먼저 강의하겠는데, 여러분들더러 이런 형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런 상황에 대면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의 종교 잡탕에서인데, 그 중에 물론 유대교도 있습니다. 어떤 유대교의 신앙이 이를 데리고 들어왔고, 그리고 이교도 신앙과 범령론 등입니다. 모두가 함께 섞여 있고, 그리스도가 더는 머리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골로새서전체의 관건입니다.

교회가 외부의 것들을 들여오면 올수록, 반사구 건강 요법이나 혹은 요가가 어떻게 좋다고 논할수록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라는 것을 점차적으로 논하지 않게 됩니다. 각종 종교 신앙의 섞임 하에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게 되고, 즉 예수의 이름이 더는 머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는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라는 것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되시기를 바라고, 우리 생명의 초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기독교 신앙에 다른 종교를 섞고, 당신이 주를 믿게 전의 배경을 섞으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로써 당신더러 진정한 초점을 잃게 합니다. 여러분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 서신을 보겠는데, 골로새 교회의 상황을 보겠습니다. 문제는 바로 신앙 혼합에서 나타났으며, 기독교를 한 종교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하면 반드시 위험이 있습니다. 영국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한 종교로 보는데, 저는 이를 교회종파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은 저의 뜻을 응당 아실 것입니다. 영국이 표면상으로는 기독교 국가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만 종교로 생각하고, 그리스도가 온 것은 우리를 종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증거도 혹시 이렇지 않습니까? 이는 당신더러 대답할 매우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나는 이미 종교를 하지 않고, 더는 종교를 믿지 않습니다. 내가 전에는 믿었는데 지금은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미신까지도 종교를 믿는 것이기에 우리는 종교를 더는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앙이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종교 혼합주의를 물리치고 싶으면 유일한 방법이 바로 그리스도의 간단한 진리를 전하면 됩니다. 바로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매우 간단합니다. 종교가 아니고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데, 바로 이렇게 간단합니다. 이런 방법만이 신앙 혼합을 막을 수 있습니다. 단지 아닙니다. 저는 종교를 믿지 않고, 저는 종교 집회에 참석하지 않고,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그래서 바로 이 두개 주제인데, 첫번째는 신앙이 혼합되면 기독교가 종교로 변합니다. 두번째는 초점을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데 두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골로새서의 초점입니다.

이제 우리가 골로새 교회의 신앙 혼합 상황을 보겠습니다. 아마도 이 상황은 오늘날의 신앙이 섞인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그래소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다른 신앙의 결과들이 섞여 있는데, 바로 신앙이 희석된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신앙은 두 방면에서 희석되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것을 더는 모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렵고 심오한 어휘 몇 개를 해석하겠습니다. 크리스찬들은 하나님이 초월성또한 내주성이 동시에 있다는 것을 믿고, 그는 높은 곳에 계시고, 우리를 초월했으며, 또한 우리 안에 내주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추잡한 것입니다. 만약 그 중의 한가지를 빼면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보다 훨씬 크고, 우리의 호흡과는 가까이 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초월성내주성이 동시에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종교 잡탕이 성도들더러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매우 먼 거리에 있다고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이 아득히 멀다고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맞아요. 그는 높은 곳에 계셔서 마치 아득히 멀어 보입니다. 그들은 빠진 부분을 천사, 많은 영 등으로 보충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가까지 있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것으로 빈 곳을 채우는데,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보다 더욱 가까워지게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골로새 교회의 첫번째 문제였고, 갈수록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 같지 않게 느껴졌으며, 하나님이 갈수록 멀리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여전히 믿었는데, 하지만 그가 아득히 멀리 있다고 느꼈습니다.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어떤 교회의 건축이 살마더러 하나님이 아득히 멀리 있다고 느껴지게 합니다. 특히 높은 천장과 우뚝 솟은 문인데, 들어가면 마치 쥐 같고, 감히 작은 소리로만 말하고, 하나님이 마치 아득히 멀리 있는 느낌입니다. 반대로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매우 가까이에 계신다고 보며, 마치 좋은 형제 사이처럼입니다. 여러분 제 뜻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과 호형호제하여 그가 사람들이 경외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고, 그를 경외하는 것을 잊는데, 이 두 사이에는 평행이 필요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훨씬 초월했다는 것을 잊고, 그의 위대함을 잊으면 우리가 그를 경외하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의 내주를 잊으며, 그가 함께 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 두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골로새 교회는 하나님의 내주를 잊었고, 하나님이 아득히 멀리 계신다고 느꼈으며,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다는 것을 잊었고, 그리스도를 다른 피조물들과 동일한 위치에 놓았습니다. 여호와 증인들이 그러한 잘못된 것을 교회에 몰래 들여왔고, 그리스도를 창주주가 아닌 피조물로 보고, 그리스도를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증인들이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신 사이에 개입시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너무 높게 보고 그리스도를 너무 낮게 봅니다. 믿음이 왜곡되었는데, 이것이 골로새 교회의 신념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이 두가지 사건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고, 그는 매우 잘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행위 방면에서 그들이 신념이 희석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행위를 규정했습니다. 바울은 이 두가지가 교회에 몰래 침투해 들어왔다고 언급했고, 이 두가지는 원래 비크리스찬들이 했던 일들입니다. 첫번째는 바로 명절을 지키는 것인데, 골로새 교회가 처음에는 일년 한번인 명절을 지켰고, 또한 매월 한번인 명절을 지켰으며, 그리고 매주 한 번인 명절을 지켰습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크리스찬들이 어떤 명절은 응당 축하해야 한다고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것으로 정말로 아픈데를 만났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축하하는 명절 대부분이 이교의 풍습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풍습이 기독교 신앙에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영국 종교 상황을 뒤섞은 것을 강의했는데, 성탄절이 가장 좋은 예입니다. 크리스찬들과 성탄절을 보내면 안된다고 하면 후과가 매우 분명하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에 격동해서 온 편지 내용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릴게요. 제가 성탄절을 그리스도와 관계를 매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그렇게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믿기 매우 힘들거에요. 하지만 신약성경 어느 구절에서 크리스찬들더러 성탄절을 보내라고 요구했습니까? 근본상 없습니다. 하지만 뒤섞인 종교의 결과가 이교 명절을 크리스찬의 행실에 들여왔습니다. 결국 성탄절과 성탄밤 성찬이 없게 되었는데, 그럼 우리가 무엇을 할까요? 여러분, 이는 근본 이교 풍습을 기독교 신앙에 혼합했고, 그리스도는 말구유의 아기로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기일 뿐만 아닙니다. 여러분, 제가 갈수록 흥분되는데, 이해가 됩니까?

골로새 사람들에게 이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매우 엉망이라고 느끼고, 골로새 교회가 뜻밖에도 이교 풍습이 혼합되었는데, 하지만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지 말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안된다고 합니다. 성탄절은 교회에서 가장 멋진 명절입니다. 크리스찬의 신앙 중점은 명절을 축하하는데 있지 않고, 성탄절과 부활절을 축하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부활절을 특별하게 지내라고 요구했습니까?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매일 부활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심지어 이방 크리스찬이 일요일을 지키라는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일요일을 특별한 날로 보고 있는데, 신약성경에 한 구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을 지키려면 당연히 되지요. 매일을 주일로 지키려도 됩니다. 우리는 자유합니다. 우리더러 주일, 성탄절과 부활절을 지키라는 율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하며, 또한 이는 크리스찬이 응당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골로새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우리더러 특별한 날을 지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설이든 혹은 매주 안식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장래의 세대에는 특별한 날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 듣기를 원하십니까?

또 한가지 일인데 이것도 헬라 풍습에서 왔습니다. 금욕은 좋은 것이라 생각하며, 금욕은 하나의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 결혼을 금하고, 독신을 제창합니다. 그들도 일련의 금령이 있는데, 어떤 것은 만지면 안되고, 어떤 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바울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각종 음식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주셨으며, 크리스찬은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나 혹은 먹어도 되는 것에는 자유하고, 당신은 자유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번은 제가 식사 대접을 받아서 갓는데, 그 부부에게는 세 아이가 있었고, 테이블에는 아주 풍성한 음식들이 있었으며, 냄새만 맡아도 군침이 돌았고, 제가 기다리지 않고 움직이고 싶었는데, 남 주인이 저더러 식사 기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주여, 음식이 상에 올라왔으니 제가 먹을 준비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눈을 떠서 보니 부부가 놀란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손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줄 알았고, 하지만 세 아이는 너무 기뻐했는데, 그들의 표정에서 이런 기독교 신앙은 매우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더롭고 긴 감사의 식사 기도를 할 수 없었으며,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을 놀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크리스찬 신앙의 중점은 사순재 때 단 음식을 먹지 않는데 있지 않고, 사순재 때 단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바로 이 두가지를 합하는 것입니다. 조금 후에 바울이 생각하는 크리스찬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를 논하겠는데, 우리는 응당 교만, 분노, 그리고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데, 하지만 사순재 때만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문제는 바로 자신이 좋은 크리스찬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하지만 사순재가 오기 전에 오히려 특별히 송편을 많이 먹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요일 송편을 먹는 풍습에서 온 것이며, 이로써 사순재는 끝납니다. 여러분이 회교도의 재계월을 보세요. 그들이 재계월 기간에 매일 해 넘어갈때까지 금식을 하고, 그리고 한바탕 크게 먹어서 소화불량에 성질이 급해집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 중점은 특별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매일 교만과 분노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점은 특별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찬에 대해 말하자면 매일 성탄절이어야 하고, 매일 부활절이어야 하고, 매일 주일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특별한 날을 지킬 필요가 없고, 수시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제가 강의하면 할수록 흥분됩니다. 우리는 골로새 크리스찬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신념과 행위에서 그리스도를 점차적으로 빗나갔습니다. 바울이 해결 방법은 바로 간단함을 유지하는원칙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틴 루터가 수도사로 있을 때 자신을 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방법은 바로 매일 세 명의 성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고, 매주 21명 서로 다른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고, 또한 자신을 방에 가두고 채찍으로 자신을 혼절할 때까지 때렸고, 그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죄를 강제로 나오게 하려고 심지어 성지 순례가서 무릎을 꿇고 로마의 계단을 올랐으며, 그는 무엇이든 다 시험해 보았는데, 후에 그는 모두 것을 포기했습니다. 지역 총감독인 스도오후루즈 신부가 그에게 묻기를 마틴 루터, 네가 만약 성인유물 숭배를 포기하고, 순례를 포기하고, 성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고, 네가 만약 이런 영적인 방식들을 포기하면 무엇으로 대신할 것인가?’라고 하니 마틴 루터가 대답하기를 그리스도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개교 운동이 이로써 전개되었습니다. 이것들을 전부 포기하고, 그리스도 원래의 위치를 회복했습니다. 중점은 사순재 때 단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칙은 매우 간단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가 초점을 그리스도에게 놓았습니다. 바울이 우선 말하기를 하나님의 본성의 모든 것은 풍성하기 때문에 모두 형태가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웨슬리가 말하기를 우리의 하나님은 자신을 작게 축소하여 이간의 유한적인 육체에 넣었으며, 그리스도를 얻기만 하면 하나님의 전부를 얻는 것이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풍성함을 얻을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그는 우주 창조에 참여하셨습니다. 그가 밥상을 만들기 전에 먼저 나무를 만들었고, 우리더러 나무에서 목재를 취할 수 있게 했으며, 그가 산상수훈 전에 먼저 산을 만들어 이것으로 강대상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우주가 창조될 때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셨고, 그가 없었다면 만물이 없었을 것이며, 그는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권세를 정복했고, 우주의 각종 권세 전부는 예수님의 통치 아래 있고, 하늘이나 땅 아래의 모든 권세가 그의 것입니다.

셋째는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통치하시고, 교회의 머리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머리일 뿐이며, 그는 머리가 많은 마차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의 머리는 바로 예수님이시고, 이 통치권은 사람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주를 창조했고, 자연계의 각종 권세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티비에서 자연계 동물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왜서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지 않고 대자연의 어머니에게 돌리지요? 영광을 응당 예수님께 돌려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하신 것이고, 그가 이 동물들을 만들었고, 그가 사람을 감탄케하는 힘과 아름다움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또 다른 하나의 관계가 있는데 바로 그가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풍성함이 그 안에 있고, 우리의 생명은 반드시 그가 초점이 되어야 하고, 또한 반드시 많은 실제 측면에서 표현해 내야 합니다. 우선의 우리의 정욕, 우리의 정욕인데, 잘못된 정욕을 매일 내려놓아야 하고, 사순재 때만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는 정욕을 소멸해야 하는데, 그것이야말로 크리스찬의 진정한 생명입니다. 사순재 때만 단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는 정욕을 소멸해야 합니다. 정욕이 우리의 주재가 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서 약자를 돕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며, 도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데 마치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한 것 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에 대해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계시며, 나도 다른 사람에 대해 응당 인내심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나를 용서했고, 그래서 나는 당신을 반드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응당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집에서는 화목하게 지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해야할 것입니다. 가족에서 부부 사이, 부모 자식 사이, 그리고 주인과 종의 사이 이 모든 것은 가족에서의 관계이며, 종도 당연이 집에 있는 사람이지요. 여기에서 한 단어가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하는데 바로 순종입니다. 아내는 남편에서 순종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종은 주인에게 순종하고, 상대되는 남편, 부모 그리고 주인 모두는 책임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그들에게 희생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중점은 여기에 있고 특별한 날을 축하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성탄절과 부활절에만 교회에 가서 축하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자신의 몸을 고행으로 대하면서 자신은 의인이라고 생각하지 말며, 진정한 중점은 간단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필요하시면 되고, 하나님의 모든 풍성함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래서 우리는 응당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메시지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무슨 명절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이며, 각 방면과 각종 관계에서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의 메시지는 매우 멋지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말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두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반드시 솔직히 말하겠는데, 신약성경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우리가 알게 경고하기를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 매우 분명하게 말하였고, 또한 마태복음’, ‘히브리서그리고 계시록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말하기를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경고하기를 너희가 만일 경건하지 못하는 정욕에 머리를 숙이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못하고 종교 형식의 묶임에 떨어져 들어가서 외적인 의식만 지키고 또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하면 그리스도가 더는 우리 생명의 주가 아니십니다. 우리는 위험해 지고, 그리스도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골로새서1:23절에서 명확하게 가르키기를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면 이 모든 것이 너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얼마나 강조해도 과분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불경건의 정욕이 있어서 하나님의 분노가 곧 임할 것이며, 나는 이 분노가 너희에게 임하는 것을 바라지 않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제2장에서 말하기를 너희는 아마 자격을 상실할 것이며, 너희 기업을 더는 계승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이 자격이 있기를 바라며, 하지만 이 일은 이미 몰리 들어와 너희를 포로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어휘는 매우 강렬하게 너희를 포로한다라고 하였고, 너희를 예수에게서 떠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만일 기독교 신앙에 다른 것들을 섞으면 교회가 바로 이렇게 됩니다. 이 일들이 당신을 묶을 것이며, 당신을 예수에게서 떠나게 합니다. 이것을 부정적인 면에서 보면 다신을 강렬하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은 종교의 매임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일단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잃게 되고, 주님이 없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정면으로 보면 기독교 신앙이 바로 그리스도이며,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지속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의 중점 구절은 2:6-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바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그의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믿음에 굳게 서서, 또한 각 방면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지속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위험은 바로 다른 것들이 들어와서 우리를 종교의 매임에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기독교라는 이 종교, 이 종교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게 하고, 우리더러 아무것도 없게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안에 거하면 내 안에 있는 가지는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요 나의 안에 거하지 않는 가지는 베어서 불에 태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너무 워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 쓰기를 원했고, 그에게 가보지도 못했고, 그가 건립도 하지 않는 교회에 가게 했는데, 하지만 독약이 이미 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바울이 걱정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것이며, 이로써 이 편지를 썼습니다. 이 서신의 어투는 냉정했고, 매우 이성적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잘 일고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